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이주윤 지음 / 빅피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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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VI / 빅피시 2번째 리뷰] 느닷없이 시작한 '필사'에 이책 저책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한 '필사 초보'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책을 말이다. 첫 번째 책은 <철학의 쓸모>였다. 나름 철학을 좋아하기도 했고 '좋은 글귀'가 참 많을 것 같아서 시작한 책이었다. 그렇게 한 달 간 알차게 써나갔다. 그런데 '한 권의 책'을 필사를 지속적으로 하다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한 달 내내 '비슷한 내용'만 필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이 다 거기서 거기일리는 없지만, 어줍잖은 실력으로 너무 어려운 분야를 선정했더니, 비슷비슷한 글귀만 골라서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은 좀 더 다채로운 책을 선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이 바로 이 책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이었다. 이주윤 작가의 2번째 필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선택한 까닭은 첫째, '필사 공책'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책 자체가 '필사 공책'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질감도 좋았고, '접착제로 발라놓은' 떡제본이 아니라 '실로 꿰맨 제본' 형식이라서 180도로 쫙 펴졌기 때문에 필기감이 너무 좋았다. 둘째는 100개의 필사를 하기 위해서 100권의 책에서 100개의 글귀를 작가가 미리 골라놓았다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100일 간은 책을 따로 고르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나중에 필사를 다 하고 나서는 이 책에서 소개한 100권의 책 가운데 땡기는 책을 골라잡아서 필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물론, 나쁜 점도 있었다. 필사를 시작할 때 골라둔 '만년필'이 있어, 그 만년필로 첫 번째 필사책을 무사히 마쳤는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쓸 수가 없었다. 만년필의 잉크가 번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의도한 것보다는 두껍게 써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펜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볼펜(모나미)'과 '젤리펜'을 병행해서 쓰고 있다. 젤리펜도 살짝 번지긴 했지만 워낙 가느다란 '세필'이었기에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책으로 필사를 하시는 분들에겐 '볼펜'을 권장하고 싶다. 이게 딱 적당했다. 너무 미끄럽지도 않고 적당히 마찰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오히려 '볼펜 필기감'에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필사를 시작한 지 '석 달'째인 초보지만, 그래도 나름 필사의 경력을 쌓아가니 좋은 점이 참 많았다. 먼저 '좋은 글귀'를 날마다 음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하루에 한 편의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책도 '1일 1독'을 하는 편이다. 그런데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어도 '날마다 좋은 글귀'를 만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사책'을 따로 읽고 쓰는 습관을 들이니, 이게 가능해졌다. 또,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어서, 읽은 책은 글귀의 내용이 추억처럼 떠올라 좋았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은 그 책에 이렇게 좋은 글귀가 있었구나 하면서 새삼 감탄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서 '필사'에 내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쓰는 [나만의 필사법]을 적용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또 하나는 '생각'이 잘 떠오른다는 것이다. 책 한 권을 완독할 때는 전체의 줄거리를 음미하며 등장인물 간의 갈등구조와 대사가 주는 감동을 떠올려야해서 굉장히 '긴 호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긴 호흡'을 하다보면 생각보다는 느껴야만 할 때가 많다. 때로는 이생각 저생각이 마구 뒤죽박죽이 되어 '잡생각'으로 종합될 때도 있는데, 앞뒤 다 짤라먹고 '좋은 글귀', '명문장'만 딱 골라서 읽으니, 그 글귀,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도 '한 가지'로 바로 꽂혀버리는 경험을 하면서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일도 수월해졌다.

물론, 이 방법도 아주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달 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내란증후군'에 시달릴 때는 아무리 좋은 글귀를 읽어도 머릿속에는 온통 '탄핵' 생각만 떠오르고 '내란범'들에 대한 단죄를 어떻게 내릴까 하는 고심만 떠올라서, 한껏 뽑아놓은 좋은 글귀에 '화만 잔뜩 치솟은 생각'을 옮겨 적는 날들도 참 많았기 때문이다. 절제를 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됐다.

