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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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뒤에 숨은 소설, 창백한 불꽃

 

그러니까 이 작품을 뭐라고 봐야할까.

일단 형태는 '시집'이다. 작품 자체가 온전한 책 한 권이다.

머리말에, 본문인 4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이어지는 주석, 마지막으로 색인까지.

책을 읽기 전 훑어보며 눈에 들어온 주석과 색인, 작품에 더한 것이라 생각해서 단테의 <신곡>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작이었다.

이 독특한 형태만으로도 '새로운 독서 경험'을 줄 수 있는 책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파고들수록 새롭다.

작품 뒤에 실린 해설을 보면, <창백한 불꽃>에 대한 비평은 크게 세 분파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이 소설을 서사구조의 실험으로 보는 경우, 둘째는 캐릭터 설정 배경이나 소재 선택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의 단서를 찾는 경우, 세번째는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중요한 해석 코드로 삼는 경우다. 세 가지 모두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첫번째 관점의 경우는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보는 견해와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탐정 서사가 아니라 살인자가 희생자를 찾아가는 설정으로 도치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백한 불꽃>은 두 명의 저자가 있다. 동명의 시를 지은 존 셰이드. 나머지 머리말, 주석, 색인을 작성한 찰스 킨보트.

찰스 킨보트가 존 셰이드의 시를 편집해 책으로 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그는 시 '창백한 불꽃'의 첫번째 독자다.

이 점에 주목해서, '독자의 해석'이라는 관점을 생각하며 읽었다.

킨보트는 주석을 통해 존 셰이드의 시 '창백한 불꽃'이 자신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킨보트가 쓴 주석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도망친 젬블라의 왕을 쫓는 암살자의 이야기, 킨보트가 셰이드와 교류하며 겪은 이야기, 셰이드의 죽은 딸에 관한 이야기, 원고의 처분에 대한 주변의 반응 등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주석을 차례대로 읽을 수도 있고, 주제별로 읽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주석에서 참조하라는 대로 따라가며 읽을 수도 있다.

<창백한 불꽃>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은 작중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정해진 해석대로 읽으라는 법은 없다. 텍스트는 같아도 독자의 경험에 따라, 성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무수히 많아진다.

킨보트는 편집자로서, 첫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존 셰이드의 시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가 주석에서 언급하는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킨보트의 주석을 믿지 않는다. 그의 해석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가 쏟아낸 이야기 뒤편의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나? 거기에는 지금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나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닌가? 글의 일부만으로 해석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 그렇다. 그 시의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그의 것이 맞다. (p.105)

 

킨보트가 말하는 것처럼,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저자의 것이지만, 독자들이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게 되면 온전히 저자만의 것이 되기 어렵다. 저자조차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킨보트가 시 '창백한 불꽃'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킨보트의 글에 대해 취하던 태도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창백한 불꽃>을 읽으며 계속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초점을 두고 반복해 읽어야 할 책이다.

주석 하나에 담긴 대사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면 찾을 수 있을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 P89

"친애하는 존." 나는 다정하게 그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테니까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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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코나
아키타 요시노부 지음, 마타요시 그림, 김동주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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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체질을 가진 소녀와 세계, 하루코나

 

책을 두른 띠지를 보면, <하루코나>는 1000만 부 판매 기록을 세운 <마술사 오펜>의 저자 아키타 요시노부가 쓴 책이라고 한다.

<마술사 오펜>이 어떤 책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사실이 독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표지 그림은 약간 수채화 느낌이 있는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이다.

SF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루코나>의 여주인공은 '하루코'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였다.

하루코는 특별한 체질을 갖고 있는데, 그건 '대항 꽃가루 체질'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바깥 공기는 유독물질이기 때문에, 외출 할 때는 항상 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 방호수트를 입어야 한다.

당연히 불편하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아 따로 통신을 해야 할 정도로 두꺼우니까.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외출을 하는 것은, 그녀와 같은 '대항 꽃가루 체질자'는 주변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거리에 나오면 꽃가루 알러지는 겪을 일이 없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외출 여부에 주목하며 바깥 활동을 한다.

