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1 : 홀로서기 - 1일 10분, 술술 읽히는 이야기 교양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 1
박선영 외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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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I / 한빛비즈 147번째 리뷰] 2018년 <퇴근길 인문학 수업>(한빛비즈)이 출간되면서 이른바 '지식쌓기 열풍'이 불었더랬다. 솔직히 책 한 권 읽어서 얼마나 대단한 지식을 쌓겠느냐는 의문도 들었겠지만 '한 꼭지'에 담아 놓은 지식의 내용이 '백과사전적 지식'을 압축한 내용이 아닌 '트랜드'에 딱 맞아떨어지는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요즘 이슈'에 관해서 전문석학들의 고뇌로 씨줄과 날줄로 짜서 엮어놓은 책이었기 때문에 퇴근길 지하철에서 무심히 펼쳐 읽다가 목적지를 지나칠 정도로 깊은 몰입감을 던져준 책이었다. 그런데 2020년을 마지막으로 <퇴근길 인문학 수업>을 접할 수가 없었는데, 다시 그 감동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이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월화수목금에 맞춰 '다섯 꼭지씩' 읽을 수 있도록 짜여졌지만, 이 책은 그런 틀에서 벗어나 '3~4꼭지'로 묶여져 배열되어 있을 뿐, 읽는 순서와 방식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짜여졌다. 쉽게 말해, 책의 '아무 쪽'이나 펼쳐서 읽어도 상관이 없는 지식보따리란 말이다. 그야말로 '하루지식'에 해당하는 한 꼭지를 아무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도록 짜여진 책이다.

