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 연대기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16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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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오래도록 읽은 고전은 없다. 잠시 나관중의 <삼국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 적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별자리이야기'로 시작해서 20대엔 점성술사와 천문학도를 꿈꾸기도 했으며, 30대엔 토마스 불핀치와 이윤기를 필두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그리고 오비디우스까지 섭렵하고 또, 탐독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헤아리며 별 하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곤 하는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 별들에 담긴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그리스로마 신화>였던 탓에 읽고 또 읽었던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같은 책'이라도 '세대마다' 느낌이 다른 법이고, '글쓴이에 따라' 내용이 다 다르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책제목을 달고 나온 책일지라도 누가 썼느냐, 무슨 관점으로 써내려갔느냐에 따라 사뭇 다른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이는 '모든 책'에 다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특히, <고전>의 경우에는 더 특별한 법이다. 이를 테면, 같은 <논어>라 하더라도 '보편적인 내용(텍스트)'는 비슷할지라도 '글쓴이의 관점(해석)'는 제각각인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덕군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고 공자를 추켜세우고, 어떤이는 오늘날에는 전혀 맞지 않은 '낡은 관점'에 불과한 까닭에 우리 안에 내재된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에게 달렸다. 오래도록 널리 읽힌 <고전>은 '다양한 해석'에서 그 가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해석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평가하는 재미가 '고전을 읽는 맛'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춰야 옳은 해석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심금을 울리는 '보평성'을 갖춘 해석이라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고전의 맛'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로마 신화>는 어떤 해석으로 읽어야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이는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면서 '필독서의 반열'로 올려놓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신화의 상징성과 시의 함축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 야하고 비도덕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필독서'랍시고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배우길 바라는 것인지 학부모들은 각성하라며 경각심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딴에는 솔깃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논술쌤인 나 역시 <그리스로마 신화>를 어린아이들이 읽기에 부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해서 '만화'로 된 책을 읽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또 바뀌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인간의 본성'을 잘 드러낸 이야기가 없는 탓이다. 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옛 그리스인'과 '옛 로마인' 들이 상상하던 신의 모습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는 종교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종교에서의 신은 '신의 형상'을 본따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신화에서의 신은 그 반대인 까닭이다. 또한, 다른 신화에서는 근엄하고 엄격하며 진지하다 못해 '절대적인 존재'로 전능을 가진 신을 그리는데 반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신의 능력조차 어딘가 모자른 점을 드러내는 불완전한 모습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근진하기는커녕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실수투성이 신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것처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 완벽한 것이 있다면 바로 '신의 형상'인 육체다.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으로 전해지는 신들의 모습은 '인간'이 가장 바라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빚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작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을 담아 빚어냈다. 이런 육체미를 직관하면서 '성욕(에로스)'을 불태우지 않으면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헐벗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것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멈칫거리는 점이 있다. 아무리 '성욕'에 충실한 인간일지라도 '불륜'만큼은 절제해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고, '부도덕한 짓'을 일삼고서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특히, 제우스의 행실 말이다. 도대체 제우스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제우스는 '최고신'이다. 그런데 '최고 바람둥이'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기(?) 전에 벌인 애정행각까지 탓할 수는 없을지라도 헤라와 결혼을 한 뒤에도 벌인 불륜은 탓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신화라고 할지라도 '같은 아버지'의 핏줄인 여자형제, 아버지의 여자형제, 어머니(하긴 크로노스와 레아도 남매사이다)의 여자형제로도 모자라서 수많은 조카들, 종족(?)이 다른 인간까지 섭렵하였으며, 그 방법 또한 강간, 납치, 협박, 유혹 등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도덕한 짓거리들을 참 잘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신화>는 여전히 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운 고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책에 '나의 고민'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었다. 바로 '제우스를 위한 변명'이라고 부제를 붙이면 딱 좋을 내용이 말이다. 부연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부터 풀어보자면, 제우스가 신화속에서 바람둥이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로, 그가 '최고신'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최고신에 등극한 바람에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너나할 것 없이 '최고신'과 연줄을 닿게 하기 위해 "우리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제우스의 후손이다"라고 제 입맛에 딱 맞는 신화를 만들어서 훗날 <그리스로마 신화>로 뭉뚱그려 엮은 탓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비록 '인간의 잣대'로 보았을 때는 부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일지라도 '최고신'과 연줄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망설이지 않았고, '신화'라는 이름으로 이를 품었다는 해석에 수긍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건, 나뿐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바람직하지 못한 짓(부도덕)'과 '도덕이 아닌 것(비도덕)'을 허용하거나 일부 수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도덕'은 필수이지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유경쟁이 원동력인 까닭에 조금이라도 '도덕적 기준'을 허물어버리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합법'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서 몰염치한 짓을 일삼는 못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반면에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도덕'조차 작동되지 않는 사회을 탓하며 신음하고 있고 말이다. 그러한 까닭에 도덕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은 절대로 이땅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 '새로운 해석'이 담긴 <올림포스 연대기>는 그 자체로 재밌고 유쾌하며 뼈 때리는 해학과 풍자까지 담겨 있는 훌륭한 책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이 '변명'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변명'이 이 책에만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글쓴이들이 이미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오남용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독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독자들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떤이는 이런 말도 했더랬다.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빈다"고 말이다. 내가 참 많이 듣는 말이긴 한데, 나는 교육자(논술쌤)의 한 사람으로서 '만의 하나'라도 지적할 점이 있다면, '반드시' 지적하고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읽으며 배꼽 빠지게 웃었던 탓에 조금더 심각하게 정색을 해보았다ㅋㅋㅋ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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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인원 - 끝없는 진화를 향한 인간의 욕심, 그 종착지는 소멸이다
니컬러스 머니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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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오만한 인간의 최후는 멸종뿐이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명백한 인간의 책임인데도 이를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고, 심지어 기후변화에 따른 혹독한 환경변화에 더는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까지 인류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거라는 질책에도 눈만 깜빡이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지적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반론마저 예상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거냐?", "쥐라시 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더 더웠는데도 생물은 번성하고 공룡은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았는냐!"는 반론을 던지며 기후변화의 책임이 인류에게 있다거나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물론, 그렇다. 인간은 과학문명의 이기를 절대로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로 인해 온실가스는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지구환경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과학문명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지구환경조차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낙관을 펼치곤 한다. 여태까지의 인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 위에 군림하고 '최종포식자의 지위'로 살아왔더랬다. 그리고 언제나 과학이 해결해줄 거라는 '과학만능주의'가 당연한 해결책인냥 마련해왔다. [이 또한 인류는 극복해냈습니다]라는 문구로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우뚝 선 자랑스런 인류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말이다.

