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 - 에로스의 모든 것에 대한 고찰 서해클래식 20
플라톤 지음, 김영범 옮김 / 서해문집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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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구속하거나 추방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절제하고 방종에 빠지지 않는

 기술을쾌락의 활용이라 한다면, 스스로 온전히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기를

 배려하는 삶의 방식을  사랑이라 한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도덕적 윤리의 완고함 속에서 배타적 금욕과 육체의 향락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이 두 영역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삶은 곧 균열이 가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육체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허요, 영혼없는 맹목이기 십상이다. 한편 신체를 멸시하고 영혼의 존귀함만을 내세우던 서구 중세의 암흑처럼 정신과 영혼의 사랑에 매몰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삶의 사랑이란 바로 신체와 영혼 이 둘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이다.

 

인간 삶과 세계 모든 것을 면밀하게 뒤지며 철학체계를 정립하려한 플라톤의 철학이론인 대화편 중에서 이 책 향연(symposion)은 아름다움과 사랑의 본성을 사유하며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여러 대화중에서 이 철학담론을 함께 모여 먹고 마시다라는 뜻을 지닌 향연이라 명명한 까닭은 비극경연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가톤을 축하하기 위한 주연(酒宴)의 성격 이외에는 논의의 주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연설하는 방식의 전경과 한 침상에 두 명씩 비스듬히 기대 누워 수다를 벌이는 당대 향연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느끼는데 조력하는 것 같다. 여기에다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능의 실체 반영이라는 수사는 가당치않은 미사여구로 여겨진다. 민주주의 발달의 문화적 토양이기는커녕 폐쇄적이며 특권적 공간에서 벌이는 귀족과 지배엘리트의 항구적 지배와 담론 결속의 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포지온(symposion)의 구성은 도입부주제 연설마무리의 형식으로, 주제를 설정하는 자의 발의와 참석자들의 동의가 있고, 이어 전원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연설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소크라테스의 총합적인 결론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 마무리 이후에 만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뒤늦게 도착하여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조롱 섞인 찬양의 수다가 있는데, 당시 정치귀족으로 권력의 중추인물(참조:펠레폰네소스 전쟁사)이었던 자였기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1. 에로스(eros)에 대해서

 

대화자는 총 일곱 명이다. 이 중 마무리 연설자인 소크라테스와 불청객인 알키비아데스를 제외하면 다섯 명의 참석자가 중심테마인 에로스에 대한 연설을 한다. 이들 연설의 주요내용을 포함하여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가르침으로부터 아름다움의 이데아, 인간 삶의 불가피한 필연적 방식을 도출한다.

 

주제 제안을 하는 에릭시마코스의 발의에 소크라테스의 동의 수락의 변은 흥미롭다. 참석자에는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도 있는데, 두 사람의 경멸과 적의가 번뜩인다. 온통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에게만 관심을 쏟는 아리스토파네스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의 작품을 점잖게 조롱하는 소크라테스를 읽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의 위험스런 입을 지녔다고 자신의 작품에서 폄하하고 적의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하자면 진보의 소크라테스와 수구의 아리스토파네스가 대결하는 양상이다.

 

첫 연설자는 파이드로스로 논지는 에로스는 가장 오래된 자로서 가장 좋은 것들의 근원이며, 아름답게 살려는 사람을 훌륭하게 이끄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며, 사랑에서 나온 용기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함께 덕과 행복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라 주장한다. 에로스란 용기와 덕과 행복을 인간에게 견인해주는 신이라는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발언이다. 두 번째 연설자는 파우사니아스인데, 에로스는 하나가 아니라며 천상의 에로스와 범속의 에로스로 구분하여 이를 영혼과 육신의 에로스에 단순 대입하여 육체를 사랑하는 범속의 에로스로, 육체적 갈망의 절제와 지성을 좋아하는 천상의 에로스가 공존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는 비난받지 않을 단 하나인 훌륭함(arete; )’을 얻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만이 아름다운 것임을 역설한다. 덕을 얻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행위는 전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다시한번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대신하여 아리스토파네스를 유머러스하게 저속화시키고 있는데, 연설 차례가 돌아 온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로 제 순번에 연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경박함에 대한 공격일 것이다. 건너뛰어 의사인 에릭시마코스가 연설하게 되는데, 에로스를 의술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에로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속해있으며, 신체의 본성에 따라 에로스의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고 시작한다.

 

즉 건강한 신체와 병든 신체가 다르듯 닮지 않은 것은 욕망하는 대상도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란 신체에서 가장 적대적 요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친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대립되는 것 사이에 에로스를 가져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의술의 신이라는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에 일치를 집어넣어주는 시가(詩歌)술처럼, 욕망을 정확하게 다루는 절제와 올바름의 특징을 지닌 그 힘이 바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것들의 욕망을 연결해주는 절제와 올바름의 힘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세상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광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릭시마코스가 에로스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빈정대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자웅동성체까지 본디 세 개였으나 지금은 이 혼합형태가 사라지고 남녀의 두 성만 남게 되었다고, 신을 공격함으로써 분노한 신들에 의해 반으로 나뉜 존재만이 있는 것이라고 현재의 인간 존재를 설명한다. 때문에 나누어진 하나하나는 자기 자신이었던 반쪽을 갈망하고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즉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인 에로스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이란 인간 본성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연인들의 크고 깊은 즐거움인 성적결합인 육체적 욕망만이 아니라 온전함, 완전해지려는 영혼의 욕망이라 설명한다. 이 두 욕망의 이상적 상태에 다가가는 최선(最善)이 바로 에로스라는 것이다. 이 뻔한 얘기가 아리스토파네스에 할당된 것 또한 플라톤의 경멸 아니었을까? 지극히 우화적이고 진부한 상상력이지만 인간 욕망이라는 원초적 본성을 말하기에 이 자보다 적절한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연설 이전의 참석자로서 마지막 연설자인 주연의 주인공인 아가톤은 그 교만함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연설 시작 전에 한 방 먹는다. 아가톤은 오만방자한 말로 시작하는데,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이 다수의 무지한 사람들보다 훨씬 두렵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제가 극()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며 자신을 마치 소수의 지적인 사람으로 간주하며 다수의 대중은 무지하여 경멸할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대해 소크라테스는 자네가 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일반 사람들보다 더 존중하리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현자의 부류에 들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무지의 앎, 지성의 겸허를 넌지시 건넨다.

