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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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우리가 언제 삶에서 소멸될지 대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 죽음의 날을 알게 된다면 우린 남은 삶의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소멸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초연하고 당당하게? 아님 죽음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할까?
마흔여덟의 남자. 이사부장이란 직위를 가진 중견 직장인. 어느 날 남아있는 삶의 시간이 6개월이라는 폐암 진단을 받아든 남자,‘후지야마’는 남은 생을 병원에 갇힌 채 받아야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진정한‘자기찾기’를 위한 적극적인 삶의 시간을 마련코자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야만’한다. 라고 여겨온 것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고 와르르 무너지는 듯 했다.”라는 심경의 표현처럼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 많은 것들이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매달릴 수 있는 나뭇조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유서를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인생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수행한다. 자신의 해결되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석연찮은 이별의 앙금을 남겼던 여자, 사소한 말다툼으로 모른 체 했던 죽마고우, 냉정한 기업사회에서 탐욕에 멀어 낭떠러지로 몰았던 사람, 젊음의 치기 속에서 상처를 주었던 여성 등 그네들에게 죽음을 알리고 비로소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은 더없이 삶을 정화(淨化)시켜주는 시간이 된다.

다분히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적 스토리 구성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사실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고통스러운 이별의 감정, 소멸을 기다리는 자의 감성의 기복과 그 여정에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와 최후의 떨림이 보여주는 그 진실의 무게가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후지야마는 자신의 방벽을 세우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상대로 아내가 아닌 여자를 말하고 있다. “그녀 앞에서만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은 가슴 아픈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진행되는 모든 의식들이 이 여성,‘에쓰코’와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마 죽는 자가 남아있는 자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짊어져야 할 짐인가에 대한 중대한 윤리적 질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회에 첫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아들에게 세상의 소소한 조언들을 해 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그리고 어엿한 숙녀가 될 딸아이에게 아빠와의 따뜻한 추억을 더 이상 남겨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아내에게 이 모든 책임을 남기고 떠나는 자의 미안함과 한 여인으로서의 아내에 대한 고백과 사죄와 참회, 부탁, 그리고 고마움의 사연들이 가슴 뭉클하게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 죽음을 준비하는 자를 엄습하는 슬픔의 파상공격 못지않게 읽는 이의 콧속도 마비되고 눈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아내, 형제, 연인, 동료들에게 삶과의 이별에 초연한 자세를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잊혀지는 게 무섭더군”하는 고백이나,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라는 점이 고통의 중심에 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바닷가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져 소멸의 순간을 기다리는 밤에 불을 켜둔 채 잠을 자야만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자의 불안의 근원에서 인간의 숙명적 실체를 보곤 수다스러웠던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내겐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그 하나는 주인공과 장인의 마지막 이별의 대화인데,

“아버님 인생은 행복하셨나요?”
“전 그저 그랬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은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네, 이제 그만 편해지게...”
“고맙습니다.”

이 장면은 삶을 이별하는 이의 통증이 이면에 잔뜩 담겨있는 것 만 같아 거의 마음에 새겨질 정도가 되고, 큰형과의 대화에서는 이처럼 진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감동과 경외로 겸허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완만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우린 소멸을 향한 시간을 달려가는 존재이다. 죽음의 선고 일에서 삶의 빛이 끊기는 순간에 이르는 한 남자의 여정에서 삶이란 비록 그저 그러함이지만 그 실존의 기억만큼 생생한 우리네 일상의 모든 것들에 깃든 소중한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인생의 존귀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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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마종기 지음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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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해서 더 쉽고 간단한 시를 쓰고 싶다.”라는 시인의 시작(詩作)에 대한 의지처럼 그의 시는“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고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그대로 묵묵히 수행한다. 
또한 “내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 평이하고 투박하게 호소해 보았다.”는 자평은 “무공해나 돌멩이 같이 예쁘지 않아도 확실한 시”가 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요즈음의 시와는 달리 평온한 위안이 되어주고 우리의 감성을 이완시켜준다.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는 표제는 시인의 등단 50년을 기념하듯 수록된 50편의 절창(絶唱)에 면면히 흐르는 고향인 나라, 조국에 대한 연민, 사랑, 슬픔, 안타까움이 되어 부르는 목소리이다. 시인의 회고처럼 쫓기듯 떠나야했던 고국은 애증의 대상으로 그의 삶을 지배하였으리라. 그래서 그의 모든 시편에 이름 모를 당신을 보게 되는 그의 조국에 발을 딛고 사는 나는 괜스레 부끄럽고 수줍어진다. 