꽃가루 알러지를 겪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맑은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일테니 환영할 법 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항 꽃가루 체질자'는 혼자 외출하기 힘들기 때문에 안내인이 붙는데, 자연히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릴 적 하루코가 옆집으로 이사오면서 그녀의 안내자가 되었다.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하루코는 아름다웠다. 하루코도 나도 아직 어렸지만, 처음 보자마자 자신들만 이 세계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하루코였다. 이 거리를, 그리고 언젠가 세계를 지배하고 나의 것이 될 하루코였다. (p.13)

 

첫만남을 묘사한 부분. 하루코의 모습은 표지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순수한 애정이 느껴지는 묘사였다. 맑고 투명한 감정.

하지만 평범하게 흐르던 일상의 행복을 어지럽히는 일이 발생한다.

공공 개선 기구, 일명 '개선'이라 불리는 단체의 꽃가루 대책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루코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지나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아 사고가 일어날 뻔 하거나, 하루코와 나를 향해 화살을 쏘는 일이 생겼다.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비난의 말을 쏟아내는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응이 이뤄지는 것 같지 않다.

급기야 학교 친구들이 나서서 직접적인 대응을 시도하는 사태에 이른다.

 

연애 요소는 잘 모르겠다.

남녀 주인공 사이에 교류의 느낌이 적다고 생각했다.

그건 여주인공이 입은 방호 수트 때문일까?

이 소설이 1인칭 시점이어서인지,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하루코의 반응이 무덤덤하게 그려진다고 느꼈다.

감정도 방호 수트 안에 봉인해 버린 것처럼.

그녀의 세계는 오직 방호 수트 안에서만 기능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말 부분을 보면 이 생각이 더욱 굳건해진다.

이렇게 감정적인 요소가 연약해서, 다른 강렬한 소재에 쉽게 시선을 빼앗기게 된 것 같다.

 

"글쎄다. 알레르기 같은 거야. 분노라는 것은 알레르기야. 화를 내는 놈은 본질을 생각하지 않아. 단순한 병인 거지. 하지만 위독하고 발병하면 벗어날 수 없어." (p.230~231)


하루코를 두고 대립이 커지며 두 세력간에 충돌하는 내용이 나온다.

"없애버려! 없애버려!"라는 대사가 한가득 쏟아진다.

화자는 그 분노 섞인 외침들이 마치 '꽃가루 알레르기'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귀족'이라는 별명을 지닌 인물도 이야기한다.

'알레르기'라는 요소가 '분노'라는 감정과 연결되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SF소설이라고 해서 과학적인 요소가 가득 담긴 책을 생각했는데, '인간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는 점이 좋았다.

 

<하루코나>는 하루코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하루코에 대해 공감하면서 읽기는 어려웠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하루코의 감정을 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코에게 공감을 하기 어렵다는 점은 그녀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책 속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대항 꽃가루 체질자'를 비난하는 인물들이나, 하루코에 대한 위협을 차단하려는 인물들이나 결국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녀를 도구적으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자연 환경에 피해가 간다는 주장, 그녀가 있어야 꽃가루 알레르기 걱정 없이 쾌적한 바깥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속내. 그들은 하루코의 감정이나 의견을 고려하겠다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을 비판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하루코를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씁쓸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하루코의 방호수트 안 그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안내자인 '나' 뿐일 수밖에 없는게 아닐까. 독자를 포함해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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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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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그 후의 이야기, 우리와 당신들

 

<우리와 당신들>은 <베어타운>의 후속 이야기다.

하키가 전부인 마을 '베어타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전작 <베어타운>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그림자는 여전하고, 새로운 사건마저 일어난다.

 

당신은 한 마을이 무너지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우리 마을이 그랬다. 나중에 우리는 이해 여름에 폭력사태가 베어타운을 강타했다고 얘기하겠지만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폭력의 조짐은 그전부터 있었다. 왜냐하면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 워낙 쉬운 일이 되어놔서 증오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p.13)

 

<베어타운>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와 당신들>의 첫 부분도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살짝 보여준다. 담담한 어조로.

