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정도 아이디어를 인정받은 크리에이터 케리 스미스의 책. 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 답게 이 작품 또한 매웃 신선하고 재미있게 '책' 의 고정관념을 비틀고 있다. 찢고 구기고 낙서하며 단단해진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줄 책!!

  

  

 

 

  

  

 

  위의 책과 세트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크리에이터의 즐거운 인생 만들이 프로젝트!!! 그림, 그거 생각보다 되게 쉽고 재밌는 거라네!!!

 

 

 

  

 

 지난 달, 진중권의 모더니즘에 이어 과거로 한달음에 돌아가서 미술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책. 풍부한 도판이 기대된다. 

 

 

 

 

  

 

 서양 미술사만 미술사인가? 한국 미술사도 있다. 이번달에 받은 추천신간 중에 민화에 관한 책이 있지만, 아마 이 책은 더 쉽고 재미있을 듯!! 두 권을 동시에 읽으면 머릿속에 아주 쏙쏙 들어올듯!!! 

 

 

 

  

 

 

 지난달에도 추천신간에 올렸던 팬톤의 컬러에 관한 에세이와 차트. 그래픽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참조해봤을 팬톤 컬러차트. 팬톤이 이룩한 색에 관한 철학과 발전상.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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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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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철학의 풍경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이번달 신간평가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라딘에서 날아온 두권의 책.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과 [사진철학의 풍경들] 이다. 알라딘 신간 평가단은 각 분야별 20여명의 회원들이 매 달 초 발간된지 2달 이내의  신간들을 2권 이상 추천하고, 담당자가 그것들을 모아 가장 많은 회원들이 선택한 두권의 책을 선정하여 회원들에게 보내주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즉, 두권의 책은 랜덤으로 조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이번에 날아온 두 권의 책은 얄궂을 정도로 연관성이 있다. 미술의 역사가 크게 변화하던 시기. 그 변화의 시발점에 카메라라는 기계의 출현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의 큰 변화가 시작되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행위는 가장 커다란 실수였다' 라며 화가 내면의 세계를 캔버스에 옮겨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카메라가 자연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행위를 이미 충분히 해 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단순히 자연을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행위가 영혼이 있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기계적인 '기술' 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피사체를 '담는' 기기에 불과했던 [사진] 은 오래지 않아 예술로 발전하게 되는데, 거기엔 역시 미술의 영향이 컸다. 고전 미술이 가지고 있던 구도와 오브제의 배치 기법들이 사진속에 그대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속에 녹아있는 미술적인 '맛' 들이 사진을 일찌감치 예술의 한 분야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했고, 탁월한 감각을 지닌 사진작가들의 출현으로 사진 예술은 점점 더 발전해 나아갔다. 
 

 '미술' 의 현대적인 발전은 형形과 색色을 버리고 한계를 깨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 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사진은 어떻게 발전해 나아갔을까? 태생적으로 형과 생을 버릴 수 없는 매체인 사진. 화가들이 자신의 내면을 캔버스 위에 녹여내고자 했을때, 사진가들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피사체에 투영시켰을까?  

 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은 사진의 예술성을 총 망라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지성적, 감성적 접근을 위해 책을 크게 다섯개의 단락으로 구분지었다. 

먼저, '인식의 풍경', 그리고 '사유의 풍경, '표현의 풍경' 과 '감상의 풍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의 풍경' 이다. 인식의 풍경에서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같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유의 풍경에서는 시간의식과 기호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표현의 풍경에서는 조형과 사진심리, 인상과 인식, 차이와 반복 등 사진이 담고 있는 '감각' 에 대해 다루고 있고, 감상의 풍경에서는 미와 진리를 지향함으로써 결국 사진 또한 미학을 넘어 예술의 근원과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풍경에서는 사진이 왜 그토록 사회적인 실천인지, 왜 이미지 수사학인지, 어떻게 필수적인 유희와 욕망의 수단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책은 완전히 하나의 도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양의 사진이 실려있다. 작가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또렷히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그 시도는 상당부분 통하고 있다. 이 책의 대상은 전문 사진작가부터 일반 독자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수많은 이론서들과 철학서들을 인용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자신의 '기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까지 고민하고 있다. 