시인이 손수 선택한 50편 각각의 시에 깃든 사연과 소중한 의미들이 때론 고통과 슬픔을, 그리고 기쁨과 행복을 담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마음 따뜻한 에세이로 시의 이해를 돕는다. 작가로부터 직접 전해 듣는 시의 배경과 표현하고자 했던 감성, 주제의식은 물론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얽힌 사연, 시가 써졌을 때의 시대상, 그리고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솔한 단상까지 더해져 작위(作爲)없는 인생록이 된다.

난 비오는 소리와 그 광경을 좋아한다. 허나 왜 그토록 비에 집착하는지 명료하게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 ~ (前略) ~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라는 詩, <비오는 날>을 읽으며, 인생에서 마주 하기 쉽지 않은 인연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비에 담겨있을 이름 모를 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한 그대의 눈. /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하는 <담쟁이 꽃>같은 시인을 언젠가부터 이해하기 시작한 나는 어느덧 시인의 글에 안락하게 싸이고 만다. 

그리곤“내게 축제의 날은 우선 꽃이 피는 때가 아니고 꽃이 지는 때라는 믿음이 있다.”라는 시인의 겸손한 삶의 이해에서 “소멸의 시간”이야말로 인생의 절정이자 가장 고귀한 시간임을 가슴깊이 새겨 넣는다. 서슬 퍼런 군부의 폭압이 나라를 휩쓸던 시절, 굴비처럼 엮여 정보기관에 수감되었던 그 공포와 위협의 시간을 지나 국외로 추방되듯이 떠나온 조국,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이 되어 아버지 ‘마해송’의 임종과 장례에도 돌아오지 못햇던 참회의 기억, 어느덧 생의 터전이 된 미국에서 낳은 아들이 자기 정체성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는 아비인 한 시인의 낮게 흐르는 목소리에서 승화된 그리움의 실체를 목격하게도 된다.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라고 시작하는 <물빛 1>이라는 시, 그리고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마. /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이라는 죽음에 닿은 삶과 사랑의 사유가 깊게 깃들어있는 <바람의 말>이라는 시는 시인의 이해하기 쉽게 쓴 시어들이 아니었으면 이처럼 매혹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시를 쓰려고 하고 이해받으려고 노력하며 산다.”는 시인의 말은 그의 모든 시들을 진정 대변하는 표현으로 한 치의 미흡도 없다. 