 

  그러나 지구는 그동안 '다섯 번의 대멸종'을 선보이며 지구상의 생물들을 최대 98%까지 절멸(페름기 대멸종)시키는 위엄을 보여왔다. 또한 여러 차례의 빙하기를 겪으며 기존의 생물군이 대다수 멸종하고 새로운 생물군으로 바뀌어 왔다는 지질학적인 근거만 봐도 '기후변화의 끝자락'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낙관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과연 인류의 과학기술이 대멸종과 빙하기까지 이겨내고 '지구의 주인'으로서 톡톡히 이름값을 할 수 있을까? 끝끝내 인류가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안락한 현대생활과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반성의 기미는커녕 개선의 의지를 요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정녕 인류는 '죽음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탄 것처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적어도 점점 빨라지는 지구온난화를 늦추거나 인간이 망친 지구의 자연을 지구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까? 이를 테면, 가까운 거리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 타기나 더운 여름철에 에어콘 대신 손부채를 이용하고, 추운 겨울철에 난방보다 내복을 껴입는 방식으로 에너지 소비를 확 줄여서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한으로 하고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점점 줄이고 기후변화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삶으로 바꿔나가는 것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지구를 강타하자 거의 모든 비행기와 배가 일시에 멈추니 일시적이지만 공해가 사라진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도시봉쇄로 인적이 끊긴 도심에까지 동물들이 찾아와 가장 자연스런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일시멈춤'으로 우리는 색다른 경험을 해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지구를 오염시키고 살고 있는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이 책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구의 주인은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지구 생물의 '최종진화'가 인간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말한다.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지능'이 발달한 생물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지구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위'를 쥐어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진리를 제발 말로만 하지 말고 몸소 실천하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쉬운 진리 아닌가. 그런데도 인류는 고도의 지능으로 지구를 아주 빠른 속도로 파괴하는 재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그 재능이 인간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얼마나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라는 스릴 넘치는 짜릿한 감동을 선사할 비극을 연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비극'을 이해할 지구생명체는 이미 멸종한 인류 이외에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비극을 왜 스스로 자초하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녕 당신들의 후손에게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을 선보여주기 싫은 것인가? 그 마지막 후손이 지금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정녕 인류의 미래는 깜깜할 뿐이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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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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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도서관이 피난처였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했다. 나에게도 도서관은 '비슷한' 공간이었던 탓이다. 저자는 그곳에서 '철학'을 만났지만, 난 '직업'을 만났다. 맹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이 '밥벌이'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진 못했다. 그래도 난 주말마다 도서관을 찾았고, 평소엔 읽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섭렵하며 점점 '논술쌤'으로서의 교양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논술쌤으로 자부하고 있고 말이다.

