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세금 사용설명서 - 2021년 개정 세법에 맞춘 부동산 절세전략 가이드
김성일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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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마흔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달은 점 하나는 '법을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나 어릴 적에는 일제의 헌병통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독재정권의 공포정치 때문이었지, 암튼 '경찰서'를 출입하는 것조차 굉장히 꺼리는 분위기였고, 어른들도 "법 없이 살 놈"이라며 착하게(?)...아니 경찰서 출입을 아예 하지도 않을 사람으로 사는 것을 최고로 치곤 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물론 불편한 것도 없었다. 착하게 살아가니 정말로 법을 몰라도 아무 문제도 없이 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가니 '경제(돈)'와 관련된 일들이 슬슬 괴롭히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 각종 세금을 직접 내곤 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라는 세금은 다 내고 살았었다. 공과금부터 소득세까지 '고지서'가 날라오면, 역시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내고 살았다. 그런데 보험도 들고, 펀드도 들고, 청약적금에 건강보험까지 이것저것 내는 세금의 종류가 많아지자, 내가 과연 적정한 세금을 효율적으로 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딱히 투자를 할 정도로 여유자금이 많았던 것도 아니기에 주식도 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는 더더군다나 생각지도 않았지만, 부모님을 모시면서 미혼으로 '1가구 1주택'을 살고 있으니, 재산세와 양도세, 그리고 상속세와 관련된 법 조항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부모님이 유일하게 남겨 주실 수 있는 '아파트 한 채'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을지 고민스러워지게 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양도세 40%, 증여세 40%, 상속세 50%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듣곤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계산을 해야 유리한지도 따져보고 싶고, 혹여 '비과세' 대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세금을 내더라도 '줄여서'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분명 책에는 친절한 설명이 가득하다. 따라서 대충은 이해가 되고 어떤 방법이 좋은지도 알 수는 있겠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여전히 모르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를 테면, 9억 원 이하의 아파르를 소유하고 있을 때에는 대부분의 세금이 '비과세' 대상으로 된다고는 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으면 어느날 갑자기 '세금고지서'가 날라와서 몇 억 원에 해당하는 과세를 부담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에는 '당황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서 차근차근 처리하면 '비과세 혜택'을 받거나 '절세'를 할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더 많았다. 친절한 책 설명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냐면 이 책에 담긴 상당부분의 내용이 '부동산 투자'와 관련된 설명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세대상'에서 제외가 되는 독자들은 책을 읽고 있음에도 '과세대상'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과세대상'이 과~하게 되는 내용에 대한 것만 잔뜩 읽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의 첫 머리나 단원의 첫 부분에 간단하게라도 '과세대상'과 '비과세대상'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선보이고 난 다음에 조목조목 과세설명을 덧붙였더라면 굉장히 친절한 책이 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이 책의 독자는 '절세전략'을 목적으로 읽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주택자'이면서 '고가의 부동산 소유자'이며,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부동산 관련세금을 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부동산 절세 원포인트 레슨'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닥 없는 소시민들에게는 딴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음을 먼저 밝힌다.

 

  그럼에도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은 법과 관련된 내용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진리다. 법을 잘 안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내 이익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권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법을 몰라서 손해를 보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민주시민이라면 더욱더 '법적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안타깝게도 법치주의는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 불친절함을 기본으로 셋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법에 대해서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는데 걸림돌이 없지 않다. <법전>을 읽을 때면 '모르는 용어'가 너무 많아서 분명 '한글'로 적혀 있는데도 내용파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용어'에 일본식 한자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는 비판도 있지만, 차차 고쳐나갈 일이고, 당장의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차근차근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법률 관련 서적>을 읽으면 겁나 졸릴 따름이다. 아무리 '표'나 '그래프'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만화 형식'을 빌려오거나 '그림'으로 이해를 돕는 방법을 선보여주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친절함(?)을 엿볼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말이다.

