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제주 여행 - 고고학으로 제주도 여행하는 법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4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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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 제주여행

 : 황윤

 : 책읽는 고양이

 : 2022/08/28 - 2022/09/01


여행기이자 역사탐방책을 계속 읽고 있다.

이번에는 제주다.

제주도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했는데 꽤 많은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것은 항파두리로 대변되는 삼별초와 몽골의 항쟁

그런데 그 외에도 탐라시절부터 대륙과의 관계 사이에서 저울질했던 모습하여, 목호의 난과 관련된 이야기, 조선초에 멸망한 몽골의 왕족들의 정착이야기 등 내가 모르던 많은 역사들이 있었다.

조심스러워서 그런지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항쟁같은 내용은 담겨져 있지 않다.

적절한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에 대한 추론도 있고, 제주도의 신화이야기도 있어서 제주도에 여행을 가게 되면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들이 생겼다. 

리조트나 해수욕장, 카페만 다니는 제주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발자취를 걸어보는 것도 제주도의 또 다른 매력일 것 같다.

마지막에 있는 목호의 난이라는 단편소설은 덤이다. 


p21 중국 한나라, 위나라의 역사서에는 이처럼 주호국이라는 이름으로 제주도가 등장한다.

p28 탐라국 전설에 등장하는 첫째인 양을나는 제주 양씨의 시조로, 둘째인 고을나는 제주 고씨의 시조로, 셋째인 부을나는 제주 부씨의 시조로 각각 모셔진다.

p50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가지의 난파선이 한반도 앞바다에서 발견되어 이곳에서 그 유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오죽하면 이곳 박물관은 특별전마저도 종종 해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난파선 유물을 소개할 정도. 세계적으로도 무척 보기 드문 주제를 가진 박물관이라 하겠다.

p61 300척 규모의 왜선을 포획하려면 최소 1만 5,000명의 외적을 제거해야 가능한 수치인데, 과장법이 심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명나라 주원장에게 잔소리로 계속 시달리자 최영은 결국 요동 정벌까지 계획하게 된다.

p72 고려가 몽골의 원나라에 하복한 뒤로는 원나라의 견제로 제대로 된 수군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왜구들의 노략질을 제어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p92 이처럼 제주도는 당시 중국 남부와 일본을 연결해주는 바닷길 중간 지대였기에, 고려의 지방으로 포함된 이후, 개성의 중앙정부에서 큰 관심을 두고 관리하고 있었다.

p125 결국 최영으로부터 낚시 기술을 배웠다는 내용은 사실 과거부터 모셔온 전설 속 선인의 흔적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374년, 최영의 추자도 방문은 그동안 모시던 신의 존재를 바꿀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p141 이곳 제주목 관아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600-900년 전후, 즉 통일신라 시대에 사용되었던 토기와 집터부터 고려 시대의 도자기 및 집터 등이 확인되었기에, 조선 시대 관아가 들어서기 전인 7-13세기부터 이미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p151 나는 여행을 가면 해당 도시의 박물관에 반드시 들른다. 이는 지역의 역사, 문화, 더 나아가 관람을 위한 지도역할을 박물관에서 충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p170 제주 삼별초의 항전으로 유명한 항파두리성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로 오기 30년 전부터 기와 건물이 있었고, 삼별초가 사라진 뒤에는 몽골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p207 한때 중국의 한 지역을 통치했던 왕 신분의 몽골 최고 귀족이 제주도에 유배 오게 되었으니 이느 ㄴ곧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제주도에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p209 고려 정부가 제주도와 원나라의 관계를 끊고자 하자 그동안 제주에서 말을 기르던 목호들이 제주 목사 등 고려가 파견한 지방관을 죽이며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니, 1356년부터 1376년까지 20년 동안 총 5회에 걸친 목호의 난이 이어졌다.

