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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내 취미는 타인의 사생활’이라고 읽는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나름 이해한 결과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위층에 사는 네 아이를 둔 여섯 가족을 이웃에 둔 홀로 사는 여자다. 위층 2302호에 사는 은협의 목소리가 서술자인 2202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된다. 서술자의 시점 선택에서 작가의 깜직하고 발칙한 재치를 읽게 되고, 호흡 짧은 문장들의 경쾌한 질주와 촘촘하게 배치되어있는 암시의 문장들, 그리고 우리네 흔한 일상사를 흥겨운 한바탕 게임으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들에 언제 빠져들었는지 모르게 책장을 거듭 넘기게 되는 소설이다.
은협은 네 아이에 치이고 여느 서민들의 살림처럼 경제적 압박에 푹 삶아진 듯한 여인이다. 화자의 목소리를 신뢰한다면 은협은 자신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힌 타인에 대한 불신과 피곤함, 짜증이 온 몸에서 발산되는, 그래서 때론 그 지친 현실로 인해 삶의 방향 감각을 잃고 넋이 나가기 일쑤인 사람이다. 갓난 아이, 유치원생 여자 아이, 연년생인 초등생 남자아이 둘, 왠지 나도 정신이 사납다. 2202호 여자는 이런 은협의 갓난아이를 맡아 돌봐주고, 유치원생 소연의 등원을 돕는가하면, 남자 아이들의 사건에 호출되어 은협 대신에 학교에 출석하여 해결사가 되어주기도 한다.
나아가 은협의 내밀한 사생활에 개입하여 은협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도 하며, 심지어 전세 계약 만기로 인해 집을 비워달라는 은협의 집주인에게 대신 협의 전화를 맡기까지 한다. 여자는 자신을 자칭 ‘임시 은협’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 당사자인 은협의 목소리가 아니라 서술자인 2203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되고 있다는 것은 은협의 사생활을 비롯한 삶의 전모를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야심찬 복선이라고 생각되는 데, 루브탱 15센티미터 검은색 펌프스 에피소드다. 갓난아이 배냇 이불을 삶다가 태워버려 이불장에서 대신할 것을 찾다가 남편의 외도가 의심되는 물증을 손 에 쥐게 된 사건이다. 좁아터진 전셋집에 여섯 식구가 바글거리는 가정이 휴식처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남편의 취미이자 사생활이 발각되는 해프닝이다.
서술자의 화법도 아주 얄궂다. 여섯 식구가 사는 은협에게 같은 규모의 집에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이웃으로서 지니는 호기심은 당연하달 수도 있다. 은협을 잘 알고 있는 여자는 항상 상대가 스스로 답을 지닌 질문을 하도록 함으로써 극히 경제적 답변만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다. 결국 서술자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은협과 그녀의 남편 보일, 아이들의 말과 사건의 묘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일화들을 전달하는 여자의 화법이나 차림새와 처세는 독특하고 튀는 데가 있어 주의 깊은 독자는 재미에 빨려들면서도 언짢고 불편한 느낌의 근원을 찾게 된다. “국민연금 수령노인”이라는 별난 연령기준의 사용, 검사의 입을 빌려 발설되는 검경수사권 분리와 검찰정권에 대한 희망의 변, 서울시장 자살에 대한 “죽어 마땅한”, “죽는 게 우월 전략”과 같은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몰(沒) 윤리적 언사,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의 제도적 틈새를 악용하는 무용화의 생각 등, 정치 시사적 소재들의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이다.
물론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어 발설되고 있으니 서사 흐름의 한 요소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이는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이의 부당한 소설 내 개입으로 읽힌다. 나는 내포저자(추정되는 소설 속 저자의 목소리)는 서술자가 어린 유치원생 소연에게 죽음을 설명하며 목을 긋는 몸짓을 하는 장면들처럼 서술자의 본래 성품을 독자가 가늠하게 해주듯 서사의 진전과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혹시 곡해하고 오독하는 것인가?
아마 이 소설의 주제어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중의 집단적 착각”, 즉 자신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의심하는 대신에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우매함을 지적하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있다. 오직 서술자인 여자 단독의 목소리에 다중적 의미의 표현을 발설케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의심하지 않는 은협의 착각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고 틈틈이 묘사된 시국에 대한 총평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침 전세입자 사기 사건이 나라를 온통 어수선하게 하고 있는 즈음이다. 이 소설의 주요 제재이기도 한데, 자신이 꽤나 약삭빠르고 현명하게 세상을 판단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금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서술자 표현의 방점이 어느 곳에 찍히고 있는 것인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희극적 드라마들이 모여 하나의 비극을 완성하고 있다. 은협은 결혼 생활의 위기에 직면케 한 남편을 향해 이렇게 내뱉는다.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래요.”라며 자신의 결혼은 사기결혼과 같다고 푸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기 친 놈의 잘못이 아니고 걸린 놈이 봉변을 당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도덕적 책임’이다.
이 도덕적 양심을 팔아먹은 인간에 희생당한 세입자들, 검찰을 비롯한 정치배들에 농락당한 시민들 또한 자기 판단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이 결말로 치달으며 들려주고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 책임의 규명일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나게 재미있다고 소설이 은연히 발설하는 의사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경쾌함 속의 진지함과 속 깊은 말들이 산재한 뛰어난 소설이다. 눈 밝은 독자들,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보이게 될 줄도 모르겠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독자들은 당황과 분노, 자신의 어리석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