 

아가톤은 파이드로스의 연설에 동의를 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는데, 사랑에서 나온 용기인지, 사실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다만 앞선 연설자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좋은 것만을 얘기할 뿐 정작 신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음을 지적하며 에로스의 본성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실재(實在) 그 자체라는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담론으로 여겨진다. 에로스는 신 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정의하며, 그 이유로 그야말로 쏜살같이 늙음을 피해 달아나본성상 늙음을 혐오하는 가장 젊은 신이라는 것이며, 에로스가 신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후에야 신들 사이에 우정과 평화가 깃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젊고 섬세하며 물같이 유연하고 우아한 존재라고 설명한다. 특히 에로스는 쾌락과 욕망을 지배하기에 당연 에로스는 절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가톤은 다시금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데, 에로스는 어떤 것의 에로스라고 할만한 그런 자인가?”라는 물음이다. 이 말은 에로스는 사랑하는 그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부연하면 에로스가 욕망하고 사랑할 때 에로스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의 물음이다. 우리는 필요한 무언가를 욕망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이면 욕망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은 우리 인간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결국 곁에 있지 않은 것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 욕망과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결핍된 존재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결여되고 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출현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2.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다!

 

2-1.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제우스에게 명예를 얻은 여인이란 뜻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자(知者)임을 암시하는 허구적 인물이 소크라테스에게 가르친 지혜를 소크라테스가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에로스가 훌륭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추하거나 나쁜 것도 아니라고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옳은 의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디오티마는 이유를 갖지 않은 것은 앎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옳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무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있는 것에 닿아있으니 무지도 아니니 옳은 의견은 사리분별과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에로스는 훌륭함과 아름다움, 나쁜 것과 추함이라는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라 정리한다. 때문에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를 메워주고 우주자체를 결속하게 해주는 정령이라 말한다. 에로스의 존재론적 위치가 정의된 것이다.

 

이어서 에로스는 바다거품 속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날 신들의 잔치가 열린 날 메티스(수완의 신)의 아들 포로스(방법 또는 풍요의 신)가 넥타르에 취해 잠들자 궁핍에 시달리던 여인 페니아가 자신의 가난을 덜 계책으로 포로스와 동침함으로서 에로스가 출생하였다고 에로스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때문에 에로스는 어미를 닮아 충동적이고 열정적이며 결핍된 존재이자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생명을 반복하는 아비의 신적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얻기위해 계책을 꾸미고 앎을 갈망하여 얻는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한다. 즉 그는 지혜를 욕망하지 않기에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신도 아니요, 스스로 자기 앎에 만족하는 무지한 자의 지혜를 욕망하지 않는 사이의 중간자임이 증명된다.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로서 무지와 지혜의 중간에 있는 자이다. 여기서 다시금 물음이 발생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냐는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사실 언어를 통한 사고란 것이 인과적 논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 사고의 원칙을 맴도는 이러한 논리적 유추는 사실 거북하기 그지없다. 어쨌거나 플라톤은 좋은 것이 속하게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답변한다. 결국 행복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좋은 것을 소유하기 때문이고 이것이 에로스가 인간에게 쓸모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 해서 모두 애착을 갖는 것이 아니다. 팔다리가 손상되어 썩어들어 가면 자신의 것이지만 절단해서 폐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정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 이외에는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이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된다.

 

2-2. 사랑의 기능에 대해서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좋은 것과 함께 불멸성을 필연적으로 욕망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육체적으로 인간은 이를 생식과 출산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존재를 남김으로써 불사적 존재가 되려는 노력을 한다. 한편 영혼의 차원에서는 소위 영광스러운 평판이라는 불멸의 덕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있다. 파트로클로스를 따라 죽음을 무릅쓴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명예라는 불멸의 것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처럼 에로스는 가사(可死)적 존재인 인간의 불멸(不滅)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다.

 

육체적 생식과 출산은 이러한 측면에서 분명 아름답지만 디오티마는 영혼 속에 이러한 아름다움이 훨씬 더 많다고 알려준다. 영혼이 잉태하고 출산하기에 적합한 것은 바로 사려깊음과 탁월함이란 것이다. 이는 바로 창조성을 낳으며, 이는 곧 생의 질서인 절제와 올바름이며,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즉 에로스(사랑)의 기능이란 불멸을 향한 인간 욕망의 실현이라는 말이다. 이제 의식의 목표인 최고의 비의(秘意)에 이른다. 어떤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다른 사람의 육체의 아름다움과 자매이듯 단 하나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을 덜어주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것에 대한 직관의 열림이다.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인식에의 도달, 진정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데 이른다. 일시적이지 않으며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영원히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인식으로.

 

진짜 세계는 형상(이데아)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인 것처럼 보이거나 믿어지는 것이 마치 옳은 것,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감각적 경험에 기초한 상식의 세계란 그림자의 세계에 불과함을 역설하는 국가동굴의 우화에 대한 미학적 판본이랄 수 있다. 에를 들어 마네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림이 아름다운 성질을 지녀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구체적 존재의 아름다움이란 그 존재가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 개별적 아름다움이나 용기, 정의는 단지 상대적이고 가변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와 별도로 아름다움 그 자체, 용기 그 자체인 아름다움과 용기의 궁극적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향연은 바로 이 아름다움 그 자체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중심 논의로 전개한 대화(철학적)이다. 결국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점차 형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아름다움의 실재로 안내하는 사유이다. 아마도 감각적 경험의 세계를 형이상학적 실재의 세계와 일정한 상응관계를 맺게 한 플라톤 철학의 일면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인간의 이 본원적 매혹에 뒤얽혀 있는 근원에 대한 이들 사유를 읽다보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사람들에게 보다 열린 관용의 시선이 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한계인 궁극적 필멸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에로스는 불멸을 선사하는 정령이란 것을. 그 가련한 추구를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에게 어찌 연민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에로스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 그 육체적 정신적 결핍을 채워 줄 본질을 오늘 우리네 세계의 무지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하게 된다. 이제 영혼의 필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 대화인 파이돈으로 시선을 옮겨야겠다. 삶의 방식인 향연과 짝을 이루듯 죽음의 세계, 사자(死者)의 방식을 사유하는 또 다른 이데아의 판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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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커뮤니케이션 - 기술의 발전 예술의 몰락
기국간 지음 / 박영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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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수변 공원 조형설치물: 2023.09.20.촬영, 장소-선유교 하단

 


매일 걷는 산책로인 한강수변 공원에 20점 남짓한 새로운 미술 설치물을 발견하고 몇 점을 촬영했다. 아직 해당 설치물의 작가나 작품명, 간략한 설명문이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치 진행중인 것 같다. 아마 대중에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미술계와 지방정부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이 예술작품을 보고 관람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좌측의 은빛 조형물은 인체의 형상 같기도 하고, 우측 돌과 기하학적 조형물이 어울린 작품은 일단 감각 자체가 주춤거린다. 어쨌든 현대미술, 특히 현재를 같이 호흡하는 동시대 미술 작품인 이들은 그 해석을 그리 호락호락 열어주지 않는다.