 

  또한, 부동산 세법이 매우 복잡한 것도 '책읽기'를 방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우리 나라는 '부동산 투기'가 과열되었다는 문제점 때문에 투기를 막고 투자로 선회(?)시키려는 정책적 노력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부동산 세법'은 전문가들조차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달라진 세법이 나올 때마다 어떤 방법이 유리하고, 어떻게 절세할 것인가 매번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세법에 관한 상식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알게 모르게 내는 세금으로 어렵게 모은 재산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빌론의 부자들의 비법 가운데 으뜸은 투자로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번 돈'보다 '적게 쓰면'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돈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번 돈보다 적게 쓰는 데도 아직 부자가 되지 못했다면, 그건 십중팔구 '세금'으로 줄줄 새어 나갔기 때문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금을 펑펑 낼 생각이 아니라면 '세금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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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2 :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 십자군의 원정로를 따라가는 시간여행 한빛비즈 교양툰 11
파니 마들린 지음,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김수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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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나라에서 <킹덤>과 같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열풍을 분 것처럼 서양에서도 <왕좌의 게임>과 같은 '중세'를 배경을 한 시대극이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긴 창과 방패를 장착한 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마상시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을 흠뻑 쏟아낼 정도로 '중세'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허나 곧바로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는 상상의 이미지일 뿐, 현실과는 다른 것일까? 아니면 '시대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아름답고 낭만이 가득한 시대였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중세는 꽤나 극과 극으로 갈리는 '모순의 시대'이기도 했다. 왕과 교황이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평민들의 생산력을 갈취하는데에는 한결 같이 최선을 다했다. 물론 합법적으로 말이다. 또한 평민들은 왕족과 귀족, 성직자, 그리고 기사 들에게까지 수탈을 당하면서도 엄청난 생산력으로 그럭저럭 넉넉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 바로 '중세'였다. 또한 여자에 대한 의식도 '원죄를 지은 이브'와 '성모 마리아'처럼 선과 악의 극단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도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건 마찬가지였다. 현실에선 싸움질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영락없는 조폭이었으나 '기사도'를 내세운 노래와 이야기속에서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등장해서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대상이 되곤 한다. 더구나 '아더왕의 전설'과 '성배(성유물)'를 구하러 떠나는 영웅의 이야기들은 실제 역사를 엄청나게 미화하였다는 비판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중세의 매력에 빠지는 것일까? 역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중세의 모습'은 비참할 뿐이다. 봉건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정립되면서 사회는 역동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주어진 신분에 만족하고 주어진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신분상승을 위한 노력 따위는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므로 '소수의 세력다툼'으로 왕조가 바뀌는 정도였을 뿐, 중세인들의 삶이 크게 바뀌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다. 신앙을 강조한 덕분에 경건한 삶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탓에 축제로 들뜨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조차 '이교도'나 '이단' 취급을 받을 지경으로 갑갑한 현실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이런 갑갑한 시대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원래 '결핍'이 많을수록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해지는 법이다. 장애가 없을 때보다 장애가 있을 때 '불편'을 더 많이 느끼지만 조금이라도 '불편'을 극복하거나 개선해나가면 행복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신분으로 억압된 사회속에서 살아야 '신분해방'과 같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법이다.

 

  이렇게 모순이 많고 갑갑한 시대인데도 중세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우리가 사는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모순과 답답한 사안들이 많다고 느끼는 친숙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중세의 매력'을 탐구하면 할수록 오늘날의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 비유적인 표현을 하자면, '갑갑한 문제로부터 탈출구'를 찾는 심정으로 중세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런지...그러나 가장 현실적인 정답은 "그냥, 재밌다"가 아닐까? 왕자와 공주가 사는 판타지인데, 우리가 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낯설고도 낯익은 '모순'이 갖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지는 것일테다.

 

  이런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접한 느낌은 설렘, 그 자체였다. 더구나 '십자군 운동'과 같은 중세시대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 연출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고 말이다. 근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런 설렘과는 약간 '다른 각도'로 중세를 바라본 책이었다. 이를 테면, <십자군 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건을 종합한 내용을 기대했는데, '십자군이 지나간 길'을 지나며 과거와 현재의 건축물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중세시대 '성직자의 삶', '기사의 삶', '농민의 삶', 그리고 '여성의 삶' 등과 같은 알찬 정보가 가득 담겨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기도 했다. 마치 책 속의 주인공들이 '성지순례자'가 되어서 중세의 길목을 누비며 중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일상을 비교하며 깊은 사색과 긴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책이었다. 이렇게나 알찬 책이었지만, '중세의 매력'을 잔뜩 기대했던 나였기에 살짝 미흡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중세가 그리 답답한 시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억압되고 종교적으로 어두운 시대라고 해서 '암흑시대'라고 불렸지만, 중세는 꽤나 '평등한 사회'였고, 때론 갈등이 심각해도 다투기보다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몰두했던 시대였다. 물론, 중세인이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의 개념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또한, '평화로운 방법'이라는 것이 '마녀재판'처럼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정해진 답을 말하여 평화를 이룩하라는 강요일 때가 더 많았지만 말이다.