  사실, 이런 짜임은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 마치 여러 가지 맛을 한꺼번에 담아 놓은 듯하기 때문이다. 어떤 맛이 가장 맛있는지 잘 모를 때에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우연히 맛본 '그맛'에 흠뻑 취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맛보려다 '그맛'이 딱 품절되어 아쉽지만 '다른 맛'을 맛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즘 트랜드는 '숏폼'과 '릴스'에 중독되다시피 한 독자들이 많은 관계로 이런 짜임이 흡족한 분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맛'이든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은 지식'을 담아 나열해놓은 책이니 다양하게 즐기면 된다. 절대로 '부담'없이 말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딱 12주 분량(12주x5꼭지=60강)이었다. 그래서 책 한 권으로 3달 동안 퇴근길에 한 꼭지씩 읽어나가는 습관을 지향했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23강x4꼭지=72강 분량으로 대략 10주 분량이다. 하지만 주5일 습관이 아닌 '매일습관'으로 꽉 채운 10주인 셈이다. 이렇게 쌓은 지식습관 5권, 6권 쌓이게 되면 일년 치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된다. 한 꼭지를 읽는 시간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5분~10분 정도면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이걸 습관으로 삼을 수 있으면 대단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이 책의 꼭지에도 나와 있다. 불교의 대표경전인 <금강경>에는 지혜를 뜻하는 '반야'라는 말이 나온다. 그 지혜를 쌓아 완전한 상태에 이른 것을 '바라밀'이라 하는데, 피안에 이른다는 '도피안'이라고 풀이하며, 피안의 세계는 바로 '해탈의 경지'에 이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은 지혜를 쌓음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뜻이다. 또한 '금강'은 보석 중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그렇게나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보석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사실, 그리고 지혜를 쌓으면 세상의 온갖 고통을 잊게 해주는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을 담아 '금강경'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금강경>을 불교의 대표 경전이자 가장 마지막에 깨달을 수 있다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지혜를 쌓으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럼 어떤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요즘에는 온갖 지식을 '문자'보다 '영상'으로 체득하는 추세다. 다시 말해, 책을 읽는 독서로 지식을 쌓기보다는 스마트폰에서 동영상('너튜브' 같은)을 시청하며 지식을 쌓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책을 읽는 독서도 '전자책'을 이용하여 스마트폰만 있으면 독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문자지식'과 '영상지식'은 똑같은 지식일까? 그렇지는 않다. 단순한 비교만 해도 '문자지식'이 훨씬 더 유용하고 방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상상력' 때문이다.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쌓은 지식은 상상할 수 있는 폭이 대단히 협소해진다. 문자를 읽으면 머릿속에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는데, 영상을 볼 때는 '이미지'가 굳어져서 영상에 나타난 이미지,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상상력 훈련'을 통해서 영상시청으로도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으나, 초심자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화속에 등장하는 잘생긴 왕자님과 아름다운 공주님을 문자로 접한 아이들은 저마다 가장 잘생기고 아름다운 '대상'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영상으로 접한 아이들은 '딱 그만큼'만으로 한정된 이미지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지식은 그런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하나의 지식이 열 개의 지식으로 체화하여 활용되려면 말랑말랑한 유연한 지식, 다시 말해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지식으로 쌓아야지, 이미 굳어져서 '정형화된 지식'만 잔뜩 가지고 있으면 애써 쌓은 하나의 지식은 '고~대로'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게나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면서 '상황'에 맞게 지식을 변형시켜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지, 수만 가지 상황을 일일이 다 외워 수만 가지 지식을 껴맞추는 식으로 활용하게 된다면, 그런 지식쌓기는 별 소용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소중한 지식을 쌓기 위해 '방대한 양'을 섭렵할 욕심만 채우는 것도 의미가 없다. 이젠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기에 백과사전을 통째로 머릿속에 암기하는 무식한(?) 방법으로 지식을 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런 지식은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다시 말해,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방식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꺼낸 '정보(지식)'을 상황에 알맞게 펼쳐나가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2045년에 찾아온다는 '특이점(싱귤레리티)'는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의 탄생을 일컫는 말이지만, 그런 '강한 인공지능(Strong AI)'가 대중화된 이후에도 인간의 지식쌓기는 유용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한낱 '인공지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짜놓은 스케줄에 맞춰서 건강하고 풍족하게 오래 살 수는 있겠지만, 그건 그저 '인공지능에게 사육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라도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인공지능'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서야만 한다. 그래서 지식쌓기는 더욱더 필요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만 남았다. 이는 거두절미하고 '고전지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담론을 나눈 철학, 과학, 수학,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교양을 다룬 지식을 '상식' 수준으로 깔끔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하나의 지식을 쌓기 위해 수백 쪽이 넘는 책을 읽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지만, 나날이 바뀌어가는 세상에는 걸맞지 않는 뒤쳐진 방식이다. 더구나 다가올 미래에는 '속도경쟁'에서도 뒤쳐져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수백 쪽이 넘는 책들에 담긴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짤막한 지식'을 쌓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짤막한 지식을 통해서도 몇 시간이고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담론 수준의 지적교양'을 쌓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소유'해야만 한다. 결국엔 수백 쪽의 책을 읽어내는 능력과 그 지식을 짤막하게 요약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만 하는 셈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지식쌓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에서 접한 지식꼭지를 지적교양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또 다시 수백 권의 책을 섭렵해야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요즘 세상에 '스마트폰'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에서 접한 지식에 관해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관련영상'을 검색해서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지식 단련'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해서 도서관 책꽂이 틈바구니에 책을 벽처럼 쌓아놓으며 밤새 독파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지만, 이젠 더 간단한 방법으로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수고를 '대신'하는 고마운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교양수업'을 제대로 해주는 분들을 잘 선별하는 능력만 키운다면 단기간에 지적교양 수준을 높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지식을 꾸준히 쌓으려는 각자의 노력이 없다면 절대로 높은 수준의 지적교양은 쌓을 수 없다. 지식을 쌓는 쉬운 길은 없다. 오직 '습관'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책 <나를 채우는 하루지식습관>은 그 습관을 도와줄 뛰어난 런닝파트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1권의 부제가 '홀로서기'라는 점도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지식쌓기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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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10 -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미국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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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X / 인물과사상사 17번째 리뷰] 제37대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다. 1968년 대선과 1972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공화당에서 연이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닉슨 시절에 미국사회를 들썩인 굵직한 두 가지 사건은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일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위상을 실추 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리처드 닉슨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미국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 상황도 그닥 나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타이밍이 늦어지면서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던 미국으로써 뼈아픈 실책을 남겼다는 점을 안타까워할 뿐이며,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을 하며 불명예를 안게 되지만, 그가 재임하던 시절에 보여준 '닉슨의 행정능력'에 대한 평가는 역대 대통령과 견주어도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고 평가 내리곤 한다. 다만, 그가 사임하고 수감된 뒤에 곧바로 '대통령 사면'을 받아 석방된 일 때문에 닉슨 개인의 불명예뿐 아닌 '공화당' 전체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 상당기간 독차지하는 뼈 아픈 실책을 남겼기 때문이란다. 닉슨이 '보여준' 행정능력을 책속에서 속속들이 밝혀주지 않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지만, 그의 시절에 실추된 '미국의 명예'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실리'는 챙길만큼 챙긴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리해보자. 베트남은 청나라의 속국이었다. 당시 '속국'이었던 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는 아닌 느슨한 조공(무역) 관계였음 감안하면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런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이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화가 되자, 프랑스와 청나라는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프랑스에게 패배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하지만 베트남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 '베트민(월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에 저항을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프랑스는 베트남에 실력행사를 할 여력이 남지 않았고, 이를 틈타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베트민'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으로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돌아왔고, 베트민은 프랑스와 다시 싸우게 된다. 하지만 '디엔비에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물러나게 된다. 베트남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에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일명 '베트콩')'은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해 활약하는데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60~1975)'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은 '통킹만 사건(1964)'을 조작하며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존 F. 케네디가 암살(1963)된 직후여서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남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지원하였고, 통킹만 사건을 통해 미군은 본격적인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허나 전황은 여의치 않았다. 계속되는 고전으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우며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베트콩 섬멸' 대신 '민간인 학살'을 하며 애꿎은 보복전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여기에 '68혁명'이 프랑스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이 붙자, 곧이어 전세계 젊은이들이 호응을 하며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갔다. 마침맞게 '반전시위'와 '민권운동'이 미국사회를 들썩였는데, 그 유명한 '히피문화'와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이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징집거부운동'이 펼쳐지며 미군은 곤혹을 겪게 된다. 전황은 날로 악화되고, 징집거부로 참전군인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고 말이다. 이때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미국으로선 대단히 반길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박정희 한국대통령은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꽉막힌 '베트남 참전' 미군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이걸 대환영했던 대통령이 린든 존슨 대통령이었는데, 68년 대선에서 닉슨이 미국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자 박정희는 쩔쩔 매게 된다.

