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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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대보다 극성을 부리는 단어, 매일 같이‘행복’을 말하는 책들이 제목을 달리하며 출간되어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누리는 시대에 냉랭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쫓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보편적인 어떤 개념의 합의가 있을 것이다.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쁨? 성취감? 순간적 쾌락? 아니면, 내면적 평온상태와 긴장된 정신에서의 해방인가?

 

만일 이 모두가 옳다면 우린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들은 행복해 할 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 우리들에게 습관화된 인지적 오류,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고 만족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명백히 잘못된 논리적 거짓으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이 그것이다. 만족감은 더 많이 성취하고 있지만 욕망 그 자체는 시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행태가 이것을 입증한다. 끊임없이 만족하려는 이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행복 중독증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가히 탐욕스러움 그 자체가 아닌가? 제아무리 가지고 성취해도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고리 말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행복’을 집요하게 추구하려는 이 사회의 언어가 혐오스럽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욕망 자체가 추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없다면,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역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소멸이고 죽음이자 무(無)의 상태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저자의 지적처럼 잘못된 논리적 연결에 의해 만족과 행복을 등식화함으로써 욕망의 제동장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습관처럼 익숙해진 우리는 아무리 충족해도 항상 빈약함에 허우적거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푸념한다. 결국 지나친 것, 과잉의 추구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행복 중독증으로 몰아대는 것이다. 물질의 과잉, 자유의 과잉, 쾌락의 과잉, 권력의 과잉, 정치의 과잉, 투명함의 과잉...모두 넘치는 과도함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의 욕망이 우리들을 습관화시킨 근인은 무엇일까? 직관과 작용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착각, 이를테면 과시적 욕구에 기인하는 허위와 겉치레, 편견과 같은 것들이기도 하며, “뭔가 좋은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거야”와 같은 게걸스런 원시적 욕망 같은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적 평등성의 이상, 합리성, 명료성, 객관성, 명백한 실용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분석적이고 분리적인 이성관의 구상성,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성의 제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의 해체와 상대주의적 관념이 몰고 온 몰개념화가 빚어낸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을 더한다.

 

이와같은 과잉 추구에 대한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설명은“자기중심적, 질투, 시기, 자기도취, 타인과의 공감결여, 속임수 등으로 자기를 확장하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오늘의 사회,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이라고‘베블런’이 쓴『유한 계급론』의 압축적인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분, 계층 상승의 무형적 가치, 즉 위신재(prestige goods)를 생산하려는 멈추지 못하는 중산층의 과시적 행동의 모순적 쳇바퀴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네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수영장, 많은 방과 드넓은 거실을 자랑하는 교외의 맥 맨션처럼 미적 얼굴을 상실한 추한 건물들과 도시의 확장을 부추겨 자연을 침해하는 부자들의 행동처럼 더 많이, 더 큰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이미 필요의 범주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를 발견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행복의 경고(The danger of happiness)』라는 이 책의 차별점은 이처럼 부영양화 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반성적 제안의 경계를 넘어서 현대적 욕망들이 구현된 양태들에서 욕망의 속성들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마침내 범지구적 생태계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물질주의가 자의식의 취약함이나 타인의 존경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며 전형적인 자기애의 특성이라는 진술이 새로운 해석은 아니지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방어로서 물질의 소유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의 과잉욕망에 대한 행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처럼, 근대성, 모더니티의 특성을 통한 도시확장, 거대 주택과 같은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의 해석은 ‘낙원 증후군’같은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 연결의 오류로 욕망과 도덕성의 균형 예측에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모더니티의 특성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념들이 공공의 영역을 해치고 개인의 영역화됨으로 인한 폐해와 선택의 자유와 같이 자유의 과잉이 마침내 현대인들 자신을 희생시키고 말 것이라는 예언들의 현실화를 목격하면서 현저성이라는 그릇된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게도 된다. 특히, 가장 욕망의 현시(顯示)성을 잘 보여주는 옷과 집을 가면이라는 거짓과 연결의 양면적 통찰을 통해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적 파괴에 이르는 현상들을 비범하게 포착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자기연민과 이기주의로 치닫는 페미니즘의 자기모순이 탐욕스런 쇼핑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입과 질의 유사성을 통한 섹스와 먹는 행위의 흥미로운 해석으로 자기절제를 집어치워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 여성을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무절제한 욕망에 길든 우리들의 모습과 그 욕망에 내재한 혐오스러운 양태들, 그리고 이로 인한 자기 파괴의 결과를 이해하게 되지만 우린 항상 공공의 영역, 혹은 집단적 이익보다는 개인, 나를 위한 욕망에 더 끌리고, 이산화탄소배출과 같은 온난화가 나와는 직접 관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마치 “아무리 많이 소비하더라도 늘 더 많은 것이 통 안에 있으리라 믿는”것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 경쟁, 그것은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격리시킨다.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그 잘못된 쳇바퀴를 멈출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제 만족과 쾌락과 행복의 잘못된 등식을 이탈하여 삶의 의미를 진정 풍부하게 하는 관계성, 유대감, 공동체와의 연대에 관심을 돌려야 할 터이다. 저자가 그리는 꿈의 도시, 꿈의 공동체를 그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우린 우리의 과잉 욕망을 통제하고 규제 할 수 없는 것일까?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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