암튼, 필사는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좋은 습관'인듯 싶다. 필사하기 전에는 그저 '내 잘난 기억력'에만 의존했더랬는데, 이제 '필사'를 통해서 점점 잊혀져 가는 기억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기록'으로 오래오래 두고두고 꺼내 읽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참 좋았다. 필사 공책이 늘어나면 깔끔하게 정리해서 '또 다른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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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개정판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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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V / 이성과힘 1번째 리뷰]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조세희 소설가의 단편모음집이다. 무려 50년 전의 소설이 지금도 주목받고 있는 까닭은 그 시절의 아픔을 겪게 만든 '구조적인 문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가난한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관통하기 때문이다. 전혀 위화감도 없이 말이다. 이는 그 시절의 가난의 원인과 지금의 가난의 원인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또 하나는 '부자들의 인색함'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돈이 돈을 벌어오는 구조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진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것이고, 빈자는 더 빈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난장이네 가족'도 인정하는 바다. 경기가 좋으면 좋을수록 부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가니 진짜로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부를 쌓았으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의 몫까지 탐을 내느냔 말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에 살고 있는 '난장이네'는 조상 때부터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난장이의 조상은 '노비 출신'으로 인심 좋은 양반이 죽으면서 떼어준 땅에서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왔는데, 난장이의 대에 와서는 이를 '무허가 건물'이라고 하면서 난장이 손으로 직접 헐지 않으면 '철거비용'까지 물어주어야 한다는 통지서를 받고 말았다. 이렇게나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국가조차 '난장이의 편'을 들지 않고, 부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는 '재개발사업'을 벌이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원래 살던 지역주민들을 '불법체류자'로 엮어서 살던 곳에서 무일푼으로 떠나라고 종용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난장이네'는 입찰딱지라도 받아서 푼돈이나마 '이사비용'을 받아서 떠날 수 있었지만, 난장이의 이웃들은 그 딱지조차 받지 못해 용역깡패들에게 두들겨 맞고 반병신이 되어서 집도 없이 쫓겨날 판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 '정의구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한편, 부자들도 할 말은 있다. 자신들이 쌓은 부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합법적인 노력'에 대한 합당한 대가였을 뿐, 부자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면서 빈자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자신들은 부를 늘려나갔고, 그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까지 막아서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며, 그에 따른 법적 조치를 망설일 까닭은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그렇게 부자들은 '난장이네의 입주권'인 딱지를 난장이네가 원하는 가격에서 깎지 않고 사들였다. 난장이네 이웃들의 딱지까지 몽땅 말이다. 그렇게 난장이는 정들었던 집이 허물어지는데도 '마지막 식사'를 오순도순 나눠먹고 철거반이 허물어버린 담벼락으로 빠져나와 집을 비워주었다. 갈 곳도 딱히 마땅히 없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입주권'을 사들인 부자가 그곳에 세워질 아파트에서 살기 위해서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그렇게나 많이 사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사모은 딱지에 2~3배의 이윤을 붙여 다른 부자에게 되팔아버리는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았다. 난장이네에게 25만원을 주고 산 딱지를 다른 입주자에게 45만~70만원 선에서 팔아버린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해서 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직거래'를 해서 난장이네에게 50만원을 주고 사갔다면, 난장이네도 '이사비용'과 더불어 '전세자금'이라도 마련해서 다른 곳에 새롭게 정착할 수 있는 자본을 챙길 수 있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이를 국가가 나서서 조금만 관리했더라면 가난한 이들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가난한 사람이 이런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헐값'에 집을 넘겨버리는 일도 미연에 방지하면서 말이다. 왜 국가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려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이런 일은 또 벌어진다.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노동조합을 이끌어가는 주동자로 몰려서 '사측'과 협상테이블에 앉아서 협의를 이어나가는데 '불법파업'을 조장했다면서 노조측이 강성하게 대응하도록 선동했다며 사측으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다시 말해, 선량한 노동자들은 성실하게 일을 하고 현재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도 만족을 하고 있는데, 난장이의 큰 아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서 고의적으로 파업을 조장하고 선량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무리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등 불법적인 일을 자행했다는 내용의 고발이었다. 