  사연인 즉슨, 닉슨이 '개인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케네디와 존슨에게 연이어 패배를 당하고 상원위원선거에서도 낙마를 한 닉슨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면담'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홀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대사의 주선으로 어찌어찌 만남을 갖긴 했는데, 마주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서먹하고 냉랭한 분위기로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 닉슨이 '화려한 재기'에 성공해서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했으니, 이제 상황은 거꾸로 반전을 해서 박정희가 닉슨을 만나러 미국 워싱턴으로, 캠프 데이비드로, 심지어 닉슨의 개인별장까지 찾아가서야 겨우 '면담'을 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도 닉슨의 대답은 '닉슨 독트린'이었다. 미국의 대 아시아외교의 원칙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다시는 '베트남 참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가 스스로 해결한다'는 골자를 내세우며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장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급습한 일도 발생한 마당에 '미군철수'까지 만지작거리는 미국의 행보에 박정희는 안절부절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월남전 파병'까지 하고 있는 한국을 마냥 홀대할 수는 없었는지, 어찌어찌 박정희를 달래려 애를 쓰는 닉슨이었지만, 곧이어 펼쳐진 중국과의 '핑퐁외교'로 인해 데탕트가 이루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는 상황까지 펼쳐지자 '한반도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그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대원칙을 밝혔고, 한반도는 '통일'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산가족찾기'와 같은 일들을 진행시켰다.

  허나 곧바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애초에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은 이유'는 중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견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기 위한 '선조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반전여론이 거세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미군이 철수한 뒤에 '중국군'이 참전해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면 미국으로서는 결코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베트남의 공산화' 불똥이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중국과 북한이 '남한'을 베트남과 같은 방식으로 '공산화'를 시킬 우려를 미연에 막고자 미국은 중국과 '외교라인'을 형성하고, 중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가입까지 통과시키며 중국을 추켜세워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평화적, 민족적 대단결'을 확인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그렇게 한반도에는 평화의 물결이 휩쓸고 갔으나, 정작 박정희와 김일성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1인 독재 체제'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남쪽의 '유신', 북쪽의 '유일' 정책이다. 유신정책의 골자가 '박정희 종신대통령' 만들기였고, 유일사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김일성 일인독재'를 더욱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통일이 된다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탄탄히 하여 '통일한국'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견고히 하겠다는 심보였기 때문이다. 떡(통일)이라도 마련해놓고 '김칫국'을 마셨으면 오죽 좋으련만...

  이렇게 닉슨은 전쟁에선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하는 일'마다 대체로 성공 이상의 성과를 얻으며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다 터진 사건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자신이 역대 대통령보다 훨씬 잘났다(?)는 기록물을 <워싱턴포스터> 기자가 빼돌려서 기사화 시켜 버린 것이다. 그저 단순히 자신이 잘난 것만 기록에 담았으면 문제될 것도 없었겠지만, 자신의 '정치적 적수들의 약점'을 까발리며 자기자신에게만 유리하게 날조하고 기만하는 따위의 '비윤리적인 내용'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던 터라 닉슨 행정부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폭삭 내려앉고 말았던 것이다.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더는 버티지 못한 닉슨은 끝내 사임한다는 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수감되었다가 자신이 지목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사면권'을 행사받은 뒤에 석방되고, 정치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살아갔다.

  '워터게이트 사건(74년)' 이후에 베트남 전쟁도 종전을 맞이한다. 미군 철수가 논의되고 곧바로 실행된다. 베트남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표면적으로는 '공산국가의 팽창'을 막는데 미국이 선봉에 선 것이다. 반공주의에 열심이던 미국으로선 당연하고 자연스런 참전이었다. 허나 전쟁의 양상이 과거와는 사뭇 달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참으로 빛났다. 미국의 역량은 고스란히 전쟁에 투영되었고, 미국의 힘으로 전쟁은 일단락이 되며, 미국은 '승전국'으로서 온갖 명예를 누렸고, 전쟁 참전으로 인한 이득도 어마무시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는 완전 달랐다. 2차 세계대전에 쏟아부은 포탄보다 훨씬 퍼부었는데도 미국은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는 고사하고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과 부상당한 군인들이 속출했다. 부랴부랴 '한국군'을 비롯해서 우방국을 상대로 파병요청을 하면서까지 승리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했지만, 미국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승리하지 못한 분풀이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사실이 발달된 통신기술이 '텔레비젼 혁명'으로 인해 전세계에 즉각적으로 '참혹한 현실'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9년엔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하는 것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전쟁의 참상도 시시각각 '텔레비젼'을 통해서 전해졌다.

  과연 전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물론 미국이 전세계를 대표하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만큼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막대한 이윤에 비한다면 '베트남 전쟁'은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로 돌아서서 전쟁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국의 경제는 더욱더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지경이었단다. 그런데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얻은 성과는 여전히 '매우 높음'이었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쏟아부었는데도 '기축통화'라는 장점을 살려 '달러의 가치'를 손보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전쟁에서 잃어버린 비용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인 일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런 비난을 감내하고서도 '세계적인 존경'을 받을 정도로 미국은 초강력한 국가로 우뚝 서버렸다. 감히 누가 미국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미국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까지 어찌하진 못한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로만 이루어지지만 '도덕'과 '윤리'를 나몰라라하면서 부와 명예를 건사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장은 떵떵거리며 남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한 삶을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있을지언정 '그 손바닥'이 하늘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도덕적인 일을 저지르고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언제고 망하는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의로움'과 '공정함'이다. 세계사를 배우는 목적이 '서양의 위대함'을 달달 외우기가 아닌 것처럼 '미국사'를 배우는 목적 또한 '미국의 위대함'을 아무런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믿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미국사'를 통해 우리가 승승장구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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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IX / 인물과사상사 16번째 리뷰] 1960년대 미국의 대통령은 JFK와 LBJ이었다. 다시 말해,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말이다. 케네디가 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 때 존슨은 부통령을 지냈고,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자 대통령직을 위임 받았다가 3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진보적 정책을 착실히 실행하였다. 허나 두 대통령은 서로 경쟁 상대였다.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스타일도 달랐는데, 직무적인 능력으로 본다면 젊은 케네디 보다는 연륜 넘치는 존슨이 더 신중하고 착실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대중은 케네디를 더 선호했다. 아니 열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널리 보급되던 시절이었기에 '보여주기'에 능했던 케네디가 미국 시민들에게 더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나 케네디는 '얼굴과 말만 번지르르한 무능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일은 꼬였고 성과는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섣불리 쿠바를 침공했다가 '소련제 미사일'이 미국의 앞마당(쿠바)에 설치되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에 위기를 초래하는 젊고 방탕한(?) 대통령이 못마땅한 것이었던지 케네디는 끝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온갖 미스터리만 남기고 '암살자'로 지목 당한 오스왈드 또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케네디가 수 발의 총탄에 저격 당해 죽었는데, 오스왈드는 단 한 발의 총알만 쏘았을 뿐이고 그가 쏜 방향(5시 방향)과는 전혀 다른 (11시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케네디의 시신은 '공개부검'도 받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을 치뤘고, 케네디의 부인과 자식들은 장례식장에서 너무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암살자로 지목된 오스왈드는 제대로 된 변론도 받지 못한 채,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기자들을 향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 순간 괴한이 등장해서 오스왈드는 총격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사망을 했다. 오스왈드가 총격을 받을 당시에 괴한을 저지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괴한은 너무도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렇게 케네디의 암살은 '음모론'이 만들어지기 딱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JFK>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단다.

