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조곡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굳이 밀실 살인이나 복잡한 트릭이 얽혀있는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고, 주변에 몇가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미스테리로 가득하다.

신의 존재, 우주와 지구의 기원, 공룡의 멸망, 생명의 기원, 삶의 의미...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외국에 다녀온 친구가 사온 유명 브랜드의 초컬릿!!

혼자 먹으려고 몰래 서랍 깊숙히 숨겨 놓았는데, 다음날 학교 다녀와서 보니 서랍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초컬릿의 향기만이 그 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 가족들은 모두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애초에 나 혼자 몰래 먹으려고 가족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기에, 전혀 몰랐을 것이다.

다음날, 빈 초컬릿 상자가 집에서 좀 떨어진 다른 주택의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들어있었다!!!

상자를 뜯기위해 가장 처음 칼질을 했던 바로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초컬릿 박스는 내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서랍 깊숙히 숨겨져 있던 초컬릿!! 이게 어떻게 하루만에 빈 상자로 우리집도 아닌, 다른 집 재활용 쓰레기봉투에 들어있단 말인가?!!!

 

너무 미스테리 하지 않은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존재이다.

그리고, 미스테리-추리물은 그런 인간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이용하는 문학 장르이다.

고전적인 미스테리-추리물은 독자와 작가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작가는 사건을 터뜨리고, 군데군데 힌트들을 흩뜨려 놓는다.

그리고, 주인공을 등장시켜, 독자들을 게임 속으로 초대한다.

독자들이 쉽게 범인이나 트릭을 알아채면, 그 작품은 기본적으로 좋은 평을 얻어내지 못한다.

최대한 복잡하고, 독자들의 뒷통수를 후려칠만한 반전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독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그런 와중에도 이야기의 처음 - 중간 - 끝의 개연성을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와 독자에 대한 속임수는 완벽한 별개가 되어야 하고, 독자들은 주인공을 따라 가면서도, 등장 인물과 주변 상황들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복선과 힌트를 흘리지만, 독자들은 이것들이 어떤 결말을 위한 장치인지 쉽게 알아채지 못해야 한다.

뭔가 있긴 있는데? 과연 뭘까??

명민한 작가들은 이 복선이나 힌트 마저도 독자를 홀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이야기 전체의 논리적 개연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애드거 앨런 포우, 아서 코난 도일, 모리스 르 블랑 등이 이러한 미스테리-추리물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면, 애거서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이 꾸준히 발전시켜 현대적인 감각의 미스테리- 추리물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시대의 미스테리-추리물들은 사실상 이런 전통적인 틀을 깨기 위한 도전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수많은 현대의 추리작가들은 전통적인 기법을 보다 디테일하고 정묘하게 계승. 발전시키거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으려고 애쓰는 한편,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장르작가들 중에 꼽으라면, 전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후자는 온다 리쿠를 들 수 있을것이다.

 

전기공학도 - 의학기기 회사원에서 일약 일본 엔터테인먼트 소설계에서는 최고로 손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트릭에 트릭을 덧붙이는 전통적인 기법에 인물간의 치밀한 관계,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면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범인이 등장하고, 그를 뒤쫓는 사람이 등장하며, 범죄를 위한 트릭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틀이라면 틀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온다 리쿠는 추리 작가라는 수식어보다는 '노스텔지어의 마법사' 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한 여류 작가이다.

그녀는 현대, 과거, 판타지를 가리지 않고 엔터테인먼트라는 큰 틀안에서 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래도 역시 지금의 그 위치까지 오게 한 장르는 미스테리 - 추리 장르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위에 언급한 범인, 그를 뒤쫓는 사람, 트릭. 이런것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테이블, 다과, 대화, 회상은 아주 자주 등장한다.

온다 리쿠의 작품세계는 히가시노 게이고에 비해 무척 정적이고 조용하다.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사건들이 뻥뻥 벌어지고,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여기저기로 우루루 뛰어다니기 보다는,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조용히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은 주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고, 과거는 필연적으로 등장인물들간의 인연이 얽혀있다.

정말 세상 모든 일들이 '미스테리' 함을 느끼게 해주는 소재들로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의 '목요조곡' 또한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4년전에 급작스럽게 자택에서 자살한 여류 작가 도키코.

