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개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김현창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6월
평점 :
생(生)의 지극한 열망의 기록
- 나는 먹는다, 그리고 존재한다. Edo, ergo Sum!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을 괴롭혀 온 최고의 물음, 즉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은 정말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반복되지만, 당연히 충분하고도 실질적인 문제로서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존재를 무시당하거나 존재 자체를 외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 앞에서 초연해지기가 너무도 어려운 까닭일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종교를 낳고 즐비한 철학적 사변을 생산해왔지만 어느 것도 인간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더구나 인간의 존재적 실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면 그것은 생에 대한 허무와 파괴로 이어지곤 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 의 이 작품은 바로 이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회의와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이를 해명하고자 한, 즉 생의 열망을 살해하는 계몽주의적 이성과 영혼 불멸과 같은 육체 소외에 대한 위선적 사변을 공박하기 위한 소설(Novela) 혹은 스설(Nivola)이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온전히 소설로 명명되지 않고 스설이니 수설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범주로 읽히는 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라 할 것이다.
첫째는 형식에 있어 저자인 우나무노가 소설 속 대화에 직접 침입하여 소설 속 인물로서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그 생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이며, 둘째는 철학적 사변의 요소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측면이다. 물론 이 작품은 분명한 서사가 있고, 매우 문학적이라 할 예술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 속에 몰입하는 데 어떠한 지장을 받지도 않을 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서사를 이루는 스토리는 다분히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을 이용하여 그 감정을 교활하게 자신의 또 다른 비천한 사랑의 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기만,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남자가 끝내 자살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압축된 줄거리로 보면 거창하게 ‘존재론’을 들먹이는 수사가 한껏 과장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주인공인 남성 ‘아우구스또’란 인물의 여성 ‘에우헤니아’를 향한 사랑의 관념이 자기 영혼의 실체가 자욱한 안개 속의 불분명성에 휘감겨 존재의 실재성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하던 인간의 영혼을 불러 깨우는,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깨달음의 시작을 가져왔기에 예사스럽지 않은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머물던 존재를 비로소 구체화시켜준 사건으로서 사랑이다. 지나가던 여인의 눈빛이 우연히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내밀하게 율동케 한 것이다.
이 상황을 다시 관찰해보면 “사랑이 에우헤니아를 유발한 것”이라는 표현처럼, 이미 아우구스또라는 인물에게는 우연을 빙자해 구체화하여 산출할 여성 일반에 대한 추상성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순수한 하나의 관념, 허구의 실체가 실재화되어 유령처럼 살던 인간에게 살아있음을 선사한 것이다. 아우구스또는 에우헤니아가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유산으로 남겨진 부동산이 부채로 동결되어 피아노 교사로 그 빚을 탕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깨운 여성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부동산을 매입하여 여자가 안은 부채를 탕감하고 동결된 연금의 수령까지 재개 되도록 한다.
여인의 눈빛을 영적인 광명이라 생각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지 묻고 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기조차 한다. 반면 여자는 피아니스트로 불리지만, 이는 혐오스러운 생계로서의 직업일 뿐, 여자에게 음악이란 지겨움이며, 끝나지 않을 영원한 족쇄이다. 또한 여자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간략하게 묘사할 수 있기도 하다. “에우헤니아는 문간의 비좁은 방에서 자기 애인의 ‘사랑의 평정’을 자극하고 있었다.”라고. 건달 애인과 음란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문장은 아우구스또의 사랑이란 이미 불모성(不毛性)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마치 굶주린 개의 눈초리 같”다고, “눈으로 구걸하는 작자”라고 하기까지 한다.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종결한 자신이 안은 빚을 해결한 조치에 대해 자기 육체를 사려는 파렴치함이라고, 결혼을 강제하려는 악의라 주장하며 선의를 거절하고, 그 의도를 매도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에 대한 심리 실험을 통해 여자를 알고자 시도한다. 이때 여자는 자신의 건달 애인으로부터 아우구스또와 결혼하여 부채가 해결된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고 자신과는 계속해서 연인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과 함께 할 하나의 대안임을 제시받는다.
느닷없는 어느 날 여자는 아우구스또의 집을 찾아 와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겠다고 결혼 승낙을 은연히 암시하며 유혹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의 제안을 일순간 거절하지만 친구 빅또르와의 대화로부터 “결혼을 않는 자는 심리적으로 여성을 체험 할 수가 없”으며, “여성 심리학의 유일한 실험은 결혼”이며, 실수나 실패에 대한 구제를 용납지 않는 결혼에 대한 이의에 대해 “여하한 진리의 실험도 구제는 없다”고 후퇴의 길을 열어놓게 되면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에 따라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 진리 실험인 결혼 준비로 한껏 들뜬, 그리고 결혼식 일자가 임박했을 때, 에우헤니아는 아우구스또가 증여해준 재산을 챙겨 건달 애인과 함께 유유히 도주한다. 구제는 없다. 아우구스또에게 남겨진 거대한 수치감, 조롱! 웃음거리가 됐다는 의식에 의해 영혼의 파괴가 시작된다. 조롱당함으로써, 이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의 독백마저 무너뜨릴 만큼 고통을 새긴다. 부정당한 존재는 존재를 방어하기 위해 이 조롱의 흉포한 체험이 ‘나’라는 존재를 느끼고 만져볼 수 있는 실재적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한 사건이라며 합리화한다.