 

  암튼, 저자는 삶의 고민을 넘어 '벽'을 만난 것 같은 답답함을 뻥 뚫어준 철학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물론, '저자의 경험'이 밑반찬이다. 그리고 갑이 아닌 을로서 자신이 느낀 우리 사회의 아리아리한 막장을 철학으로 스리스리 넘겨내는 지혜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삶은 편안해졌단다. 박수가 필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답답함'과 '억울함'을 맞이하는가. 그때마다 당신의 처세술은 무엇인가? 그저 참고 견디는 것뿐인가? 아니면 다 때려치고서 후회하는가? 그러고서는 '원래 삶이 그런거야'라면서 또다시 그 답답함과 억울함 속을 전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친구들과 술 한잔 나누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다음날이면 취기와 숙취가 가시질 않아 불편해진 속을 달래려 '반복적인 해장'을 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인생이란 말인가.

 

  그럴 때 저자처럼 '철학'을 만나보길 권한다. 쫌 쎈 철학자를 만나길 권한다. '반사회적인 철학자'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겐 '마르크스'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름하야 '반자본주의'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본가들의 반성이 유의미하지 않으니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을 쓴 것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억압하고 굴종하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일삼는 자본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마르크스'가 무조건 옳지만은 않다. 그의 '실험'은 끝내 현실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망했고, 자본주의로 돌아섰으니 '마르크스 이론'은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자본주의도 삐걱거리긴 매한가지다. 그때마다 자본주의를 고치려고 들여다보는 메뉴얼이 있으니, 바로 <자본론>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가 사라지거나 '대체'될 다른 경제시스템이 요원한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건실하다. 허나 자본주의 속에서 신음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자본론>은 필독서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의 저자도 피난을 간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자신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까닭이 <자본론>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단다. 책하고는 담장을 쌓은 이는 엄두를 내지 못할 독서력이긴 하지만, 지금도 자본주의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마르크스'를 만나보길 권한다. 정말 속이 시원해질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마르크스도 철저한 '을'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제목이 <을의 철학>인 까닭은 무엇일까? 갑의 철학은 없기 때문일까? 학력으로 보나, 금전으로 보나, 갑들이 철학이 없을 까닭이 없다. 허나 그들의 철학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는 '그들만의 천국'을 만드는데 일조할 뿐이다. 허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갑'보다 '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나 많은 '을'들이 있는데, 딱 하난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철학'이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도 좋은데, 소위 '개똥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갖지 않은 '을'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수많은 '을'들이 어제도 힘들고, 오늘도 지치고, 내일도 피곤할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리라. 그러니 제발 '철학' 좀 하고 살길 바란다.