p218 토성을 따라 20여분 걷다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군. 수백 년 전 고려 시대에도 앞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육지에서 오는 배를 매번 확인했을테다. 또한 항푸두리성 앞바다에는 여러 포구가 존재했기에 바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p236 1374년의 전쟁은 원명 교체기의 영향 속에 벌어진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도 역시나 제주도는 육지 세력의 변화에 따라 크게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p240 새별오름 주변에는 목호가 제주도에 있던 시절만큼이나 말 목장이 여전히 많이 남아 운영 중이다. 이 중에는 국내 최고 수준의 경주마를 키우는 곳부터 관람객이 말을 직접 탈 수 있는 곳까지 다양하게 있으니 말이지

p272 홍로현, 그러니까 지금의 강정동에 대궐 터라 불리는 곳이 있어 살펴보니, 이곳에 질 좋은 돌과 기와가 여전히 남아있었나보다. 이에 송정규는 이곳이 바로 원나라 마지막 황제가 궁궐을 만들고자 했던 장소가 아닐까 하고 추정했던 것이다.

p278 목호의 난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제주도에는 몽골의 후손들이 살아갔으니, 제주도 서남부에 남아 있는 많은 유적지가 과거에 있었던 몽골의 영향력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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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전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5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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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 전주여행

 : 황윤

 : 책읽는 고양이

 : 2022/08/23 - 2022/08/27


시리즈로 나오고 있고, 여행기가 유익해서 계속 읽고 있다.

이번 장소는 전주다.

앞에 나왔던 책들은 글만 있고 사진이 없었는데 이번 장소는 사진이 많아져서 좋다.

대신 책의 두께가 두꺼워졌다. 그래도 사진으로 유물과 유적을 보면서 읽으니 훨씬 몰입이 잘된다.

전주는 그냥 한옥마을이나 전주이씨 정도로 내게 기억되는 곳인데 저자는 이곳에 견훤을 불러와 견훤과 이성계를 비교하며 여행기를 꾸몄다.

생각해보니 중학교 국사시간에 견훤이 완산주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걸 배운적이 있었다.

전주라는 곳이 예전부터 유서깊은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산 곳은 결국 무엇인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이유가 산을 넘기 위한 것이든, 강을 건너기 위한 것이든,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이든 결국 지리적 요인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니 과거 사람들에게 좋았던 곳이 지금도 도시가 되어 그 지역의 중심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이 책은 전주뿐만 아니라 금산사까지도 돌아본다. 견훤을 이야기할 때 금산사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때문에 중간중간 대중교통이 잘 맞지 않으면 중간에 시간낭비를 하게 된다.

이것도 다 여행의 일부다. 어떤 여행이든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계획대로 할 수 없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이 시리즈 덕분에 우리나라 지역 박물관을 많이 알게 됐고 여행에 도움이 되고 있다.

좋은 책이다. 


p24 뒤이어 10정이라 불리는 지방군대 중 하나를 전라북도 임실군에 배치했고, 남원에는 신라의 지방 주요 도시인 5소경 중 하나를 설치했으니까. 그만큼 전주 주변을 꽤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p36 사람 발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진 금동신발은 죽은 이와 함께 묻는 부장품으로서 특수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신지 않았다. 실용성을 포기한 대신 장식성을 강조해 전체 디자인이 날렵하다.

p52 한때 전라북도에는 백제도 함부로 하기 힘든 상당한 힘을 지녔던 세력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남하한 백제가 본실력을 서서히 회복하자 다시금 이 지역은 강력해진 백제의 영향력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p69 당시 일본은 신라 해적 때문에 갈수록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으니, 쓰시마섬과 규슈 등으로 많으면 수천에 이르는 해적들이 침범하여 사람을 죽이고 민가를 불태우며 재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p77 전주는 나로 하여금 백제 말기 —> 통일신라말기 —> 고려 말기 —> 조선 말기의 이야기를 함께 읽을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p128 이는 언급된 산성들 역시 통일 신라 시대에는 주변을 통치하는 장소로 운영되다가 신라 말기에는 주변 호족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후 견훤이 등장하자 후백제 영역이 된 것이니까.

p170 견훤의 고향이 있던 문경 및 상주 등도 과거에는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하루 이상 머물러야 했던 교통로에 위치했다.