 예를들어 책에는 '스티븐 쇼' 라는 미국의 사진 작가이자 이론가의 말을 빌려 사진 감각을 후천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거의 초반부에 실려있는데, 작가는 독자들에게 사진감각에 대한 열린 마음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 이라는 무거운 단어와 달리 책은 초반에는 아주 쉽게 읽힌다. 수많은 사진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지만, 설명에 따라 잘 배치되어 있다. 독자 친화적인 설명 방식도 맘에든다. 인용구를 인용구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다시 한 번 쉽게 풀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상당히 어려워진다. 사진의 기법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진이라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관념' 을 '설명' 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다. 책을 읽어 나가다 보니 저자 스스로도 아직 완벽히 정립시키지 못한, 즉 관념 자체는 명확하지만, 남에게 풀어서 설명하기에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관념론까지 등장하는 듯 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카메라가 살아있는 하나의 생물과도 같다. 때로 이 카메라라는 녀석은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바로 나 자신의 내면이다. 저자는 존 사코우스키라는 사진이론가의 말을 빌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자아를 향한 내면의 응시 - 거울" 로서의 역할과 "타자를 행한 외면의 응시 - 창" 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눈은 얼굴 밖으로 돌출되어있는 뇌이다. 전에 다른 책의 리뷰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모습을 갖춰가는 광경을 보면, 먼저 뇌가 생기고, 그 뇌에서 더듬이처럼 가느다른 두개의 돌기가 비죽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눈이 된다.  눈은 뇌의 두개골 외부 출장소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뇌가 인식하는 장면을 그대로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꽤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나 역시 이제 사진을 보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테니까. 

"당신의 사진은 거울의 시선입니까? 창의 시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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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대학 1학년 1학기때 일러스트레이션 이론이 필수교양이었다. 서양미술사는 선택교양이었고. 워낙에 외우는 것을 싫어했던 난 서양미술사를 최대한 피했더랬다. 하지만, 관심은 많았던지라, 강의서적은 구입해서 열심히 읽었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어떤 분야에 넣느냐에 따라 그 출발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당시 내가 들었던 강의의 교수님께서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산업디자인의 범주에서 다루셨다. 아, 그 교수님은 산업 디자인과 전임 교수님이시기도 했고(ㅋㅋ) 기본적으로 그 분께서 말씀하셨던 '일러스트레이션' 이란 결국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태생 자체가 상업과 긴밀한 관계이다. 요즘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단어 자체에 '오브제를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한 그림'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바우하우스에서 산업 디자인과 함께 시작되어 결국엔 키치로 함께 들어갔던 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는 꽤나 흥미로웠다.

 한 학기동안 거대한 미술사의 한 부분, 한 흐름을 공부했기때문에, 그 시간은 생각보다 깊이있었고 정말 재미있었다. 1학년짜리가 맨날 맨 앞에 앉아서 잔뜩 필기를 하며 수업을 따라가곤 했기에, 교수님도 날 꽤 예뻐해 주셨지만, 우리 과 전임 교수님은 아니셨던지라 인연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더랬다.
  