 

  이렇게나 중세는 결핍투성이에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였다.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파문'을 공공연하게 남발하여 '교황의 권위'를 드높이기도 했고, '성지탈환'이라는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같은 편'을 공격하고, '유대인'을 수탈하곤 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다. 바로 '돈(이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협잡과는 달리 '순수한 신앙'으로 세상을 정화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정말 인간다운 시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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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1 :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 - 암흑의 시대 중세를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한빛비즈 교양툰 10
플로리앙 마젤 지음, 뱅상 소렐 그림, 이하임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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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중세를 엿보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다. 그 가운데 이 책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여성'이다. 중세 여성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다. 여전히 남성들에게는 '무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더 가관이다. 남자의 피조물이며 유혹에 약하며 음란하고 선정적인 까닭이란다. 이런 부정적인 관점이 널리 퍼진 것은 <성경>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최초의 여성인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기술에서 파생한 원죄인 것이다. 거기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여 '출산의 고통'이라는 형벌을 받았으며, 신의 형성을 본따서 만든 남자를 홀리는 음란하고 선정적인 존재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여성은 영원한 '미성숙한 존재'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남자들에 비해서 힘이 약하므로 보호 받아야 할 존재이고, 남자들과 동등한 교육을 하지도 않은 채 그저 '복종'만을 강요하면서도,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엉터리 논리를 선보일 뿐이다. 그래서 중세 여성의 권리는 모두 아버지, 남편, 아들이라는 이름의 '대리인'들이 대신 갖고 있으며, 만약, 셋 가운데 아무도 없으면, 먼저 차지한 남자가 모든 것을 차지해버려도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다. 여성들의 삶을 '남성의 관점'으로 풀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세여성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관계로 속속들이 파헤쳐볼 수는 없으나, 적어도 귀족여성의 삶만 보더라도 꽤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위층 여성의 혈통'으로 형성되는 귀족계급만 보더라도 중세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결코 하찮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는 '아들이 있는 귀족'이 신분상승을 위해서 결혼 전략을 잘 짜려고 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증명 된다. 이들의 열과 성을 다하는 자세는 중세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성은 모든 '집안일'을 관리감독하면서 귀족계급의 품위를 담당하였다. 특히 옷을 만드는 방직과 직조 작업을 도맡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당시에는 '옷'이 곧 '신분'이었으므로 여자옷은 물론이려니와 남자옷도 모두 '여자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자녀교육'도 도맡아 했다. 남자아이들은 7~8세가 되면 또 다른 스승을 찾기도 했지만, 여자아이들은 결혼을 하기 전까지 쭉 교육을 도맡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도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는 남자들 못지 않았다.

 

  물론, 남자들이 하는 역할에 비하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없다. 더구나 '사회참여'와 같은 굵직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여성들의 목소리'가 역사에 남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허나 남자들이 '칼'을 차고 다니던 시절이다. 치안이 형편없던 시절이란 말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당당히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음으로 비난을 한다면 무식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키워드는 '기사 문학'이다. 원래 기사들의 역할은 '전쟁 수행'이었다. 왕이나 영주는 자신들의 영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 깨나 쓰는 사람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에 적격인 집단이 바로 '기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중세 기사'를 조폭으로 떠올려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사도 정신>과 명백히 위배된다. 그럼 '기사'의 이미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바뀌게 된 것일까?

 

  그건 '십자군 운동'과 관련이 깊다. 성스런 예수살렘을 다시 되찾으러(?) 떠나는 기사에게 '수도사'의 명예를 주었고, 이교도와 맞서 싸우는 '군사'의 역할과 결합하여 '성당 기사단(템플 기사단)'이라는 칭호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스런(?) 전쟁을 치루는 기사에게 중세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기사의 모습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들을 노래하는 이들에 의해서 기사는 괴물(이교도적인 모든 대상)과 싸워 승리하면서도, 한 여성만을 섬기고, 오직 명예로운 일만 하겠다는 서약을 맹세한 집단으로 그려놓았던 것이다.