p174 통일 신라가 만든 9주 5소경의 중심지는 조선 시대까지 중요한 행정 타운이 건설되며 이어졌고, 지금도 도시 중심에 위치하며 오랜 한반도 역사의 흐름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p187 파비각은 명칭 그대로 부서진 비석을 모아놓은 보호각인데, 가까이 가보니 큰 비석이 박살이 나 쓸슬히 누워 있고 글씨는 정으로 하나하나 쪼아서 없앤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선조 때 만들어진 황산 대첩비가 다름 아닌 이것이다. 그렇다. 이 역시 일본이 민족 발살 정책을 펼친다 하여 1945년에 저지른 만행이다.

p218 구산선문 중 실상산문이 자리 잡은 실상사는 홍척 선사가 창건한 한반도 역사상 첫 선종 사찰이라는 데 그 남다른 의미가 있다.

p231 통일 신라나 후백제 시절보다도 더 큰 사찰로 발전한 것이니, 고려라는 새로운 시대에도 한국의 첫 선종 사찰인 실상사를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겠지.

p236 금산사는 견훤과 인연이 있는 장소이면서, 전라북도에서 가장 규모 있는 중심 사찰이기도 하다.

p237 이 내용은 1075년 저술된 균여전에 등장하는데, 이 책은 균여 대사의 전기로서 무엇보다 귀중한 향가 11수가 담겨 있어 한국 문학 연구에 그 중요성이 남다르다고 하더군

p278 특히 김복진이 만든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조선 시대 부처 형식이 아니라, 8세기 이후의 통일 신라 시대 부처 형식을 갖추고 있어 흥미롭다 이는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신라 불상을 치밀하게 연구한 결과물이다

p293 함흥차사에 나오는 박순은 실제로는 이성계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함경도 반란 세력에 의해 죽었던 것. 이것이 나중에 함흥차사 속 이성계를 설득하던 박순의 모습으로 그려지게 된다.

p300 고려를 멸한 후 고려 왕족인 왕씨 사람들을 뿌리까지 찾아내 마구 죽인 조선 왕조와 달리 고려는 멸망한 국가의 세력에게도 최대한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했으니 이는 당시 왕건의 철학 및 의도와 연결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p314 실제로 조선 시대 들어와 유교 질서라는 명목으로 과거부터 이어오던 한반도의 문화와 문물을 절단, 파괴시킨 사건이 유독 많았으니, 솔직히 몽골 침임, 임진왜란 등 외부 침입으로 입은 피해 이상으로 한반도 문화유산에 심각한 피해를 준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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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투어 -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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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랜드투어

 : 설혜심

 : 휴머니스트

 : 2022/08/11 - 2022/08/24


그랜드투어의 역사에 대한 책.

그랜드투어를 어디로 다니고 가서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에 대한 책인 줄 알았는데 그랜드투어의 역사를 알려주는 책이었다.

영국의 귀족들이 대륙의 역사를 배우고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기간은 길었다. 대부분 2-3년정도를 다니는 것 같다.

유럽을 다니면서 사교도 즐기고 역사도 배우고, 연애도 하고...

젊은 시절에 일탈과 교양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시간으로 보인다.

역시 귀족들은 살기 참 좋았던 것 같다.

영국의 뒤를 이어 미국도 역시 그랜트투어를 다닌것 같다.

역사가 짧은 미국이니 더더욱 열심이었을 것 같다.

우리도 성인이 되기전에 이런 gap year가 있으면 참 좋겠다.

약간의 일탈과 교양을 쌓아 평생의 추억과 즐거움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지만 돈에 얽매여 사는 모습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p10 그랜드 투어는 유럽 지배계급 사이에 동질성을 만들어냈고 예술과 건축의 발달을 촉진했으며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등 유럽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현상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역사학계는 이 주제에 냉담했다

p22 이른 죽음으로 더 유명해진 시드니는 유고가 출간된 이후에는 문필가로서의 명성까지 얻었다. 당대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가운데는 그랜드 투어 안내서인 <유익한 가르침>도 있었다

p23 헤로도토스는 뚜렷한 목적이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행 자체가 즐거움인 여행일 했기 때문에 최초의 여행자로 불린다

