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조곡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이 밀실 살인이나 복잡한 트릭이 얽혀있는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고, 주변에 몇가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미스테리로 가득하다.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의 기원, 공룡의 멸망, 생명의 기원, 삶의 의미...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외국에 다녀온 친구가 사온 유명 브랜드의 초컬릿!!

혼자 먹으려고 몰래 서랍 깊숙히 숨겨 놓았는데, 다음날 학교 다녀와서 보니 서랍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초컬릿의 향기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 가족들은 모두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애초에 나 혼자 몰래 먹으려고 가족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기에, 전혀 몰랐을 것이다.

다음날, 빈 초컬릿 상자가 집에서 좀 떨어진 다른 주택의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들어있었다!!!

상자를 뜯기위해 가장 처음 칼질을 했던 바로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초컬릿 박스는 내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서랍 깊숙히 숨겨져 있던 초컬릿!! 이게 어떻게 하루만에 빈 상자로 우리집도 아닌, 다른 집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들어있단 말인가?!!!

 

너무 미스테리 하지 않은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존재이다.

그리고, 미스테리-추리물은 그런 인간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이용하는 문학 장르이다.

고전적인 미스테리-추리물은 독자와 작가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작가는 사건을 터뜨리고, 군데군데 힌트들을 흩뜨려 놓는다.

그리고, 주인공을 등장시켜, 독자들을 게임 속으로 초대한다.

독자들이 쉽게 범인이나 트릭을 알아채면, 그 작품은 기본적으로 좋은 평을 얻어내지 못한다.

최대한 복잡하고, 독자들의 뒷통수를 후려칠만한 반전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독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그런 와중에도 이야기의 처음 - 중간 - 끝의 개연성을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와 독자에 대한 속임수는 완벽한 별개가 되어야 하고, 독자들은 주인공을 따라 가면서도, 등장 인물과 주변 상황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복선과 힌트를 흘리지만, 독자들은 이것들이 어떤 결말을 위한 장치인지 쉽게 알아채지 못해야 한다.

뭔가 있긴 있는데? 과연 뭘까??

명민한 작가들은 이 복선이나 힌트 마저도 독자를 홀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이야기 전체의 논리적 개연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애드거 앨런 포우, 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 블랑 등이 이러한 미스테리-추리물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면, 애거서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이 꾸준히 발전시켜 현대적인 감각의 미스테리- 추리물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시대의 미스테리-추리물들은 사실상 이런 전통적인 틀을 깨기 위한 도전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수많은 현대의 추리작가들은 전통적인 기법을 보다 디테일하고 정묘하게 계승. 발전시키거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으려고 애쓰는 한편,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장르작가들 중에 꼽으라면, 전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후자는 온다 리쿠를 들 수 있을것이다.

 

전기공학도 - 의학기기 회사원에서 일약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계에서는 최고로 손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트릭에 트릭을 덧붙이는 전통적인 기법에 인물간의 치밀한 관계,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면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범인이 등장하고, 그를 뒤쫓는 사람이 등장하며, 범죄를 위한 트릭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틀이라면 틀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온다 리쿠는 추리 작가라는 수식어보다는 '노스텔지어의 마법사' 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한 여류 작가이다.

그녀는 현대, 과거, 판타지를 가리지 않고 엔터테인먼트라는 큰 틀안에서 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래도 역시 지금의 그 위치까지 오게 한 장르는 미스테리 - 추리 장르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위에 언급한 범인, 그를 뒤쫓는 사람, 트릭. 이런것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이블, 다과, 대화, 회상은 아주 자주 등장한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는 히가시노 게이고에 비해 무척 정적이고 조용하다.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사건들이 뻥뻥 벌어지고,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여기저기로 우루루 뛰어다니기 보다는,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조용히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은 주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과거는 필연적으로 등장인물들간의 인연이 얽혀있다.

정말 세상 모든 일들이 '미스테리' 함을 느끼게 해주는 소재들로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의 '목요조곡' 또한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4년전에 급작스럽게 자택에서 자살한 여류 작가 도키코.

그리고 도키코가 죽던 날, 도키코의 자택에 모여있던 다섯명의 여류 문인들.