이에 난장이의 큰 아들은 '사측의 주장'은 궤변이라고 대응한다. 회사가 엄청난 이익을 봤는데도 노동자의 임금을 고의로 '동결'하고, 근로기준법에도 저촉되는 추가업무를 강요했으며, 규정된 근무시간을 초과했는데도 '추가수당'을 제대로 쳐주지 않아, 회사가 노동자의 정당한 몫을 가로챈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이를 발뺌으로 일관하고, 노조간부를 비롯해서 노조원들을 '불법파업'이라 협박을 하며 정당한 '노동쟁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당한 조치로 일관하고 있음을 낱낱이 밝혔다. 이에 따라 회사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회사 이름으로 20억원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미명으로 기부를 하며 호의적인 여론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기부금 20억원은 '회삿돈'이 아니라 '노동자의 몫'이 분명하며, 기부를 하더라도 '노동자의 이름'으로 기부를 했어야 맞다고 시시비비를 가렸다.

그럼에도 사측은 노조간부를 일괄적으로 고소했으며 특히 '난장이의 큰 아들'은 부당한 해고를 통지하며, 노조까지 해산시켜버리는 '악덕사장의 행위'를 보여주었다. 이에 참지 못한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는 회사의 사장을 '살해'할 목적으로 찔렀는데, 알고 보니, 그 사장이 아니라 사장과 꼭 닮은 '동생'을 찔러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말았다. 난장이의 큰 아들은 졸지에 '살인자'가 된 것이다. 앞서 난장이는 철거반에게 온가족이 쫓겨나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막내딸이 '행방불명'이 된 사실에 비관해서 '공장 굴뚝'에서 추락해 자살을 했으니, 난장이네 가족의 비극은 대를 이어 일어나게 된 셈이다. 이런 비극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행방불명이 되었던 막내딸은 사실 '자기네 집'을 되찾기 위해서 처녀의 몸으로 부자에게 성욕구를 처리해주는 역할을 자처하며 부자네 집에 잠입했다가, 부자가 잠든 틈을 타서 '자기네 집 입찰권(딱지)'과 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의로 새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입주해야할 아버지가 자살을 해버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올린 입주권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집을 되찾아주기 위해 막내딸은 '자신의 몸'을 담보 삼아 저당잡혔다가 '자기 몫'을 단단히 챙겨서 달아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사이에 그런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책이 한때는 '금서목록'에도 올랐다고 한다. 부자들에게 '살인'까지 저지르는 빈자들의 행동강령(?)을 부추기는 불온한 내용이 담겼다는 게, 그 이유라던데...글쎄,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차마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읽으면 '살인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니 불건전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외국의 소설은 이보다 더한 '살인범'이 등장해도 명작소설이라며 극찬을 하지 않던가.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건, 이 땅의 부자들이 빈자들을 두려워할 만한 '쫄리는 일'을 해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부자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뜨끔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그들이 '합법'을 목놓아 부르짓지만 결코 '합법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서목록'에 올릴 까닭이 없다. 오히려 정정당당한 부자들이라면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이 책에선 '재벌의 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빈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역할로 나오기도 한다. 아쉽게도 자신의 친족이 변을 당하자 '살인자에게 관용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기본적으로 부자들도 '선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놓인 환경 때문에 '끝까지 선량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자신이 가진 부를 '물려주기' 위해선 빈자들의 몫을 빼돌려 '자신의 몫'으로 착복하는 일을 하지 않고선 부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자로 살다보면 '빈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넣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냉혈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자가 빈자들을 궁휼히 여기면 '부를 세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악착같이 착취하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자행해야 겨우 '부자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대한민국 부자들만 이런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부자들이 다 이런 축인가? 정녕 부자가 되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면 난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다. 정말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어릴적부터 왜 '존경받는 부자'가 없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더랬다. 최부자의 예도 있지 않던가?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하고, 곳간을 채우려 들지 말고, 관직을 탐하지 말라는 원칙으로 '부자의 의무'까지 제시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지금도 이런 재벌이 있다면 온 국민들이 '돈쭐'을 내주려 벼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안팎으로 이런 재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정녕 부자들은 다 '착취'를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란 말인가. 굉장히 서글픈 일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나서면 어떨까? 