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 연대기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6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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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오래도록 읽은 고전은 없다. 잠시 나관중의 <삼국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적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별자리이야기'로 시작해서 20대엔 점성술사와 천문학도를 꿈꾸기도 했으며, 30대엔 토마스 불핀치와 이윤기를 필두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그리고 오비디우스까지 섭렵하고 또, 탐독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헤아리며 별 하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곤 하는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별들에 담긴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였던 탓에 읽고 또 읽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같은 책'이라도 '세대마다' 느낌이 다른 법이고, '글쓴이에 따라' 내용이 다 다르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제목을 달고 나온 책일지라도 누가 썼느냐, 무슨 관점으로 써내려갔느냐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이는 '모든 책'에 다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특히, <고전>의 경우에는 더 특별한 법이다. 이를 테면, 같은 <논어>라 하더라도 '보편적인 내용(텍스트)'는 비슷할지라도 '글쓴이의 관점(해석)'는 제각각인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덕군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고 공자를 추켜세우고, 어떤이는 오늘날에는 전혀 맞지 않은 '낡은 관점'에 불과한 까닭에 우리 안에 내재된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에게 달렸다. 오래도록 널리 읽힌 <고전>은 '다양한 해석'에서 그 가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해석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하는 재미가 '고전을 읽는 맛'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춰야 옳은 해석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심금을 울리는 '보평성'을 갖춘 해석이라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고전의 맛'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어떤 해석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이는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면서 '필독서의 반열'로 올려놓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신화의 상징성과 시의 함축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야하고 비도덕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필독서'랍시고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배우길 바라는 것인지 학부모들은 각성하라며 경각심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딴에는 솔깃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논술쌤인 나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를 어린아이들이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만화'로 된 책을 읽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또 바뀌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인간의 본성'을 잘 드러낸 이야기가 없는 탓이다.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옛 그리스인'과 '옛 로마인' 들이 상상하던 신의 모습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는 종교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서의 신은 '신의 형상'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신화에서의 신은 그 반대인 까닭이다. 또한, 다른 신화에서는 근엄하고 엄격하며 진지하다 못해 '절대적인 존재'로 전능을 가진 신을 그리는데 반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의 능력조차 어딘가 모자른 점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모습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근진하기는커녕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실수투성이 신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것처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 완벽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신의 형상'인 육체다.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으로 전해지는 신들의 모습은 '인간'이 가장 바라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빚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을 담아 빚어냈다. 이런 육체미를 직관하면서 '성욕(에로스)'을 불태우지 않으면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헐벗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것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멈칫거리는 점이 있다. 아무리 '성욕'에 충실한 인간일지라도 '불륜'만큼은 절제해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부도덕한 짓'을 일삼고서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특히, 제우스의 행실 말이다. 도대체 제우스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제우스는 '최고신'이다. 그런데 '최고 바람둥이'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기(?) 전에 벌인 애정행각까지 탓할 수는 없을지라도 헤라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벌인 불륜은 탓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신화라고 할지라도 '같은 아버지'의 핏줄인 여자형제, 아버지의 여자형제, 어머니(하긴 크로노스와 레아도 남매사이다)의 여자형제로도 모자라서 수많은 조카들, 종족(?)이 다른 인간까지 섭렵하였으며, 그 방법 또한 강간, 납치, 협박, 유혹 등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도덕한 짓거리들을 참 잘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신화>는 여전히 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운 고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책에 '나의 고민'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었다. 바로 '제우스를 위한 변명'이라고 부제를 붙이면 딱 좋을 내용이 말이다. 부연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풀어보자면, 제우스가 신화속에서 바람둥이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가 '최고신'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최고신에 등극한 바람에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너나할 것 없이 '최고신'과 연줄을 닿게 하기 위해 "우리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제우스의 후손이다"라고 제 입맛에 딱 맞는 신화를 만들어서 훗날 <그리스로마 신화>로 뭉뚱그려 엮은 탓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의 잣대'로 보았을 때는 부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일지라도 '최고신'과 연줄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망설이지 않았고, '신화'라는 이름으로 이를 품었다는 해석에 수긍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건, 나뿐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바람직하지 못한 짓(부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비도덕)'을 허용하거나 일부 수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도덕'은 필수이지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유경쟁이 원동력인 까닭에 조금이라도 '도덕적 기준'을 허물어버리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합법'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서 몰염치한 짓을 일삼는 못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반면에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조차 작동되지 않는 사회을 탓하며 신음하고 있고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도덕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은 절대로 이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 '새로운 해석'이 담긴 <올림포스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재밌고 유쾌하며 뼈 때리는 해학과 풍자까지 담겨 있는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이 '변명'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변명'이 이 책에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글쓴이들이 이미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오남용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독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독자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이는 이런 말도 했더랬다.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빈다"고 말이다. 내가 참 많이 듣는 말이긴 한데, 나는 교육자(논술쌤)의 한 사람으로서 '만의 하나'라도 지적할 점이 있다면, '반드시' 지적하고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배꼽 빠지게 웃었던 탓에 조금더 심각하게 정색을 해보았다ㅋㅋㅋ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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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 - 서세동점의 시작 본격 한중일 세계사 1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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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직도 역사의 범주를 '한국사'와 '세계사'로 가르며 한국사는 '나라안의 역사'를, 세계사는 '나라밖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사관의 그릇된 인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는 힘으로 우리 나라를 강제병탄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왜곡하고 축소하며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이라 부르며 차별과 멸시의 대명사로 만들었으며, 우리 역사의 장면은 '한반도'로 축소되고 말았고, 외세의 위압에 자율적 대항은 꿈도 못꾸고 오직 '타율적 순응'만 하는 식민의 DNA를 갖고 있을 뿐이라며 왜곡을 일삼았다. 이런 시각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순삭했어야 마땅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오늘날에는 우리 역사를 '한반도'라는 작은 그릇으로만 보지 말고, '한반도'라는 세상의 중심에서 세계로 뻗어나갔던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다시금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고대 4대문명과 동시대에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고조선이 다시 보일 것이며, 중국세력이 춘추전국시대로 사분오열이 되었을 때 우리도 4국시대를 맞아 군웅할거의 쟁패를 벌였으며, 중국의 혼란을 틈타 팽창정책을 펼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면모를 선보였고, 중국이 오랜 혼란을 접고 수당시대를 맞이하자 우리도 똘똘 뭉쳐 통일국가의 면모를 보이며 세계정세의 흐름과 맞물려 역사를 꽃 피웠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 중국 이외의 세력과도 연이 닿아서 활발한 외교전을 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신라의 청해진과 고려의 벽란도는 아주 사소한 사료일 뿐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저멀리 인도와 아라비아를 넘어 유럽의 로마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아직은 사료가 태부족한 탓에 이들과 어떠한 역사를 맺고 풀었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우리가 '우리의 시각'으로 세계를 톺아보면 분명히 우리의 영향력이 고작 '한반도' 안에서만 머물고 있지 않았을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세계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이 결코 우리 역사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의 근대사에 깊이 영향을 끼친 중국과 일본에서 벌어진 일들을 확대경으로 깊이 들여다보는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확 넓혀서 좁게는 동북아시아 삼국을, 넓게는 서구열강세력까지 포함해서 '함께 읽는' 소중한 안목을 선사한 책이기에 매우 뜻깊다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책으로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제목이 참으로 솔깃하다.