한편, 그 한 학기동안 베개만한 '서양 미술사' 를 들고다니던 녀석들도 있었다. 녀석들은 쏟아지는 과제들 속에서, 그림과 화가이름을 정신없이 외우며 다녀야 했다. 물론 사조의 순서 또한 외워야 했고, 후기 인상주의를 지나 야수주의에 돌입하며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사실 인상주의부터 주요 화가의 그림들이 비슷비슷해진다. 특징을 찾아 외우기가 만만치 않다. 심지어 마네, 모네 등은 이름부터 헷갈리고, 르누아르와 마네의 화풍도 상당히 닮아있다. 반면, 고흐, 고갱, 세잔같은 후기 인상주의의 그림들 또한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를 지나 야수주의에 들어가면 대부분 시험을 포기한다. ㅋㅋㅋ 

 난 수업을 듣지 않았기때문에 흥미롭게 서양 미술사에 관한 책을 탐독했었지만, 부족한 도판과 딱딱한 저술은 개인적인 흥미를 반감시킬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모든 시대적 흐름에는 흐름을 주도하는 큰 사건과 인물들, 그리고 그 인물들의 개인사까지 망라되어야 한다. "히스토리" 란 결국 사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서들은 모두 그렇다. 왕 중심으로 기록이 전개된다.
 

 하지만, 미술사는 다르다. "미술사" 라는 단어처럼 '미술' 중심의 역사가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림이 주인공인 역사이다. 당연히 그림을 그린 화가 역시 서브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에 얼마나 많은 그림과 화가와 기록들이 있는가.  

 결국 미술사는 시대별로 기록되야 했고, 그 시대에 가장 우세했던 '화풍' 을 묶어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유행인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좋아했던 화풍, 중세 이전까지는 왕의 초상화나 왕실화가, 혹은 성당 미술등의 그림을 '주류 화풍' 으로 구분할 수 있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흐름을 이해하기 조차 쉽지 않았다.  

 특히 시대별로 나누면 야수주의, 입체주의가 거의 동일한 시대에 꽃피웠고, 바로 뒤이어 등장하는 추상주의와 절대주의, 표현주의도 거의 동시대에 걸쳐있다. 그렇기에 한 작가가 여러 화풍의 그림을 내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 역시 화풍의 변화에 따라 그 작가 개인의 화풍을 구분해야 할 정도이니, 흐름을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책들이 현대 미술부분을 '모더니즘' 으로 묶어서 간략하게 기술하는 경우가 많다.  

 진중권 교수가 풀어내는 모더니즘은 지금껏 내가 읽어온 어떤 미술사보다 쉽고 명쾌하게 풀려있다. 그냥 읽기만 하면 술술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 인과관계가 완벽하고, 작가와 작풍, 작품의 분배가 쉽고 뚜렷하다.  진중권 교수는 모더니즘을 '아방가르드의 시대' 로 명명하고, 그 안에서 화풍 - 사조가 생성된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 잡지나 신문등에 기고됐던 기록들의 인용도 상당한 양이고, 도판도 정말 풍부하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모더니즘의 특성들 중 하나는 '자아성찰과 그 표현' 이다. 여기서 '작가주의' 가 도래한다. 아방가르드 시대 자체를 작가주의의 시대라고 생각하고 보면 더 쉽다. 화가들은 더이상 남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 시기부터 이러한 색깔은 조금씩 보여왔었다. '야수주의' 라는 이름 자체가 주류 미술계에서 조롱을 담아 내뱉은 표현이었듯, 미술세계는 점차 진보적인 비주류가 주류가 되어가는 과도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등 거대한 비극을 겪으며 주류와 비주류의 교체는 더욱 빨라지고, 변화에 대한 욕구는 거세졌다.

 당시의 화가들이 자연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화폭에 담아야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영혼이라고 외쳤다. 심지어 우연의 효과를 기대하는 다다이즘은 현대인인 나에게도 충격이었으니, 당시의 주류 미술인들에겐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아방가르드의 시대는 전통적 화풍의 파괴를 불러온 시기이자, 재료의 파괴를 불러오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더니즘 이후, 네오 아방가르드의 시기를 다룬 미술사 서적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 출간되어온 대부분의 서양 미술사에 관련된 책들은 수십년 전의 책들이 번역되고, 중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양미술사에 대한 서적이 잘 팔릴 리도 없을뿐더러. ㅎㅎ  

이 책을 읽으며 특히나 독설로 유명세를 떨치는 진중권 교수가 입만 발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쉽고 명쾌한 정리에 술술 빠져드는 문장력이라니. 용어의 사용과 풀이도 대단히 친절하다. 완벽하게 독자 친화적인 글들이라, 솔직히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니 진중권 교수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어??' 라는 느낌이었달까. ^^

새삼 언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느낄 수 있었다.