한 나라에 빈자가 많아지면 정치, 경제, 사회가 제대로일 리 없으니 말이다. 가난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가난'이 부끄럽지 않도록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 가득한 복지정책을 촘촘히 만들어두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그러라고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 아니겠는가. 오히려 이런 좋은 일에 세금을 투명하게 쓰인다고 국가가 앞장을 서면 국민들도 더 적극적으로 '세금'을 내려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부자들이 따로 기부금을 내지 않아도 '세금탈루' 할 생각말고 따박따박 내야할 세금 다 내는 것으로 빈자들의 의욕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다. 매번 '선심성 정책'이라면서 발목만 붙잡지 말고 '효과적인 복지정책'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가 되겠느냔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꿍쳐 먹기에 해마다 '예산부족'으로 추경하는 것도 모자르다고 하면서, 정치인들 월급만 따박따박 올려 받아 처먹냔 말이다.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무너지면 안 된다, '공산주의가 젤 싫어요'라고 하면서, 나라 경제가 휘청이게 만드는 '빈자들 양성 프로젝트'는 왜 매번 빠뜨리지 않고 시행하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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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그게 최선입니까? - 윤리가 과학에게 묻는 질문들,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이음스코프
강호정 지음 / 이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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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V / 이음 2번째 리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학'이 주는 편리함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만능주의'에 기대어서 우리가 마주한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을 정도로, 어쩌면 그 '믿음'이라는 것을 넘어 '종교적 맹신'이나 '광신도'처럼 굴면서, 과학에 기대어 산다. 그렇다보니 때로는 '과학'이 가져온 새로운 문제마저도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은 문제점이 발견된 '주체'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마련이데, 현대의 과학을 대체할 새로운 것이 마땅하지 않기에 문제를 발생시킨 과학을 '비과학'으로 내몰고, 대안으로 내세우고 문제점을 해결한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새롭게 세우는 일이 당연시 된다. 그만큼 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위치는 견고하다고 놓고, '과학자'의 위치도 견고한지 되물어보자. 우리는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서 '기존의 과학'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과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과학'과는 달리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신뢰도는 완벽한 신뢰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면 '과학자'들은 과학을 행하는 사람이기에 꽤나 신뢰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들 자체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미친 과학자'를 공상과학소설 속에 등장시켜 지구멸망, 인류멸종을 부추기는 '지구정복'이란 허황된 꿈을 꾸는 과학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때론 인간이 아닌 '과학의 결실'로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서 허황된 꿈, 아니 로봇에게 어울리는 '엉뚱한 알고리즘의 결과'로 지구환경을 깨끗하게 되돌리기 위해서나, 하나 뿐인 지구를 멸망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인류멸종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미친 로봇'이 등장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때에도 우리는 '과학'을 맹신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과학이 완전무결하게 인간에게 이롭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은 과연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고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과학에게 '최선입니까?'라고 되묻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과학자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지 않는다. 또 '과학적 수행'이라면 무조건 옳은 절차이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이렇게 과학적 판단과 수행의 결과물이 늘 '윤리적 문제'를 아무런 문제도 없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이 있었을 때에도 일본정부는 '과학적 검증'을 강조하며 완벽하게 걸러진 방사능 오염수는 깨끗하기 때문에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발표를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나라에서 '의문'을 내비췄고, '우려'를 표명했다. 왜냐면 현재의 '과학기술'로 아무리 완벽하게 '방사능 오염수'를 걸렸다고 하더라도 방사성원소인 '삼중수소'는 거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정부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방류하는 오염수는 안전하다면서, 이는 '과학적 검증'을 거쳤기에 오염수가 아니라 '처리수'라고 표현해야 맞다면서 끝끝내 방류를 해버렸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방류를 할 계획인가? 일본정부의 발표대로라면 2035년까지란다. 그때에는 '삼중수소'마저 완벽하게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안전하지만 그때에는 더 안전할 것이며, 더 나아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봉을 해체할 수 있는 과학기술도 개발완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점을 완전하게 해소할 것으로 기대한단다.