 

  저자는 철학을 알고 나니, '자기 자신을 좀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는 고통에서 벗어나 백수가 될지언정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영업사원으로 취직해서 '재고물품을 대리점주에게 떠넘기라는 상사의 지시'와 '울며겨자 먹는 셈으로 재고물품을 떠맡은 대리점주의 자살 소식'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을 때, 당신이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살아남기' 위해서 갑질 아닌 갑질을 하며 수많은 대리점주들을 울릴 참인가? 아니면 대리점주를 죽음으로 내모는 짓은 할 수 없다며 과감히 사표를 던질 것인가? 그도 아니면, 한낱 영업사원에게 '갑질'을 강요하는 '저질 대기업'을 쫄딱 망하게 만들 불매운동에 동참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속세를 훌훌 털어버리고 저 세상으로 이항하거나 남은 생을 무한대로 인수분해하는 길로 들어설 것인가? 무엇은 '선택'하든, '을의 철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보면 '경쟁'에 길들여지기 마련이다. 이겨야 살아남는 무한경쟁을 거듭하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 <오징어게임>에 결국 참여하게 된다. 돈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돈이 꼭 있어야 행복한 것인가? 물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금전'은 벌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자립은 '어른의 필수덕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금전은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듯 '무한경쟁'에 뛰어들어 자기 삶을 고갈시키곤 한다. 과연 누굴 위해서 말인가?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일까? 원치도 않는 직장생활을 견디며,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일도 서슴지 않는 삶을 과연 '바람직한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을'끼리 서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 '갑'이 끼어들지 않는다. 갑은 그저 '판'을 만들어줄 뿐이다. 자신의 몫은 이미 떼어놓고서 '남은 몫'을 수많은 을들이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단 말이다. 이게 '자본주의'다. 왜 '을'끼리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왜 '갑'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 '을'이 더 많은 것일까? 아이러니 할 뿐이다. 그렇다고 '갑'과 싸우라는 말은 아니다. 갑도 나름대로 '정당한 몫'을 가져갔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을'끼리 사이좋게 노나 먹으면 좋을 일을 굳이 왜 싸우냔 말이다. 만약, '을'이 사이좋게 노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남겨놓은 것이 문제라면, 그땐 '갑'과 한판 싸워야 마땅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을'끼리 싸울 까닭이 없다는 점이다. 사이좋게 노나 먹다가 부족한 듯 싶으면 합심해서 '갑'에게 따지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을의 철학'이란 이런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허나 '철학'과 함께라면 어떤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을'끼리 치고 받으며 싸우는 어리석은 짓부터 멈추는 '철학'이 절실하고 말이다. 다음으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유치원 때 '착하게 사는 방법'을 모두 마스터 했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런데 왜 착하게만 살 수는 없는 걸까?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이렇다. 착하게 살면 '호구취급' 당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착각은 하지 말자. 착하게 산다고 순딩순딩하게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만렙'으로 살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 위할 줄 알고, 약자를 배려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때마다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슈퍼 을'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갑에게 호구가 되는 '을'이 아니라 갑 앞에서도 당당한 '슈퍼 을' 말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철학'뿐이다. 이럴 땐 이랬다가 저럴 땐 저랬다가 하는 '그때그때 다른 철학'이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결같은 '철학' 말이다. 그러다가 목이 잘리면 어떻게 해요? 라고 고민하진 말자. 최강의 철학은 '모든 칼'을 다 막아내는 굳센 철학이 아니라 '애초'에 칼이 목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슬기로운 철학'이니 말이다. '을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내 삶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멋진 철학으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한 번 살아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철학도 소중하니까 응원할 겁니다. 세상 모든 을들이 철학쟁이가 되는 멋진 상상을 하면서.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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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숙제 -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경제학자의 제언