  하지만 케네디는 미국시민들에게 '전설'로 남았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발표했던 연설은 미국인들에게 '뉴 프런티어'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은 위대한 사회다...그런 미국의 정부는 해줄 것이 없다. 오히려 국가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기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바탕으로 미국인들 자신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메시지로 전해지며, 위대한 미국은 미국인들의 '개척정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젊은 대통령이 이렇게 말을 하니, 뭔가 있어보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대통령이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하니, 미국인들의 마음속에는 그가 한 일이 별볼일 없었다는 사실보다 그가 추켜세워준 '미국인의 자긍심'에 더 열렬히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 '케네디의 전설'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린든 존슨'이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이었고, 자신이 공약한 것은 '해내고 마는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텔레비젼 시대'에 걸맞지 않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어눌한 말솜씨에 긴장한 것이 역력한 굳은 표정을 짓곤 했던 탓에 국민들로부터 그닥 호감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카메라'나 '녹음기'가 없는 곳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직무를 다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케네디보다 존슨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지만, 호사가들에겐 존슨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그랬던 탓인지 존슨은 '케네디'를 너무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열정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대중 앞에서 활짝 웃기만 해도 "케네디를 따라한다"한다는 언론의 반응을 받게 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전한다. 그는 그렇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될 운명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발을 담근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60년대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과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시끌벅적했다. 링컨 대통령 시절에 '흑인노예 해방선언'을 했는데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은 '한국전쟁'에 이은 또 하나의 '이기지 못하는 전쟁'에 참전했다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더구나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위해 참전을 한다는 명분에 걸맞지 않게 '사살한 베트콩의 귀를 잘라내는 장면'이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송출된 것을 지켜본 미국시민들의 '반전시위'는 끝없이 이어지게 된다. 미정부는 서둘러 '참혹한 전쟁 참상'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입까지 막을 순 없었다. 더구나 참전용사들 가운데 '흑인병사들'에게는 더 위험한 전투에 투입하는 '차별'이 자행되자, 인종차별에 반전시위까지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지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1961년 박정희는 5·16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미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지만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를 푸대접하고 만다. 하지만 63년에 케네디가 암살 당하고 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자 린든 존슨 행정부는 박정희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인 박정희는 린든 존슨에게 환대를 받았고, 박정희도 린든 존슨을 격렬하게 대접한다. 이렇게 한미간의 혈맹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지만, 날로 커져가는 '공산진영의 확장'에 맞서 한미일 공조를 견고하게 쌓고 싶어하는 미국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일시위를 벌이며 '반성과 사죄 없는'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며 결사반대를 외치지만,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던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게 된다.

  이런 한국국민들의 반대시위를 무마하기 위해서 미국은 '한국경제의 빠른 성장'이라는 선물(?)을 마련하는데, 이른바 '경제성장 5단계설'이다. 날로 확장되는 '공산진영'과는 상반된 성공 케이스로 한국이 낙점을 받은 셈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한국의 수출품을 미국이 대량으로 사들이는 정책을 폈으며, 한국이 원활한 수출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은 '일본배상금'이 아닌 '일본차관'으로 충당하는 방식으로 성사시켰다. 당장 배가 고팠던 한국의 경제 상황으로서는 피치 못할 '당근책'이었으며, 이로써 한국경제는 기적과도 같은 성장세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이 달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주도로 밀어붙인 '한일 국교정상화'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도 없고, 배상금도 한 푼 들지 않은 '면죄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에 대한 처벌은커녕 '피해국의 위기'를 이용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당한 논리'로 벌어들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피해국을 '놀림거리'로 삼는 일본의 우익집단들의 행패가 날로 심해지는데도 이에 대한 제지도 하지 않고 '당연한 귀결'로 치부하고, 미국은 이를 그저 방관만 하며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태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납득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된 처사다. 미국은 고종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미국 사회에 날로 번져가는 '반전시위'로 베트남에 파병할 장병이 절대부족해지자 미국정부는 '우방국(?)'들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하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가 바로 '박정희 정부의 대한민국'이었다. 그렇게 비전투병력인 '비둘기 부대'를 시작으로 '청룡, 맹호 부대'에 이어 '백마 부대'까지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파병되었지만, 그렇게 파병된 '한국군'이 받는 월급은 미군의 6분의 1, 필리핀이나 태국 군인의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군도 미군과 똑같은 수준으로 월급을 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있었으나, 미국정부는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애초에 '용병 취급'으로 값싼 비용으로 합의한 박정희 정부의 요구와 상반되기 때문이란다. 과연 미국은 '대한민국'을 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요리해야 마땅한 것일까?