그녀들이 2박3일로 도키코를 추모하기 위해 그녀가 살던 저택에 모인다.

도키코를 위한 추모 모임은 올해로 4년째. 그녀가 죽었던 그 해부터 시작되었고, 올해도 목요일을 사이에 끼고, 수-목-금. 이렇게 추모 모임이 시작된다.

목요일이 사이에 낀 이 애매한 평일 날짜에 모이게 된 이유는, 도키코가 생전에 목요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노는 모임인 이 자리엔 생전에 도키코의 전담 편집인이었던 에이코와 논픽션 작가인 에리코, 도키코의 이복동생이자 예술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문화 비평가 시즈코, 떠오르는 신예 작가인 도키코와 혈연 관계가 있는 나오미와 츠카사.

 

그리고, 여기에 메모가 들어있는 꽃다발 하나가 배달된다.

다섯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개봉한 메모에는 뜻밖에도,

"여러분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 오늘 이 장소에 죽은 이를 위한 꽃을 바칩니다"

라는 섬뜩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과연 이 다섯명은 도키코가 죽은 날, 그녀의 자택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 그 다섯명 중 도키코를 죽인 사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섯명 모두가??

 

다섯명의 여인들은 한명씩 4년 전, 그 날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풀어져 나갈때마다, '그날' 의 비밀은 하나씩 공개되고, 생각치도 못한 결말이 다섯명의 여인들과 독자들을 기다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남녀가 사이좋게 분배되어 있던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여자들만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온다 리쿠 이거나, 그녀의 주변인물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더 즐겁기도 하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작가' 라는 직업과 '작품' 이라는 것에 대한 사상은 분명 그녀 자신의 것일 터.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그녀 자신의 세계관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온다리쿠의 작품은 언제나 너무 '평범한 듯' 해서 매력적이다.

이 세상은 모두 미스테리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이 엄청난 '글감' 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작품은 '관계' 와 '죄의식' 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다섯명의 여인들. 여기에 도키코까지 포함해서 여섯명의 여인들은 혈연과 사업으로 끈끈하게 얽혀있었다.

도키코를 중심으로 여성 특유의 감성과, 작가 특유의 상상력, 그리고 예술가 특유의 괴팍함까지 뒤엉켜 애증의 끈이 이중 삼중으로 얽히고 설켜있었다.

문득,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고, 자살한 수많은 유명인들이 떠올랐다.

미스테리-스릴러가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된다면, 자살만큼 미스테리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삶은 살아있음을 전제로 펼쳐진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무無가 되는 것일 뿐이다.

사후가 어쨌건, 윤회가 어쨌건, 지구라는 세상 위에서 '나' 라는 인생은 완벽하게 종결되는 것이다.

내 육체, 육체를 통한 감각, 감각을 통한 경험, 경험을 통한 기억, 추억, 그것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

나 자신도 무無가 되지만, 나를 둘러싼 타인들에게도 '나' 라는 존재는 무無가 된다.

자신의 모든것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부정하는 행위인 '자살'.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본능은 생존본능이다.

그런 기반을 뒤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과연 무엇을 통해서 일어날까??

 

 

 

이 작품은 작가들이 주인공이어서인지, 지금까지 온다리쿠의 작품들 중 내러티브가 가장 풍부하고, 디테일도 가장 뛰어나다.

실제로 이 작품속의 작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을것만 같다.

문득,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작품에서, 작품 속에 소재로 등장했던 책들이 각각의 제목을 달고 실제로 이 세상에 출간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가 흔히 '삼월 연작' 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이다.

('황혼녘 백합의 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흑과 다의 환상'은 모두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단편집에 등장하는 소재이자,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후에 모두 각각의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이 작품 안에도 '삼월' 때처럼 몇권의 책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다.

작품 안의 등장인물들이 써낼 책들인데, 팬의 입장으로서 '목요조곡 연작' 을 기대하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닐터다.

 

작가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도 한다.

작품 안에서 온다리쿠는 '망상' 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고도 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능력이 있다면, 바로 상상일 것이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거대한 궁전의 주인이 되어 아리따운 미녀들을 사방에 끼고 자기만의 하렘을 만들기도 한다.