책 말미에 저자는 아방가르드의 다음 시기인 '네오 아방가르드' 에 대한 글을 쓸 것임을 예고해 준다. 서양 미술사 시리즈의 첫 권이 나온지 3년만에 두번째 권이 나왔으니, 다음 권 또한 만만치 않겠지. 하지만, 정말 너무 기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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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전, 영국 BBC를 통해 나치 휘하에서 독일군 제복을 생산했던 독일 명품 의류기업인 '휴고 보스' 가 나치 시절,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는 여러 사람들의 끊임없는 국제 법정 투쟁에 의한 결과물로서, 휴고 보스는 당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에게 법적인 보상을 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공을 쏟아야 하게 생겼다.

 이 기사를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 침략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전쟁에 동원한 물자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에게서 강제로 침탈해간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수업체가 바로 미쓰비시나 도요타 같은 자동차 회사들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일본의 기간산업들은 일본이 침략한 국가에서 강제로 끌고온 노역자들에 의해 성장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자기네 정부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임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이었고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선전하기 바쁘며, 일본 내의 여러 기업들 또한 정부의 비호 아래 강제 노역자들과 피해자들을 외면하기에 바쁘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아픈 과거를 더욱 절절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340여 페이지에 달하는 페이지들에 꼼꼼하게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슬픔과 고통, 절망들이 또렷한 사진으로 보여지고 있다.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나가사키와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까지 일본 열도의 대부분을 샅샅히 훑으며 우리 조상들을 침탈한 역사의 현장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피를 토하고 죽을때까지 석탄을 캐 날라야 했던 수많은 갱도들, 석탄을 고르고 골라 운반해야 했던 탄광들, 누군가를 쏘아 죽이고 파괴하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지하 은밀한 곳의 터널과 군창들.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인간 어뢰로, 가미가제 특공대로 끌려간 선조들의 이야기도 있다. 위에도 언급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쓰비시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등장하고, 우리의 기억속에서도 점차 잊혀져 가는 우토로도 등장한다.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당하면서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정말 너무나 아프고 쓰린 기록들에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은 단순히 탐욕스러운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분노였고, 무능한 우리 정부에 대한 분노였다. 오히려 당시 고통받았던 생존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있는 부근의 일본인들이 나서서 도와주고 있었다. 결국 나라와 이념을 떠나면 다 같은 사람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강제 노역을 한 것은 침략한 국가만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인들도 평범한 국민들 대부분은 피해자이다. 그들도 함께 노역을 했다. 물론, 그 대우는 완전히 달랐지만, 일본인들도 사람인지라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조선인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도와주려 했던 이들도 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사진들과, 철저하게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실려져 있다. 단순한 감상이나 에세이가 아니라 완벽한 한권의 논픽션 르포이다. 폰트도 큼직하고, 사진과의 배치도 상당히 잘 되있어서 굉장히 잘 읽힌다. 정말 힘든 내용이지만, 그것들을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말 잘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은 단순히 독자들에게 일제 침탈기 겪었던 조상들의 고통을 느끼게 해 주는데 있지 않다. 이 책은 우리에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민족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전쟁의 위협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우리를 도발하고, 북한과를 이빨을 맞대고 있는 사이이다. 누구라도 턱에 힘을 주고 물기 시작하면 서로가 살아남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될 터다.

 전쟁이란 그런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 친구들과 강제로 떨어지게 되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할 것이며, 하루하루 차라리 죽음을 바랄 정도의 고난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옆에서 함께 숨쉬고, 웃고, 울고, 서로 위로하던 존재가 순식간에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리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폭탄 한방에 도시 전체가 쓸려버리고, 그 후유증이 나로 끝나지 않고,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전쟁의 공포인 것이다.