 

다시말해 대상이 뜻하고자하는 모종의 지식이나 정서에 대한 감응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서울 아트페어가 열려 대중이 동시대미술 작품들을 접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현대미술을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들에 무수한 개인들에 의해 이미 영상과 함께 짧은 소감이나 견해들이 피력되고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 미술에 친화적이고 격의 없는 소통이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들 소통의 오피니언들은 전시된 작품들과 진정 감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해당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교환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고작 작가의 명성이나 도록 등의 설명 내용이나 기타 온라인 검색 정보가 아닌가? 이를테면 자신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감상이 아니라 권위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의 해석을 그저 수용하고 앵무새처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자기 감상이 아니라 타인의 글을 읽은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책은 이 지점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 특히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해석 불능 또는 이해의 포기라는 앎의 무능지대로 향한 오늘의 대중과 미술계를 반성적으로 비판하고 미술의 진정한 감상과 대중화를 모색하고 있다.

 

미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미술은 잘 모릅니다.

미술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미술을 사랑합니다.“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미술

 

요즈음 미디어 매체들에는 연일 그 어느 때보다 증가한 미술 관람자를 보도하며 동시대 미술이 부흥하고 있다며 자못 흥분된 기조의 말들을 뱉어내고 있다. 소위 MZ세대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의 신장이 미술계에도 한류의 열풍을 불게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미술이 이들 대중에게 그 감상의 문이 열려 있어 누구나 감응하며 창의적 해독이 가능함을 시사한다는 말인가? 그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않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술 전시관을 방문한 관람자들에게 전시 작품에 대해 묻거나 전시관 방문이유를 물으면 그네들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은 거의 동일하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왠지 마음이 위로되고 평안한 기분이 된다는 것이며, 자신이 미술은 모르지만 정서적 위안을 느낀다고 말이다. 사실 난해하기 그지없는 동시대미술은 비지각적 의미로 대체되어 있는 까닭에 본다는 시각적 속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왜 이러한 양상이 되었을까? 이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대두된 미술 이외의 미디어로 인한 전통적인 미술 방식, 즉 시각적 속성들로는 미술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술의 발전으로 인해 대상의 재현을 근간으로 하던 미술은 보는 것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즉 관념화된 비지각적 의미로 전환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미술은 관념화라는 외피를 두르고 형이상학적 철학, 사회학적 사유를 기입하여 전문가의 해석과 비평이 아니고서는 해독이 불가능한 예술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의 감상과 대중적 몰이해의 문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낱 미술의 역사를 외우고 타인의 해설을 읽어 예술을 알고 즐기는 것처럼 뻐기는 SNS활동이 되고만 오늘의 실상, 앎은 사라지고 미술에 대한 무지를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영역이 된 현대 미술의 근저에 자리잡은 보이지 않는 힘을 규명해보는 것이다. 미술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고, 이 알지 못함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게 되었냐는 것이다. 책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문화가 산업화되면서 예술의 탈신비화가 가속화되었음에 비롯됨을 아도르노, 벤야민의 이론을 오가며 복제화를 통한 아우라의 상실로 인한 예술의 민주화(대중화)를 비롯하여, 조작된 표준화로 인한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순응의 인도, 이러한 수동성으로 인한 실존적 안정과 정체성으로 주입되고 주류의식에 지배된 개성 상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소위 문화산업이란 것이 사유하는 주체를 배제하고 영원한 소비자를 만들어내어 개성이라는 가치를 물질적 가치로 전화하여 여기서 탄생한 사이비 개성으로 주체의 소멸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로인해 탄생하는 것이 바로 허위의식이란 것이다. 문화산업은 중산층이나 부르주아지의 형태와 흡사하게 문화생활환경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을 마치 이상적 민주사회에 사는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상위층 문화를 자신도 소비한다는 허위욕구에 몰입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숱하게 대중을 현혹하는 선전과 광고를 생각해보면 문화산업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계 속에는 일률적인 삶의 모델과 패턴이 있다. 표준화된 세계관으로 대중을 유인하여 계급의식을 둔화시키고 비판적 판단을 마비시켜버리는 것이다. 사회 내재적 저항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여 마찰없는 대중문화의 체제 도구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의 대중화라는 것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마르셀 뒤샹의 자기(磁器)변기인 <(fountain)>이나 전시관에 바나나 한 송이를 붙여놓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예술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흔해빠진 도기로 된 변기와 갈변하는 바나나 한 송이가 왜 미술 작품인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예술인가 비예술인가?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나? 허접하고 조악하며 악의적 조롱같은 이것이 고가의 미술작품이 되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미술은 보이는 것은 아무런 말도, 의미도 없으며 실제로 전해지는 것도 없다. 이것이 미술이 되는 것은 어디에 그 물건이 놓여있는가와 누가 그것을 미술이라 주장하는 가에 따라 미술과 비미술이 된다. 판단할 수 없으니 전문 비평가와 미술관과 같은 권위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실제 이것들에 대체 무슨 창의적 요소와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 결국 현대미술 나아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 생성은 오직 권위를 지닌 일군의 미술계 권력의 자의적 가치판단과 이에 편승한 자본의 결합이 부여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미술관은 막강한 권력이다. 미술관은 자신의 공간에 전시될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작품이라 불리는 것에 예술의 딱지를 붙인다. 이때 미술관은 미술비평가와 함께 한 송이 바나나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니 알아낼 수 없는 절대적 희소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하지 않는 지식을 포장하여 대중의 무지를 견고히 한다. 이로서 앎을 추구할 수 도 없으며, 추구하지 못하는 절대적 수동적 무지로 대중을 이끌어댄다.