확실한 건 현실은 현실,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상도 거대한 심연과 같다.

이 거대한 심연속에 사로잡힌다면, 현실은 물론 삶 조차도 못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 나 역시 작가를 꿈꾼다. 여전히, 그리고, 아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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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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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야의 왕이었던 김수로의 삶을 다룬 드라마가 한창 방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들 중에서 가야시대는 삼한시대나 고조선만큼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역사시대이다.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 기재되어 있는 부분적인 기록이나,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존재의 유무 정도이다.

김수로가 왜 김씨인지, 이름은 왜 수로인지, 알에서 태어났다는 건 뭔소린지, 그 부인이 정말 인도사람인지, 그 부인이 정말 바다에서 떠내려 왔는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야에 거대한 세력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부족국가였던 가야에 연합체를 구성하는 구심점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삶 대부분은 상상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를 제압하고 강력한 세력을 이끌었으며, 주변에 신라, 백제 그리고 동해를 넘어 왜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던 부족국가.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무리 위대한 선구자라 해도, 그 시대 사람들이 현대인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을리는 만무하다.

그들의 삶과 사랑, 발상과 행동 등 모든 것은 그 시대상에 맞게 재해석해봐야 할 것이다.

김수로가 천민이었을 수도 있고, 왕족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신라나 백제계 인물이었을 수도 있고, 고구려의 후손일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당시의 유물이나 유적, 단편적인 기록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

 

버나드 콘웰의 '윈터킹' 을 보면서 김수로를 생각했다.

고대 브리튼은 우리의 가야처럼 많은 것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역사이다.

아서왕 이야기는 우리의 단군 신화처럼 '신화'로 규정되어 있으며 로마 강점기에 대부분이 윤색, 창작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아서' 라는 이름이 실제 브리튼의 단편적인 기록에서는 명확히 등장하지 않으며 '멀린' 은 거의 '환웅' 수준이다.

아서가 세운 왕국이라는 '아발론' 역시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성이었다는 '캐멀롯' 역시 그러하다.

실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 확률이 미미하며, 아서왕이 찾아나섰다는 성배신화 역시 그 역사적인 시간대가 전혀 맞지 않는다.

 

버나드 콘웰은 이런 모든 역사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아서를 새롭게 재조명했다.

드라마 '김수로' 가 천민에서부터 시작해서 바닥부터 왕까지 바득바득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듯, 소설 '윈터킹' 의 아서 역시 왕이라기 보다 일군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군벌(Warlord)로 묘사된다. 자신의 땅도 없이 그저 자신을 따르는 일군의 무리가 있는 군벌.

그는 브리튼의 왕 '유서'에게 인정받지 못한 서출로, 그에게 명령받은대로 한 지역을 지키는 군인에 불과했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점은 바로 아서의 마인드이다.

아서는 완벽하게 당시의 군인들이 가지고 있었을만한 마인드의 소유자였고, 버나드 콘웰은 그런 그의 마인드를 너무나 디테일하고 설득력있게 잘 표현했다.

내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정말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아서가 실제로 그 시대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은 생생한 디테일을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다.

많은 역사소설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바로 이 '마인드' 즉,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다.

셰익스피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버나드 콘웰의 세계관은 같을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로미오와 버나드 콘웰이 그리는 로미오는 그 성격과 마인드, 행동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원작소설 '로미오와 줄리엣' 과 1996년에 발표되었던 바즈 루어만 감독이 재탄생 시킨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김연수나 김영하 작가 같은 분들이 그려내는 이 시대의 '로미오와 줄리엣' 은 또 완전히 다를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인물을 창조해 내는 데 있어, 자신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그 시대의 세계관을 등장인물에게 완벽하게 이입시킬 수 있어야만 완벽하게 설득력 있는 역사소설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선덕여왕' 과 펄 벅 여사의 소설 '서태후' 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의 '덕만' 은 지나치게 현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아무리 그 시대가 남녀가 지금보다 평등했던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성에게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세계에서 살았던 덕만 역시 어느정도 그런 세계관 속에서 영향을 받았을터다.