 그런 것들이 정말 너무나 잘 실려있는 책이다.

 

 분명, 과거는 잊어서는 안된다.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추가 단순히 분노와 슬픔에서 멈춰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잊지않고, 끊임없이 반추해야 하는 이유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에 있다. 과거에 얽매여서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고,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일본의 행위는 쉽사리 용서해서도 안된다. 일본이 아시아 전체에 정식으로 사과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할 때 까지 싸움을 멈춰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워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이다.

우리는 일본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용서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

이 책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는, 그를 위한 쉽고도 친절한 첫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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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세트 - 전2권 신의 궤도
배명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길어서 죄송합니다 ^^;; 읽기 싫으신 분은 그냥 제 팬픽이나 보고 가셔요.ㅋㅋㅋ

http://blog.naver.com/fireflag/150118811415 

 

 

 

SF란 무엇일까??
Science- Fiction. 우리는 이런 단어로 부르지만, 그 아래 카테고리에 Space Opera 라는 항목이 추가되면서 SF 는 Science- Fantasy라 불러도 무방하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의 흐름은 SF와 Fantasy를 큰 범주 안에서 함께 묶는 경우가 많고 어슐러 K 르귄이나 로저 젤라즈니 같은 2세대 SF작가들은 실제로 SF 소설과 Fantasy 소설을 모두 써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리처드 매드슨과 같은 소위 '장르소설 전문' 스토리 텔러들도 SF경향을 가진 Fantasy 혹은 Fantasy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SF를 쓰곤 했다. 완벽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의 특성상 SF는 Fantasy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일례로 장르 문학쪽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휴고상' 은 SF와 Fantasy를 크게 나누지 않고 후보군을 선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애써 그 둘을 분류하려는 이들을 반대하거나 타박할 생각은 없다. 장르는 단순히 구분,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향 자체가 현실과 상상을 자유로이 오가고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내며 장르의 파괴를 넘어선 장르간의 융합이라는 색채가 뚜렷하기 때문에, 애초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져 버렸다. 이런 와중에 틀을 만들고 규칙을 만들어서 SF와 Fantasy를 끼워 맞추는 식의 구분이나 분류는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같은 작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는 설정은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갑자기 좀비가 된다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와 어떤 틀과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구분해 낼 것인가? 모든 사람이 장님이 되는 바이러스와 모든 사람이 좀비가 되는 바이러스? 눈이 머는 것과 좀비가 되는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 는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중심이고, [나는 전설이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눈이 머는것과 좀비가 되는 것은 작가가 자신이 진짜 하고픈 이야기를 하기 위한 무대와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정작 스토리 텔러들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이야기' 를 할 뿐이다. 독자들은 그것을 즐기면 될 뿐. 한국 작가들의 SF는 어쩌고, Fantasy는 어쩌고, 블라블라 떠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의 과학적 상상력을 얼마나 조화롭고 설득력있게 이야기속에 녹여내는지, 그리고 그 속에 진짜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 물론, 이야기가 아닌 곁가지, 작가가 어떤 발상을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지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과정 또한 상당히 재미있는 것임을 인정한다.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 은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일종의 텔레포트 포털 같은 것이 존재한다. 거대한 저택에 문들이 있는데, 그 문들은 모두 각각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의 별장과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 텔레포트 포털의 문을 유지하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작가는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구체화 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를 상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물론 [히페리온] 의 이야기 속에서 이 문이 뭔가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은하계를 넘나드는 포털도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구체적인 상상의 세계를 찾아내고, 작가가 설정해 놓은 나름의 원리를 깨닫고,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회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이다.

 

 자, 그리고.

