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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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뒤에 숨은 소설, 창백한 불꽃

 

그러니까 이 작품을 뭐라고 봐야할까.

일단 형태는 '시집'이다. 작품 자체가 온전한 책 한 권이다.

머리말에, 본문인 4편으로 된 시 '창백한 불꽃', 이어지는 주석, 마지막으로 색인까지.

책을 읽기 전 훑어보며 눈에 들어온 주석과 색인, 작품에 더한 것이라 생각해서 단테의 <신곡>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작이었다.

이 독특한 형태만으로도 '새로운 독서 경험'을 줄 수 있는 책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파고들수록 새롭다.

작품 뒤에 실린 해설을 보면, <창백한 불꽃>에 대한 비평은 크게 세 분파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이 소설을 서사구조의 실험으로 보는 경우, 둘째는 캐릭터 설정 배경이나 소재 선택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의 단서를 찾는 경우, 세번째는 죽음에 대한 작가의 태도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중요한 해석 코드로 삼는 경우다. 세 가지 모두 흥미로운 관점이라고 생각했다. 첫번째 관점의 경우는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보는 견해와도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탐정 서사가 아니라 살인자가 희생자를 찾아가는 설정으로 도치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백한 불꽃>은 두 명의 저자가 있다. 동명의 시를 지은 존 셰이드. 나머지 머리말, 주석, 색인을 작성한 찰스 킨보트.

찰스 킨보트가 존 셰이드의 시를 편집해 책으로 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그는 시 '창백한 불꽃'의 첫번째 독자다.

이 점에 주목해서, '독자의 해석'이라는 관점을 생각하며 읽었다.

킨보트는 주석을 통해 존 셰이드의 시 '창백한 불꽃'이 자신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머나먼 북쪽의 나라 '젬블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킨보트가 쓴 주석에는 이 이야기와 함께 도망친 젬블라의 왕을 쫓는 암살자의 이야기, 킨보트가 셰이드와 교류하며 겪은 이야기, 셰이드의 죽은 딸에 관한 이야기, 원고의 처분에 대한 주변의 반응 등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주석을 차례대로 읽을 수도 있고, 주제별로 읽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주석에서 참조하라는 대로 따라가며 읽을 수도 있다.

<창백한 불꽃>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것은 작중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정해진 해석대로 읽으라는 법은 없다. 텍스트는 같아도 독자의 경험에 따라, 성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무수히 많아진다.

킨보트는 편집자로서, 첫번째 독자로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존 셰이드의 시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가 주석에서 언급하는 다른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킨보트의 주석을 믿지 않는다. 그의 해석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가 쏟아낸 이야기 뒤편의 진실을 찾아내려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나? 거기에는 지금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나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닌가? 글의 일부만으로 해석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 그렇다. 그 시의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그의 것이 맞다. (p.105)

 

킨보트가 말하는 것처럼, 최종 텍스트는 온전히 저자의 것이지만, 독자들이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게 되면 온전히 저자만의 것이 되기 어렵다. 저자조차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킨보트가 시 '창백한 불꽃'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킨보트의 글에 대해 취하던 태도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창백한 불꽃>을 읽으며 계속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초점을 두고 반복해 읽어야 할 책이다.

주석 하나에 담긴 대사 하나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면 찾을 수 있을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에 붙인 주석 같은 것.
- P89

"친애하는 존." 나는 다정하게 그리고 황급히 대답했다. "사소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당신이 시로 변형하면, 사료는 정말 진실이 될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정말 살아 있는 게 될테니까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서지요."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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