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그 사랑을
카챠 랑게-뮐러 지음, 배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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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게 풀어나가는 비릿한 회상의 연속 된 이미지들이 잿빛으로 묵직이 가라앉은 안개를 떠도는 느낌이다. *정키‘해리’가 ‘조야’를 안듯이 “심드렁하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정적이지도 않게”담담한 목소리가 안타까운 비애를 가득 머금고 사랑, 아니 그 이상을 들려준다.
작품의 문장은 ‘W.G.제발트’의 호흡이 긴 그 장문(長文)과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닮아 있기도 하고, 손이 닿지 않는 더욱 아득한 간절함의 기운으로 빠져들게도 한다.

아직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7년 서베를린으로 탈주한 동독출신의 ‘조야’, 숙련식자공으로 그리고 꽃 가판대 아르바이트로 여전히 타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에게 말을 걸어온 멋진 서베를린 남자‘해리’는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연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미 눈 을 감고 세상을 떠난 연인의 노트를 몇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읽어내는 한 여성의 절절한 추억의 회상들에서 그래야만 했다고 괜스레 그녀의 사랑을 초월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고 싶게 된다.

마약과 절도로 1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해리, “단 한 번도 그런 키스를 받을 거라곤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우스꽝스럽고도 보드라운 애기키스”의 기억을 준 남자, 섹스에서는 “그야말로 의학적 의미로” 다뤘고, “ 힘차고 따뜻했고, 결코 과민하지 않았”던 남자, “자칭 민주적이라고 하는 국가는 어떠한 폭력도 행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좌익무정부주의자, “사이비 프롤레타리아에게‘68소동(68혁명의 해리식 표현)’이 남긴 건 몇 마디 문구와 주삿바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그래서 마약으로 “의식 확장 작업인지 의식 파괴 작업인지를 철저하게 해낼 수 있었던”남자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온 마음과 육체에 깊이 각인되어있다.

이 연인의 시련을 담아내는 작품 속 베를린은 왠지 뜨내기들의 집합장소이고, 뿌리 없이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나뭇가지 같은, 이념의 공황상태, 신념을 상실한 황폐한 공간이란 분위기로 다가와 ‘반파시즘 보호 장벽’이 무너지는 통독(統一獨逸)의 전후 시대상과 결합하여 더욱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이러한 혼란스런 시대의 정황이 어찌되었건 이 작품은 분명 사랑의 이야기다. 그러나 화려한 낭만과 통속적 쾌락의 추구와 같이 삶과 괴리된 부르주아적 연애담은 결코 아니다.

“다시 사랑이라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난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 싶었어. 나의 성(性)이 나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나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나이 ~ 中略 ~ 부작용이 있는 권력이나 탐욕도 아무 소용없는 그런 나이 말이야.”처럼 조야의 사랑은 무념의 평온과 상반되는 두려움이기조차 하지만, “운명이 내 손안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한 투쟁이었어!”라는 말처럼 그녀의 일상은 온통 해리에 대한 보살핌과 연민, 나아가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같아지고 또 같아지고...”하는 타자 없는 동일화, 일체화로 보여 진다.
지독한 사랑을 하면 아마 다른 어떠한 이미지에 의해서도 지워지거나 밀려나지 않는 고정된 자신의 마음속에 끈끈하게 침착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HIV양성반응자임을 알았을 때 숨고 싶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걸 듣고 싶고, 울고 싶고, 매 순간 림프절 하나하나를 만져보고 싶었던 그 처절한 갈등의 고통이 엄습하는 시간을 무어라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에게만 폭력을 가하는”착한악인을 향한 안타까움과 애틋한 연민으로 그를 더욱 갈구하는 조야를 이해하게 된다.

“미래의 씨앗이 움트는 베를린 이라는 배아세포 한가운데 누워 있긴 하지만, 나의 동베를린, 우리의 서베를린이 모두 해체된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떠나야만 했던 그 떨칠 수 없었던 업보 같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연인의 이 사랑이야기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매트리스에 누워 가는 호흡만 들려오던 작고 궁박한 방을 자꾸만 선연하게 그리게 한다.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 속 바닥에 놓여있던 노트, 그 노트를 읽고서야 죽은 자에게 써내려가는 이 위대한 서간문은 사랑의 진실이란 진정 무엇인지 슬프도록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작품을 더욱 진솔하게 만들어 낸 작가 ‘카챠 랑게-뮐러’의 파란만장한 삶의 경험들에 애착과 숭고한 정신을 읽게 된다. 부럽고 존경스런 작가이고 더할 수 없는 경외의 작품이다. 뒤늦은 감 없지 않으나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지속적으로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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