2000년을 전후하여 한국 시단을 휩쓰는 현대시의 몇 자락들에 대해 “내용 없는 과시와 허세”로 “신선하고 독창적인 예술에 대한 열정을 한 갓 시들어가는 문학이론에 다 소비해 버리겠다는 것인가?”하고 날로 궁핍해져만 가는 정신세계와 미혹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는다고 날선 비판도 아끼지 않지만, 시인의 따뜻함이 가득 스며든 시선들로 충만한 이 詩作 에세이집은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섬세하고 다정한 서정(抒情)’으로서 우리들의 마음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고, 푸근하게 감싸준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다시 그 슬픈 파두의 노래 속에 빨려들기 시작했다.”라는 <포르투칼 일기>에 비친 시인의 외로움 혹은 고독의 의미를 아로새기며 책장을 덮는 마음이 애절하게 느껴진다. 시인의 희망처럼 그의 시는 내게 가슴 속 깊이 스며들어 내 삶이 소멸하는 순간에 문득 한 구절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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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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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환상과 본성의 치열한 충돌을 본다. 또한 본능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윤리라는 인간사회가 만들어 낸 질서의 실체를 골똘히 생각게 한다. 인간이 가진 정염(情炎)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란 것이 진정 존재 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 본성의 분열된 이중성, 그 불완전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에서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서의 그 아득한 추락의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그럼에도 관습적 경계를 마련하고 인간 행위의 부적절함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본성 아닌가? 17세 소녀에 대한 칠순 노인의 에로스적 욕망은 사회라는 인간집단의 도덕적 가치기준에 있어서 그리 너그럽지 않다. 아니 부도덕하다고, 추하다고, 미쳤다고 배척된다.
그래서“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과 소멸”은 인간의 생물학적 연령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시인‘이적요(李寂寥)’의 여고생‘은교’를 향한 욕망의 정당성은 온전히 사회가 구축한 집단가치를 부정하여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개인의 본능과 집단적 가치의 불일치. 그래서 시인은‘완전한 해방’을 말하지만, 이는 곧 죽음으로서만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설은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인 소설가 서지우의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바로 이와 같은 인간 본성과 사회적 시선의 갈등을 마치 심리 스릴러물을 보듯이 극적 긴장감에 담아 펼쳐놓는다. 시인의 죽음 후 1년 뒤에 공개토록 유언된‘시인의 노트’, 그리고 은교에게 전해진‘서지우의 일기’는 두 사람의 진정, 즉 두 인물의 적나라한 애증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노출한다.
이적요 시인의 노트는 욕망이라는 본능의 예찬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제자에 대한 연민, 의심과 시기, 질투조차도 그 근원은 처녀로서의 은교에 대한 갈망, 젊음이 내쏘는 광채에 대한 경외로 연결된다. 노트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출처의 사랑의 시들과 찬란하다 할 정도의 섬세하고 치밀한 관능의 묘사들은 가히 시인의 주장처럼 17과 70이라는 나이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무참한 기억의 편차”일 뿐 인간 욕망의 본질을 구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데 고개를 끄덕일 정도이니.