이런 일본정부의 발표에 당신은 얼마나 신뢰를 보내는가? 과연 '방사능 오염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마실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또한 이미 '과학적 검증'이 되었다는 일본정부의 발표도 신뢰가 가느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을 윤리적 잣대로 판단을 할 때 '무한신뢰'를 보낼 수 없게 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 <과학, 그게 최선입니까?>에는 이런 불편한 진실을 더 많이 마주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과학자들이 항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학이 우리는 늘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은 '과학이 우리에게 늘 밝은 미래만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물음에 '상세한 예시'를 보여줌으로써 과학, 또는 과학자에게 '윤리적 물음'에 대한 불편한 답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학'을 불신하자는 말을 건내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다만, 과학을 맹신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알맞은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다. 어차피 '과학'도 완벽할 수는 없다. 왜냐면 '과학연구'를 하는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일지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틀린 과학'일 수도 있다. 마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옳다고 믿었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자 '틀린 과학'으로 증명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은 '과학적 진실'이라도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으로 증명된 것'을 모두 부정하자는 말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적 증명을 부정하기 위해서 '또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해서 두번, 세번 안전한지, 확실한지 살펴보는 꼼꼼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꼼꼼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선 '기후변화'는 축복일 뿐이며 따뜻해진 지구는 더 많은 생명체가 번성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기에 걱정할 것이 전혀 없는 '자연스런 변화'일뿐이라고 일축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기후위기'로 지칭하며 엄청난 자연재앙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파괴될 것이고, 생태계는 망가지고, 지구환경은 펄펄 끓거나 빙하기를 맞아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절망적인 전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을 때를 대비한 '대안'을 마련되어 있는가? 그 또한 '없다'고 한다. 왜냐면 이미 늦었기 때문이란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온실가스배출'을 지금 당장 막는다고 해도 지구의 기온이 더 오를 수밖에 없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류는 멸종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늦추는 정도밖에, 그래봐야 2040년까지라는 절망적인 전망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온실가스 감축'을 하지 않으면, 그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만 내놓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다. 우리 인간은 '하나 뿐인 지구'를 망치는데 주범이고, 확신범이자, 현행범이긴 하지만, 하나 뿐인 지구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역설적이지만 '과학'뿐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오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긴 하다. 과학으로 망친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구환경에 최악이었고,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차고도 넘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어쩌랴? 인류에게 남은 방법이 '과학'뿐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는 맹신만큼은 결코 가져선 안 된다는 지적에 겸허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의심할 바도 없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과학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싶다. 적어도 이 책에서 묻는 '윤리적 질문'에 과학은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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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2 : 자본이라는 신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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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I / 돌핀북 2번째 리뷰] 1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구석기부터 근대 이전까지 경제적인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2권에서는 '자본주의시장'이란 주제로 근대 이후에 펼쳐진 경제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과연 '자본'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른 '노동의 가치'를 살펴보자.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의 경제모습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까지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사꾼'이 더 많은 부를 쌓게 해주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꾼을 '토지'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이들을 '농노'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지배하는 '영주'라고 불리는 지배계급이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하고 있어서 농노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독점하며, 부를 늘려갔다. 이를 '장원경제'라 부른다. 원시공산사회였던 '석시시대'에는 함께 노동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불만도 없고, 지배자도 없었지만, 경제생산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연)환경변화'에도 인간들은 쉽게 굶주렸고 죽어나갔다. 이를 극복하고자 더 많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고, 단순한 돌칼이었지만, 농사일을 더 쉽게 해주는 원리를 터득하고부터 인간은 '생산량 증대'를 위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중세의 봉건제와 장원제도가 정착되면서 인간은 더이상 평등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계급이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생산한 물질을 가로채면서(세금 따위) 일하지 않고도 부를 늘려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하거나, '생산도구'인 철제농기구, 가축, 그리고 강력한 무기 등을 이용해서 피지배계층이 생산한 물질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했던 인간이 불평등해진 까닭이다. 