하지만, 덕만은 현대적인 세계관에서도 특히 진취적이고 능동적인데, 과연 그것이 당시 시대상의 디테일을 반영한 캐릭터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 펄벅여사의 서태후는 완벽하게 그 시대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암투가 난무하는 궁정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태후' 로서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은 당시의 시대상에서 봐도 무리가 없으며, 현대인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시 시대의 세계관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려 시대 서경 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 과 관련이 있는 '정지상' 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역사소설 '국풍1135' 같은 작품은 그런 관점에서 봤을때 정말 제대로 된 역사소설이 아닐까 싶다.

 

버나드 콘웰의 '윈터킹' 역시 그런 관점에서 봤을때 완벽한 역사 소설로 볼 수 있다.

 

역사소설의 허구성은 마법이 등장한다거나 각종 무공이 등장하는 것으로 갈려지는 것이 아니다.

인물의 등장 순서나 사건의 순서 또한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무리 '역사' 에 그렇게 '적혀' 있다지만 기록 또하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내에서는 다른 역사서와 비교해서 정당성을 결정하는 이른바 '비교사학'이 많이 발달해 있다.

바로 이 비교사학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가 '기록' 에는 언제나 '오류' 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록 속의 오류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듬성 듬성 비어있는 역사의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고, 당시에 언제나 변방에서 머물렀을 궁녀, 후궁, 천민과 추노꾼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마법을 쓰던, 초능력을 쓰던, 무공을 쓰던 큰 상관은 없다.

그것을 통해 그 시대상을 디테일하고 정말 '그 시대 처럼' 그려내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윈터킹' 에는 마법도 나오지 않고, 무공도 나오지 않는다.

돌에서 엑스칼리버를 뽑아내는 아서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원탁 또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충성을 최우선으로 삼고, 야심을 마음 깊숙히 꽁꽁 봉인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는 브리튼을 통일하고자 하는 평화를 꿈꾸는 군주의 모습은 등장한다.

사랑에 미쳐 실수를 하는 남자의 모습도 나오고, 그 죄책감에 자책하는 모습도 나온다.

 

윈터킹은 아서가 군벌에서 왕이 되어가는 모습의 도입부에 불과하다.

진정한 왕이 되어 브리튼의 통일을 이루어갈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하다.

 

정말 '제대로' 인 역사소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훌륭한 역사소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충분히 그런 역량이 있고, 지금도 여전히 꾸준히 나오는 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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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미학 - 인문학과 사회학, 심리학과 경영학을 넘나드는 종횡무진 축구이야기
프리츠 B. 지몬 지음, 박현용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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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고싶은대로 본다고 한다.

그림이나 음악을 보거나 들을때, 작가의 탄생 연도나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 그림을 그릴때 쓴 재료나 기법,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화음이나 악기연주 수준 등을 알면 조금 다르게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만화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영화를 보거나 멋진 광경을 볼때 언제나 만화 컷 안에 들어있는 선으로 된 그림들을 상상한다.

'아 이장면은 만화로 표현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저렇게 할 수 있겠다...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책을 볼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내용은 만화로 각색하면 이렇게 되겠고, 주인공은 어떻게 생긴 캐릭터로 잡으면 되겠고... 등등.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과 전공에 따라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한 '이미지' 는 머릿속에서 각각 완전히 다른 모양새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가장 많은 인구들이 즐기는 '축구' 라는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이다.

 

축구 역시 즐기는 사람들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보일 것이다.

선수출신이었던 사람이나, 관련된 일을 하는 행정직원, 또는 축구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나, 축구영상을 찍는 TV 카메라 기사등은 분명 나같이 만화를 그리는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축구가 보일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문, 사회학의 대가들이 보는 축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에 심리학과 경영학자들도 참여해, 피치위에서 벌어지는 22명의 격렬한 전쟁을 통해 현실을 재조명한다.

 

축구는 흔히 피치 라고 부르는 그라운드 위에 22명의 건장한 남자들(여자들)이 공을 하나 사이에 두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손보다 둔한 발로 둥근 공을 컨트롤 해 상대방 골 문 안에 집어넣는 것이 이 싸움의 목적이다.

아마 한국의 왠만한 남자 치고 공 한번 안차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축구는 그만큼 쉽고 간단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이다.