  '굴욕외교'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방'이니 '혈맹'이니 떠들기에 앞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얻는 것'도 없이 '퍼줄 것'만 생각하는 자세가 바로 '굴욕외교의 시작'이다. '우방'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차원에서 '도청'을 허용할 거라면 공평하게 서로 도청하는 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에게 대놓고 욕할 자신은 없으면서, 대한민국 입법부(국회)를 향한 욕지거리였다는 변명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굴욕외교'란 말이다. 외교관계에 '겸손'을 떨 필요는 없다. 서로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갈라서는 것이 '외교관례'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외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미국의 약점'을 파헤쳐서라도 미국을 꼼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다 못해 '대의명분'에서라도 미국보다 우위에 서서 미국 스스로 쪽팔리게 만들어야 '다음 외교'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약소국의 비애'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그러니 외교에서 절대 물러서는 모습이나 뒤처지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꿀리지 말라!'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로 결론이 나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된 '대의명분'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다.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이 고려에 참패한 것도 '외교전'에서 기선제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명분'이 없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더라도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거란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려침공을 했음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반면에 절대적인 약세였던 고려는 '대의명분'에서 꿀릴 것이 없었기에 싸움에 나서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명분 위에 '실력'이 더해지니 불리했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한 셈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실력에서 미국은 대한민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미국은 절대로 한국에서 발을 뺄 수가 없다. 발을 빼는 순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이어 지금까지 '휴전'하고 있는 한국전쟁까지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익이 없어 한국에서 발을 뺀다하더라도 그 순간 미국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보다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에 미국은 더욱더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이 미국에 설설 기는 굴종외교를 이어가는가? 과연 굴종외교를 통해 한국이 얻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절대로 고개 숙이지 말라. 우리는 미국을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할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이 일본에게 '면죄부'를 줘서 대한민국이 '대신' 받은 불이익과 불명예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착실히 힘을 키워나가 미국과 일본에게 퍼주다시피 내어준 '국익'을 톡톡히 받아내야만 한다. 그러기 전까지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등쳐먹고 내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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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8 - 미국인의 풍요와 고독 미국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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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II / 인물과사상사 15번째 리뷰]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질 '제3차 세계대전'의 대리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 결과론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글쓴이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남북한의 첨예한 갈등부터 '김일성의 오판과 이승만의 무능'에 이르기까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무엇'으로 단정하기엔 너무나도 복잡다단한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분만 보고서 전체를 확증하는 식으로 '한국전쟁'을 논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세계가 '경제특수'를 맞이한 것은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바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도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경기가 되살아나는 것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확연했기에, '돈벌이'가 된다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한국전쟁'에 발이라도 담궈보려 무진 애를 썼다. 이런 호황속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한국민족' 뿐이었다. 한국전쟁 이전 남북한 통틀어 3000만 명이던 인구가 정전 이후에는 24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전쟁통이라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었겠지만, 불과 3년 만에 600만 명이나 죽은 것이다. 이조차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수가 대부분일 것이며, 폭격과 공습, 그리고 학살로 인한 민간인의 사상자까지 포함한다면 가히 1000만 명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중공군의 참전 이후 미군의 대공습과 함포사격은 날마다 이어졌고, '휴전협정'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53년 6월 한 달만해도 남북한 사상자가 도합 6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7월 27일 이전까지의 한 달간에는 10만 명이 증발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원산 폭격'에서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전쟁기록 하나를 남겼다고 한다. 휴전이 이루어지기 하루 전날 24시간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함포사격과 폭격, 그리고 대공습이 이루어졌단다. 당시 함포에서 발사 되는 포탄 한 발의 가격이 '캐딜락 한 대 가격'과 맞먹는다고 했는데, 그걸 24시간 동안 계속 쏘아댈 정도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퍼부은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는 작살이 났지만, 세계경제는 호황을 이루었다.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1차 경제부흥'에 성공했다면, 한국전쟁으로 '2차 경제대부흥'에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경제특수를 이룬 나라는 따로 있다. 바로 일본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일본을 '전진기지'로 삼아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자를 일본에서 생산해서 한반도에 퍼날랐더랬다. 총탄과 포탄 등 전쟁물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리산 빨치산의 투항을 권고하는 종이전단지까지 일본에서 생산해서 한국에 뿌려댔단다. 일본은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말했다고 하고, 한국전쟁을 일컫어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평가했단다. 한국전쟁이 일본에게 준 선물은 이뿐 아니다. 51년에는 미일 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서둘러 맺으며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게 '면죄부'를 안겨주며 거의 모든 방면으로 일본은 '미국의 파트너'로 승격되어, 일본을 묶어두었던 제재들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미국은 한술 더 떠서 일본을 세계무대에서 '전쟁 가해국'이 아닌 '전쟁 피해국'으로 이미지를 바꿔줄 정도로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정도였단다.