이 내용을 읽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 이야기 역시, 읽는 내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흔들겠구나 싶어서.

<베어타운>을 읽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용감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바라는만큼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p.14~15)

 

<베어타운>을 읽으며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독자조차도 그렇다. 그들의 입장이 아니니까, 안전한 위치에서 그들의 행동을 나무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당신들>에서 화자는 그 부분에 대해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도 우리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고.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펼쳐진다.

다수의 생각때문에 소수가 상처받는 내용들이 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서양은 개인주의라고 하던데, 이 책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와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걸까.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상황을 만든 이를 미워한다.

'우리'와 다른 성향을 가진 이를 비난한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와 다른 목표를 가진 이를 나무란다.

내 편과 네 편. 우리 편이 좋은 편. 당신 편은 나쁜 편.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키'라는 스포츠 경기와 맞물려 그 대립이 강렬하게 보인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벗겨내고 애초에 그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들만 남기면 단순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P.616)

 

하지만 결국 하키는 단순히 스포츠일 뿐이다. 하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에 덧씌워진 다른 생각들이 문제였던 거다.

하키는 위로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서로의 마음을 묶어내는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어떤 것이든지 선악을 규정해둘 수 없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프레드릭 배크만의 책이다.

두꺼운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입장이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계속해서 마음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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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 도시 여자의 리얼 농촌 적응기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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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

 

가키야 미우의 책을 세 권째 읽는다.

이 작가는 현실적인 요소를 충분히 살리면서도 '소설'이라는 인식을 놓치지 않게 해준다.

미묘한 균형이 마음에 든다. <서른두 살 여자, 혼자 살만합니다>도 그래서 좋았다.

주인공 미즈사와 구미코는 직장에서 잘린 날, 동거하던 애인에게서 이별통보까지 받는다.

혈혈단신인 그녀는 임대보증인 구하기도 쉽지 않다.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TV 프로그램에 나온 농사 짓는 여성을 보고 시골 생활을 결심하게 되고, 행동에 옮긴다.

농업대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신청하고, 대학 동문에게 연락해 이사갈 곳도 구한다.

 

아아, 드디어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살 곳이 없어진 그 순간의 공포감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힘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아.

어느새 주먹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p.63)

 

그렇게 인생 제 2막은 장밋빛으로 가득해 보였건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문제들이 샘솟는다.

외지인을 경계하는 동네 토박이들. 농사지을 토지 빌리는 것부터 쉽지 않다.

겨우겨우 토지를 구해 농사를 짓지만 노력만큼 수입이 생기지 않는다.

의견을 나누던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을 택하게 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화가 머릿속을 차지했다.

누구에게든 좋으니 호통을 치고 싶었다. 폭발할 것만 같다.

한편으로 슬프고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울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마음 한구석이 어두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p.125)

 

책을 읽으면서 인물들에 대한 생각이 계속 바뀌어간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화가 난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상대가 그런 행동을 한 속사정이 나오면 가라앉는다. 어느정도 합리적인 이유라서.

생각과 현실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니 자의적인 판단을 내릴수밖에.

그건 농사라는 '일'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갑작스레 이별통보를 한 구미코의 전 연인. 그는 오래전 청혼했을 때 구미코가 거절한 것에 상처를 받았었다.

이야기 하지 않았기에, 구미코는 그의 마음을 몰랐다. 헤어지게 되서야 그때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단순히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갑작스런 이별이었지만 솔직하게 서로의 감정을 털어냈기에, 두 사람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상대가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남자라고 구미코에게 이야기하던 시즈요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블로그를 보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 보이던 파워블로거 미즈키의 삶은 꾸며진 것일 뿐이었다.

독립해 농사를 짓는 일에서의 선배였던 히토미도 결국 안전한 삶을 위해, 결혼을 택한다.

그 상황 속에서도 구미코는 꿋꿋이 독립생활을 이어간다.

주변의 도움으로 집도 살 수 있었고, 그간의 노력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로부터 토지도 더 빌려 경작할 수 있게 된다.