 

  흔히 중세는 세 부류가 있다고 한다. 기도하는 자, 전쟁하는 자, 일하는 자를 말한다. 이들은 각각 성직자, 기사, 농노를 가리키지만, 중세를 이해하는 세 개의 키워드라고 생각해도 큰 과언은 아니다. 중세는 '종교'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성직자'의 권위와 세속적인 지배가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라는 코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앞서 설명한 여성의 삶도 종교에서 말하는 '원죄'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제약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기사의 삶도 종교와 만나면서 환골탈퇴할 지경이었다. 이밖에도 중세를 속속들이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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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시미즈 켄 지음, 박소영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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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문구다.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윤회나 구원이기 이전에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살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막연할 따름이다. 건강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강 건너 불구경보다 더 무심하게 바라볼 대상인 탓이다.

 

  그러나 '암 선고'를 받은 이들에겐 다를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삶이 고작 1달이나 3달, 길어야 반 년이나 고작 일 년 남짓하다는 의사들의 소견은 환자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이들은 하루, 아니 1분 1초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환자들의 태도는 어떨까? 저자는 일본에 '정신종양학' 전문의로 지내면서 수많은 암 환자들과 상담을 한 결과, 놀라운 결론을 접할 수 있었단다.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에게 환한 웃음과 희망찬 삶을 발견하였다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분명 삶은 무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대부분 무미건조하기 십상인데, 죽음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암 환자들의 삶이 그토록 밝고 환할 수 있단 말인가?

 

  결론은 '후회없는 삶'으로 남은 생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환자들의 표정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단다. 남의 눈치만 보는 삶이나 남의 위한 삶 따위는 걷어 내버리고 오직 '자기를 위한 삶'으로 사는 1분 1초가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비록 건강을 잃어버려서 고통에 겨운 나날이 더 많을지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없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 말이다.

 

  욕심을 부려 본다면,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떨까? 혹시 막연하다고 느껴진다면 <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이라고 가정을 한다면,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 물론 쉽지 않은 상상일 것이다. 절실함과 절박함이 없는 삶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한 깨달음인 탓이다.

 

  그래도 애써 욕심을 부려보자. 아니 적어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응원이라도 보내 보자. 나의 삶은 그들에 비해 '영원'에 가깝다는 염치를 배우는 순간, 분명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리는 순간, 다시 말해, 죽을 각오로 '하는 일'은 무서운 힘을 보여주곤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에게는 뒤를 되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 다른 말로 '남의 눈치 따위'는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온전히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순간'부터가 진짜 자신의 삶이 시작하는 셈이다.

 

  평범한 이들이 투정부리는 오늘은 바로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문구가 새삼 떠오른다. 딴에는 너무 비장하다는 생각에 그닥 와닿지 않는 문구이기도 했지만, 하루하루가 심심해 죽을 지경인 이들에게는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릴 법하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하루를 살더라도 멋지게 살고 싶은 이들에겐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도 절박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지금 행복에 겨운 이들이라면 너무 뻔한 소리라는 느낌일테고 말이다.

 

  아쉬운 것은 '평범한 삶의 나날들'이 행복이라는 마무리였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얻은 교훈을 그리 '평범한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차라리 채찍으로 따끔하게 깨우쳤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고 있는데, "투정을 부리는 너의 삶이 행복한 거란다"라는 말이 씨알이라도 먹힐까? 차라리 암으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또래 어린이가 고통에 겨워하는 장면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더 시원한(?) 깨우침이 아닐까? 너무나 폭력적인 훈육이라는 비판이 앞선다면...나이를 조금 더 들게 하여, 스무 살 청년인데도 무료한 나날을 보내면서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다면..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여전히 '폭력적인 훈육'일까? 이 나이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꼰대라는 비판을 받을까? 그렇다면 나름대로 살만큼 산 '40대 중년'이라면 어떨까? 그 즈음에는 바람직한 훈육(?)일까나?

 