 

  이 책의 시리즈는 '한국사' 정도는 통달했을 독자 여러분들의 지적 수준을 높이보고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우리 역사'는 쏙 빼고서 '남의 나라 역사'만 주야장천 풀어내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허나 우리가 고등학교 수준의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열강이 동쪽으로 밀려들면서 아시아국가 곳곳이 극심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 차원에서 서구열강이 중국에서 한 일과 일본에서 한 일을 각각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시기에 우리는 조금 외돌톨이처럼 따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까닭은 바로 '은'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단다.

 

  서구열강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와 가장 게걸스럽게 탐욕의 본성을 드러냈던 근본적인 목적 가운데 으뜸이 바로 '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 중국의 은과 일본의 은은 서양상인들의 주요 품목이 되어 활발한 무역(?)을 일으키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은화'가 아닌 상평통보라는 '동전'을 썼던 탓에 특별한 관심(!)을 덜 받게 되었던 셈이다. 암튼 서구열강은 동양의 은 경제시스템에 당당히 개입을 했고, 자기들 입맛대로 '룰'을 바꾸려 했고, 그 결과 중국은 아편전쟁을 치뤘고, 다음 책에서 다뤄지겠지만 일본은 쇄국정책을 풀고 개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에 '근대화'에 접어든 중국과 일본은 또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 물론 우리도 말이다. 그건 차차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암튼, 첫 번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바로 '아편전쟁의 흑막'이 낱낱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책에서 서구열강의 침탈과 근대화의 시작을 이야기하면서 '아편전쟁'은 수없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아편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맺게 되었는지는 '도식적'으로 간략히만 전할 뿐, 세세한 전개내용과 뒷이야기, 그리고 감춰진 이야기까지 속속 파헤친 책은 내 기억으로 이 책이 첫 번째 책이 분명하다. 그 전까지의 역사책에서는 그저 대략적인 내용만 반복할 뿐이었다. 더러운 영국이 중국인을 상대로 아편밀매를 했고, 이를 근절시키려는 중국의 당연한 조치에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난징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것이 중국이 근대화를 시작하게 된 까닭이었다...라는 내용 말이다.