 

다시말해 가치판단의 기준이 부재하여 비판이 불가능한 소수만이 독점하는 고급문화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알 수 없고 모르니 신비한 고급 예술이 되는 것이다. 미술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화 된 미술계는 매체를 이용하여 대중화를 유도하여 친근한 문화상품의 이미지로 다가서지만 결코 자신들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은 불허한다. 결코 대중이 이 비밀, 이 신비에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판단과 가치와 가격의 설정을 독점하기 위해 이같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밀실 심판을 통해 대중의 무지는 절대 필요인 것이다. 대중은 고작 이들이 짜깁기하여 만들어 낸 정보와 지식의 테두리 속에서 제한된 앎의 기회를 받으며 허위의식을 충족시킨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권력화되고 수동적 무지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들의 지배적 의도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대중에 대한 지배적 힘을 보이지 않게 행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비판이 불허되는 오늘의 미술은 오직 예술을 선택하고 가치를 결정하는 미술계 권력의 선택만이 작동함으로써 고도로 세련된 이들의 지배 메커니즘에 굴종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피지배 계급들에게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지배를 견고하게 확립한다. 대중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해석과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동시대미술이란 것이 관람자 자신과 작가의 세계를 이어주고 이해하는 창의에서 시작되어야 함에 대한 자각이다. 유럽의 미학의 역사를 여기저기 주워모아 짜깁기된 미학지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설명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직접의 소통에 다가가려는 창의적 사유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술은 남이 발견한 것이거나 이미 해결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과거지향적, 종속적, 피지배적 지식을 앎이라고 치부하며 수동적 무지를 자랑하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그야말로 더러운 권력의 세계가 되고 말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미술계가 설정한 독법에 휘말려 그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의 가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은 되돌아보는 것이 이성적 판단이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지적 도전에 나서야 하며, 또한 새로운 언어의 필요를 위해 모두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 요구된 수동적 무지를 계속 고집스레 주장하는 것은 대중이나 권력화된 미술계에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미술계가 이렇게 폐쇄되고 집단화, 조직화되면 필히 썩은 내 풍기며 그 악취를 은페하기 위해 더욱 권력화되고 폭력화 될 것 이다.

 

깜깜한 무지 속에서 최소한 예술을 즐기는 허위의식, 사이비 개성에 도취되어 교양인으로 포장하는 미술커뮤니케이션의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술계를 위해서? 대중 자신들을 위해서? 무지를 뽐내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이다. 수치를 당연시하면 굴종의 세계가 펼쳐진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기 무지의 발견은 불안할 것이다. 불안함을 이겨내는 힘을 갖추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터, 바로 이 용기와 모험이 곧 창의적 예술 활동의 시작임을 새겨야 할 것 같다. 다음의 구절로 소회를 맺는다. 예술은 도전이다. 아니 모든 지적 활동은 도전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에 응결된 문제점과 대중화 마케팅과 관련한 미술 커뮤니케이션에 내재된 문제 규명과 창의적 미래를 위한 모색의 시의적 평설이다. 명료한 언어를 통해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탁견(卓見)의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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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글 상단의 조형물 사진 설명

-이 설명 글은 수변공원 설치물 옆에 놓인 설명글을 간략하게 옮겨 적은 것이다. 자신의 해석 혹은 비평과 견주어 보는 것도 창의적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좌측 은빛 조형물: 'The secret of Existence(존재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스테인레스스틸 재료로 2021년 제작, 작가 이윤복 - 망치질, 용접, 그리도 또 망치질과 숱한 사포질을 통해 이음새 없는 매끈한 유기적 덩어리인 작품으로 탄생한다. 수많은 노동시간을 견뎌온 몸과 영혼을 치유의 강에서 씻겨온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2)우측 조형물: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제목의 박지선 작가의 작품, 2021, 스테인레스 스틸, 자연석 제작 -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적층되고 구르고 굴러 단단해지는 자연석의 형성과정을 통해 개인에서부터 가족, 사회 등 다양한 층위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의 유사를 은유함, 네모 유닛은 가족이나 공동체가 머무는 장소를 단순화시킨 것으로 개인, 가정, 집단을 상징하며, 장소들에 의해 지탱된 자연석의 모습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 온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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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 거짓의 쇠락 위대한 생각 시리즈 10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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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존재하는 사상과 물질, 제도와 질서 등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익숙한 것들에 대한 혐오, 이러한 것들로부터 탈주하려고 지난한 몸부림을 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도덕적 위선으로 가면을 쓴 귀족들과 유산계급의 사치와 허영이 휩쓸어대던 빅토리아 시대는 가히 구역질나는 것이었을 게다. 때문에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오스카와일드의 문학세계는 아마 온통 이러한 기성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름과 새로움의 창조를 향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세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예술 에세이네 편은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의 하나는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예술지상주의의 주창이고, 또다른 하나는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 삶을 더없이 완벽하고 충만하게 꽃피우기 위한 자유로운 자기실현인 에고티즘(egotism)의 독특한 '개인주의의 추구'이다. 전자는 에세이 거짓의 쇠락: 항의에서, 후자는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거짓의 쇠락은 작가 스스로가 대화체로 쓴 나의 최초이자 최고의 글이라고 평했던 글이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심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문학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술지상을 형식으로 두르고 기성의 사실이라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시 예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인 고작 자연과 삶의 현실세계를 묘사하는데 치중하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는 그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는 곧 질서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지배질서를 답습하는 것에 대한 지극한 회의와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던 사회질서, 즉 체제내적 순응 세계의 주입에 참여했던 고전 동화들 -샤를 페로, 그림형제, 안데르센 - 에 대한 저항을 위해 동화를 창작했던 일군의 작가들에 대한 전환적 노력을 보기 위함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만큼 당대의 뛰어난 동화 작가이기도 했다. 바로 그의 동화들의 정신을 담고 있는 글이 바로 거짓의 쇠락: 항의이다. 또한 이 글은 대표작인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전반부를 흐르는 삶이 모방하는 예술,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강렬한 논고이기도 하다.

 

1. 예술지상주의 미학에 대해서

 

여기서 거짓의 의미는 예술에 있어서의 거짓말이다. 모든 걸 자연과 삶속에서 직접 캐내기를 고집해 허구를 가장해 지루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고작 유용성의 문학이 예술을 메마르게 하고,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의 본질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음에 대한 역설로서의 거짓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다가 현실성을 박탈해버리는 비예술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다. 태양이 언제나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발상의 예술은 죽은 생각들이란 것이다. 그는 에밀 졸라와 기 드 모파상을 천재는 재치라고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고결한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천재성은 없어도 적어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보여준 소설가라 비난한다.

 

그들의 작품은 윤리적 관점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진실하며 정확하지만 와일드는 이들의 분노에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선언하며, 문학은 과학적 사실의 증명이 아니라 차별성, 아름다움, 상상력, 매력을 축으로 하는 거짓, 다름과 새로움의 세계 창조를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다.

 

헤카베의 슬픔이 비극의 훌륭한 모티브가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녀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인 거야.”  -41

 

이 문장은 어떤 것이 유용하거나 필요한 한, 또는 고통이나 기쁨 그 어느 쪽으로 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의 공감을 강력하게 호소하는 한, 또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예술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다시 읽으면 예술의 목적은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다양한 아름다움의 추구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현존 질서의 언어를 가지고 그 사실만을 맴도는 문학의 체제 내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때문에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를 탐미주의로 한정하여 쾌락주의 문학으로 폄훼하는 독서는 심한 오독이 되고 만다. 그는 도덕주의의 위선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문학을 지향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 유토피아, 이상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는 지독한 저항 문학이 된다.

