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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혼자 공상에 빠져드면 무엇을 알게 될까? 봄에 나는 없었다
조앤 스쿠다모어가 어떤 여자인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짚어봐야 했다.
사막에 온 건 그것 때문이다. 이 맑고 무지막지한 빛줄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진실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책속에서)
이 책은 추리 작가로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 중 하나이다.
필명으로 쓴 소설인만큼, 그녀의 추리소설들을 읽으면서 파악할 수 있었던 스타일과는 약간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e-book으로 접할 수 있게 되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사실 애거서 크리스티가 다른 필명으로 쓴 이 시리즈는 처음엔 읽을 계획이 없었었다.
애초에 애거서 크리스티를 좋아하는 건 그녀의 추리 소설 속 등장인물과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스타일이 다른 책에 빠져들게 될까, 솔직히 기대감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기대감이 낮았기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예상보다 훨씬 더, 몰입감 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는 '조앤'이 딸네 집에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 우연히 과거 같은 학교를 다녔던 '블란치'와 만나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학창시절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블란치는 건실한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고, 그런 그녀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에 조앤은 안쓰러운 마음을 가진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변함없이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한다.
블란치와 헤어진 후 홀로 여행을 하던 조앤은 날씨 때문에 어느 사막 지역에 발이 묶이게 되어버리고, 여행 중 할 소일거리가 없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부분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조앤이 이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이면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
외면하려고 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
정말 흥미롭다......
자신을 만나다니......
자신을 만나다......
맙소사. 그녀는 두려웠다......
소름끼치도록 두려웠다...... (책속에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도 조앤처럼 점점 섬뜩해지고 두려워지는 느낌이었다.
초반의 과거 회상에서는 알쏭달쏭한 의미였던 주변 사람들의 말들은 반복되는 생각 속에서 차차 그 이면에 숨겨졌던 의미를 드러낸다.
그리고 조앤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힘겨운 존재였는지.
사실 완벽한 제 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주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성격이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 또한 조앤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두려워지곤 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을 진실에서 도망친 적이 분명 많이 있을테니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조앤은 분명 주인공이지만 연민보다는 어쩐지 자꾸만 외면하고 싶어지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건 그녀가 독자인 나를 자꾸만 되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일것이다. 달아나고 싶어지는 것들을 향해 돌아서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앤이 학창시절 졸업 전에 들었던 그녀의 학교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분명 새겨둘 필요성이 있었다.
"이제 특별히 한 마디만 더 하겠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돼!" (책속에서)
혼자 생각속으로 빠져드는 것만으로 이렇게 두렵고 섬뜩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새삼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감탄했다.
서술트릭을 이용해서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은 어쩐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주요 사건이나 진행방식에는 차이가 많지만, 두 책의 결말까지 읽어낸 후에 느껴지는 느낌이 꽤나 비슷하다. 계속해서 앞부분의 내용을 곱씹게 되는 것도 그렇고.그리고 한 가지. 해설 부분을 읽는데 거기서는 조앤이 원래의 조앤으로 돌아간 것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원문을 읽지 않아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에필로그의 조앤의 반응을 보면서 물론 조앤이 자신의 생각을 한낱 공상으로만 치부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먼저 입밖에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조앤의 주변 사람들 역시, 조앤이 변화를 겪었음을 결코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주변 사람들이 그녀만 빼고 비밀을 지키는 것처럼. 그래서 마지막 글이 좀더 아프게 찔러왔던 것 같다.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책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