 

  이걸 이 책에서는 서양상인들이 '은본위제도' 경제시스템에 전세계의 은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하고 있던 차에 중국에서는 도리어 영국의 은을 빨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전제를 깔아놓은 다음에, 왜 그런고 하니, 바로 영국이 자랑하는 '면직물'이 중국의 비단에 밀리고 더 값싼 면직물에 발려서 제대로 팔리지 않는 상황에서 영국인이 사랑하는 '홍차(밀크티)'를 비롯한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에 열광한 덕분에 전세계에서 흡입한 은이 중국산 제품 수입 열광에 의해 중국에 죄다 빨려 들어가버린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아편'을 유통시켜 영국에 막대한 이득을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는 스토리를 알게 해주었다. 그 뒤에 벌어진 '임칙서, 아편 퐁당', '영국, 해군 출발', '아편전쟁 발발', '청나라군대, 시원하게 발림', '난징조약, 불평등조약의 시초' 등등이 저절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뿐 아니다. 이 책에는 '아편전쟁의 민낯'을 낱낱히 밝히며, 당시 청나라의 무능과 헛발질, 영국의 탐욕스런 전쟁사, 당시 무기체제의 비밀 등등 알면 알수록 역사적 흥미가 쑥쑥 올라가는 경험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재미는 '결말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재밌는 역사이야기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과정도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적인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또 다른 역사의 비밀 장면'을 들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딴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고 의문을 품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역사란 '정답'이 없는 학문이다.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고, 그 해석에 '납득'이 더해지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납득'이란 개인의 납득이 아닌 '모두의 납득'일 때만 그렇다. 그렇게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을 갖춰야 하며 당연히 학문답게 '보편타당한 근거'로 탄탄하게 역사를 풀어내야만 할 것이다. 이 책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설득력의 높낮이가 오르락내리락하곤 하는데, 그 역시, 현명한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음 책은 문제의 '태평천국운동'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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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인원 - 끝없는 진화를 향한 인간의 욕심, 그 종착지는 소멸이다
니컬러스 머니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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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오만한 인간의 최후는 멸종뿐이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명백한 인간의 책임인데도 이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고, 심지어 기후변화에 따른 혹독한 환경변화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까지 인류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거라는 질책에도 눈만 깜빡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지적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반론마저 예상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거냐?", "쥐라시 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더 더웠는데도 생물은 번성하고 공룡은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았는냐!"는 반론을 던지며 기후변화의 책임이 인류에게 있다거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물론, 그렇다. 인간은 과학문명의 이기를 절대로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로 인해 온실가스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지구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학문명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지구환경조차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낙관을 펼치곤 한다. 여태까지의 인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 위에 군림하고 '최종포식자의 지위'로 살아왔더랬다. 그리고 언제나 과학이 해결해줄 거라는 '과학만능주의'가 당연한 해결책인냥 마련해왔다. [이 또한 인류는 극복해냈습니다]라는 문구로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우뚝 선 자랑스런 인류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말이다.

 