  이로 인해 일본은 '우경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이란 발등의 불이 떨어진 미국을 돕기 위해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우익인사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미국의 비위를 맞춰주었고, 그 덕분에 회생을 넘어 특수까지 얻게 되니, 그로 인해 쌓은 부를 통해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50년대 기적 같은 '흑자전환'을 이루고 60년대 '경제성장'을 이루고 70년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은 풍요로운 경제를 누리며 한국을 비웃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단다.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받은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일본의 우월감'이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풍조는 일본의 우익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패전으로 인해 '패배감'에 찌들어 살 걱정을 할 정도로 절망에 빠졌는데, '한국전쟁'으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버린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도움으로 '패전국의 멍에'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피해국 코스프레'를 통해 미국과 함께 당당히 세계무대를 누빌 수 있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8권에서 다룬 '한국전쟁' 부분은 가히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알지 못했던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 내용을 일일이 거론하기 보다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난 뒤에 세세한 내용을 되새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먼저 미국은 세계대전을 성황리에 마치며 경제대국에 걸맞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미소 간의 '냉전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냉전의 갈등은 고스란히 '한반도'로 쏠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아픔은 전세계의 경제부흥을 안겨주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미국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명실공히 '초일류 경제대국'으로 거듭나며 풍요로움의 극치를 누리게 되었고, 유럽과 다른 나라들까지 경제성장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만큼 대박을 터트린 나라는 없었다. 경제호황을 넘어 '전범국가'라는 이미지까지 벗어던지며 미국의 소개를 받아 세계무대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니 말이다. 물론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의 '꼬붕'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 꼬붕인 나라가 '경제대국 2위'의 반열에 오르니 꼬붕 노릇을 마다할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공산주의' 때려잡기에 열을 올리며 풍요로움을 한껏 누렸다. 미국의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문화, 거의 모든 점에서 '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있으며 나쁜 일도 따라오는 법이다. 그렇게 떵떵거리던 미국이 '한국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휴전 협정'으로 한 발 물러서려 했다. 초강대국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쉬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희생자는 점점 불어났으며, 그로 인핸 피로감은 점점 누적되었고, 이제 슬슬 전쟁이 지겨워질 때가 된 것이다. 미국인들의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급기야 미국대통령은 정당이 바뀌고 말았다. 트루먼(민주당)에서 아이젠하워(공화당)로 말이다. 무려 20년간 민주당에서 배출하던 대통령을 공화당에게 빼앗기도 만 것이다. 그것도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에게 말이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끝이 보였다. 그리고 이를 환영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과 중국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북한은 38선 이북지역이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미국은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뽐내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폭탄세례를 안겨준 것이다. 그래도 북한은 낮에는 땅굴속에 숨고 밤이면 게릴라전을 펼치며 끝도 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이는 인해전술을 펼치던 중국군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피로감이 쌓여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것이 미국과 유엔군이었다. 계속 전쟁을 하기 바란 것은 오직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는 이승만 뿐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사람들을 총동원시켜서 북진통일을 세뇌시켰으며, 1000만 학도병이 통일을 위해 준비되었으니 미국은 '무기' 지원해달라, 우리는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구호를 앞세워 미국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아이젠하워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을 피해다닐 정도였단다.

  그래도 미국은 '휴전협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주면 휴전을 받아들이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렸고, 미국은 통제할 수 없는 이승만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 조약을 맺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자 이승만도 조약 없이는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으름장을 내놓았다. 졸지에 모두가 원하는 '휴전'을, 대한민국만 바리지 않는 꼴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국군과 한국인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거졌다. 그래도 이승만은 오직 '북진통일론'만 내세우며 국민들을 시위에 동참하도록 내몰았단다. 그렇게 '휴전'이 코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이승만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만다. 이 사건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는데, 전쟁을 종식하고 포로교환을 성사시키려던 미국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마저 '석방포로'를 재수용을 요구하며 진정시키려 했는데, 이승만은 결사반대를 외치며 휴전협정을 완강히 거부하고 만다. 그럼에도 휴전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휴전이 성립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더이상 전쟁을 치룰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8선 이북 전지역이 초토화 되었고 희생자는 날로 늘어나고 미군의 포격은 끝도 없이 이어지니 하루도 편히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투는 지리멸렬하게 막상막하의 공방을 이루었다. 고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마다 땅따먹기하기가 일쑤였고, 그로 인해 수 만의 전사자가 날마다 나왔고, 수십 만의 전사자가 매달 나왔으며, 수백 만명의 전사자가 해가 넘어갈수록 넘쳐났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한국전쟁'을 애초에 시작한 이가 '김일성'이었단 것이다. 그가 시작한 전쟁인데 이기지도 못하고 휴전을 하면서 '성공'이라고 자축하고 있으니 '한국전쟁'이 얼마나 오판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만 하다.

