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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겐 통독 전후시대의 옛 동독인들의 사랑이 왜 처연하고 비릿한 회상이어야 하는지, 안타까운 비애를 가득 머금은 것이어야 했는지, 더구나 그토록 집요하게 대상을 향해 자신을 결박시켜야 하는지, 마치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려고”한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해준 소설이 있다. 닿지 않는 그 아득한 사랑의 간절함에 깊게 드리워진 정말의 번민을 해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 탓이었을까? ‘카차 랑게 뮐러’의 『차마, 그 사랑을』과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자연스레 읽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지만, 이 기억의 성분과 기록의 목적은‘그’와 ‘나’처럼 다르다. 뮐러가 쓴‘조야’는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 속 노트를 읽고서 비로소 그에게 써내려가는 애틋한 연민의 송사(送辭)임에 비해, 마론이 쓴 ‘나’는 끝없이 막으려 했던 억압된 기억의 해방, 생을 지탱시켜왔던 사랑의 기다림이란 구속에서의 영원한 자유를 향한 자기구원의 회고이다. 그럼에도‘조야’와 ‘나’라는 두 동독 여인들이 하는 사랑은 매우 닮아있다. 장벽 서쪽에 있던 남자들, 그녀들의 연인과 일체화되기 위해 신앙적 몸부림에 가까운 집요한 사랑, 즉 온 마음과 육체에 남자들을 깊이 각인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베를린 장벽, 이 경계의 동쪽 진영, 동독에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네들의 시대를 “기이한 시대”, “갱단 지배의 시대”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속에 붙잡은 사랑을 놓칠 수 없고, 그 사랑과 일체화되려는 간절한 열망이 이미 숙명처럼 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는 대척에 놓여있는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짐에 대한 역설, 빼앗긴 인간 본성에 대한 집착, 감성의 저 뒤편으로 망각했던 가치인 사랑의 절실함을 향한 안타까움이 아니었을까? 젊음, 사랑, 자유... 모든 것을 앗아간 기이한 시대에서 해방된 여자에게 사랑은“지금 놓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두려움”의 강박이었으리라.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그저 자발적으로 선택한 다른 감금상태와 맞바꾸고자 했을 때만 좋은 것 같았다.”는 그녀의 자유에 대한 패러독스는 사랑이란 “항상 죽음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란 말에 닿을 만큼 절실하고 유일한 것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여자의 사랑은 치열함이고 가히 투쟁적이다. 처절한 갈등의 고통이 연속되는 그녀들의 사랑에서 황폐함과 폭력이 지배하던 파시즘의 세상, 그 기이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이는“모든 것을 내게서 빼앗아갔다. 나는 정말로 기이한 시대에 살았다.”는 ‘나’의 말처럼 다가온 사랑을 움켜쥘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절실함과 어떤 최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당신은 뒤늦은 내 청춘의 사랑이야.”라고 남자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 안에 움츠리고 있던 젊음의 거침없음에 맡기는 것,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가소로워할 정도로 알만큼 나이가 든 중년 여자 ‘나’는 사랑의 열망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어찌할 수 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사랑했지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소설의 백미는 바로 이즈음에 있는 것 같다. 정작 해방되었지만 다시금 사랑이라는 자기구속에 빠져버렸던 여자가 이제 구십 살인지 백 살인지도 스스로 구별할 수 없는 나이에 그 사랑에 진정한 자유, 해방을 비로소 부여하는 작업 말이다.
기억을 막으려고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친 순간이 되어 그녀는 연인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기로 하는 것이다. 차마 사랑을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었던, 더 이상 사랑과 자신을 구분할 수 없을만큼 멈추어있던 사랑, 그 초월의 시간을 비로소 흐르게 하는 것이다. 두 동독 여자의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는 작업일 것이다. 아니 그녀들이 기억하려 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시 꾸며내려 한 것이었을 게다. 그리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인생의 이해를 확인 하는 것, 사랑했던 자신과 남자의 삶과 죽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이제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내게 내 삶의 유일한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묻게 된다. 내게서 활기와 의욕의 힘을 사라지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도시의 문명과 규칙들이 점점 거추장스럽고 두려워짐에 따라 더욱 갈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지 반문하게 된다. “사랑만이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자연”이며,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질서 전체는 그저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이 비록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일지언정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기이한 시대, 베를린 동쪽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과 갑자기 그들과 함께 살게 된 서쪽 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몰이해, 그래서 우리의 자연성에 대한 모든 고백은 믿음의 문제임에 불과함을 함께 생각게 하는 이 자유와 사랑의 이야기는 파시즘의 과도함과 기이함에 대한 혐오와 조롱과 함께 인생의 가치와 이유를 반추케 하고, 불치의 병이 될지언정 바이러스처럼 침입해 올 사랑앓이를 하게 한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정말 사랑밖에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