  그러나 지구는 그동안 '다섯 번의 대멸종'을 선보이며 지구상의 생물들을 최대 98%까지 절멸(페름기 대멸종)시키는 위엄을 보여왔다. 또한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겪으며 기존의 생물군이 대다수 멸종하고 새로운 생물군으로 바뀌어 왔다는 지질학적인 근거만 봐도 '기후변화의 끝자락'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과연 인류의 과학기술이 대멸종과 빙하기까지 이겨내고 '지구의 주인'으로서 톡톡히 이름값을 할 수 있을까? 끝끝내 인류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안락한 현대생활과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개선의 의지를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정녕 인류는 '죽음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 것처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적어도 점점 빨라지는 지구온난화를 늦추거나 인간이 망친 지구의 자연을 지구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까? 이를 테면, 가까운 거리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 타기나 더운 여름철에 에어콘 대신 손부채를 이용하고, 추운 겨울철에 난방보다 내복을 껴입는 방식으로 에너지 소비를 확 줄여서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한으로 하고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점점 줄이고 기후변화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삶으로 바꿔나가는 것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지구를 강타하자 거의 모든 비행기와 배가 일시에 멈추니 일시적이지만 공해가 사라진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도시봉쇄로 인적이 끊긴 도심에까지 동물들이 찾아와 가장 자연스런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일시멈춤'으로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해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지구를 오염시키고 살고 있는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책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구의 주인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지구 생물의 '최종진화'가 인간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말한다.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지능'이 발달한 생물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위'를 쥐어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진리를 제발 말로만 하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쉬운 진리 아닌가. 그런데도 인류는 고도의 지능으로 지구를 아주 빠른 속도로 파괴하는 재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 재능이 인간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얼마나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라는 스릴 넘치는 짜릿한 감동을 선사할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극'을 이해할 지구생명체는 이미 멸종한 인류 이외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비극을 왜 스스로 자초하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녕 당신들의 후손에게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을 선보여주기 싫은 것인가? 그 마지막 후손이 지금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정녕 인류의 미래는 깜깜할 뿐이련가.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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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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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많이 팔린 책(베스트셀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책이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더랬다. 한때 유행하는 일명 '트랜디 북'은 인기에 비해서 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스테디셀러)'도 많은데 시간만 축내는 책(?)들은 한켠으로 재쳐두고서 독서를 해왔었다. 그러다 학생들의 입에서 이 책의 제목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재밌는 책이 있는데 '그 책'으로 논술수업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베스트셀러를 손에 잡았다.

 

  이 책을 읽은 첫 인상은 <해리포터>와 <꿈의 대화>를 콜라보한 느낌이었다.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꿈 백화점'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바라는 '꿈을 소비'하면서 자기만의 희망과 욕망, 그리고 때로는 일탈도 하는...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형 판타지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가, 문득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자아와 초자아를 다룬 '무의식의 세계'를 담은 독특한 세계관을 담았다는 생각에 다다른 순간, 작가의 스케일의 남다르구나, 작품의 세계관이 엄청나구나...프로이트의 표현을 빗댄다면 '빙산의 일각'만 보여줬을 뿐이구나, 의식의 저편에서 펼쳐지는 '꿈 백화점의 이야기'는 정말 방대하고, 더욱 방대하겠구나..싶은 생각에 닿는 순간, 매 스토리마다 진한 감동과 짜릿한 전율마저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어지는 후속작에서 그런 감동과 전율이 끊이지 않고 전달될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큰 까닭이다.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꿈 백화점에 방문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설정이다. 그렇다면 꿈 백화점의 직원들은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주인공 페니를 비롯해서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한국 이름'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세계(대한민국)와는 사뭇 다른 곳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신'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있고, '무의식의 존재'나 '영혼'이라고 보기에는 뜨악한 점이 한둘이 아닌 탓에 작품의 세계관을 좀더 분석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쯤해서 느닷없이 드라마 <호텔 델루나>와 같은 설정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사후세계'와의 연결고리나 '중간세계'로 볼 만한 근거 또한 찾을 수 없기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저 일반 사람들이 잠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찾아가는 '꿈의 세계'라고 이해하면 그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선 '세계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탓에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 남기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려 한다.

 

  꿈 백화점의 주요 상품은 다름 아니라 '꿈'이다. 즐겁고 재미나고 행복한 꿈도 있고, 무한한 감동을 선사하는 꿈이나 바라고 또 바라던 희망과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꿈도 판매한다. 때때로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기도 하고, 태몽이나 예지몽 같은 신비한 꿈도 있다. 심지어 사람이 아닌 '동물들을 위한 꿈'도 판매한다. 한편, 꿈을 '판매'하는 설정이다보니 꿈을 '상품'처럼 설정하였고, 자연스럽게 꿈을 제작하는 '꿈 제작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전문가마다 저마다 색다른 꿈을 꿀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같은 상품'을 사더라도 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직접 꿈을 꾸는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도 당연하지만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을 소비한 대가는 '후불제'라는 점도 신기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설렘'이나 '기쁨', '두려움', '화남' 등등 여러 가지 감정을 정수(에센스)하여, 마치 '향수'처럼 병에 담을 수 있고, 그렇게 꿈의 대가로 받은 감정의 에센스를 은행에 맡기기도 하고 돈으로 교환할 수도 있다는 설정이 신기했다. 딴에는 '감정을 허비했다'는 투로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는 표현처럼 기쁨보다 더 큰 희열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선 그런 감정을 '화폐'와 교환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한 것에서 세련한 느낌으로 압도 당하고 말았다. 어찌보면 뻔한 설정인데도 결코 뻔하지 않는 익숙함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연코 '저마다의 꿈 사연'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꿈을 제작했더라도 꿈을 꾸는 당사자가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경험을 하더라도 누구는 '그 경험'을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거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북돋기도 하겠지만, 어떤 이의 성공스토리를 직접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거나 정반대로 실패스토리로 만들어버리는 불운을 경험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책의 내용 하나인 '대박을 내는 꿈'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에겐 '대박'을 내게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꿈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그런 '일상'을 담은...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 그저 그런 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럴 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떠올랐다.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담담한 이야기말이다.