이처럼 이성(理性)은 인간의 감정, 생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의 적임을 드러낸다. 아우구스또의 이 냉소적 이성에서 자기기만의 위선을 읽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을 온통 삼켜버리는 고통은 존재와의 결별, 자살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 빅또르는 고통당하는 너 자신을 삼키라고, 자살을 하나의 방법으로 권유한다. 자살이란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존재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개똥철학의 유명한 공리가 등장한다. “A는 A에 동일하다”, 이 말은 정말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바로 A가 A라는 사실 때문에 가장 진실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철학의 논리적 이성, 이 사변적 이성은 얼마나 인간의 생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진실은 존재 부재이다? 그러니 자기 살해의 죽음이 순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마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 될 것 같은데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또는 자살을 결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가와 상의를 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살라망까에 사는 저자 우나무노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 우나무노는 소설 속으로 침입하여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인 아우구스또와 대화를 나누는 소설 속 인물이 된다. 아우구스또 자신의 처분권을 가진 창조자인 우나무노와 대화해 봄으로써 불운의 원천인 자기 존재와의 결별을 최종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황당해 보이는 장면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화로 읽게 되는데, 이 지점까지 썼을 때 작가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의 처리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는 더불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음에 착안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대화는 서사이론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어 잘 알려져 있는데, 소설 속 인물인 아우구스또는 저자 우나무노의 환상의 산물로서 허구의 실재로서 존재할 뿐, 즉 한 인간의 기록을 위해서 만들어진 산물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죽이고 살리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또의 반론이 바로 유명한 문장이다. “허구의 실재도 내적 논리가 있으며, 이는 작가도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에 더해 그는 실로 비수같은 지적을 던진다. “더욱 어려운 일은 작가들이 상상한다고 믿는 인물들을 잘 안다고 하는 것만큼 어려운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우나무노는 이 지적에 창조주로서의 불안을 감지하고 아우구스또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아우구스또는 살아야 함을 하소연하지만 작가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 독자들은 아우구스또의 처절한 생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읽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우구스또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집에 도착한다.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에게 허구의 존재,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우구스또가 이 말에 집착하는 까닭은 살아있음을 연장하려는 몸부림의 생각임을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으니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니 죽을 수 없기에 자신은 불멸이다! 이 모든 것, 허구의 실재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은 불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말이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거림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먹고 있다. 먹고 있는데 살지 않은 것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존재한다. ‘Edo, ergo Sum! 나는 먹는다. 그리고 존재한다!’ 육체의 철학이다. 이 비극 앞에서 웃음이 나온다. 웃음은 비극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했던가? 상상력을 자극하여 사물의 현실을 직시토록 유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예를 두고 한 말 같기만 하다. 죽음을 알아차린 육체는 맹렬한 식욕을 보이며 자기를 방어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육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우구스또는 세 가지로 사망한다. 의사는 두뇌와 심장과 위장이 동시에 종합적으로, 온 육체로 사망했다고 최종 진단한다.
이 작품은 인간을 추상적 존재로 사유하는 이성주의가 존재를 제거한다고 비판하는 반(反)이성주의 산물이랄 수 있다. 작가는 생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살과 뼈를 가진 사람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내밀한 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간이란 정신적 영혼의 존재라는 사변을 개 같은 수작, 위선이라고 보았던 듯하다. 존재를 의심케하는 예술의 소임을 다하는 작품이다. 이 의심 속에서 우리 인간은 삶의 의지를 더욱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비대해진 자아로 거들먹거리는 인간들로 얼마나 어지러운가?
존재의 소멸로 돌진케 하는 죽음의 사유없는 인간에겐 냉소의 소용돌이 외에는 없을 것이다. 메마른 감성이야말로 바로 존재를 부식시킨다. 오늘의 과학기술 최전선의 전사들은 뇌 스캔이 곧 동일한 자아라고 주장하며 인간 총체성으로서의 육체를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생의 열망을 소진시키고 육체로서의 존재는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이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만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반이성주의적 표방은 오늘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시금 주의 깊게 성찰케 한다. 소설에는 실로 많은 물음들과 대화가 있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과 출생에 대해서, 질투와 증오와 배신과 고통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또한 살과 뼈에 대해서. 이 한 편의 소설 혹은 스설에서 실로 다채로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의 사유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