p31 14세기부터 호기심은 도덕적인 오명을 벗기 시작했고 15세기가 되면 인간정신의 우월한 특성으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나아가 여행의 합법적인 동기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탐험의 시대나 발견의 시대에 딱 맞는 개념으로 떠오르게 된다

p45 그랜드 투어에 나서는 이들은 “게으른 자, 호기심 많은 자, 허영심이 많은 자, 돈을 헤프게 쓰는 자, 순진한 자, 바보 같은 자, 감상적인 자, 그리고 지식과 보다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자”등 다양하다고 말했다

p48 유럽대륙의 그랜드투어리스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인물은 아마도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말썽꾸러기였던 표트르는 정신을 차리고 서유럽의 발달된 문물을 직접 보기 위해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p60 츠빙거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나라에서도 곧바로 번역본이 나오면서 유럽 여행 지침서의 유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후 그랜드 투어 지침서들은 이 정형화된 틀을 유지하며 출판 시장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p70 그런데 돈쓰는 기계로 불리게 될 많은 여행자에게 팁이나 레슨비 심지어 관세 등은 그렇게 큰 지출이 아니었다. 엄청난 여행비의 주범은 사치와 방탕이었다

p74 여행 중에 죽은 사람도 상당수였다. 특히 나폴리와 포르투갈에서 폐결핵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p86 에디슨의 여행기는 작가가 가장 자신 있었던 분야인 고전을 도구라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이는 여행과 문학을 결합한 매우 새로운 시도였다. 그는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웃, 세네카 등 고대 시인들의 작품을 장소나 주제에 끼워 넣었다. 피렌체에서 볼로냐로 가는 험한 길에서 실리우스 이탈리쿠스가 묘사한 한니발의 행군을 떠올린다거나, 제노바에 생선이 귀하다는 사실을 호라티우스를 인용해 설명하는 식이었다

p96 몬터규가 보기에 여행기 작가들은 자기도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돈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항상 현재의 입맛에 맞추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기 때문에 여행기에 과장이나 오류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101 여행자는 자기 집에서 누리던 안락함을 누릴 수 있고 화려한 사교계가 있는 문명화된 지역을 선호했다

p104 데생의 여관은 훌륭한 음식을 내놓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생선과 게요리, 차가운 샴페인은 영국인들이 감격할 정도의 맛을 자랑했다고 한다

p113 마음속은 분명 고통에 차 있었겠지만 왕비는 슬픔을 감추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그녀의 밝은 눈 속에서 단 한 점의 어두운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여신처럼 미소 지으며 기도서를 넘기면서 처음에는 왕을, 그다음에는 왕자를, 그리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기도서로 시선을 돌렸다

p118 영국에서는 윌리엄 길핀 목사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픽처레스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p139 독일 땅에 도착한 영국인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독일은 숙박 시설이나 도로 사정이 유럽 최악이라고 할 만했다. 여행 지침서는 하나같이 독일의 여행 여건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p151 르네상스 시대는 흔히 무대의 시대라고 불린다. 마치 무대에서 연극을 하듯이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언행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라는 말이다

p167 아부는 칭찬과 아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칭찬은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생각되었던 반면, 아첨은 진심 없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그 때문에 아부는 매우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p173 독일의 한 여행 지침서는 “여행을 할 대 산과 바다를 보지 말고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하라. 공부하는 학생들은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학자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장조했다

p178 그랜드 투어의 성공 여부는 귀국 길에 들른 파리에서의 처신으로 판단되곤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파리에서 살롱 등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그전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p187 이 클럽의 회원이 되지 못했던 호러스 월풀은 딜레탕티 회를 “총각들이 술이나 먹는 클럽”이라고 비하하면서 “회원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이탈리아에 다녀올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술에 절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딜레탕티 회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방탕아들이 근황을 주고받던 모임에서 벗어나 점차 미술품과 유적에 대한 취향을 발전시키면서 영국 예술사에 매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p195 메디치 가문처럼 신흥 상인 출신으로 지배자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가문들은 미적 동기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에술을 후원하고 열성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했다

