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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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책은 낯설고 거북한 무엇이었다. 한국의 미술은 근대성에 이르기위해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이상적 세계로 가버렸다는 것이 내 관점이었기 때문이며, 포스트모던 또한 미술가들의 자기만족적 예술관의 추구라는 점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를 지배하는 인식이었다. 예술이 동시대의 삶을 말하지 않고, 더구나 보이지 않거나 외면당하는 삶의 형태들을 대중에게 인식케 함으로써 삶을 사유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은 채 자기들만의 리그에 빠져 젠체하는 허위의식이 가소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선입견은 이 책에 시선을 맞추는 데 망설임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독한 그리기”, 그리고 “나의 그리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다.”라는 저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집념과 수줍은 듯한 고백의 언어가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조잡한 인문학적 식견을 첨삭한 미술작품의 독해 따위나 화단이 축조한 경계 내에서 편협한 위세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별하게 되었다. 특히 천박하고 탐욕스런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기들만의 아성을 쌓아 배척하는 자들의 얘기가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외려 호감과 동지적 이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 하겠다.

 

또한 지면의 모든 글들에 드러나는 진솔한 작가의 면모는 불신과 가면의 장벽을 완벽하게 거둬들이게 한다. 그래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닮은꼴의 고민과 갈등, 망설임과 외로움의 면면들과 이를 이겨나가는 슬기와 희망의 원천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아마 한국 사회처럼 모든 분야에서 왜곡과 아집으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과 같은 배타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 이 폐쇄적인 그룹이 해당 분야의 주된 흐름을 좌우하다보니 다양성이 도태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하다보니 정작의 예술가는 기회조차 갖기가 힘겹고, 어렵사리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망각해야 가능한 지경이다. 결국 진짜배기는 도태되고, 남의 흉내만 내는 아류들, 엉터리인 가짜들이 주류입네하고 설쳐댄다. 이러한 토양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궈내고, 세계의 화단이 인정하는 화가가 된다는 것은 굳이 그 사람의 행로를 추적치 않아도 그 고통의 시간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다.

 

활동무대가 그 흔한 파리나 뉴욕은 물론, 서울도 아닌 지방 소도시인 공주를 터전으로 삼은 지역화가, 더구나 지방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가난뱅이 화가, 회화의 소재 또한 키치적이고, 한물간 대중적 과거의 조야한 사물이나 그려대는 화가는 한국적 토양에서 당연히 배척된다. 그러함에도 그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결코 그리지 않고서는 삶의 지속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사람임을 처절할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처절함의 기억들이 많은 지면에서 펄떡인다. 가난으로 병을 얻은 아내와 어린 딸을 안고 시골의 축사를 거처로 삼아야 했던 화가로서의 좌절과 번민, 어려운 가계의 큰 아들임에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대에 진학함으로써 부자의 정을 단절했던 야속하기만 했던 기억, 빈정거림과 조롱이 밴 화단의 시선들,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택시회사에 달려갔다 퇴짜를 맞고 돌아서야 했던 인생의 변곡점이었던 순간의 고뇌들이 자신만의 삶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무엇을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를 목격하게 한다.

 

이처럼 집념을 잃지 않고 자기만의 삶의 길을 위해 거친 지난한 곡절들이 결국은 어떤 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선사하는지를 공감케 하기도 하지만, 화가‘김동유’로부터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인이란 어떠한 태도여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느끼고 생각게 되는 것은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이다.

해외의 트렌드를 추종하며 모방하기에 급급한 기능자들, 그래서 자기 것을 지니지 못하는 한국 주류의 일천한 의식, 게다가 예술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없이 지적 허영과 탐욕만 가득 담겨 시대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미술이 지역의 이름 없는 화가, 아니 정말 예술을 삶으로 살아낸 화가만이 뛰어 넘을 수 있음을, 그 가능성의 실현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읽기가 된다.

 

남들의 성공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흔하디흔한가! 진짜배기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화가는 또 얼마나 생존하기 힘든 풍토인가 말이다. 포스트모던의 성공이 확실해지면 너도 나도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어 그 익숙함의 이득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어중이떠중이 화가들이 주류를 이끈다. 그러니 일류의 아류에 불과한 이들이 세계의 미술품 시장에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술이란 낯설게 하기, 비로소 보이게 하기, 새롭게 하기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새로이 해석되고, 막혔던 문제를 해결하는 사유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런 인맥도 없던 화가의 작품을 알아보고 그가 고집스럽게 지탱하던 그림의 세계가 바로 예술이라고, 길을 마련해준 갤러리의 대표까지 사랑스러워 진다.

 

‘이중 이미지’라는 그만의 화풍으로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 화가 김동유의 삶, 그의 예술의 세계가 더욱 든든한 지지를 받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또한 고단한 삶의 시련, 그 시간들이 그림에 녹아 우리 대중의 삶을 대변하고, 생각을 더욱 키워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림에 삶의 희망이 있고, 가능성의 실현이 있는 그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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