과연 이 작가는 왜 이런 세상속에서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현실을 놔두고, 현실이 투영된 가상세계를 그려야 했을까? 과거, 혹은 미래. 과학이 엄청나게 진보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문명이 엄청나게 퇴보하거나. 필립 k 딕은 왜 핵전쟁으로 멸망하여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그려야 했을까? 어슐러 르 귄은 왜 황량한 행성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동체를 그려야 했을까? 왜 꼭 우주일까? 왜 꼭 미래일까? 왜 복제인간? 왜 안드로이드? 왜 꼭 외계인?  

 영화 [인셉션] 에서는 꿈 속 세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타인의 꿈 속 세계에 들어가보면,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이 구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무의식은 통제할 수 없다. 수많은 인종, 다양한 연령대, 남녀구분 없이 수많은 '사람' 들이 등장한다. 인셉션이 그려낸 누군가의 꿈 속 세계는 한 명의 작가가 그려내는 소설과 닮아있다. 작가의 내면 속에서 재구성된 수많은 사람들.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투영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거대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런 그들이 왜 현실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낯선 세상에 던져져야 했을까?

 작가는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했을까?

 

 [신의 궤도] 는 그런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읽으면 훨씬 즐겁게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고전적으로 활용되오던 수많은 클리셰들의 집합인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시도이다. 셰익스피어때부터 되풀이 되어 온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 왕좌를 노리는 치열한 암투, 그리고 신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서의 탈출은 물론, 조선시대 김만중의 '구운몽' 과 워쇼스키의 영화 '매트릭스' 까지 망라한다. 물론 '라 파이예트' 와 '스타워즈' 를 능가하는 화려한 공중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연상케하는 전쟁과정 또한 매우 디테일하고 심도깊다. 책의 반 정도는 공중전을 그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수많은 전투기들의 기동이 솔직히 머릿속에 그렇게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워낙 많은 수의 전투기들과 편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저자의 단편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이 떠오른다. (여담이지만 확실히 배명훈 작가는 '어마어마한 숫자' 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인 배명훈 작가도 '자신이 재미있을 만한 모든 소재를 넣었다' 고 했는데, 과언이 아니다. 그래, 현존하는 좋은 플롯들의 총 합인 동시에 완벽한 해체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대단히 통속적이면서도 황당할 정도로 신선하고, 엄청나게 쉽게 읽히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작품의 프롤로그라고 할만한 첫 챕터부터 통속적이고 신선하다.

인공위성 사업을 하는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의 서자인 김은경. 적자인 경라에게 살해위협을 당하게 된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지는 비행. 바로 하늘이었다. 비행기 조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은경. 하지만, 경라의 음모로 그녀는 동면되어버리고, 이야기는 순식간에 십오만년 뒤로 점프한다.

 동면된 은경이 십오만년뒤에 눈을 뜨면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휴양행성 '나니예' 에서 일어난 몇 달 간의 일. 그것은 거대한 전쟁이었다. 수천대의 전투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행성의 운명을 바꿔놓은 거대한 두 세력의 충돌.

 그리고 그 안에서 전쟁의 키가 된 두 명의 주인공. 김은경과 나물수사.

결국 이 이야기는 신을 좇는 이야기인 동시에, 인물들이 치열한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와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 여기서부터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작가가 '나니예' 라는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여주인공 은경을 무려 15만년의 시간을 점프시키고, 수많은 SF적 상상력을 쏟아부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쟁' 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성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쟁. 이 거대한 전쟁속에서 타의에 의해 윤회를 거듭하는 '은경' 과 신의 목소리를 듣는 운명을 타고난 '나물' 수사. 이 두 인물들의 관계는 참으로 안타깝고 눈물겹다. 

 

 일단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제목에 등장하는 '신' 에 주안점을 두고 읽었다.