p215 정작 이탈리아에서 화가로서 그의 명성은 그리 높지 못했다. 당시 지배적인 화풍과 다른데다가 돈맛에 길들여져 여행자의 입맛에 맞춘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카날레토의 그림을 영국인들이 몽땅 사가는 바람에 이탈리아에서 거의 볼 수 없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p254 게이야르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교육하지 않을 경우 학생이 얼마나 나쁜 지배계급이 될 수 있는지를 역설하다가도 “하지만 결국 그는 엄청나게 잘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귀족이며 고귀한 가문 출신이니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좋은 혈통을 지니고 있는지 자랑하겠지. 결국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위대해 보일 것이다라고 한숨을 쉰다.

p279 영국인들에게 그랜드 투어는 다른 나라를 직접 봄으로써 영국인으로서의 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애국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p289 파리의 사교계는 영국의 유명 인사들을 언제나 환대했지만 그런 자리에서 그들이 빛나는 존재였다는 이야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에서 이름을 날렸던 에드먼드 버크, 에드워드 기번, 심지어 데이비드 흄까지도 말이다

p299 제임스 하웰은 영국인이 지나치게 자기 나라만 위대하게 여기고 다른 나라를 깔보는 경향이 있으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장 게이야르는 여행자라면 국적을 밝히지 말고 세계인으로 행세하며 자신이 머무는 관습에 적응하라고 조언했다

p315 클라크는 자신의 경험을 <1810~1823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 여행>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는 책의 내용을 북쪽 변경, 동쪽 변경, 남쪽 변경으로 구분함으로써 이 여행이 유럽 대륙의 변방을 답사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p329 몬터규가 보기에 외국을 평범한 수준에서라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매우 긴 체류와 부지런한 탐구, 그리고 훌륭한 고찰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은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통과의례를 거치듯 외국을 거쳐가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p330 영국에서 마카로니는 원래 여행자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랜드 투어와 연관되어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악덕에 물들고 겉멋만 든 젊은이를 지칭하게 되었다. 마카로니의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계집애 같은 취향이었다

p335 이것은 특히 유럽 대륙에 비해 성적 자유나 섹스의 기술이 뒤처져 있다고 생각되던 영국 남자들에게는 일종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대륙에서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일종의 제국주의적 정복으로, 국가의 수준을 높이는 행위라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황태자비와 잤다든가, 심지어 집주인의 마누라를 정복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p341 여행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엘리트의 온전한 정체성을 갖추는 데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p349 로마에 카페 그레코가 있다면 1638년부터 커피가 판매되기 시작한 베네치아에는 이탈리아 최초의 카페인 카페 플로리안이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베네치아를 찾아온 지식인들은 그곳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한쪽 구석에서는 1760년에 창간된 이탈리아 최초의 신문 가제타 베네타의 편집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p369 이 소설이 드러내듯이 그랜드 투어의 최후 배턴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의 그랜드 투어는 18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세기 중엽에 최고조에 달했다

p380 바이런의 죽음은 더 극적이었다. 1824년 오스만튀르크의 압제에 저항하는 그리스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바이런은 한 개 사단의 지휘를 맡아 원정에 나서게 된다. 그는 그 원정에서 불과 3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p384 자신은 독립적이고 지식과 교양, 호기심과 생기발랄함을 갖춘 여행자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미덕이 결여된 열등한 관광객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여행은 전통적으로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는데, 쿡이 나타나면서부터 자격도 없는 하층민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특권의식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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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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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 마틴래디

 : 까치글방

 : 2022/08/14 - 2022/08/23


오스트리아의 빈을 좋아하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기껏해야 자연사 박물관 앞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마리 앙뚜와네트, 모차르트에 나오는 요제프 황제 정도만 아는데 합스부르크 제국의 ATOZ를 배우게 됐다

책은 생각보다 재미는 없었다. 

아무래도 에피소드 중심이 아니라 해당 지도자의 역할과 사건을 기술하다 보니 재미보다는 정보전달에 치중한 책이다.