적당한 공간과 왠만큼 굴러가는 공 하나만 있으면 할 수 있다. 예전에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엔 교실 앞 복도에서 우유팩, 심지어 실내화까지 차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종이를 뭉친 뒤 테이프를 돌돌 감으면 그것 역시 좋은 공이었다.

 

애초에 축구란게 원래 성문 사이에서 돼지 오줌보를 차며 놀았던 놀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런 목적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니고, 뭔가 엄청난 상을 차지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그냥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단지 그 하나만을 위해. 그리고,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공을 차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스포츠에 인문학, 사회학, 심리학에 경영학까지 들어있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축구라는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팀웍, 선수들 개개인의 마인드, 골대 앞에 선 골키퍼와 그와 마주한 상대팀 스트라이커의 마음,

끊임없이 발전하는 '전술' 과 피치 밖에서 선수들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감독,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팀 전체의 경기력을 끌어 올려야 하는 코칭 스탭들과, 팀, 즉 구단을 운영하는 운영진들의 마인드.

 

축구는 11명이 하지만, 결코 11명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선발선수도 있고, 후보선수도 있으며, 용병선수도 있다.

팀을 이끌고 가는 감독과, 감독을 보좌하는 스탭들, 그리고 팬들이 있다.

이 모든것이 하나의 작은 사회이고, 현실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책을 통해, 인문, 사회학과 경영학의 일부를 잠깐 즐길 수 있었다.

축구를 통해 보는 세상과 사회는 좀더 치밀하고, 좀더 쉬웠다.

 

이 책은 축구이야기라기 보다는 세상 이야기이다.

축구에 담겨있는 작은 세상 이야기.

축구공은 둥글다. 지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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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 아웃케이스 없음
마크 웹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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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0대 후반부터 나를 알아온 사람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도 운명같은 사랑을 꿈꾼 시절이 있다.

한 여자만 만나서, 평생 그 여자만 사랑하고, 결국은 그 여자랑 죽고싶다는... 꿈을 꾼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정말 얼굴만 보면 '이 여자가 내 여자!' 라는 도장이 쾅 찍혀있을 줄 알았다.

내 눈에 만큼은 김태희보다, 전지현보다 더 예뻐보이는 여자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난 한 여자만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이란 건 절대 일방적일 수 없는것 아닌가?

세상에 60억의 인구가 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지구 위에 60억개의 또다른 지구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딱히 이티나 에일리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외계인과의 만남. 미지와의 조우에 필적하는 어마어마한 대 충돌인 셈이다. 하물며 남자와 여자, 게다가 연애라고 한다면 이건 뭐 거의 '지구 최후의 날' 수준일거다.

나의 사랑이 그녀(들)의 언어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해!!"  가 "싸울래?" 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흐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대충 추측할 수 있을터. 암튼, 20살때 첫 연애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 연애인 28살까지(그래 햇수로는 2년. 실제로는 3년가까운 시간동안 솔로를 만끽하는 중이다. 참고로 마지막 연애는 100일도 못채웠다능!!!), 약 8년간의 시간동안 그닥 많은 여자들을 만난건 아니지만, 짧게 했어도, 횟수는 적었어도 연애는 연애. 어느정도 하고나니, 나의 꿈들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500일의 썸머> 라는 묘~한 제목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톰' 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있었다.

그도 운명을 믿었고, 운명의 여인을 믿었다.

근데, 그런 그가 첫눈에 보자마자 '오! 저 분이 나의 운명의 여인이야!!' 라고 느꼈던 여성이 하필이면 '썸머' 였다.

왜, '하필이면' 이었냐면, 이 썸머라는 아가씨는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파탄으로 이어진 이후,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하게 된 여성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도, '지구 최후의 날' 인데, 썸머와 톰의 만남은 '빅뱅'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터다.

아니, 어쩌면 썸머와 톰도 그냥 평범한 남녀이지만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세계관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세계관과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톰과 썸머는 그랬다.

 

운명적인 만남을 굳게 믿는 톰과, 운명은 커녕 사랑과 그 결실도 믿지 않는 썸머.