부의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러한 '구체제'는 빠르게 무너졌다.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왕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에게 위임(왕권신수설)'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압과 착취를 당연시 했으나, 르네상스 이후 '신중심의 사상'에서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바뀌게 되자 더는 피지배계층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참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왕과 귀족, 성직자 들의 권력을 흔들어버리고 난 뒤에 '평등한 세상'이 찾아왔을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왕과 귀족같은 '특권계층'이 사라진 듯 싶었지만, 그들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층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점한 '부'를 이용하여 빠르게 '자본화'하였고, 그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을 이용한 부르주아들이 '지배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피지배계층의 생산물을 또다시 착취하는 구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노동착취'다. 노동자가 당연히 일을 한만큼 정당하게 받아야 할 '임금'을 경쟁의 논리를 내세워서 '저임금'만 주고 하루 15시간 이상 부려먹는 구조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몸을 혹사당한 노동자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냥 '해고'를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아픈 노동자를 대신할 건강한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노동자보다 농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농장에서 먹거리를 생산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으로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먹을거리가 부족해지면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그뿐이었다. 이젠 '공장'을 얼마나 더 많이 돌리느냐가 '자본증식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장의 수를 늘려나가다보니 더는 '수익창출'을 하기 힘들어졌다. 왜냐면 '공급과잉'으로 인해서 더는 생산품을 판매할 곳(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국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저생산저성장 경제구조로 경제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럽국가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건 바로 '시장개척'이었다. 공장에서 만든 생산품을 판매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을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기계'를 도입해서 더더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유럽국가들 안에서는 더는 '시장'이 확보가 안 되니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장문을 닫고 기계를 멈추는 것이 '순리'겠지만, 자본주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생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늘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유럽의 각국은 시장개척을 위해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였다. 그로 인해서 인간(백인)이 인간(유색인)을 죽이고 땅을 빼앗고, 원재료를 헐값에 사들이고,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고가에 강매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킨다'라는 제국주의를 퍼뜨려서 인간사회에 '약육강식의 이론'을 적용하는 무리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자본주의'는 유럽인들을 배불리 먹여 살렸다.

그런데 발빠르게 식민지점령에 뛰어든 선발주자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후발주자들은 '식민지'로 삼을 만한 땅이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탐욕'이 부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이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직면하고서 탐욕을 조금이나마 줄이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과 파괴를 일삼고 온통 폐허가 된 자리에서 또다시 엄청난 수익창출을 해냈다. 각국이 참전한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전쟁물자'를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더 강한 무기를 만들려는 욕망 덕분에 '과학기술력'은 더욱더 발달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를 기반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게 된다. 이른바 '수요폭발'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또다시 공장을 더 많이 만들고, 기계를 가동시켜서, '공급과잉'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만드는 족족 '생산품'을 팔려나갈 테니까 말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해 경제호황은 계속 이어나간다. 사람들은 호황속에서 노동만으로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식투자'라는 새로운 수익창출 방법을 익혀 나간다. 경제호황 상황에서 '투자'는 곧 '이익'이니까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게 되고, 그 덕분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돈을 더 많이 벌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급과잉'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시장'은 포화상태가 된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전세계에 더는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정말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장'문을 닫아야만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멈추는 순간 큰일이 난다. 그동안 받은 '투자금'이 얼마인데, 그 투자금에 이익까지 챙겨서 투자자에게 돌려주려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공급과잉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다. 물건을 만들어서 내놓아도 사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여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경쟁사도 금방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럼 노동자를 해고해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경쟁사가 금세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다가 그만 망해버렸다.