한편, 이적요의 손과 발이라 할 수 있는 제자 서지우는 시인의 가족화 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문학적 감수성의 한계로 스승으로부터‘멍청한 놈’이라는 핀잔을 달고 사는 인물이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충성스러움은 시인도 인정하는 됨됨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승의 용광로처럼 들끓는 욕망들과 간교한 전략, 그리고 아주 이기적인 내부의 본질까지”읽어낼 수 있는 서지우는 은교에 대한 시인의 탐욕스런 눈빛을 ‘일흔살’과  성적‘불능’, 그리고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란 수치와 모멸감으로 자각케 하려 하지만 애욕의 환상에 이미 신성을 부여한 시인을 돌이킬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늙은이를 가리켜‘썩은 관’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는 범죄자”들이라고 “시간에 따라 죽음으로 실려 가는 게 존재의 공동운명”임을 모르는 젊음의 기고만장한 무지라는 항변으로까지 이어지듯이, 이 애욕의 환상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자신의 문학적 성취도, 치밀한 전략까지 투영하여 일궈낸 삶의 행적도 모두 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끝없이 흐르는, 특히 이러한 욕망의 달성을 꿈으로 상징한‘호텔 캘리포니아’에서는 시간을 역진시키기까지 하며 “동갑내기 우리는 함께 보고, 느끼고, 껴안는다”라고, 그리곤 “시간은 마음속에 있지. 여긴 호텔 캘리포니아”라고 완전한 혁명, 완전한 해방을 부르짖는다. 더구나 “내 마음 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를 부르는 노회한 시인의‘본능의 호소’는 관능의 자극을 넘어 죽음에 맞닿는 무엇이다. 아마 이 죽음에 닿아있는 사랑처럼 성적 욕망의 환상은 시기와 분노, 마침내는 죽음을 내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죽음에 양도한 스승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죽음의 길을 받아들인 서지우나, 스스로 처형의 무대로 이끌어 죽음에 이르는 이적요는 결국 본능의 희생자이며 한편은 완전한 해방을 성취한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이 소설에는 해설자가 있다. 소설을 양분하는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에‘Q변호사’가 개입한다. 즉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은교의 평범함에 대한 지적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적요의 처녀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와는 달리 원조교제를 하고 섹스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를 자유롭게 즐기는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하고 싶으면 키스해도 되요. 할아부지”라는 말은 다양한 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은교의 실체를 설명함으로서 성적 환상을 확인시켜주는 그러나 그 순수성과 본성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그래서 두 남자의 파멸적 죽음은 관능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 소설에 인용되는 보들레르나 스탕달의 문장들,“그녀의 옴씬한 발목”처럼 성적 욕망이라는 본성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관능을 자극하는 무수한 언어와 문장들에서 강한 유미주의적 향취를 느끼게 된다. 특히 우주를 온통 점령할 정도의 강렬한 소녀에의 욕망이란 경험이 본능의 완전한 해방을 느끼게 해주고“인생 유일의 싱싱한 행복”이라고까지 외치는 시인에게서 탐미적 본질까지도 보는듯하다. 사실 욕망의 면죄부니, 섹슈얼 환타지니 하는 구호는 이 작품을 너무 작은 범주에 갇히게 만들어 버린다. 오히려 성적 취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위선, 즉 도덕적 가치기준에 대한 회의를 노년의 욕망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긍정성이란 그릇에 담아낸 이 소설은 이러한 성적 욕망이란 틀을 벗어나 인간 본성을 탐미적으로 묘사한 예술주의의 작품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독서 내내 내밀한 관능의 향기가 쉬이 유실되지 않을 정도로 욕망의 폭풍은 장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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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일본탐정기
박덕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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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를 역사소설의 대상으로 한 것만큼 이 작품은 낯설다. 인구에 회자되기는 하였지만 세속의 인물이 아닌 불가(佛家) 즉, 성(聖)에 속한 인물이라는 선입견 탓에 그리 본격적인 관심을 갖지 못한 이유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속인도 아닌 스님이 이웃나라를 탐정(探偵)한다니 호기심을 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품에 진입하자마자 우울함이 몰려온다. 시대적으로 임진년 및 정유년의 조일전쟁을 전후하고 있으니 무능함을 넘어 무책임하기까지 한 당시의 국왕은 물론 사대부들의 몰염치와 파렴치까지 더해져 그 비열함이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이 짜증을 피할 도리가 없는 연유이다.

작품은 허균, 이달과의 친교로부터 시작해 억불숭유책을 쓰던 조선사회에서 유학자들과도 폭넓은 교류와 주자학에도 조예가 깊어 유교와 불교, 소위 오늘말로 하면 통섭에 가까운 폭넓은 학문적 식견을 소유한 유정의 인물됨과 전쟁 중 승군(僧軍)으로 스승 휴정대사를 이어 구국의 역량을 발휘한 호국승려로서 조명한다. 사실 조선의 왕과 사대부 중심인 주류의 역사는 수치스러움과 오명(汚名)의 기록이다. 전쟁 후 대마도주를 비롯한 도쿠가와 막부의 조선과의 강화제안은 피해의식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공포와 죽음, 위협으로만 느껴졌을 터이다. 결국은 천민으로 치부하던 승려인 유정에게 위험이 내재한 외교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조선 지배층의 야비함을 드러내는 대표적 예라 하겠다.

이 소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사실 너무도 단순명료해서 그 의도를 그냥 외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직설적이고 외형적이다. 어쩜 소설의 이야기에 내면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서걱거림같은 것이라 할까. 그 첫째는 부산의 다대포항을 출발해 대마도에 도착한 사명대사 일행이 전쟁을 도발한 침략국으로서 일본이란 나라와 그 구성원인 국민들이 전쟁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하려하지 않는다는 점의 표면화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를 통해 20세기 제국주의 야만성에 유린당한 아시아 나라들과 국제사회를 향해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는 오늘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식과 경계의 의미에서 일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승려가 왕과 사대부들을 대신하여 성취한 외교적 업적을 통해 유정이란 인물의 역사적 재조명의 서치라이트를 비추어 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의 의도를 배제하면 이 소설은 사실 허망하고 허름하다 할 수 있기조차 하다. 간간히 뱉어내는 역사의 단편적 일화들, 이도다완이나 도쿠가와 막부와 덴노(天皇)의 관계, 일본의 소소한 사적(史蹟), 일본의 주자학 전래, 조선옹주 등 피로들 이야기, 이후 조선통신사의 시효가 되었다는 사적 의의등 문학적 해석이나 향취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역사관광 가이드 같은 기록만 남는 것이다.