(이 작품을 다른 관점, 은경과 나물수사를 둘러싼 관리사무소와 천문교측의 '전쟁' 에 주안점을 둔다면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간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읽어도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풍부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신' 을 중심으로. 즉 '신앙'을 중심으로 읽어보면 은경은 마치 크리스트교의 예수와 닮아있다. 창조주의 아들 예수처럼 나니예의 창조주의 딸인 은경은 부활을 반복하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뚜렷한 삶의 지향점을 가지고 존재한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에 등장하는 '네오' 와 닮은 것은 그렇기에 필연이다. 'ONE' 이라는 단어의 재조합인 NEO 또한 예수를 모티프로 태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물수사가 믿고 있는 '신' 이 사실은 '신' 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은경도 나물수사도 각자의 눈은 또렷하게 '신' 을 향해있다. 아니, 그들의 영혼이 온전히 '신' 이라는 어떤 존재를 향해있다. 은경은 하늘에서 공전하는 천체를 '태초의 무기' 라고 인식하고 있는 행성관리사무소의 대표인 셈이고, 나물수사는 하늘을 공전하며 인간들을 보살피는 조물주라고 인식하고 있는 천문교의 대표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현실속, 무신론자와 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유태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의 투영이다. 신을 과학적 소산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따르는 편과 신이 인격적 존재로서 정신적, 물질적 교감을 추구하는 편인 것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천문교 안에서도 신에 대한 접근법이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니예에서는 실제로 신의 존재가 눈으로 확인되던 시절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실제 현실에서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과학적,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구약에 나오던 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자 하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고, 신학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앙' 이란 존재의의이다.

지금 우리 세상에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유일신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그 신을 믿는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그 신을 믿는 이유는 아주아주 간단하다.

 그는 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왜 태어났지?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존재하지?" 라는 인류 태고의 질문에 가장 또렷한 답이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는거지." 라는 답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간의 존재의의에는 '신' 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 밖에 없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문명이 시작된 이래 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보여주듯, 인간에게 '생각' 이 있는 한, 모든 행동과 동기, 근원적 갈증의 가장 쉽고 모범적인 답안인 '신' 을 포기할 수 없을터다.

 

 타인에게 '네가 믿는 신은 신아니 아니야.' 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은 물론 존재의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때로는 자신의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하려 하고, 다른 신을 믿는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타종교와의 갈등도 비롯한다. 내가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이 정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이 둘일 수는 없다. 반드시 세상에 나를 있게한 나의 신. 그 존재 단 하나여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정답.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런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섣불리 자신의 신의 존재증명을 꺼리게 된다. 만약 그 증명에서 실패한다면 스스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김어준 식으로 말하면 그레이트 빅 엿을 스스로 쳐먹는 꼴이 되기에, 현실 종교에서 과학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신비' 로 넘겨버린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천문교는 두 종파로 나뉘어 있다.

태초에 나니예의 창조설화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신 관찰기록에 의존해 신이 나니예를 공전하는 궤도를 계산하는 이론신학회와 그 공식을 대입해 천체 망원경으로 신을 눈으로 확인코저 하는 관측신학회가 그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공식들을 대입해 보고 관측해봐도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을 대두시킨다. 신은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닌 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천문교내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관측신학회는 유물론적 신앙관을 유지하고자 하고, 이론 신학회는 관념론적 신앙관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런 와중에 신의 존재를 귀울림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예언자들. 그 중 마지막 예언자인 나물수사는 이론신학회에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우주 왕복선을 이용해 신에게 날아가려는 김은경의 존재 역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신앙관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인류의 '항성화' 이다. 인류는 십오만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동안 육체를 버리고 별이 된다! 그것도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 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자, 과연 항성에게는 종교가 있을까? 항성의 존재의의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자신의 주위를 공전하는 천체들? 아니, 그 천체들의 입장에선 항성이 신일 것이다. 신에게도 신이 있을까? 신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일전에 배명훈 작가는 [안녕, 인공존재] 라는 작품을 통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고찰과 '존재 폭발' 이라는 신선한 개념을 선보인 바 있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단편들 속에서 장편의 모티프를 얻어내는데, [신의 궤도] 의 모티프는 단연 [안녕, 인공존재] 일 것이다. 무의미하게 우주를 도는 천체. 하지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를 되뇌이는 천체.

