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성의 환상과 본성의 치열한 충돌을 본다. 또한 본능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윤리라는 인간사회가 만들어 낸 질서의 실체를 골똘히 생각게 한다. 인간이 가진 정염(情炎)에 대한 도덕적 기준이란 것이 진정 존재 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 본성의 분열된 이중성, 그 불완전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작품에서 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에서의 그 아득한 추락의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그럼에도 관습적 경계를 마련하고 인간 행위의 부적절함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본성 아닌가? 17세 소녀에 대한 칠순 노인의 에로스적 욕망은 사회라는 인간집단의 도덕적 가치기준에 있어서 그리 너그럽지 않다. 아니 부도덕하다고, 추하다고, 미쳤다고 배척된다.
그래서“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과 소멸”은 인간의 생물학적 연령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시인‘이적요(李寂寥)’의 여고생‘은교’를 향한 욕망의 정당성은 온전히 사회가 구축한 집단가치를 부정하여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개인의 본능과 집단적 가치의 불일치. 그래서 시인은‘완전한 해방’을 말하지만, 이는 곧 죽음으로서만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소설은 시인 이적요와 그의 제자인 소설가 서지우의 관점을 교차시키면서 바로 이와 같은 인간 본성과 사회적 시선의 갈등을 마치 심리 스릴러물을 보듯이 극적 긴장감에 담아 펼쳐놓는다. 시인의 죽음 후 1년 뒤에 공개토록 유언된‘시인의 노트’, 그리고 은교에게 전해진‘서지우의 일기’는 두 사람의 진정, 즉 두 인물의 적나라한 애증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노출한다.
이적요 시인의 노트는 욕망이라는 본능의 예찬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제자에 대한 연민, 의심과 시기, 질투조차도 그 근원은 처녀로서의 은교에 대한 갈망, 젊음이 내쏘는 광채에 대한 경외로 연결된다. 노트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출처의 사랑의 시들과 찬란하다 할 정도의 섬세하고 치밀한 관능의 묘사들은 가히 시인의 주장처럼 17과 70이라는 나이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무참한 기억의 편차”일 뿐 인간 욕망의 본질을 구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데 고개를 끄덕일 정도이니.

한편, 이적요의 손과 발이라 할 수 있는 제자 서지우는 시인의 가족화 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문학적 감수성의 한계로 스승으로부터‘멍청한 놈’이라는 핀잔을 달고 사는 인물이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충성스러움은 시인도 인정하는 됨됨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승의 용광로처럼 들끓는 욕망들과 간교한 전략, 그리고 아주 이기적인 내부의 본질까지”읽어낼 수 있는 서지우는 은교에 대한 시인의 탐욕스런 눈빛을 ‘일흔살’과  성적‘불능’, 그리고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란 수치와 모멸감으로 자각케 하려 하지만 애욕의 환상에 이미 신성을 부여한 시인을 돌이킬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늙은이를 가리켜‘썩은 관’이라고 나팔을 불어대는 범죄자”들이라고 “시간에 따라 죽음으로 실려 가는 게 존재의 공동운명”임을 모르는 젊음의 기고만장한 무지라는 항변으로까지 이어지듯이, 이 애욕의 환상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자신의 문학적 성취도, 치밀한 전략까지 투영하여 일궈낸 삶의 행적도 모두 부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끝없이 흐르는, 특히 이러한 욕망의 달성을 꿈으로 상징한‘호텔 캘리포니아’에서는 시간을 역진시키기까지 하며 “동갑내기 우리는 함께 보고, 느끼고, 껴안는다”라고, 그리곤 “시간은 마음속에 있지. 여긴 호텔 캘리포니아”라고 완전한 혁명, 완전한 해방을 부르짖는다. 더구나 “내 마음 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를 부르는 노회한 시인의‘본능의 호소’는 관능의 자극을 넘어 죽음에 맞닿는 무엇이다. 아마 이 죽음에 닿아있는 사랑처럼 성적 욕망의 환상은 시기와 분노, 마침내는 죽음을 내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죽음에 양도한 스승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죽음의 길을 받아들인 서지우나, 스스로 처형의 무대로 이끌어 죽음에 이르는 이적요는 결국 본능의 희생자이며 한편은 완전한 해방을 성취한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이 소설에는 해설자가 있다. 소설을 양분하는 시인의 노트와 서지우의 일기에‘Q변호사’가 개입한다. 즉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은교의 평범함에 대한 지적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적요의 처녀에 대한 환상적 이미지와는 달리 원조교제를 하고 섹스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를 자유롭게 즐기는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하고 싶으면 키스해도 되요. 할아부지”라는 말은 다양한 이해를 불러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은교의 실체를 설명함으로서 성적 환상을 확인시켜주는 그러나 그 순수성과 본성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그래서 두 남자의 파멸적 죽음은 관능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 소설에 인용되는 보들레르나 스탕달의 문장들,“그녀의 옴씬한 발목”처럼 성적 욕망이라는 본성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관능을 자극하는 무수한 언어와 문장들에서 강한 유미주의적 향취를 느끼게 된다. 특히 우주를 온통 점령할 정도의 강렬한 소녀에의 욕망이란 경험이 본능의 완전한 해방을 느끼게 해주고“인생 유일의 싱싱한 행복”이라고까지 외치는 시인에게서 탐미적 본질까지도 보는듯하다. 사실 욕망의 면죄부니, 섹슈얼 환타지니 하는 구호는 이 작품을 너무 작은 범주에 갇히게 만들어 버린다. 오히려 성적 취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위선, 즉 도덕적 가치기준에 대한 회의를 노년의 욕망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긍정성이란 그릇에 담아낸 이 소설은 이러한 성적 욕망이란 틀을 벗어나 인간 본성을 탐미적으로 묘사한 예술주의의 작품이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독서 내내 내밀한 관능의 향기가 쉬이 유실되지 않을 정도로 욕망의 폭풍은 장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