  바로 이렇게 '선택적인 깨달음'이라는 점이 아쉽다는 말이다. 가슴 깊은 울림을 주는 깨달음이라면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큰 울림을 주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소재가 비교육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나이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메멘토 모리'라는 문구가 주는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점 하나가 더욱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검은 바탕으로 물들게 되었을 때 '하얀 점'을 찍을 용기가 필요해지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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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공룡의 생태 한빛비즈 교양툰 3
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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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공룡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 걸까? 무엇보다 큰 덩치를 자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덩치가 큰 동물들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을 것을 보면 '절대적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른 이유를 꼽고 싶다. 내가 공룡에 큰 관심을 갖는 까닭은 바로 '어제의 공룡'과 '오늘의 공룡', 그리고 '내일의 공룡'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한다.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공룡이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까닭은 다름 아닌 '화석을 통한 연구'에 '연구자의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학계의 공인'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적인 가설'을 증명하는 방식인 탓에 허무맹랑한 상상력 따위의 허섭스레기 가설은 발붙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어릴 적의 공룡의 모습을 상상한 것과 마흔이 넘어선 지금의 복원된 공룡의 상상도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불과 2~30년이 지났을 뿐인데, 공룡에 대한 연구가 이토록 깊고 넓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오늘날의 새'가 공룡의 후손이라는 것과 공룡은 파충류와 달리 '롱다리'라는 것, 그리고 공룡에게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을 거라는 것 등이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진화의 계통도'에서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의 순서로 진화가 이루어졌으며, 진화가 진행될수록 고등해진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 가운데 '공룡'은 파충류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확정지었기 때문에, 공룡은 '새대가리'보다 못한 저능한 거대동물이었을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했기 때문에 '뇌용량'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오늘날에는 '공룡'은 파충류도 아니고 조류도 아닌 독자적인 생태적 지위를 가졌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거기다 공룡은 파충류와 달리 '따뜻한 피'를 지닌 온혈동물이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다. 요즘에는 온혈이나 냉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항온'과 '변온'이라고 표현하므로, 공룡은 '항온성 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늘날의 새가 '항온 동물'이기에 새의 조상인 공룡이 '항온 동물'이라는 것이 얼추 보더라도 맞을 것이다. 이는 공룡이 육지에서만 번성하고 바다에서는 살지 않았다는 점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커다란 덩치로 바다에서 적응하려면 엄청 높은 체온을 유지해야만 했을 것인데, 공룡이 번성하던 '쥐라기 시대'는 지구의 기온이 지금보다 더 높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체온이 더 높았다면 소행성이 떨어지기도 전에 고혈압으로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룡이 번성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므로 그렇게 높은 체온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쪽으로 진화했을 거라는 상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한편, 공룡은 커다란 덩치 때문에 느릿느릿 걷거나 기어갔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화석'에서 보여주는 증거들은 두 다리 또는 네 다리로 겅중겅중 잘 걸었으며, 커다란 꼬리나 무거운 배를 질질 끌지 않고 당당하게 걸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그런 탓에 과거의 공룡화석 복원은 하나같이 '꼬리로 무거운 체중을 떠받치는 자세'이거나 무거운 체중을 버티기 위해서 '수중생활'을 했을 거라고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공룡은 물속에서 살지 않았다. 간혹 <공룡대백과>에서 공룡이라고 소개하는 물속 생물체들은 물고기의 모습을 닮은 '어장룡'이나 목이 긴 '수장룡'이라고 불리는 파충류들이다. 분명히 공룡과는 사뭇 다른 종인 셈이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학계의 보고'는 왜 이토록 빠르게 달라지는 것일까? 그건 바로 '공룡 연구'의 핵심이 화석인 탓이다. 과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이 오늘날의 생명체와는 사뭇 다른 덩치를 자랑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관심도는 매우 높지만 연구할 수 있는 재료는 고작해야 '돌이 되어 버린' 화석 뿐인 셈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오로지 연구자의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주관적인 결과물을 내놓곤 했지만, 오늘날에는 온갖 첨단과학장비 덕분에 공룡의 모습을 좀더 '객관적'인 결과물을 내놓으며 과학적인 복원작업을 하기 때문에 좀더 수긍할 수밖에 없는 공룡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복원된 오늘날의 공룡의 모습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바로 '깃털 달린 공룡'이다. 이는 오늘날의 '새의 모습'을 닮았기에 더욱 흥미를 끈다. 더구나 잠들다 화석이 된 듯한 공룡의 모습은 오늘날의 새가 잠든 모습을 영락없이 빼다박은 듯하였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조새'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참고로 시조새는 오늘날의 새와 '공통 조상'을 가졌을 뿐, 오늘날의 새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면 좋다. 예컨대, 인류의 조상이 침팬지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처럼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과학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처럼 증거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매우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따라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표현도 매우 과학스럽다. 어찌 이런 과학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또한 '공룡 연구'처럼 매우 빠른 속도로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공부는 정말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또 달라질 공룡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이 책을 만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일 것이다. 물론 공룡이 좋아서 읽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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