그래도 새로운 걸 많이 배웠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긴 이야기며,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2세의 계몽주의 정치, 뜬금없이 합스부르크 사람이 왜 멕시코에 가서 황제가 됐는지,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된 후 오토의 멋진 모습등

전쟁이 아닌 결혼으로 제국을 이룬 특이한 제국이기도 했고, 문화를 사랑했던 제국이다보니 강한 제국은 아니지만 멋진 제국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유럽 역사의 다른 조각과 비교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역시 아는만큼 읽을 수 있고 보이는 것 같다. 


p16 구왕궁은 호화로운 시설로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 아니었다. 구왕궁은 빈과 그 주변의 농촌을 위압하고, 권력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성이었다.

p24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황제들과 통치자들은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교 교리의 확산을 단속했따.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종교의식에서, 신앙을 정화해야 한다는 사명은 영성체를 향한 과시적인 헌신과 안무를 통해서 연출된 이교도 화형 장면으로 골고루 드러났다

p39 초야권은 후대인들의 외설적인 날조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3실링은 결혼에 부과되는 세금이었을 뿐이고, 사육제의 종료를 알리는 사순절 선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스위스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p44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혈통을 파고든 연구자가 깨달았듯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상속자를 낳았다. 아들이 없을 때면 사촌과 조카가 대를 이었다. 그렇게 끈질기게 대를 잇다 보니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의 대가 끊어질 대 그 재산을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p66 알브레히트는 궁정을 오늘날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 중심부에 위치한 구왕궁으로 옮겼다. 스위스인들이 아르가우에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토지와 거점을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

p76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대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히 각인되었다.

p86 계보 중심의 기사 이야기는 귀족과 왕족의 혈통을 당대의 지명이나 언어, 여성 전사들과 거인들, 용이 가득했던 전설상의 과거와 연결하려는 중세 말엽의 문학 장르였다. 그러나 영주 95인의 연대기는 성서의 역사와 황실의 역사,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뒤섞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공상을 문장학이나 전기와 조합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p91프리드리히는 장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는 친척들과 적들보다 오래 살았고, 덕분에 여러 개로 나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재산을 단일 단위로 재편할 수 있었다.

p109 나중에 드러났듯이, 막시밀리안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의 상속자들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남들은 전쟁을 벌일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한다”라는 17세기의 어느 낙서처럼 말이다.

p119 카를은 애인들을 둘 만큼 사별의 아픔에서 충분히 벗어난 후에도 티치아노에게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고, 종종 악사들에게 그녀를 추모하는 의미로 프랑스 샹송 “1000가지 후회”를 연주하도록 지시하는 등 부인의 죽음을 꾸준히 애도했다.

p146 펠리페는 그가 자신의 처신을 두고 몇 차례 내놓은 해명을 근거로 판단하는 편이 더 낫다. “종교에 대한 모욕을 조금이라도 감수하느니 차라리 내 모든 신분을, 그리고 만약 있다면 100개의 목숨을 잃겠다. 이단자들을 통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p179 헤르메스의 사상은 모든 물질이 사실상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만물의 재료인 원질 또한 금으로 바뀔 수 있을 법하다는 원리를 확증함으로써 연금술 관행의 밑바탕이 되었다.

p229 마그데부르크 약탈 사건은 수많은 소책자와 선전용 인쇄물, 설교를 거쳐서 아주 생생하게 알려졌다. 카톨릭교도들은 그 사건을 천벌의 관점에서 평가했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화재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마그데부르크 주민들이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p236 베스트팔렌 조약은 “기독교 세계의 전반적인 평화” 달성을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최초의 유럽헌법을 제정한 조약으로, 또 근대 유럽의 발전에서 중대한 순간을 장식한 조약으로 높이 평가되어왔다.

p262 그들의 탁월한 통치 덕분에 펠리페 4세는 아무 부담 없이 의식과 관련한 역할을 맡고, 훌륭한 예술품을 의로하고, 본인의 특기를 발휘하여 무려 30명 이상의 사생아를 둘 수 있었다.

p273 바로크의 핵심은 풍유이고, 풍유는 흔히 상징(인간 조건의 양상이나 태도나 행동이 농축된 그림 문자나 주제)의 형태를 띤다.