둘의 연애는 겉보기엔 엄청나게 평범하다.

성인 남자와 여자의 데이트는 겉보기에는 모두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함께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를 가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스킨쉽을 하고,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의 것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둘의 관계를 '규정' 함에 있어서 썸머는 톰을 '그냥 친구' 라고 생각하고, 톰은 '연인' 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톰은 시간이 지나면 썸머도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하리라고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둘의 관계는 아무리 봐도 그냥 친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썸머는 '관계'를 규정짓는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를 원치 않기때문이다.

할건 다 하지만, 떠나고 싶을때 훌쩍 떠날 수 있는 관계.

썸머는 그런 관계를 원했다.

 

난 예전엔 연애의 결실은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애란 언제나 상호간의 사랑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전제로 시작한 교제가 연애이고, 그것이 깊어지면서 현실이 되면, 결국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험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내 경우에 대부분은 일방적인 사랑으로 연애가 시작됐다.

운명적인 연애라고 믿는 나의 사랑이 상대방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되어 다가갈지 전혀 알지 못했을 무렵이다.

난 나의 사랑을 맹목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터.

받은만큼 돌려줘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할 수 없기때문에 부담은 배가 되었을터다.

연애에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이 작품은 결국 연애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 '남녀관계' 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터다.

물론, 남녀 관계에 연애와 결혼말고 무엇이 더 있겠냐마는.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가 주가 될 수 밖에 없지만서도.

작품 안에서는 남자인 톰이 좀 더 관계에 집착하고, 썸머가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욕구에 솔직한편이지만, 딱히 남녀의 역할 구분은 짓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줄곧 상충되던 두 세계관이 존재한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톰의 세계관과 그것을 절대 믿지 않는 썸머의 세계관.

이 둘은 성인이지만, 사실 자기만 고집하는 아이들과 같다.

 

결국 톰과 썸머의 애매모호한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삐걱거리게 된다.

톰은 자기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그 부분을 고치길 원하지만, 남녀간의 관계에서 사랑도, 문제도 모두 상호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반드시 둘이 함께 풀어나가야만 풀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소통'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톰은 이 소통을 겁낸다.

톰은 분명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고, 이것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쉽게 그 문제를 끌어 올리지 못한다.

그 문제를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가, 오히려 배가 가라앉아 버릴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각자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었다.

안정적인 관계에 정착하고자 하는 톰, 그런 관계를 거부하는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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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처음 해보는 톰에게 가장 이상적인 조언자는 어린 여동생이다.

(영화 '킥애스' 에서 나쁜놈들을 썰고 총알을 박아넣던 귀여운 꼬맹이가 여기서는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꼬맹이...입술이 너무 예쁘다. 부디 이대로 잘 자라주길...)

이 거대한 문제 앞에 직면한 톰이 어린 여동생에게 묻는다.

 

톰: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레이첼: 물어봐

톰: 왜? 왜 잘 가는 보트를 세우냐는 거지.

    내 말은 다 잘 되고 있는데, 거기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하는건 죽음의 키스같은거야.

    그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레이첼: 무슨 얘긴지 알아. 나하고 션이 그랬거든.

톰: 션이 누군데?

레이첼: 남자친구, 마크 전에.

톰: 그래서 무슨 얘길 하려는거야?

레이첼: 가서 물어봐야 한다고.

           틀림없어. 오빠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대답을 들을까봐 무서운거야.

           그래서 지난 몇 달 간의 아름다운 환상에 숨으려는거지.

           하지만 봐, 만약에 내가 오빠라면 당장 물어보겠어.

           쉽게 생각해, 오빠.

           겁내지 말라고.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어린아이가 된다. 남자는 '관계' 에 있어서는 정말 세상 없어도 단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명적인'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톰은 더더욱 단순하다.

반면, 연애를 하는 여자는 정말 복잡하다.

초등학생에 불과한 여동생 레이첼이 자신의 경험(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연애를 한다!!OTL)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는데, 톰의 상태는 정말로 레이첼이 사귀는 초등학생 남자들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ㅋㅋㅋㅋ

고집쟁이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겁이 많으며, 대화를 두려워하는 부분들이 말이다.