한지원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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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책내용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제'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문제의 근본은 '교양을 갖춘 시민이 대세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잘못 된 길로 빠져도 바라보고만 있고, 국회의원이 깽판을 쳐도 나몰라라 하고, 장관이 헛발질을 해대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재벌과 엘리트 등이 망나니 같은 짓을 저지르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도 '있는 놈들'은 스케일이 남다르다는 감탄만 내뱉고 있으니, 이 땅에 제대로 된 '교양시민'이 태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한편, '경제학자'가 풀어낸 역사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도덕'과 '정의'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자유와 풍요'만을 기준치로 삼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친일적폐청산'을 내세운 것을 '반일 민족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부동산정책 실패'를 예로 들면서, 경제의 기본도 모르는 정권이 오로지 '포퓰리즘'만 앞세워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과, 대한민국을 폭망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는 공감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도 그닥 공감 가지 않았다. 같은 저자가 쓴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는 재미나게 읽었다. 핵심은 많은 사람들은 '자유, 평등, 풍요'의 원칙만 지킬 수 있다면 어떤 경제시스템이라도 상관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21세기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선 뜬금없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불운했고, 대한민국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하며,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마감하고,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내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있고 신뢰 넘치는 '국회'로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긴 했다. 허나 난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대한민국 국민'이 뽑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교양시민'의 양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양시민이란 단순히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소위 '엘리트 집단'이라고 일컫는 부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정의를 지키는데 앞장 서며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 '교양시민의 첫째 조건'이다. 그러니 '교양시민'은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굳이 학력이 높을 필요도 없고, 사회적 지위가 드높을 필요도 없으며, 돈이 많아서 갑질하는 부류는 절대로 '교양시민'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교양시민의 둘째 조건'이 더 까다로울 수 있겠다. 한달 평균 10권 이상의 '독서력'을 갖춰야 하고, 가짜뉴스를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이성적/객관적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이의 주장도 끝까지 들어주는 '겸허한 경청력'도 반드시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교양시민'이 넘쳐날 때,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며, 전세계의 시기와 질투를 슬기롭게 넘겨내며 존경과 부러움을 한번에 받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수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이 가는 길을 따라오려 너나들이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무력이 아닌 국력으로 선진국이 될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낑긴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국력'이 아직 이들 강대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니 객관적으로 주위를 살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세계적인 골칫거리인 '북한'과 통일을 꿈꾸는 일을 그만 두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말이다. 북한은 애당초 대한민국과 통일할 생각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제발 '햇볕정책' 같이 북한 퍼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과 과거사논쟁을 벌이지 말라고 지적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대한민국 경제에 '청신호'가 켜진다고 말이다. 더구나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해야 북중러와의 대결에서 겨우 맞설 수 있는데, 허구헌날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서 일본과 거북한 관계를 만드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제발 '전작권 환수' 같은 뻘짓은 그만두란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목숨줄이라면서 '자주국방'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 '자주국방'은 어림도 없다면서 말이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도 바로 '이런 논리'를 앞세우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참아달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미국의 노예'로 살 것이며, 언제까지 '중국의 종속국'으로 남을 것이며, 언제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만족할 것이냔 말이다.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아도 이미 '일본의 경제력'보다 앞섰고, '미국과는 대등한 경제 파트너'가 되었고, 중국경제는 이미 '한국 베끼기'를 하지 않으면 팔 것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주변국 눈치만 보면서 쭈뼛거릴 거냔 말이다. 이젠 대한민국이 당당해질 때가 되었다. 그래야 통일도 한낱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에 '발끈'할 것이 아니라 '쯔쯧'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꿀려서 발끈하고 질질 끌려다닐 것이냔 말이다.