 

그는 문학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전적으로 완벽한 거짓 세계를 펼쳐보임으로써 삶의 진실을 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예술은 삶의 거울이 아니고 베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처럼 베일 뒤에 숨겨진 알지 못하는 숲과 꽃들, 그 어떤 삼림도 갖지 못한 새들을 상상해내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술이 실재이고 삶은 거울일 뿐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하나의 유형을 창조해내면 삶은 그것을 모방하고 대중적 형태로 재생산한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그의 작품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도리언이 탄생한다. 삶은 예술의 유일하고도 가장 훌륭한 제자가 됨으로써.

 

거짓의 쇠락에 대한 이 강력한 저항의 이유들은 아름다고 불가능한 것들,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해야만 것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거짓말의 기술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 된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상상의 세계, 그 거짓의 세계야말로 진정 도달해야 할 진실의 세계일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예술은 현실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만을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며, 살고 있는 시대만 빼고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를 포기하는 순간 형편없는 예술, 즉 삶과 자연의 구렁텅이를 맴돌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목표는 삶에 에너지를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형식을 제공하는 의식적 자기표현이어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오스카 와일드가 도달한 예술지상주의 미학이다.

 


2. 개인주의 에고티즘,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문학적 유토피아를 향한 야심찬 평설인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은 자유로운 개성이 펼쳐지는 세상, 곧 그 새로운 세계의 입구에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가 나 자신을 알라를 대체한 곳, 가장 강력한 개성의 발현인 예술이 있는 장소를 말한다. 자신을 둘러싼 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완벽성과 가치를 드높이는 에고티즘의 세계이다. 개인주의의 특수한 에고티즘과 에고이즘(이기주의)을 구별하기 위해 이기주의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기 바라는 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것, 즉 자기 욕구의 실현을 위해 다른 이들의 수용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와달리 에고티즘(개인주의)이란 다른 사람들의 간섭과 침해를 배제하고 무한한 다양성을 인식하며 자기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아가 완벽히 구현되는 세계로서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이나 산업독재가 배제된 자기 개성의 완전 발현이 보장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기획하고 있다. 이로써만이 개인주의, 삶을 더없이 완벽히 충만하게 꽃피우는 세상이 열릴 수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 등 지식 엘리트 계층과 축적된 충분한 부를 향유하는 자산계층은 자아실현을 부분적이나마 누리고 산다. 그러나 많은 다수의 사람들은 가축처럼 일해야 빈곤의 모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계층에게는 사실 자아실현이니 개성의 발현이니 하는 말들이 한낱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에고티즘의 세계를 향유 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와일드는 거대한 정치 기획으로서 사회주의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삶인 곳, 개성이 제약없이 만발하는 시공으로서 사회주의이다. 어떤 주류의 지배질서가 있어 불복종과 반항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곳, 인간의 소유물이 인간의 개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존재보다 소유가 중시되는 곳이 아닌 곳, 따라서 지겹게 재산을 축적하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 세계는 어떤가? 세상은 온통 권력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있다. 지배질서의 역겨운 야만성이 가득 차 있는 세계이다. 때문에 이를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성의 실현, 개인주의는 용납되지 않으며, 인간 삶을 심하게 격하시키고 있다.

 

이러한 말이 있다. 최악의 노예주는 자신의 노예들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이다.’ 이럴 때 노예로서 고통받는 인간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제도적 문제점을 고찰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하려는 인간이 가장 유해한 인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애완동물처럼 천박한 안락함에 길들여져 한 순간도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 소외이고 예술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와일드는 이러한 압박과 제약, 즉 예술의 자기실현을 훼방하고 개인의 개성 발휘를 못마땅해 하는 권력에 대해 몸서리를 친다. 독재 또는 과두제에 의한 국가권력, 그리고 사회통념과 편견에 매몰되어있는 우중으로서의 대중 권력을 지적하면서 예술은 결코 대중적이고자 해서는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역설적 조롱의 언어는 대중의 관심을 벗어나는 것이 예술임을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예일 것이다. 대중의 관심을 벗어나 대중이 읽지 않음으로써 가장 훌륭한 예술이 된 시()야말로 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들의 저속하고 무지한 통속성으로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에 공개되자 아주 이해하기 쉽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작품으로 인정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삼류거나 예술적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보아야 한다는 경고처럼 권력화된 질서는 개성과 개인주의를 억압하여 예술이 들어설 기회를 차단한다.

 

저속함과 어리석음은 현대적 삶에서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한다. 결국 오늘날의 예술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많은 것들이 대중이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 생각된 것들이다. 있는 것을 조작, 변형하여 유행에 따라 포장된 것이니 지극히 진부하고 불건전하며 지각없고 심미성이 결여된 것들이 난무한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권력화되어 무지를 조장하고 무능과 부패를 은폐한다. 상상력, 창의가 넘치는 개성, 새로운 세계를 위한 거짓의 세계가 실종되어 존재하는 것만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이상을 향한 모험과 도전은 위험하고 불순한 것으로 매도되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기존에 없었던 예술로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이 예술 비평은 삶의 가치에 대해서, 개성과 에고티즘(개인주의)의 자유로운 발현을 위한 세계의 창안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세계의 필요인 예술의 의미에 대한 다채로운 영감을 제공한다. 그러함에도 인간 삶의 형식은 끊임없이 변화해왔기에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수용할 여지가 있는 글이기도 하다. 자선, 동정심, 박애에 대한 이타적 충동이 설혹 개인주의의 발현, 개성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귀족적 이유로 비난당하는 것처럼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다.

 

물론 와일드는 이러한 사회의 음지에 대한 외면과 무시에 입각한 자신의 믿음을 후일 반성하기도 했으며, 그것은 그의 동화 작품들을 통해 변화 반영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예술비평 에세이들은 단지 와일드라는 작가와 작품의 이해뿐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성의 질서를 탈주하려는 위대한 이상을 향한 염원이기도 하다. 혹여 지금까지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에 대해 잘못된 이해와 왜곡을 가하지 않았는지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 그의 동화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려 한다. 안일하고 획일적 상식의 세계로 아이들과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려했던 고전 동화의 추오를 어떻게 이탈하여 전환하려 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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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두 얼굴 - 조선의 권력자들이 전하는 예와 도의 헤게모니 전략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4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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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믿음과 생각의 경향성에 있어 개인의 불가피한 지적 역량과 행위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알지 못하니 그 앎에 대해 생각도 행위도 할 수 없으며, 고작 좁쌀만 한 알량한 것에 의지해 자기 삶의 지평이 의존 될 도리밖에 없게 된다. 이는 수동성을 낳고 남이 부과한대로 주입한대로 순응하는 삶,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사회의 주류의식이며 지배의식이 가리키는 것만을 바라보며, 그 가리킴으로 은폐된 것, 실재(實在)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의 형상이라고 우겨댄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이 의심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주체에게는 바로 앎이란 것, 의심하고 사유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다. 통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주류의식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를, 그 무엇을 알아야 하나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며, 비로소 판단이라는 것에 이르러 어떤 숙고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 여전히 남아 문화유산이라는 광휘(光輝)를 발하는 축조물과 건축물들은 우아함이나 장려함과 같은 그 예술적 미로 찬양되곤 한다. 이 책은 조선조의 왕릉과 궁궐, 성벽, 그리고 서원과 사찰의 유산적 가치라는 이면에 가려진 사상과 이념, 권력의 욕망을 보게 함으로써 빛으로서의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를 정면에서 직시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들 유산에 서린 아픔을 보듬을 때 이 세상에 대한 더 넒은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물론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인간들이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게 공부를 말해 무엇 하겠는가.


