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코끼리의 등>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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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우린 우리가 언제 삶에서 소멸될지 대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 죽음의 날을 알게 된다면 우린 남은 삶의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소멸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초연하고 당당하게? 아님 죽음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할까?
마흔여덟의 남자. 이사부장이란 직위를 가진 중견 직장인. 어느 날 남아있는 삶의 시간이 6개월이라는 폐암 진단을 받아든 남자,‘후지야마’는 남은 생을 병원에 갇힌 채 받아야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진정한‘자기찾기’를 위한 적극적인 삶의 시간을 마련코자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야만’한다. 라고 여겨온 것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고 와르르 무너지는 듯 했다.”라는 심경의 표현처럼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 많은 것들이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매달릴 수 있는 나뭇조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유서를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인생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수행한다. 자신의 해결되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석연찮은 이별의 앙금을 남겼던 여자, 사소한 말다툼으로 모른 체 했던 죽마고우, 냉정한 기업사회에서 탐욕에 멀어 낭떠러지로 몰았던 사람, 젊음의 치기 속에서 상처를 주었던 여성 등 그네들에게 죽음을 알리고 비로소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은 더없이 삶을 정화(淨化)시켜주는 시간이 된다.
다분히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적 스토리 구성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사실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고통스러운 이별의 감정, 소멸을 기다리는 자의 감성의 기복과 그 여정에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와 최후의 떨림이 보여주는 그 진실의 무게가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후지야마는 자신의 방벽을 세우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상대로 아내가 아닌 여자를 말하고 있다. “그녀 앞에서만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은 가슴 아픈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진행되는 모든 의식들이 이 여성,‘에쓰코’와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마 죽는 자가 남아있는 자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짊어져야 할 짐인가에 대한 중대한 윤리적 질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회에 첫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아들에게 세상의 소소한 조언들을 해 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그리고 어엿한 숙녀가 될 딸아이에게 아빠와의 따뜻한 추억을 더 이상 남겨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아내에게 이 모든 책임을 남기고 떠나는 자의 미안함과 한 여인으로서의 아내에 대한 고백과 사죄와 참회, 부탁, 그리고 고마움의 사연들이 가슴 뭉클하게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 죽음을 준비하는 자를 엄습하는 슬픔의 파상공격 못지않게 읽는 이의 콧속도 마비되고 눈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아내, 형제, 연인, 동료들에게 삶과의 이별에 초연한 자세를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잊혀지는 게 무섭더군”하는 고백이나,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라는 점이 고통의 중심에 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바닷가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져 소멸의 순간을 기다리는 밤에 불을 켜둔 채 잠을 자야만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자의 불안의 근원에서 인간의 숙명적 실체를 보곤 수다스러웠던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내겐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그 하나는 주인공과 장인의 마지막 이별의 대화인데,
“아버님 인생은 행복하셨나요?”
“전 그저 그랬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은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네, 이제 그만 편해지게...”
“고맙습니다.”
이 장면은 삶을 이별하는 이의 통증이 이면에 잔뜩 담겨있는 것 만 같아 거의 마음에 새겨질 정도가 되고, 큰형과의 대화에서는 이처럼 진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감동과 경외로 겸허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완만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우린 소멸을 향한 시간을 달려가는 존재이다. 죽음의 선고 일에서 삶의 빛이 끊기는 순간에 이르는 한 남자의 여정에서 삶이란 비록 그저 그러함이지만 그 실존의 기억만큼 생생한 우리네 일상의 모든 것들에 깃든 소중한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인생의 존귀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