 존재란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에서 시작된 배명훈 작가의 존재에 대한 거대담론은 [신의 궤도] 를 통해 조금은 발전한 듯 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 하고 있다. 심지어 프로그램과 메뉴얼들도 '존재' 한다.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개체는 비행기들 뿐이다. 하지만, 최후의 존재폭발로 인해 비행기들 또한 '존재' 하게 되었을 듯 하다.

 

 존재의 의의. 삶의 의미. 운명과 목표. 그것이 신이어도 좋고, 신이 아니어도 좋다. 나물수사는 신이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은 신이 아니라고 불렀던 그것. 은경과 나물수사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신' 이라는 그 천체를 바라보지만, 그들 사이에 갈등은 없다. 둘 모두에게 그것은 삶의 목표이자, 자신의 존재의의였으며, 끊임없이 추구하는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은경은 하늘에 떠있는 인공천체를 신이라고 숭배하는 나물수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나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나물수사는 그런 신비로운 증명이 있음에도, 자신이 숭배하는 신을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은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둘 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신을 품에 안은 순간.

 은경은 신을 숭배하며 살았던 나물수사의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나물수사 또한 궤도 비행사로 살아온 은경의 삶의 궤적을 이해한다.

신의 궤적은 은경과 나물수사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글이 참 두서없이 길기만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수만가지 상념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게 대체 무엇일까. 이건 또 뭔가. 이게 무슨소리야. 그런 느낌이다, 솔직히. 이 비슷한 감정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사이버리아드] 와 [솔라리스] 를 읽었을때와 비슷하다. 우주적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어처구니 없는 경지. 이것은 뭐랄까. 생각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심심할때 꺼내보는것과 비슷하달까?

 

엄청 통속적이고, 그만큼 낭만적이기도 한, 게다가 관념적이고, 공상과학적이면서 재기발랄하고, 뭔가 틀을 깨는 이야기속에 들어있는 [존재] 에 대한 우주적인 고찰. 치열한 전쟁 속에서 그것들을 찾아나가는 은경과 나물의 행보가 애틋하기만 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생생했고, 이해되었으며, 사랑스러웠다. 특히, 수십년을 관통해서 지난, 나물과 엮여가는 은경의 윤회의 이야기에는 가슴이 짠했다. 정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서, 2권이라는 분량이 짧게 느껴졌고, 너무 금방 끝나버렸다는게 아쉬웠다. 은경과 나물의 이야기가 더 많이 보고싶었다. 나니예에서의 생활들이 더 보고싶었다.

 조지 R.R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처럼 엄청나게 하드하게 그려주었어도 좋았을 듯 싶다.

뭐 물론, 우리나라의 장르문학 시장에선 그랬다간 출판사도 망하게 하고, 작가 본인도 굶어죽기에 딱 좋겠지만 말이다. ^^

 

저자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는 또 얼마나 우주적인 이야기를,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깃속에 담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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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9-2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톤』때문에 들어왔다가, 글이 너무 길어서ㅡ.,ㅡ
펜픽이나 보고 갑니다. ^^ 재밌어서 서재 즐찾했어요.
여기서두 펜픽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열혈명호 2011-09-22 20: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너무 길죠?? ㅋㅋ 제 리뷰는 솔직히 왠만해선 남들 보라고 쓰는 리뷰가 아니라 재미도 없고 길기도 길죠 ^^;;
팬픽, 여기에도 올려보려고 했는데, 요기는 아무래도 텍스트에 특화된 사이트라 그림 올리기가 만만찮네요~ 그림 사이즈를 많이 줄여야 해서요~ 네이버 블로그 자주 놀러와주세요^^

미르하이 2011-09-3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