【 247쪽 부분 발췌


이 인용 글은 이미 병자년 전쟁이 한참이나 지난 효종조에 남한산성 성벽 축조에 대한 대신의 항소 내용이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고통스런 공역의 중지를 요청하는 글이다. 오늘날 우리네가 유흥을 위해 찾는 그 남한산성의 성벽 증축 및 보수공사다. 이 공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백성인가? 아니다,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 한 오직 왕과 그 일족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을 비롯한 건축물이란 백성의 땀과 피눈물의 소산이지 어느 왕이나 대신의 노고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축조물 및 건축물은 그 조성으로 얻고자 하는 목적이 숨어있다. 그것은 위세와 존엄, 통치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제이자, 권력행사를 순조롭게 하는 지배전략으로서의 욕망, 권력이 복종시키고자 하는 순응의 요구이며 자신의 안락을 위한 장치다. 결국 지배층의 욕망충족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릉, 궁궐은 오늘 우리들에게 자부심이기만 한 건가?

 

조선 시대에 조영된 왕과 왕비의 능이 44기인데, 북한에 있는 2, 광해군과 연산군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있다. 등재 이유는 살아있는 유교문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살아있다는 유교규범과 풍수지리 사상이 어우러진 건축미와 조경(造景)미가 왕과 왕비 능의 존재 보전 의미 전부인가? 그저 그 예술성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연 자부심의 대상이기만 한 것인가?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역 선정이 필요하며, 그 영역 내에 있던 기존의 집과 묘는 모조리 철거 이전해야 한다. 또한 능역은 능을 중심으로 사방 500보라는 광활한 조성 구역이 필요했으며, 이는 목재와 기타 식물을 생존 수단으로 삼던 곤궁한 백성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능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과 소요 물질이 백성에게 전가되었으며, 능을 경계하는 수호군이라는 신역(身役)을 져야했으며, 능 관리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능은 왕과 지배세력의 권력 과시 도구이자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으며, 정례적 제례와 규범화된 의례를 통해 권력자에 대한 숭배와 자발적 복종을 체화시켜 지배정당화를 강요하는 공간이었다.

 

지배 권력을 위해 공역을 부담하고 생존을 위협당하면서 게다가 자기훈육까지 당해야하는 참담함의 형상이 바로 왕릉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상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빛 뒤에는 그림자가 있음을. 그 그림자를 외면하는 역사는 올바른 역사가 아니다. 소수의 지배층을 위해 다수의 백성이 신음해야했던 철저한 신분제 사회 조선의 음영이, 그 슬픔이 간직된 것이다. 문화유산임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은폐된 그 실재의 의미까지 아울러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와 유교 논리를 통해 정치적 세력 다툼의 재료로 왕릉은 줄 곧 이용되어 빈번하게 능을 옮기는 천릉(遷陵)과 많은 인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왕의 능행까지 백성의 부담과 고통은 늘 가중되었다. 한편 궁궐의 건설은 조선조 내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조선조 개국으로 인한 한양 천도로부터 시작된 궁궐 공사는 조선조가 망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저자는 조선 궁궐에 대한 오늘의 주류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자연과 어울림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포스모던적 어울림이라 했으며, 한국학자 최준식은 창덕궁을 꽉 짜인 질서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구도를 좋아하고 대칭적인 것보다 다양하고 비균제적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 작동한 것이라 했고, 미술사학자 최순우 는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한국인의 성정과 솜씨를 가늠하며, 실질미와 단순미를 지닌 한국의 멋이라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이들 모두에서 한결같이 자연이나 심성이라는 인식 틀만을 갖다대는 것을 본다. 조선의 궁궐을 바라보며 이 외에 다른 해석개념은 마치 없다는 듯 말하는 이들을 점잖게 비판하는 것 같다.

 

한글 창제로 백성에게 글을 준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세종의 경우를 보자. 모든 임금이 궁궐 증개축과 보수, 더불어 이궁의 신축까지 궁궐공사를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왜 그러했을까? 이것은 곧 왕권강화와 관료의 위계질서 확립, 즉 지배제체 강화를 의미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를 둘러싼 왕과 지배층의 힘겨루기와 지배계급 간의 정치 세력 다툼이 그친 적이 없다. 세종은 경복궁 강녕전, 경회루, 남대문 토축공사, 물시계 조성공사 등등 수많은 공역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재와 홍수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의 피해가 커 공사시기를 재고해달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세종은 이를 무시하고 백성들의 공역을 가속화했다. 그에게는 왕권의 신성화와 위계라는 계급적 질서의 강고화를 통한 권력의 항구적 안정화가 중요했지 백성의 삶이란 그의 유교질서에 자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분별과 차등, 위계에 따른 역할과 책임 의식 고취를 위한 궁궐의 배치, 세부적 장식, 극히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사전 연습의 시행은 물론 예규로 정해놓기까지 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이라는 물시계 또한 궁궐에 설치한 것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며, 만백성의 일상행위를 제한하는 장치(세종실록 77, 1437628)로 삼았음을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는 행동에 동시성을 부여하여 일사불란한 사회질서 유지를 통해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왕의 욕망의 실현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파의 온상이자, 착취 도구로서 성곽과 서원, 향교

 

성곽 건설과 증개축 및 보수 공사는 그렇다면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위한 방어전략을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을까? 조선은 엄격하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교의 인()과 덕()은 명분을 위해 소용되었지 정작 백성을 위한 덕목이었던 적이 없다, 단지 예를 실현하기 위한, 즉 지배계급에 복종하기 위한 순응성을 위한 가치였을 뿐이다. 차별과 특권으로부터 백성을 분리하기 위한 덕목.