물론 대마도의 한반도와 일본본토와의 지리적 거리처럼 일본보다는 우리의 문화적, 경제적 배려에 의존했던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심층적 고찰과 같은 문제의 제기도 엿 볼 수 있으며, 당시대의 일본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조명으로 일본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의 기반제공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소설문학이지, 역사에세이나 인물평전이 아니기에 주제와 이야기가 서로 분명하게 결절되어 존재하는 것은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요인임에 확실하다.

마치 소재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 하나씩 짜깁기하다보니 누더기임이 선명하게 인식되는 것 같은 남루함마저 느껴진다. 유정이란 인물의 삶의 본질적 탐색이나 역사적 진정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승려의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외교사의 한 토막이야기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양호한 대중용 역사 참고문헌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문학적 향취가 무척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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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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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평생을 함께해 온 반려자가 나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래서 그 주검이 문득 나의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막 끓인 커피향이 감돌고 따뜻한 체온이 머무는 침대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이 주는 안정감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 때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남편을, 바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식하는 순간, 이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살아있는 자의 당혹스러움, 그 혼란의 시간을 우린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소파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온기를 잃어가는 남편‘쥘’의 주검을 두고 ‘알리스’는 쥘과의 이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되뇐다. 오십 여년을 함께 해온 동반자를 선뜻 자식들에게, 친지에게, 장의사에게, 목사에게 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쥘의 죽음이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들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죽은 게 아니다.”아마 오랜 세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들이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저장 될 수 있는 그런 시간, 그녀에게 남편이 온통 흘러들어올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은 차마 남편의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못하고 차갑게 굳어가는 남편의 주검을 두고 자신만의 이별의 시간을 보내는 하루의 이야기다. “일상이라는 이름에 묻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고 용서하는 화해의 시간이 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과 증오, 그러나 그때만큼 사랑했던 적이 없노라고 고백하며, 살아있는 당신보다 죽은 당신을 떼어버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쉽다고 말하는 알리스의 떠나보냄의 수긍은 시큰거림과 슬며시 흐르는 눈물을 동반케 한다.
익숙한 체취,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고 삶에 대한 충동이자 현실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쥘과 함께 얼음이 되어버렸으면. 그와 함께 빛을 꺼버렸으면.”하는 상실의 아픔으로 갈등하는 여인의 사무침이 내내 가슴에 울린다.

한편 남편과 규칙적으로 체스를 두던 아파트 아래층의 자폐증 소년‘다비드’의 극도로 제어된 언어와 행동이 알리스의 혼란과 망설임의 시간에 개입하여, 그 어떤 죽음에 대한 위로의 수다보다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되어준다.
“쥘 할아버지 껍데기”라고 죽음을 이해하는 소년의 표정, 두 명의 산 자와 하나의 주검이 마치“ 세 명의 성좌가 확정되어 있는 삶과 죽음 사이의 지대”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괜스레 목이 메어지기도 한다.

날이 기웃기웃 저물어가는 눈 내리는 밤이 오고, 정말 이별을 위한 완벽함이 도달한 시간,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뜻해요”하는 소년의 무심한 듯한 한 마디는 삶과 죽음과 대비되어 산 자가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평온함이 되고, 그래서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라며 쥘의 자리에 누워 잠에 빠져드는 소년을 바라보는 알리스의 표정에서 삶의 안식을 본다.

죽음이란 삶의 가장 큰 상실을 극복하는데 요구되는 다독거림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부부의 연을 맺고 세월을 같이하는 동반자의 증오와 사랑의 실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동적 작품이다. 단숨에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짤막한 소설이지만 그 감동의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고 오랫동안 가슴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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