 

운명을 믿지 않는 썸머는 사실, '관계' 라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 하는것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관계가 언젠가 반드시 끝나게 되있고, 그 순간의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마음의 벽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치고, 타인이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마치 휴전선 부근의 군인들처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쏘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애초부터 그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썸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확실하게 연애를 '즐기는' 쪽을 택한 것이다.

 

연애에는 정말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10명의 커플이 있다고 친다면, 최소한 10개 이상의 케이스가 생성된다.

이것들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다르기도 하다.

그런 반면에, 잘 들어보면, '어? 나도 그랬는데!' 라는 부분이 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연애란 전쟁이다.

 

남자와 여자. 기본적으로 남자는 정자를 '방출' 하는 종족이고, 여자는 그것을 '받아서 품는' 종족이다.

일단 이런 기본적인 역할 자체의 차이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기본을 결정한다. 완벽하게 차별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은 2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완벽하게 다른 가정에서 자라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먹고, 입는것이 모두 다르다. 다닌 학교, 사귄 친구들, 선생님과 부모님..더 말 할 것도 없을터다.

그 환경은 고유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수많은 다른 것들을 첨가하여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남자라고 무조건 '싸지르는' 법을 배우지 않고, 여자라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남성성은 여성성과 융화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각자 자기의 고유한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톰의 세계관과 썸머의 세계관인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남성과 여성의 만남은 일종의 문명의 충돌, 문화의 충돌, 종교의 충돌, 물리적 충돌이다.

 

그리고 그 충돌, 그 전쟁은 자신의 모든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이다.

유치하고, 치졸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남자와 여자의 내면 깊숙한 모든것들이 몽땅 드러난다.

이런 처절한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정도는 다 비슷하다.

그리고, 누구나 연애하면서 겪는 부분이다.

 

결국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톰과 썸머의 경우 같은 케이스라면 과연 그것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자기 세상을 양보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스스로 구축해 놓은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톰과 썸머의 소통은 절대 합치될 수 없는 소통이다.

톰이 용기를 내서 썸머에게 "우리 어떻게 되는거야?" 라고 물었을때, 썸머는 "몰라, 무슨 상관이야. 난 행복해, 자긴 안 행복해?" 라고 되묻는다.

톰은 "행복하지." 라고 말하자, 썸머는 "됐네, 그럼" 이라며 소통을 단절시킨다.

톰에게 일방적으로 자기의 세계관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서로의 관계를 끊임없이 규정하려 앴는 톰 역시, 썸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세계관을 요구한다.

마치 초딩들이 책상에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죽어!! 라며 투닥거리는 것과 똑같다.

 

결국은 각자의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져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둘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리다.

자기의 세계관만을 고집하고, 상대방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인들은 지하철 안이건 화장실 안이건, 배고프면 밥달라고 죽어라 울어대는 어린아이들과 다름없다.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톰의 모습은, 자신의 세계관이 깨진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깨지는 것은 미치도록 힘든일이다.

 

그 순간  또 어린 여동생 레이첼의 한마디가 톰의 가슴을 파고든다.

"오빠가 썸머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알겠는데, 난 아니라고 봐.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기억하고 있는거야.

다음번에 다시 생각해보면 오빠도 알게될거야."

 

 

그렇게 상실의 고통을 마주하고, 톰은 아주 조금 성장한다.

 

 

운명은 있다, 없다고 단정짓긴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한가지는, 그것은 우리가 하루에 겪는 수많은 우연들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톰은 500일만에 자신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톰과 썸머.

둘 중 옳은 사람도 없고, 그른 사람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만남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을 낳고, 헤어짐은 또다른 만남을 낳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정말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온다.

작년에 봤을때 다르고, 올해 볼 때 또 다르다.

누군가가 마음속에 있을때 다르고, 없을때 역시 또 다르다.

과거의 실연들을 추억할 때 다르고, 잊었을때 역시 또 다르다.

 

 

하지만, 이 엔딩만큼은 언제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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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대부분의 날들은 평범하다.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고.

그 사이에 남겨지는 추억도 없이

대부분의 날들은 인생에 있어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는다.