 

서울 성곽은 지배계급과 그 가솔, 그리고 성곽 내의 이들 지배계급의 일상생활이 가능케 하는 모든 노동과 생산자인 백성은 성곽 외로 나누어져 있었다. 실제 성곽은 5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으며, 여타 방어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즉 신분의 차별을 위한 분리 책략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 분리 장벽에 내몰려 국가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이들 성곽 밖 백성들의 공역으로 축조되고 유지 보수된 것이다. 이 기괴함, 착취적 행위의 산물임을 오늘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지방의 성곽이란 정치 세력간 다툼의 지대였다. 군사를 배치하여 자기 당파의 세력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곽이 축조되었다. 남한산성 외성의 축조와 관련한 치열한 당파 싸움의 실상이 고스란히 실록에 전해져오고 있다. 조선조의 성곽들에 서린 그 천박한 양반무리들의 이전투구와 백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일제가 조선 병탄 전후하여 성곽 철거와 궁궐의 훼손에 나선 것은 곧 조선 왕조와 지배계급의 권위라는 지배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백성의 심신에 각인된 그 오래된 존엄과 숭배의 상징을 해체한 것이다.

 

1907년 일본은 숭례문 좌우 성벽 철거를 시작으로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경복궁을 훼손, 파괴하고, 궁중 의례와 제도를 파기했다. 오늘 한국의 총리는 당시 일제가 적국이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며 이들의 침략 역사에 대한 실제를 회피하기까지 한다. 궁궐과 성곽이 왕의 존엄성을 해쳐서가 아니라 백성의 고혈이 쌓아올린 민족의 유산이기에 분노하는 것이다. 일본은 궁궐의 헐린 전각과 초석, 댓돌을 연못 조성에 써버리거나 경매에 넘겨 일국의 얼을 조롱했다. 이렇듯 건축 및 축조물은 인간의 정신을 길들이고 지배자가 요구하는 질서에 순응케 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 더해 소수의 지배계급에 무한히 착취당하여야만 했던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있다.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의문이 있다. 1907년 일본인으로 구성된 성벽처리위원회의 주도하에 서울의 성곽과 그 출입구인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 혜화문(동소문)등 빠짐없이 모두 철거되었음에도 일제가 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남겨두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는 300년을 거슬러 1592년 임진년 왜군이 서울을 함락을 위해 입성한 곳이 이 두 개의 문이었기에 승전문이라는 유래를 지녔다는 것이다. 침략자인 일제에게는 전승 기념물로 보존할 역사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문경 조령의 관문, 전주 풍남문 등이 남았다. 철거된 성벽재는 신작로와 철도 바닥 다지기 재료로 소모되었다. 우리의 유산은 이렇게 일제에 의해 파괴, 유린되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정신과 물질적 유산을 철저하게 파괴한 적을 적이라고 하지 않는 세칭 친일파라는 인간들이 오늘 한국인의 정신을 다시금 유린하고 있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이황이 지은 서당을 모태로 안동과 예안 지역민이 주도해 건립, 305쪽에서


아마 저 산간벽지와 촌락의 백성에게까지 성리학이라는 유교적 질서, 즉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분리 차별책을 강요하고 착취하는 권력의 끝판 왕이라 할 서원과 향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설립한 영남 사림의 본산인 도산서원은 오늘에도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서원이 지방 교육기관의 기능을 가지고 사회규범과 생활전반을 규율하는 유교화 진행의 첨병 역할을 했음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들 서원은 백성을 착취하는 세력들의 단체로 그 악명을 떨쳤는데, 1920년의 서원철폐 운동이 대두된 것은 이들이 소작인을 비롯한 인근 백성을 얼마나 심하게 착취했는가의 반증적 사건일 것이다.

 

이들 서원에 소속된 유림은 군역 면피는 물론 잡역까지 면제받았다. 특히 이들 유림은 대지주 양반들로 구성되어 지배층의 이익을 담보하는 착취기구이자 일종의 권력기관으로 행세했다. 인근 사찰과 점촌(店村)의 예속을 통해 경제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서원세력은 확보된 재력으로 고리대 놀이를 함으로써 더욱 백성의 삶을 핍박했다. 이황조차 이 식리(殖利)를 서원 재정 확보 수단으로 인정했을 정도이니 사대부 계급이 백성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었는지, 그 골 깊은 신분 차별책의 사악함을 볼 수 있다. 일제하에 서원 세력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참가하여 총독부 정책에 적극 부응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총독부 정책 보조 선전도구 역할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오늘 우리들은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학문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원을 찾으며 옛 선조의 고상한 취향을 칭송한다. 그러나 이들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문화유산이 된 것은 그리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조선조에는 지배권력의 착취기구였으며, 일제식민체제에서는 적국의 부역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역사 아닌가? 민족을 착취하고 배신함으로써 문화유산이 되어 그 고유의 사적(史的) ()로 후손들의 내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맺으며 - 차가운 이성을 위해서

 

저자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서원을 두고 장식을 멀리한 엄숙한 건축물이라 평가하며, 인공물과 자연과의 흔쾌한 조화미를 칭송한다. 그러나 자기 당파의 위상을 높이고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지배권력의 파당적 공작공간이었으며, 농민을 압박하고 관권을 대행하여 권세가로 주민을 통제하는 파렴치한 이익기구이자 권력기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조선조의 건축물, 축조물들은 조선의 지극히 철저한 신분제 질서를 위한 상징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내부의 설계와 배치에서부터 그것들의 경영에 소용되는 각종 의례와 제도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분리라는 위계질서의 장치였다.

 

"시각질서와 제국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로마의 판테온도

남자들과 여자들로 하여금 보고 믿고 복종하게 하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리처드 세넷 著, 살과 돌 (Flesh and Stone)』, 문학동네刊


한결같이 이들은 백성들의 눈물과 땀이 밴 노역과 물질적 공역에 의존한 산물들이다. 양반과 왕가는 결코 이러한 산물을 위해 어떠한 공여도 한 것이 없다. 오직 착취만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오늘 남아 전해지는 문화유산이라는 것들의 많은 것들이 불의를 통해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맺는말에서 유려한 문장으로 반추할 문장을 남기고 있다. 산세 그윽한 저 왕릉은 누구를 위해 그리도 오래 엄숙했는지 눈 시리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문화유산에 배어있는 아프고 쓰라린 민초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오롯이 그것을 우리들의 것으로 품어낼 수 있을 때 그 유산은 정말 우리들의 얼과 혼으로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조선 시대의 왕릉과 궁궐, 읍치와 성곽, 서원과 향교 등이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분우위와 특권행사의 근거를 마련하던 지배전략의 산물이었음을, 양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본거지로서 기획된 진지였음을 알게 된다. 지배이념 주입과 순치의 전진기지였음을.” 이처럼 이들 유적이 전하는 어두운 이면이 비록 암울하고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들의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 양면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그 유산의 역사적 의미는 보다 견고해지리라는 앎의 믿음이다. 그저 감탄하고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 피땀의 무덤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오늘 권력을 지닌 자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고 무엇을 주입하려하는지를, 또한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차디찬 이성으로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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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창백한 손으로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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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반성보다 자기 합리화를, 고통보다는 안락과 포만감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뇌는 (자기 생존에 불리한)기억을 삼켜버린다.”

