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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리터의 피 - 피에 얽힌 의학, 신화, 역사 그리고 돈
로즈 조지 지음, 김정아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에서 근무한 지도 벌써 반 년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코드 레드"는 더는 긴장감을 주지도 않을 시간이고 말이다. 대신 아픈 환자를 마주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부풀어 오르곤 한다. 몸은 힘들지만 말이다. 언젠가 저 환자를 대신해서 내가 있을 때 다른 누군가가 내가 했던 것처럼 도와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버틸 뿐이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의학'과 관련이 있다. 인류는 의학과 만나면서 '혈액'에 대한 신비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이는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머리라는 흡혈동물이 현대 의료에서는 아주 유익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심지어 거머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수술을 집도하지 않는 의사가 있을 정도다. 응고된 혈액은 환자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지만 거머리만 있다면 간단히 '혈액응고'로 인한 사망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혈액으로 전염이 되는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일명 '에이즈')를 비롯해서 오염된 혈액을 팔아 거액의 돈을 챙기는 산업비리가 만연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염된 피를 수혈받아서 목숨을 잃는 혈우병 환자들의 슬픔까지 '현대의학의 어두운 면모'를 담담히 밝혀내고 있는 저자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감탐을 자아낼 정도다.
이뿐 아니다. '혈액형'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낸 내용은 '혈액형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사이비과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로 허튼 소리라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생리혈'과 '생리대'에 관한 르포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축복이 더럽고 불결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얼룩져 있다는 생생한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말이다.
특히, 난 '생리'에 무지한 남자인 까닭에 '생리혈'과 '생리대'에 관한 어두운 진실을 파헤친 내용이 참 인상적이었다. 책의 내용 중에는 2016년에 벌어진 '깔창 생리대'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생리대를 살 형편이 안 된 소녀가 생리대를 대신하기 위해서 깔창에 휴지를 둘둘 말아서 '대용품'으로 썼다는 내용인데, 그 소녀가 사는 나라는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이었다. 불과 5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란다. 대한민국은 비교적 의료환경이 잘 갖춰진 나라이지만 '생리대'만큼은 아닌 듯 싶다. 매년 가격의 40%가 인상이 되는 바람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대한민국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를 비롯해서 전세계에서 여성의 생리를 부정적이고 불결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단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에서 일반의약품을 살 때는 하얀 비닐봉지에 담아주지만 생리대를 사면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준다고 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생리'를 감추고 싶고 감춰야 한다는 사회분위기가 작동한 셈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인권 유린'마저 벌어지고 있단다. 네팔에서는 생리하는 어린 딸을 헛간을 내쫓고 남자와 격리시키곤 한단다. 그런데도 집안일도 하고 시장도 봐야 한다. 가게 주인은 생리를 하는 여자를 가게 안에 들이지 않고 사러 온 물건을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리혈을 흡수할 '천'을 구하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다. 적당한 천을 구할 수 없으면 곡식의 껍질이나 흙을 깐 바닥에 하루종일 앉아 있기도 한단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짓'으로 여기는 풍습으로 인해 적당한 '생리대'를 구할 수 없는 것뿐 아니라 생리혈로 지저분해진 몸과 천을 씻는 것도 아무도 보지 않은 음습한 장소에서만 '허락'된다고 한다. 천으로 만든 생리대는 잘 씻어서 햇볕에 말려야 하는데 어둡고 축축한 장소에 보관한 덕분에 '여성질환'으로 고통을 받는 이중고가 다반사라고 한다. 심지어 케냐에서는 '생리대'를 구매할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웃지 못할 비극이 자행되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간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이 낱낱히 밝혀진다. 우리가 피에 대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까닭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이다. 우리는 피에 관한 정보를 고작 <흡혈귀>나 <성격 테스트> 따위로 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피에 관한 진실'을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샘 솟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매혈(혈액매매)'의 비리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다. 그보다 더 심각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점도 겁나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혈장 산업 비리'로 고통받는 혈우병 환자들이고,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인권 유린의 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세계 소녀들이다. 비리를 밝히면 고통은 줄어들 것이고, 생리대를 기부하는 것으로 인권 유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보통은 '혈연'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지만, '생명'을 강조하는 말로 쓰고 싶다. 지구생태계와 자연환경의 위기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얘기할 때, 곧잘 '물'을 비유적으로 쓰곤 한다. 물은 생명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은 '5리터의 피'보다 많거나 적으면 건강에 이상신호가 오고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간 우리는 '피로 얼룩진 것'을 부정하게만 보고, 그저 안 보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묻어두길 반복했다.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은 환자와 사회적 약자, 그리고 여성 들이 있었음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알았으면 좋겠다. 아는 것은 힘이 된다. 그리고 그 힘은 약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말이다. 부디 이 책이 전세계로 '희망'이 퍼지는 단추가 되길 바랄 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