파워블로거인 미즈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농작물 판매량도 큰 폭으로 상승한다.

좌충우돌을 겪었던 그녀가 이제 겨우 농사 짓는 독립 생활에 적응한 모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강하기 때문에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쉽게 결혼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진 않았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가 궁지에 몰렸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340)

 

도시여자였던 구미코가 귀농해 농촌에 적응해가는 이야기는 세상에 역시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결혼으로 도망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꿋꿋이 독립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은 멋져보인다.

구미코 주변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도 흥미롭다.

각각의 사연이 있고, 그 문제들도 다양하다.

그녀들이 서로 의견교류를 하면서 조언을 주고 받고,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좋았다.

이 책은 주인공 구미코의 독립생활에 관한 이야기지만, 여성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내용이 좋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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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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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서히 스러지는 소멸의 이미지를 담은, 작별

 

<작별>은 제 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수상작인 표제작 '작별'을 포함해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작별'은 <채식주의자>로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한강 작가가 쓴 단편이었다.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라, '작별'으로 한강 작가의 글을 처음 읽게 되었다.

매력적인 글이었다. 정말로. 한강의 다른 작품들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p.13)

 

'작별'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눈사람이 되어버린 여자의 이야기.

판타지라고 할 수 있는 눈사람으로 변한 그녀의 현재 상황과, 현실적인 내용들인 그녀가 떠올리는 과거 이야기가 균형있어서 매끄럽게 읽어갈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나아가는 분위기가 눈사람이란 소재와 잘 맞아떨어진다.

표지의 제목 디자인도 반짝이는 점들이 모인 형태인 것이 마치 흩날리는 눈을 연상하게 된다.

 

그녀가 아이를 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순간 그녀의 왼쪽 가슴이 더워졌다. 얼어붙은 줄만 알았던 눈두덩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새어 나오려 하는 것을 느꼈을 때 그녀는 아이를 안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현관문 닫아야겠다. 공기가 너무 따뜻해. (p.37)

 

눈사람이 된 후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고, 아이를 만나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그러면서 그들과 연관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상대와 온기를 나누면서 눈사람인 그녀는 조금씩 스러진다.

서서히 사라지는 묘사가 감정을 자제하고 있어서 더 세세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무서울 게 뭐야, 문득 소리 내어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어때, 뒤이어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좀 전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p.43)

 

존재의 소멸이 두려울법도 한데 그녀는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미, 죽음을 준비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의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를 미리 해 둔 상태다.

어쩌면 그녀는 머지않아 자신이 소멸할 거라고 예상했던걸까.

덤덤한 그녀의 독백들, 따옴표가 없는 대화들이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전체적인 통일된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불현듯 자신을 향해 물었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직 그녀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 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이 층계참에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야. (p.53)


'작별'이 보여주는 '사라짐'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해서 좋았다.

표제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인지, 다른 수록작들은 애매했다.

대부분의 단편에서 모호하게 느껴지고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는데, 깔끔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이 취향과 맞지 않았다.

'손'의 경우, 화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의 모호한 문제. 숨겨진 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느꼈다. 이 작품은 시골이 배경인데 일반적인 고정관념에서 조금 비틀린 부분들이 있어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희박한 마음'은 꿈과 현실의 모호함이 있었다. 이야기 초반 타인의 이야기였던 내용은 결국 화자의 이야기가 된다. 돌고 도는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내용의 분위기도 어쩐지 어두운 느낌이었다.

'동네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관찰당하고 있는 도시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소돔의 하룻밤'은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이방인, 외부에서 온 나그네를 굴복시키려는 텃세를 보여준다. 같은 장면을 다르게 풀어나가는 일종의 병렬구조를 사용하고 있어서 약간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언니'는 부당하게 대우받은 언니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내용. 관찰자 시선이라 감정적인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좋았다.

'Light from Anywhere(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은 읽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다. 종결어미가 뒤섞여 혼란스럽기도 했고, 어디까지가 등장인물의 말이고 어디까지가 서술인지 종종 헷갈렸다.

이렇게 '작별' 외에 끌리는 단편은 없었지만, 표제작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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