이제 시장에는 '값싼 물건들'이 넘쳐난다. 소비가 살아났을까? 소비를 해야할 주체가 바로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방금 '해고' 당해서 실업자가 되었다. 소득이 없어졌으니 생계가 막막하다. 그래서 소비를 더욱 줄인다. 그리고 맡겨놓은 예금과 내일을 위해 투자했던 원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지만, 이미 늦었다. 공장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니, 그 공장에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도 뒤를 따라서 도산을 해버렸다. 노동자들은 실직에, 예금에, 투자금까지 다 날려버려서 살길이 막막해진다. 바로 미국 월가의 '검은목요일'과 뒤이어 벌어진 '경제대공황'이다. 이때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미국을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퍼져 나간다. 그나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에 닥친 대공황의 여파를 '식민지'에 떠넘기면서 용케 해쳐나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그야말로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을 칠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경제상황을 만든 '자본주의'는 이후로 정신을 좀 차렸을까? 발빠르게 성장하고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 '공급과잉'이 저지른 폐해를 목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2권의 내용은 여기까지고, 그 뒷이야기는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1930년대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불과 100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자본주의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경제체제로 작동하고 있다. 대안이 시급해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3권에서는 그 '대안'이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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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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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 / 더퀘스트 2번째 리뷰] '필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 어처구니 없는 '비상계엄'이 발표되자 '윤석열 씨'로 시작하는 필사도 겸하기 시작했으니까. 작년 11월 4일이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리'를 작성해본 경험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에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는데, 나도 뭔가를 해봐야겠다면서 시작한 목표가 '1년에 책 100권 읽기'였고, 읽은책 목록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쉽게도 그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들은 보관상태가 엉망이어서 '다이어리 가죽자켓'에 곰팡이가 쓸기도 했고, 글씨도 삐뚤빼뚤이라서 한 10여 년 전에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독서기록'은 쭉 써오긴 했는데, 2005년부터는 손글씨가 아닌 '온라인'에 리뷰형태로 남겨왔기 때문에 '종이'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 작년 11월에 다시 시작한 것이 '필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나름 세 달째 쓰고 있고, 거의 날마다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온라인서점', 그리고 '투비'와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인기는 별로 없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꾸준히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필사'를 시작하고 보니, '필사'에 관련된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 있는 줄은 몰랐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문구점'에 각종 공책이나 다이어리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길래 '누군가' 사서 쓰기는 하다보다 싶었는데, '필사'나 '기록' 관련 책이 이렇게나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더욱더 부지런히 쓰고 있기는 하다. 배우고 싶은 선배(?)님들의 '필사기록'이 참 많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다. 왜냐면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작정 '따라쓰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 결국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난 20년간 꾸준히 '리뷰'를 써오면서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온라인 타이핑'과 '오프라인 손글씨'의 차이점은 빠르고 느린 '속도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쓰는 것은 '쓰면 쓸수록' 점점 손에 익어가는 느낌이 들고, 온라인과는 달리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과정이 녹아 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시점부터 고민과 불평이 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전문적인 필사가들'만큼 자신이 직접 쓴 '글씨의 모양'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맘에 안 들고, 글씨크기도 고민이고, 고수님들이 작성한 '기록'들은 한없이 예쁘기만 한데, 왜 내가 쓴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컸다가 작아지고, 왼쪽의 글자배열은 어느 정도 줄을 맞출 수 있겠는데, 어찌해서 오른쪽의 글자배열은 들쑥날쑥인 건지...