 

  그동안 꿈을 소재로 한 신나고 재미난 소설과 영화를 보았지만 이 책보다 더한 감동을 얻진 못했다. 이 책을 '판타지'로 분류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한국형 판타지'로 거듭날거라 장담한다. 서양의 판타지와도, 동양의 판타지와도 사뭇 다르며, 누가 읽어도 '낯설고도 익숙한 꿈 이야기'에 흠뻑 빠져서 현실의 고민은 툴툴 털어버리고 아름답고 설레는 감동 한 숟갈로 한가득 달콤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신비하고 재미난 판타지 세계로 당신을 초대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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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의 신화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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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이야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 '단편소설'의 매력일 것이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플롯도 길지 않아서 이야기 전개가 빨라서 좋고 '메시지(주제) 전달'도 명확해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단편소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유머와 위트, 반전과 에로틱한 내용을 첨가한다면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짧은 서사'로 이 모든 것을 담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맹탕'이 되는 경우도 흔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짧은 만큼 '비유적인 표현'을 남발하다보면 웬만한 '문학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다지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는 난해한 소설이 되고 마는 단점도 극복해야 좋은 소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책 <돌고래의 신화> 단편소설은 어느 축에 드는걸까? 책의 뒤표지에 적힌 누군가의 평가는 [충격과 반전의 묘미], [빠른 갈등 전개], [녹아 흐르고 있는 에로티시즘]이라고 적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의 단편소설은 곳곳에 자살과 살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복선처럼 깔려 있고, 등장인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를 펼쳐냈으며,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관능적인 섹스를 나누는 장면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어 충분히 충격적인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읽는 맛'만큼은 높은 평점을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단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상적이고 강렬한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흐지부지 끝맺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충격적인 결말, 예상 못한 반전 따위를 염두에 둔 결말이라 그런 것이라 짐작은 된다. 허나 중년의 죽음이든 청춘의 죽음이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명확해야 할텐데, 그닥 공감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크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수상작'이라는 것은 일반독자에게 메리트가 크지 않다. 다시 말해,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과는 달리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에 흠뻑 젖어들게 만드는 '공감'되는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등장인물과 독자의 고민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등장인물의 삶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고, '보여지는 삶'은 다를지라도 소설속에서 전개되는 '개인적 고민'과 '사회문제', 그리고 '인물들의 갈등'이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 일반독자들은 이야기속으로 풍덩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속 등장인물이 겪는 고민과 문제에 '깊은 고뇌'가 보이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펼쳐지는 '에로티시즘'은 그저 흔한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눈을 현혹시킬 순 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동은 찾을 수 없기 마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인상 깊은 것은 '소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과 함께 어린 소년소녀가 보여주는 풋풋한 사랑을 짧은 순간 쏟아붓고 끝나버리는 '소나기'에 비유하며,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소녀에게 찾아온 강렬한 첫사랑이란 감정을 잘 녹여냈기 때문이다. 비록 시골출신이 아닌 독자라도 '첫사랑의 설렘'은 누구에게나 서툴고 강렬하게 찾아오기에 공감하기가 쉽고, 소년소녀의 서툰 몸짓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에로틱한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둘이 함께 건너는 징검다리 씬'과 '쏟아지는 비를 피해 흠뻑 젖은 움막 씬'은 이 소설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는 속설을 재확인하는 듯한 충격적인 결말, 또한 안타까움이 한껏 살아나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설렘과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난 그렇지 못했다. 인생은 꼬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청춘과 중년의 등장인물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고, 아픔과 고통의 나날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허우적거리듯 섹스와 일탈을 일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흙탕 같은 삶을 벗어날 유일한 출구는 '죽음'뿐이라는 듯 전개되는 이야기는...안타까울 뿐이었다. 좀더 희망적인 삶을 노래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생각밖으로 이야기는 재미 있었다. 그렇지만 깊은 감동과 진한 여운은 없었다. 마치 8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당시의 한국영화의 주된 소재가 바로 '방황하는 청춘'과 '위기의 중년'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배드신'과 '노출연기'만이 화제가 되었던...그런 느낌 말이다. 모쪼록 작가의 후속작들은 이보다 '공감력'을 갖추고 요즘 독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길 바란다.

 

글여울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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