p287 자동체스 인형이라는 속임수가 먹힌 데에는 켐펠렌의 기술적 창의력뿐만 아니라 상자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공로도 컸다

p297 마리아 테레지아는 치세의 거의 절반 동안 전쟁을 치렀다. 재정 개혁과 자원의 적절한 관리는 그녀가 군사적으로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이 역할을 했다

p320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민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과정의 기저에는 공동의 복리를 위해서 신이 군주를 임명했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p325 요제프가 반포한 관용 칙령에 힘입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은 아마 유럽에서 종교적 비동조자들에게 가장 관대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p345 죽음, 철학, 상업 등을 주제로 이사벨라가 남긴 글 중에는 남성론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이 있는데, 이 글에서 그녀는 남자들을 실속 없고 이기적인, 그리고 여성의 속성인 이성이 결여된 자아도취자들이자 무익한 동물들이라고 통렬히 비방했다.

p350 빈이라는 도시에는 저급한 면도 있었다. 약 2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인 이곳엔느 1만 명의 일반 매춘부들과 4,000명의 고급 매춘부들, 1만 2,000명의 매독 환자들이 있었다.

p356 1780년대 후반기에 개혁이 좌초되기 시작하고 반대 세력이 결집하자, 요제프는 언론과 극장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어릿광대의 즉흥 공연을 금지했고, 신문에 특별세를 부과했으며, 모든 종교와 도덕과 사회질서를 훼손하려는 잠재적 말썽꾼들을 조사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p394 롬바르디아에서는 모든 민주 정치가 파괴되었고, 군사 통치와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는 반란자들과 동조자들을 체포해서 공개 태형과 교수형에 처했다. 오늘날 음악회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관객들은 곡의 배경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411 프란츠 요제프는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제도나 헌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군주로서 적합하지않은 인물이었지만, 자신이 우월한 지혜의 소유자라고 자부했다.

p435 멕시코에서는 이미 사형제가 폐지된 상태였음에도 그는 짧은 재판을 거친 뒤 2명의 장군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1867년 6월 19일에 처형장으로 향할 때, 그는 날씨를 언급했다. “날씨 참 좋군! 늘 이런 날에 죽고 싶었지”

p436 막시밀리안의 위엄과 용기, 순교를 길게 설명하는 익명의 프랑스어 원문은 곧바로 독일어와 헝가리어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막시밀리안이 사후에 그와 같은 명성을 누린 것은 무엇보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 때문이었다.

p462 조각상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자연의 제국을 탐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제국 창건자들만큼 칭송되어야 했다.

p463 역사주의는 19세기 중엽의 건축적 관례였다. 역사주의에 의하면 건물은 각자의 기능에 맞추어 그것과 가장 부합하는 시기의 건축 양식을 반영해야 했다. 따라서 빈의 시청은 빈이라는 도시가 영광을 누렸던 중세를 상기시키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p483 루돌프 황태자는 1888년에 보스니아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이룩해야 할 사명은 동방에 서양 문화를 도입하는 것이다 .”

p505 영국의 외무 장관 로이드조지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는 “우리 전쟁 목표의 일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져야 한다”라고 요구했고, 1918년 6월에 윌슨 대통령은 “슬라브 인종의 모든 분파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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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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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 21세기북스

 : 2022/08/07 - 2022/08/11


이런 책을 읽어야 성장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에서 책읽고 강의듣고 했던 내용보다 책 한권에서 얻은 지식이 훨씬 크다.

그만큼 유물조사 및 고고학에 의한 역사발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보면 그저 우리나라 만세를 외치는 국뽕주의자나 일본이나 미국에 경도된 바보들이 정말 많은데 그런 엉터리 사이에서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발견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지를 알 수 있었다. 

올해 읽은 책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던 책 가운데 하나다.