이런 불만이 점점 쌓이다보면 어느새 '필사'를 빼먹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쓰지 않고 마는 경험이 다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문가들의 다이어리'는 한권 한권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멋져 보이는데, 내가 직접 쓴 다이어리는 왜이리 허술하고 맹탕인 건지, 다 쓰고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 남 보여주기 부끄럽기만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필사공책'이나 '다이어리'는 한 10년쯤은 '연습' 삼아 이렇게 저렇게 써보다가, 그 가운데 '어멋! 이건 딱 내 스타일이야!!'라는 것이 유레카! 처럼 발견이 될 때, 그걸 중심으로 삼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깨달음을 온라인리뷰 20년을 써보고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완성형 필사기록'을 남겨야지..라는 욕심을 버리고, 1000원짜리 싸구려 공책을 사서, 모나미 검정 볼펜으로 쓱쓱싹싹 꾸준히 써나가는 연습부터 하다가, 그 공책이 10권쯤 쌓였을 때, 예쁜 다이어리와 잘 써지는 펜을 구입해서 '나만의 다이어리'를 작성해나가는 방법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현재 필사 3달째인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공책'에다가 '공짜 선물로 받은 펜'으로 매일매일 쓰는 연습부터 하고 있다. 리뷰쓰기는 '20년차'지만, 손글씨는 이제 '완전초보' 딱지를 떼기 전까진 이런 작업을 매일매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글씨도 한글자 한글자 '예쁘게' 쓰는 것도 좋겠지만, '줄'을 맞춰서 쓰는 연습이나 '글씨크기'를 일정하게 쓰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이어리 작성 고수들'은 글씨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예쁜 글씨체'나 '유행하는 글씨체'가 따로 있기도 하고, '펜글씨 교본' 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 어떤 글씨체라도 웬만하면 '줄 맞추고', '크기만 일정'하면 나름대로 개성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습만 꾸준히 하게 되면, 굳이 '다이어리'에 옮겨 쓸 것도 없이, 책의 한귀퉁이에 써넣은 '메모'만으로도 꽤나 볼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고, 그렇게 '코멘트'나 '밑줄'을 남긴 책은 읽을 때마다 '추억'이 되살아나서 기쁘고 '예쁜 글씨'에 또 한 번 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록'을 잘 남기기 위해서는 '글씨 쓰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개성 넘치는 글씨는 대환영이고, 중요한 것은 '줄'과 '크기'만 일정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 다음에서야 이 책 <기록이라는 세계>의 저자인 '리니'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리니님이 남긴 기록물을 참고 삼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 '내 수준'은 초보임이 분명하기에 리니님처럼 '완성형 기록물'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꼭 따라하고 싶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인생의 오답노트'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오! 이 방법은 꼭 따라하고 싶어졌다. 사실 '오답노트 학습법'의 효용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도 학창시절이 아니라 논술쌤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오답노트 작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이고 보니, '인생의 오답노트'도 귀에 너무나도 솔깃했던 것이다. 50살이 넘도록 살아온 내 인생에 '오답'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아예 없는 셈이다. 그래서 써야할 '오답노트'가 쌓이고 쌓였음을 생각해볼 때, 이건 정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고전 리뷰'를 필사해보겠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도 하고 있고, 쭉 해오기도 한 것인데, '온라인 타이핑'으로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고전 리뷰'를 그동안 5000자 이상씩 써왔는데, 그걸 모두 '손글씨'로 쓰는 것은 무리일테고, 그렇게 쓴 리뷰를 거르고 걸러서 '딱 한 문장', 혹은 '딱 한 문단'으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면 좋을 듯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손글씨 연습부터 하고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시작하려고 한다. 꽤나 멋진 기록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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