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목에서 느껴지는 계절의 모호한 경계, 그리곤 궁극에는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을씨년스러움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잔득 묻어 있는 소설이다. 쇄락과 죽음,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랄까? 대형 슈퍼마켓 지점의 보안부장인 오십대 남성‘히라타’, 그의 앞에는 빵과 우유를 절도한 초췌한 여성이 앉아있다. 그녀의 신분증에 기재된 1985년 출생의 기록은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엄격함을 남자로부터 지워버린다. “두 번 다시 이러면 안 돼”, “돌아가도 좋아”

 

남자의 일상적 행동에 일탈이 생긴 것은 곧 사건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기억, 혹은 감히 심연에서 퍼 올릴 엄두를 못 내던 고통의 기억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고, 남자는 여자의 추레하고 헐벗은 차림새와 뻔히 읽히는 내면의 진부함으로 외면하지만 교차하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까지 피하지 못한다. 겨울날씨에 맨발의 샌들, 닳아 얄팍해진 겉옷은 생활고로 고통 받는 여자임을 감추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생일이 1985년 10월 5일이라는 사실이 뺑소니사고로 사망한 딸에 대한 애틋함과 보고 싶은 간절함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소설은 시점을 바꿔 7년 전 딸아이의 뺑소니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과 아비로서의 통렬한 애처로움의 기억을 더듬고, 딸의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내의 고통스런 자살의 기억을 술회한다. 외려 피해자인 죽은 딸아이의 부주의만을 열거하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회피하는 경찰들에 대한 분노까지, 자식을 상실한 부모의 쓰라리고 아픈 통한(痛恨)이 혼자가 된 남자의 내면을 흐른다. 대기업 임원승진의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중앙의 격렬한 경쟁 지대에서 벗어나 지방의 지사로 내려와 억울하게 희생된 딸과 아내의 원통한 응어리를 간직한 채 시간을 지탱하는 고독한 남자, 그가 자신의 딸과 동갑내기인 여자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이렇게 가족을 잃고, 세상을 외롭게 허우적대는 남자와 또 다른 상처를 지닌 여자와의 조우와 같은 흔하고 낡은 패턴의 이야기가 너절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폭력배에 불과한 남자와 동거하며 급기야는 진심의 도움을 베풀었던 남자를 간통으로 협박하기에 이르는 여자와 같이 진부함의 끝이 보이지만, 이에 반응하는 중년 남자의 허를 찌르는 태도와 그의 육체적 반전은 이를 완전히 쇄신해 버리는 것이다.

보안부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여성 절도범에 성적 요구를 협박했다는 모함과 위협은 가족을 잃은 고독한 중년 남자의 이성을 허물어버릴 만큼의 강박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그 남자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소설적 우연을 남용하여 이야기의 진정성이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았던 소설의 흐름이 이로 인해 내용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작가적 역량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여자가 잊고 간 듯한 휴대전화와 손가방! 이 우연찮은 물건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딸아이 사망의 진실? 뺑소니 운전자의 발견? 남자를 10년 남짓에 이르는 고통의 시간에서 풀려나게 하는 해결이 될까?

 

누군가가 궁지에 빠진 나를 진심으로 구원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 구원의 의지에 고결한 아픔이 있는 것이라면, 그 구원자의 아픔을 위해 나는 어떤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그가 안은 아픔과 슬픔이 자신의 죽음을 방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가 죽기 전에 그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그래서 여자의 실수 같은 실수는 진실 같은 진실이 되고, 거짓 같은 새하얀 거짓이 된다. 자신들의 생명으로 하는 보시(布施), 영영 진실을 모르기에 구원되는 이 아이러니, 삶이란 본디 이렇게 부조리한 것일 게다. 정말의 사랑, 죽음의 희생을 통해 구원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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