  이승만의 무능도 한 몫 단단히 했다.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을 갔으며, 국민들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통령 자리보존'에만 열을 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자 모든 권한을 '위임'해버리는 무능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깽판을 놓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는지 가는 곳마다 '트러블메이커'로 톡톡히 일을 해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을 빠르게 종식할 수도 있었는데, 북진통일을 외치며 한국군 단독작전으로 북진을 했다. 흥남철수와 일사후퇴로 마무리 되었는데도 미군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북진통일'을 외쳤고, 서울재수복을 하고 난 뒤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든 권한을 위임해버려 할 일이 없음에도 국민들을 선동질시켜 '반공정신'만 투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온국민을 '희생양'으로 삼고서 얻고자 한 것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온국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오죽했으면 미국이 앞장 서서 '이승만 암살'을 논의했겠는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고, 예측불허의 사람으로 타고난 협잡꾼 노릇만 일삼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온 국민들은 이승만 편을 들었다. 이승만의 말이 백 번 옳다고 두둔했다. 이승만이 원하면 무슨 일이라도 따랐다. 그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국민들이 정말 대단할 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어디 갔는가?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통일론'을 온국민의 90%가 찬성하고 지지했단다. 행여나 반대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현실속에서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리 전쟁통이라고는 하나 '자성의 목소리'는 귀 기울일 법도 하다. 전세계가 바라는 '휴전'인데, 당장에 죽어나가는 국군과 한국민간인 들은 안중에도 없었단 말인가? 끝내 휴전에 반대해서 이승만은 '휴전협정서'에 사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종식되자 북한 김일성은 매년 7월 27일을 '승전기념일'로 삼아 대대적으로 축제를 벌이고 공휴일로 삼았단다. 미국의 오바마는 7월 27일을 '한국전쟁참전용사의 날'로 정해 조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하자며 성조기를 조기로 달며 매년 기념을 한단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아무런 입장 발표가 없다. 휴전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국군장병들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이승만은 그토록 '북진통일'을 바라며 온국민들을 전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왜 그들의 공로와 아픔을 치하하지도 보듬어 주지도 않았느냔 말이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정권들도 묵묵부답이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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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7 - '뜨거운 전쟁'과 '차가운 전쟁' 미국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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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XVII / 인물과사상사 14번째 리뷰] 이 책의 구성은 '미국사'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 방식(연월일 시대순)으로 기술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 사이사이에 벌어졌던 '주요사건들'을 기사본말체(사건별로 역사서술) 방식으로 풀어낸 역사책이다. 특히, 미국과 관련된 '한국사'에 대한 비중도 깊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미국사에 대한 서술이 일품인 책이다. 7권에서 다룬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관련이 깊은 내용은 '해방 뒤에 분단된 한국'과 '한국전쟁의 발발'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즈음에 미국은 이미 패권국가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으며 '가공할 만한 힘'을 전세계에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히틀러'를 찍어 누를 때와 '히로히토 일왕'을 압박할 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이 패망할 즈음에 히틀러는 '자살'을 할 지경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에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랜 친구를 배려(?)하듯 최대한 양보하는 듯한 뉘앙스가 엿보일 정도였다. 이는 전범을 다루는 '방향'에 대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은 그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에 대해서 추호의 용서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의 처우는 달랐다.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에 대해서 관대하기 짝이 없게 단 7명에 대해서만 사형을 집행했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머지 잡범(?)들은 석방되었고, 심지어 과거의 경력을 높이 사서 일본의 주요관직에 속속 복귀할 수 있었다. 조선인을 비롯해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부대 관련자들은 '연구자료'를 미국에 고스란히 넘기는 조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강연에 초빙을 받아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발표할 정도로 안락한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누구도 불명예를 받지 않았고 유명 대학과 제약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호의호식을 받으며 살아갈 지경이었단다.

  오히려 해방 이후 일제의 범죄에 대한 죄값을 받은 건 '한국'이었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패망하고 분단되었어먀 마땅했는데, 오히려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맥아더의 호의(?) 덕분에 분단이 아닌 '통일'을 유지했는데, 한국은 북쪽으론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군사정권'을 만들어 신탁통치를 강요받은 것이다. 이유는 한국에서 일어날 소요사태를 단속하고 통일정부를 이끌어나갈 정도로 막강한 단체나 지도자를 내세울 수 없을 정도로 '지도부의 분열'과 더불어 '국민들의 사상적 분열'이 매우 심각했다는 분석 때문이었단다. 이는 해방이 되자 서로 일제로부터 '정권 이양'을 받겠다는 인물이 스무 명도 넘게 등장했고, 단체 또한 너무 많았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이 때문에 한국 분단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서 찾는 경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미국의 철저한 '한국 무관심'에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국은 분명 제국주의의 피해당사자인데도 미국 행정부는 이를 '완벽한 무지'를 바탕으로 한 '철저한 무시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서 입국할 때 환영하는 한국인들이 치안을 맡은 '일제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한국인을 죽인 일제경찰에 대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팩트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군은 한국을 '해방' 시킨 것이 아니라 '점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렇게 주둔하게 된 미군은 한국을 다스리면서 전쟁을 일으킨 일본보다 더욱 가혹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일본인들을 철저히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뒤에 쥐 죽은듯이 얌전한 일본인들 부드럽게(?) 다스린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초지일관' 무관용으로 대응하며 '공산주의의 확산'만을 면밀히 주시하며 철저한 '반공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런 미군정의 자세는 일제가 물러난 한국에 비극의 씨앗을 남겨주었다. 바로 독립운동을 한 이들에게는 모욕감을 주고, 친일행적을 일삼았던 무리에게는 영예를 안겨 준 것이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했던 나라는 한반도의 조선 뿐만이 아니었다. 만주국을 세워 수많은 만주인과 몽골인 들도 일제의 식민통치로 억압을 받았으며, 대만도 총통을 둘 정도로 철저한 관리를 했고, 유럽 열강의 통치를 받던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제도의 식민지들을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점령을 하고 억압하고 수탈했었다. 그 가운데 일제에 끈질긴 항거를 하고 전투를 일삼고 끝까지 저항을 한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조선인들에게 치열한 투쟁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한국인'들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고 강제 점령(?)을 강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게 적절한 어필을 못한 탓으로 봐야할까? 유럽과 태평양이라는 '양대 전선'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쥔 초강대국에게 우리가 어필 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38선을 긋는 것도 고작 '30분간의 회의' 끝에 일방적으로 그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개무시를 하는 미국에게 우리의 어필이 통하기나 했을까?