톰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건 전 우주적 의미를  단순히 지구적 이벤트로 치부래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우연

 

항상 일어나는 그것이다.

 

우연,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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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쓰기 - 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장상용 지음 / 해냄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이야기를 하고, 듣는것은 모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인간은 유희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이야기란 즐거움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도 단순한 방법이다.

이야기, 즉 '스토리' 를 통해 무생물은 생명을 얻고, 찰나의 순간은 명확한 서사를 가진 영원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찰나의 순간에 영원이라는 시간을 불어넣는 과정을 '스토리 텔링' 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스토리' 가 있고, 세상 어떤 것에도 '스토리' 를 부여할 수 있다.

생판 모르던 두 남녀가 스토리를 통해 어린시절 헤어진 남매가 되기도 하고, 전생에 연인이거나 혹은 원수였던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 뿐이랴, 정체를 숨긴 스파이나 외계인이 되기도 하고, 철천지 원수 사이로 만나 복수를 꿈꾸기도 한다.

이 남녀를 그런 사이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스토리 텔링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로미오와 줄리엣 답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숱한 '스토리' 들이다.

철천지 원수간인 두 가문. 그 가문의 비슷한 나이대의 청춘 남녀. 서로 한눈에 반할만한 외모, 그리고 그 순간을 이끌어내는 가면무도회에서의 첫 만남. 여기에 둘의 관계를 알고 도와주는 줄리엣의 유모, 성당의 신부, 그리고 그 관계를 방해하는 줄리엣의 사촌오빠.

관계를 파국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결투, 그리고 신부가 구해주는 수면제와, 로미오가 구하는 독약.

이 모든 요소들이 인과적으로 명확히 연결되고, 그 과정들의 디테일이 설득력이 있을때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 이 완성된다.

 

이 책은 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고 설득력 있게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들이 모여있다.

 

개인적으로 영화나 연극 시나리오를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처음 이 책의 내용을 들었을때, 굉장히 두껍고 전문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게다가 단순히 영화나 연극 뿐 아니라, 만화, 드라마, 게임등 제목 그대로 '전방위' 적인 장르들을 담기만 하는데도 상당한 분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깜짝 놀랄정도로 얇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다 가벼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책은 그야말로 일종의 '다이제스트' 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드라마, 만화, 연극은 물론 소설까지 다양한 장르를 모두 관통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들만 뽑아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정리한 카테고리와 뽑아낸 요약본도 쉽고 알차서 한 부분도 놓치고 싶지 않을정도이다.

 

우선 카테고리들은 크게 '구성' 과 '연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잡는 방법을 제시한 뒤에, 그 캐릭터를 활용하는 연출기술의 몇가지를 보여주고,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구성방법을 알려준다. 캐릭터의 주변 인물들을 배치하는 연출기술을 제시하고, 사건을 나열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스토리를 '구성' 하는 기술의 엑기스들을 알려준다.

 

이 과정도 크게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다. 저자는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최근의 드라마나 소설, 영화의 킬러씬들을 예로 들기때문에 대중문화에 관심깨나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것이다.

 

이 두 부분 사이에, 최근의 유행대로 원소스 멀티유즈의 방법, 즉. 각 장르에 따른 각색 요령을 간단히 정리해 준 뒤에 본격적인 연출 기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 역시 굉장히 쉽고 명징하게 설명하고 있다.

관객들을 캐릭터에 감정이입시키고, 그 감정을 따라 흐르게 만드는 다양한 기법들이 역시 위와 같이 크게 히트한 작품들의 킬러씬들을 예로 들며 또박또박 짚어나간다.

 

'스토리 텔링' 은 '문학' 과는 차별을 두어야 하는 분야임은 확실하다.

비록, 그 뿌리는 같다고 하더라도, 스토리 텔링은 엄연히 '대중' 을 타겟으로 한 철저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일종의 기술이다.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식상한 것을 식상하지 않게 다듬고 꾸미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책을 보면,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소위 '막장' 드라마를 볼까?

왜 그렇게 욕을 많이 먹으면서도 작가들은 끊임없이 '막장' 드라마 대본을 쓸까?

라는 의문은 어느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사실 해답은 우리도 다 알고 있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 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유익한 지침서를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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