- 67쪽에서

 

소설의 문을 열기 전에 거치는 것이 유익한 읽기가 있다. 이 책에는 별책 부록으로  짧은 소설 낙원의 기억이 있는데, 15년 전 만우절 학생주임의 티코 자동차를 엉뚱한 곳에 옮겨놓고 골탕 먹였던 기억의 장면들이다. 이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이 이어진다. 적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에 한해서

 

그리고 본 작품인 낙원은 창백한 손으로의 프롤로그에는 삽을 들어올려 고통을 끝내주겠다고 선한 마음으로 머리를 다시 한번 내리찍는 남자의 정제되고 효율화된 행동이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소설을 읽기 위한 워밍업이다. 두뇌 엔진이 충분히 가열되었으니 드디어 시작된다. 새해 첫날 변호사 차도진은 의문의 쪽지를 받는다. 선양 경찰서에 체포된 용의자의 변호를 맡을 것. 만일 그러지 않을 경우 15년 전 그날의 일을 낱낱이 밝히겠다....”

 

지역에서 명망과 보이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던 에덴종합병원 원장 차요한의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위해 서울청에서 파견된 정호연 경위는 용의자로 지목된 간호사를 취조하던 중 불시에 들이닥친 용의자의 선임 변호사라는 차도진과 마주하게 된다. 차도진은 자신이 변호하는 사건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아버지인 차요한의 피살 사건임을 뒤늦게 인지하게 된 차도진은 당혹감과 함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된다. 사건은 15년 전, 차도진이 자신의 기억에서 지운 어떤 사건의 진실로 향하게 된다.

 

폐광되면서 돈과 가족마저 잃은 은퇴한 광부들이 우글대는 곳, 이들은 오랜 질병인 폐결핵과 함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차요한은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사회의 주변으로 배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그 어떤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을 무수한 이들 은퇴광부들을 이용해 신약 개발의 실험도구로 이용한다. 차요한은 주장한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니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한 거다.”, 즉 신약개발을 위한 실험 도구로 이용되어 그 부작용으로 신체의 근육과 뼈가 뒤틀리고 부러져 사망하는 것은 소위 의학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당하며, 희생자들은 의미있는 죽음을 가진 것이니 영예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텍쥐베리가 자신의 소설 야간비행을 통해 인도적인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내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위대해 진다.’라는 인간의 독자성과 생명윤리를 문명의 위대성과 맞 바꾸어 영웅적 행동이라며 공리주의적 셈법을 들이대는 그 터무니없이 기만적인 문장이 떠오른다. 이렇다 할 야간 비행을 위한 기술적 수단도 없이 오직 조종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시행착오를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야간 조종술과 항공로의 개척이라는 목적을 위대한’ ‘인간 본연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는 그 메마른 비윤리성을. 류의 진보라는 대의(?)를 위해 인간 개개인의 생명은 그것의 수단으로 소용될 수 있다는 인간 도구화의 이 주장은 악의 기괴한 미화 아닌가?

 


이 악덕은 또 다른 악덕으로 순환한다. 1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차요한의 아들 차도진은 에덴병원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시체들이 즐비하게 싸여있다는 장소에 숨어들고 두 친구는 홀린 듯 살아있는 사람을 끌고가 소각시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 학생은 두려움과 친구 차도진을 위해 본 것에 대해 입을 다문다. 인간이 한 개인의 야심을 위해 한낱 실험도구로 사라지는 현실이 정당화되는 세계, 여기서부터 모든 것은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가면 뒤에 숨겨진 흉측한 본색, 아이는 절망하고 방황한다.

 

생텍쥐베리식() 대의에 굴종된 세계, 경찰도 학교도, 그 세계의 모든 어른들도 불의에 협력하거나 방관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에 열중한다. 실의로 절망한 소년 차도진은 실험용 주사액을 자신에게 주입하지만 극단의 환각과 폭력상태에서 차요한의 환상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 실제의 대상은 다른 이였다. 선양지역의 실질적 권력자에 빌붙어 부정한 돈을 챙기는 경찰은 범죄를 둔갑시켜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다. 가난한 약자의 아들은 친구들의 거짓 증언과 조작된 증거에 희생되는 것이다. 그 위대한 대의라는 인간도구화의 악덕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살해하며, 공권력과 결탁하여 법()망까지 무력화한다. 악은 이렇게 또 다른 악으로 순회한다.

 

15년 전 사건의 진실 속으로, 그 끔찍하게 부도덕한 생체 실험의 세계와, 권위와 재화에 종속되어 불의가 정당화되는 현실을 파들어 간다. 한편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바쁜 부패한 선양 경찰을 피해 본청에서 파견된 민완 여수사관 정호연은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새로 부임한 선양경찰서장의 피살, 에덴병원 간호사의 죽음 등 연쇄적인 살인이 이어지며, 사라진 도진의 15년 전 친구들과 유력한 용의자의 인상을 주는 인물들을 통해 소설의 미스터리적 구성미를 강화하며 강렬한 흥미로 독자를 몰아넣는다. 차요한의 살해자를 추적하는 현재의 수사 이야기와 현재의 범죄를 초래한 15년 전 진실의 이야기가 미로처럼 얽혀들며 핏빛으로 물든 농장 낙원에 이르게 된다. 나약한 짐승은 결국 강자의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그 주장이 과연 이 세계를 어떻게 지옥으로 추락시키는지의 또 하나의 강력한 이야기다. 물을 마시다 죽게 될 걸 알아차린 사슴의 눈에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로 세상이 들어차게 된다면 인류의 존속은 아마 불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자기 안락과 이익을 위해 기억을 삼켜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악의 고리를 자르고, 그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또 다른 악이 실행되어야 하는 이 세계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작가의 전작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스릴러 판본이라면 곡해일까? 전작에서 말한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대가로 빚을 가리고 이득을 보는 도시, 그들의 실패와 죽음을 연료로 휘황하게 빛나는 도시가 바로 선양일 것이다. 선양!,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도시와 인간들의 이야기다. 비윤리와 비굴함, 불의한 권위와 부패한 권력, 악의 처단을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요구하는 악이 순환하는 세계.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 작품이지만 함의하는 무게는 꽤 묵직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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