  물론, 미국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을 것이다. 바로 '공산주의와의 대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에 곧바로 '냉전시대'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뜨거운 전쟁에서 차가운 전쟁으로의 전환은 이미 독일과 일제가 패망하기 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북쪽에 '소련군'이 진군하였고, 이미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발빠른 진격(?)'은 미국으로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일제가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 몰랐던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소련의 참전'을 요구한 것부터 오판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일제가 허무하게 항복할 줄도 몰랐고, 소련군이 일본 본토가 아닌 한반도로 진격해갈 줄은 예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소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38도선'으로 한반도를 양분하기로 통보한 것이고, 이는 두 나라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단다. 미국은 소련이 순순히 받아들일 줄 몰랐고, 소련은 미국이 이처럼 후하게 남하할 수 있도록 배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그어져버린 '38도선'은 지금까지 한반도를 '분단'시켜 버린 원흉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미국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미국 사회는 온통 '자신감'으로 넘쳐났고, 그런 자신감은 '힘의 과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에 '고립주의'를 외치던 미국은 이제 본격적인 '세계화'에 나서며 국력을 과시하고 국익이 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1945년 이후 미국은 '자본주의'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전세계를 주름잡으려는 포부를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반면에 소련은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뽐내며 초강대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자존심을 넘어 '압도'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미국적인 세계화에 번번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른바 '냉전시대'다. 그리고 그 냉전의 종착점은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미국내에서는 '매카시 광풍'이 불면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데 열을 올리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가릴 것이 없이 탄압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그 광란의 분출구를 빠르게 한반도로 '유도'하는 양상이었다. 그에 반해 소련은 한국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탄탄히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며 미군에게 무기를 달라고만 요구했다. 이승만에게 그럴 듯한 대안이라도 있었다면 미국이 '무기'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못지 않게 '반공주의' 노선을 확고히 했던 이승만이 고마워서라도 도와주는게 인지상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언제나 말로만 앞세웠고, 실제로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미국은 오히려 '미군철수'와 동시에 쓸만 한 무기로 일체 회수해가버렸다. 무기를 남겨두었을 때 이승만이 저지를 무모함을 우려한 탓이다. 거기에 '애치슨 라인'까지 그으며 한국에서 철저히 발을 빼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냉전'이 새로운 '열전'으로 전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할 수만 있다면 소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은 참전했고 '노근리 학살'과 같은 인종차별적 행태는 한국전쟁을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었다'는 언론의 보도보다 더 끔찍하게 한반도를 달구었다. 그 참혹한 전황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으로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다. 당시 트루먼 미대통령은 '38도선의 회복'으로 전쟁을 일단락 짓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선넘는' 무모함은 전쟁을 장기화 시켰으며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고, '흥남철수'와 '일사후퇴'로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고 전투는 더더욱 치열해졌다. 서로 물고 물리는 악전고투 속에 양측의 '희생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전선은 사나운 맹수의 아가리처럼 들쭉날쭉 하길 반복했다. 이런 와중에 맥아더는 중국본토에 원자탄 26발을 투하하여 공산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이미 세워두었단다. 이를 내심 바랐던 것이 이승만이고 말이다. 허나 맥아더의 문제점은 '한국전쟁'을 통해 전세계 공산세력을 궤멸시켜 냉전까지 종식시키겠다는 야심에 있었다. 이에 반해 트루먼은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둘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승자는 맥아더가 아니었다.

  만약, 맥아더의 야심대로 중국 본토와 만주에 원자탄을 떨어뜨리고, 대만의 장제스가 본토 진격을 했다면, '한국전쟁'은 곧바로 종전을 했고, 이승만은 통일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기 때문이라는 환상(!)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일제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가 함락되고 매일 반복되는 미군의 '대공습'으로 이미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서두른 것도 아니었다. 항복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미군에 피해를 안겨 유리한 고지를 점한 뒤에 '협상 테이블'에서 항복을 조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서둘러 미국에 항복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속셈으로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중공군을 지휘하는 모택동(마오쩌둥)은 항복할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원자탄 26발을 얻어 맞으면 전쟁이 종식되고, 전세계 공산세력도 함께 궤멸할 것이라는 환상은 빨리 깨는 것이 다행이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구상은 오히려 소련의 한국전쟁 참전을 불러 일으켰을 공산이 크며, 그로 인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와중에 '한반도'는 어땠을까?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이 되어 한반도는 조금이나마 평화로웠을까?

  이와 더불어서 맥아더를 '한국전쟁의 우상'으로 삼는 것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백인우월주의자였다. 실제로 그는 항복문서를 조인한 '일왕'을 대신해서 일본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즐기던 고루한 인간이었다. 전근대적인 정복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을 넘어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수호받는 것이 마땅한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단 말이다. 만약 그가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면 일본에 이어 한국마저 '자신의 왕국'으로 삼았을 것이다. 무능한 이승만은 그런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콩고물 얻어 먹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물론, 과거에 젖어서 현재를 망각하고 미래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곤란하다. 남북분단에 이어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정'을 걷어찰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다시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은 '지상천국'으로 여겨질 것이다. 절대로 전쟁만큼은 두 번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선 안 된다. 우리에게 '미국사 공부'가 필요한 까닭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닌 대한민국의 이익을 우선하기 위해서다. 철저히 공부해서 우리가 당한 만큼(?) 미국을 이용해먹자는 거다. 그들이 우릴 이용해 먹는 것이 '국제관계의 민낯'일텐데, 우리라도 당하고만 있어야겠느냔 말이다. 제대로 빨대 꽂고 쪽쪽 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오늘날의 미국은 절대로 '대한민국'을 버릴 수 없다. 대한민국을 잃으면 미국도 잃을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갑질'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역사를 꿰뚫어보면 그 방법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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