 

  이 책이 보다 더 가치 있으려면 '경제학자'가 아닌 '교양시민'으로써 썼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과 정의에 둔감한 '경제학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지적질'보다는 '대안제시'에 중점을 두었더라면 더욱 멋진 책이 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칭찬할 내용이지만, '지적질'로 그친 탓에 윤석열 정부가 배워서 고칠 점이 눈에 띄지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타락한 민주주의'에 절대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촛불을 들고 나타날 '교양시민'들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서로의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어서 '패거리 정치'를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교양시민'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적질'은 멈추고, 눈부신 미래비젼을 보여줄 때다. 까짓, 대통령 잘못 뽑았어도 '교양시민'을 차고 넘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뭣이든 '교양시민'이 가꾸어 나아갈 것들이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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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상식을 배우는 법 - 당당한 교양인으로 살기 위한
제바스티안 클루스만 지음, 이지윤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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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독일 '퀴즈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 경험을 갖고 있는 경력자다. 퀴즈대회의 성격상 굉장히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로 하는 까닭에 글쓴이는 '모르는 것'을 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절대적인 상식의 소유자라고 착각하기 쉽다. 글쓴이도 고백하건데, 자신은 결코 '엄청난 상식의 소유자'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열심히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노력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무엇'을 물어보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대답하곤 한단다. 그만큼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방대한 지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상식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만한 지식'을 일컫는 것이지만, 뜻밖에도 우리는 '상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나'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우리 모두의 상식이라고 할만한 것을 추려보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맞닥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상식'이라는 범주도 '세대차이'가 존재하며 '교양'이라는 딱지(프리미엄)를 하나 더 얹으면 '수준차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녀차이', '인종차이', '민족차이' 등등 세부적인 수준까지 파고들면, 과연 우리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심케 만들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두가 알만한 지식'을 상식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우리는 '상식'을 쌓으려 대단히 오랫동안 배우고 또 익히며 살아간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상식'이 필요한 걸까? 지금은 '검색능력'이 상식을 대체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른바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은 지금의 세대에겐 지식을 외우는 능력보다는 '검색'을 통해서 적절한 지식을 빠르게 찾아내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직접 대화를 통해서 필요한 지식을 쉽고 빠르게 얻어낼 수 있는 시대에 '상식' 따위를 익히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시간낭비로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마치 주산, 암산이 대유행하던 시대를 지나 전자계산기와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에 와서까지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허나 글쓴이는 단언한다. 인공지능 나부랭이가 판을 치는 시대라할지라도 '상식'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도움이 되고 꼭 필요한 공부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유를 들어보면 수긍이 될 것이다. 구글검색을 통해서 얻어낸 쉽고 빠른 '정보'들은 한쪽으로 쏠린 '편향된 정보'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검색을 거듭할수록 '편협한 정보'만을 한정해서 보게 되기 때문에 폭넓은 사고를 기를 수 없고, '내 입맛'에만 딱 맞는 정보를 골라서 보여주는 것에 길들여지면 '다른 생각'을 원천 차단 당하는 까닭에 '원하는 정보'는 얻을지언정 '그밖의 정보'와는 담을 쌓게 되는 우물의 안의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퀴즈대회의 우승자답게 엄청난 양의 지식을 쉽고 재밌게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개중에는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익히고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유용한 방법도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내용은 따로 있다. 바로 상식이 '교양'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테면, 전세계의 '수도이름'을 외우는 것은 상식의 범주이지만, 우연히 만난 외국인 친구의 '수도'를 아는 채하며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드러내어 상대방의 '호감'을 끌어냄과 동시에 '절친'으로 발전하는 것은 교양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세계 '프로축구선수'를 달달 외우고 관련된 '축구정보'를 척척 읊어대는 것이 축구팬으로서의 상식이라면, 각구단의 사정에 빠삭하고 올해 시즌의 성적을 예상하며 팀과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하며 전문해설가 못지 않은 해설을 풀어낸다면 '교양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상식은 교양인의 필수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뜻깊게 읽을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상식밖의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페해를 일으키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분들에게 '상식'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분들 나름대로는 꽤나 많은 상식을 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단언컨대, 이분들은 '교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다. 사람으로써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는 고사하고 '자기가 보고 싶고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행동을 일삼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교양은 절박한 시점에 다달았기 때문에 '상식'은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첨예한 대립'을 넘어서 '치열한 갈등 양상'을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끝도 없다. '페미문제'에서 비롯된 '남녀갈등'은 해결점을 찾지 못했고, '소녀상'과 '위안부'를 둘러싼 해묵은 진실공방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건설적인 토론을 기대할 수 없는 맹목적인 비난과 상대를 향한 비방은 끝내 서로를 청산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버린 우스운 꼴로 전개되어 버린 탓이다. 어느 곳에서도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조심스럽게 진단을 내려본다면, 바로 '상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이라고 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모두가 알만한 상식'이 사라져버린 탓에 벌어진 다툼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비상식'이 '비정상'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말이다.

 

  이제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 왜 서로 갈라져서 싸워야만 하는가. 아니, 의견이 서로 다르고 갈라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왜 조금만 '양보'하고 '한발' 물러서서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경청'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해보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경청'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경청을 하다보면 말이 통하지 않을 수도 없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 드는 것은 '상식'이 아니라 '꼬장'이다. 내 주장을 상대에게 '설득'하려 백 번 양보하는 것이 '상식'이자 '교양인의 자세'다. 그리고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풍부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야 내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전개시킬 수 있고, 상대의 주장도 십 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상식을 쌓아야 할 이유를 이해했다면, 상식을 쌓을 방법만 익히면 된다. 그 방법은 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실천'이란 것도 잊지 마시길.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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