좋다.. 


p7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면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랜 기간 논란이 되었다가, 가야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p13 상고사는 전문 연구자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 시민들이 수많은 설을 자유롭게 주장하는 백가쟁명의 장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연구자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유투버가 등가로 취급받는 분야이기도 하다

p22 두 책에 의하면 고대부터 일본 천황은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렸고 백제와 신라, 가야 왕들은 천황에게 굽신거리는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 이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이용해서 한국 고대사나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려면 독이 가득한 알을 제거하고 복어를 섭취하듯 왜곡된 내용을 전부 걸러내야 한다

p22 이처럼 급변하는 게 고대사이다 보니, 수십 년 전 진실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통설은 계속 무너지고 있다

p30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제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36 고고학 자료는 금석문이나 목간처럼 요리하기 좋은 재료가 아니기에 연구자는 자료가 충분히 말을 하도록 자꾸 대화를 걸고 흔들어 깨워야 하는데 그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p47 대표적인 예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사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57 익산 미륵사가 무왕과 신라 출신 선화공주의 협력으로 조성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 문헌은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인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800년 통설이 무너졌다. 문헌에는 보이지 않던 사택씨 왕후가 등장했고 무왕의 왕비가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됐다

p61 무엇보다도 인천공항을 향할 때마다 근심걱정보다 가슴 설레는 체질이라면 고고학 연구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p72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가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인골 대부분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101 옥전 M3호분이라고 명명된 다라국 왕릉에서는 고령 지산동만큼의 순장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쇠도끼 수십 점, 말 갑옷과 투구, 사람 갑옷과 투구, 용과 봉황을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자루칼이 4점이나 나왔다. 비슷한 시기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용봉문 고리자루칼이 한 점밖에 나오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옥전 M3호분의 후장은 분명 지나치다. 아마 망자의 내세를 위해 현세의 삶을 망가뜨린 것이다.

p127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p143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전체 둘레 3.5킬로미터, 기저부 폭이 40미터 이상, 높이 12미터 이상인 초거대 토목구조물을 축조하며 동원된 노동력은 2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왕성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p146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되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 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에 틀림없다

p155 무령왕릉을 발굴한 학자들은 최고의 영예와 행복을 누렸을 것 같지만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최대의 발견, 최악의 발굴이라는 야유와 빈정거림 속에 살아야 했다. 모든 유적은 소중하며,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유적 발굴조사에 임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p162 동북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서 유라시아 동부라는 안경을 쓰고 역사를 보면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 싸운 세력은 동쪽의 고조선만이 아니었다. 북쪽의 흉노가 한을 압박했고, 서쪽에는 오손, 월지, 사카란 세력이 있었다. 미얀마 쪽에는 퓨라는 종족이, 중국 운남성 지역에는 디안이, 그리고 지금의 중국 광동, 광서, 베트남 북부에는 남월이, 복건성의 민월 등이 마치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를 둘러싼 진돗개 무리처럼 한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p167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p169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황금인간전이란 이름으로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카족 왕자의 무덤, 즉 쿠르간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전시했다. 그런데 이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을 5세기 무렵의 신라 왕릉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것들과 매우 유사한다. 문제는 두 유적 사이에 천 년이란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p175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p178 국제도시 장안에서는 복장, 음악, 음식 등 많은 분야에서 소그드와 페르시아의 호풍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이 동정했을 때 혼인한 현지의 여성도 소그드인이었고, 당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사사명의 반란을 주도한 안록산 역시 소그드와 돌궐의 혼혈이었다.

p184 카타콤 내부에서는 신장 180센티미터가 넘고 편두를 한 장신 여성이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채 무기를 잔뜩 보유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찾아냈다. 여성 전사였던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카타콤에 묻힌 이들은 알란과 사르마티아라고 하는 유목 기마민족이었음을 알아냈다.

p190 사기에 등장하는 한나라의 누선장군 양복은 남월 공략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위만조선 침략전에 나섰다. 이 양복이란 인물에 의해 남월과 위만조선이 연결되었다. 그렇기에 남월의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느냐 묻는다면 위만조선을 아는데 남월국의 역사가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p192 참파는 한자로 임읍이라 불리던, 베트남 중부의 다낭과 호이안을 무대로 발전한 항시 국가다. 372년 참파가 동진에 사신을 보낸 기사가 남아 있는데 이 기사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p197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 발생하였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p206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가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향으로 인해 세계 학계의 우스갯거리가 되어가고 있음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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