그리고 도키코가 죽던 날, 도키코의 자택에 모여있던 다섯명의 여류 문인들.

그녀들이 2박3일로 도키코를 추모하기 위해 그녀가 살던 저택에 모인다.

도키코를 위한 추모 모임은 올해로 4년째. 그녀가 죽었던 그 해부터 시작되었고, 올해도 목요일을 사이에 끼고, 수-목-금. 이렇게 추모 모임이 시작된다.

목요일이 사이에 낀 이 애매한 평일 날짜에 모이게 된 이유는, 도키코가 생전에 목요일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노는 모임인 이 자리엔 생전에 도키코의 전담 편집인이었던 에이코와 논픽션 작가인 에리코, 도키코의 이복동생이자 예술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문화 비평가 시즈코, 떠오르는 신예 작가인 도키코와 혈연 관계가 있는 나오미와 츠카사.

 

그리고, 여기에 메모가 들어있는 꽃다발 하나가 배달된다.

다섯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개봉한 메모에는 뜻밖에도,

"여러분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 오늘 이 장소에 죽은 이를 위한 꽃을 바칩니다"

라는 섬뜩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과연 이 다섯명은 도키코가 죽은 날, 그녀의 자택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 그 다섯명 중 도키코를 죽인 사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섯명 모두가??

 

다섯명의 여인들은 한명씩 4년 전, 그 날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풀어져 나갈때마다, '그날' 의 비밀은 하나씩 공개되고, 생각치도 못한 결말이 다섯명의 여인들과 독자들을 기다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남녀가 사이좋게 분배되어 있던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여자들만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온다 리쿠 이거나, 그녀의 주변인물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더 즐겁기도 하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작가' 라는 직업과 '작품' 이라는 것에 대한 사상은 분명 그녀 자신의 것일 터.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그녀 자신의 세계관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온다리쿠의 작품은 언제나 너무 '평범한 듯' 해서 매력적이다.

이 세상은 모두 미스테리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이 엄청난 '글감' 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작품은 '관계' 와 '죄의식' 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다섯명의 여인들. 여기에 도키코까지 포함해서 여섯명의 여인들은 혈연과 사업으로 끈끈하게 얽혀있었다.

도키코를 중심으로 여성 특유의 감성과, 작가 특유의 상상력, 그리고 예술가 특유의 괴팍함까지 뒤엉켜 애증의 끈이 이중 삼중으로 얽히고 설켜있었다.

문득,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고, 자살한 수많은 유명인들이 떠올랐다.

미스테리-스릴러가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시작된다면, 자살만큼 미스테리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삶은 살아있음을 전제로 펼쳐진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무無가 되는 것일 뿐이다.

사후가 어쨌건, 윤회가 어쨌건, 지구라는 세상 위에서 '나' 라는 인생은 완벽하게 종결되는 것이다.

내 육체, 육체를 통한 감각, 감각을 통한 경험, 경험을 통한 기억, 추억, 그것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

나 자신도 무無가 되지만, 나를 둘러싼 타인들에게도 '나' 라는 존재는 무無가 된다.

자신의 모든것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부정하는 행위인 '자살'.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본능은 생존본능이다.

그런 기반을 뒤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과연 무엇을 통해서 일어날까??

 

 

 

이 작품은 작가들이 주인공이어서인지, 지금까지 온다리쿠의 작품들 중 내러티브가 가장 풍부하고, 디테일도 가장 뛰어나다.

실제로 이 작품속의 작가들이 살아 숨쉬고 있을것만 같다.

문득,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작품에서, 작품 속에 소재로 등장했던 책들이 각각의 제목을 달고 실제로 이 세상에 출간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가 흔히 '삼월 연작' 이라고 부르는 그것들이다.

('황혼녘 백합의 뼈',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흑과 다의 환상'은 모두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라는 단편집에 등장하는 소재이자, 챕터의 제목이기도 하다. 후에 모두 각각의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이 작품 안에도 '삼월' 때처럼 몇권의 책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다.

작품 안의 등장인물들이 써낼 책들인데, 팬의 입장으로서 '목요조곡 연작' 을 기대하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닐터다.

 

작가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도 한다.

작품 안에서 온다리쿠는 '망상' 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라고도 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능력이 있다면, 바로 상상일 것이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거대한 궁전의 주인이 되어 아리따운 미녀들을 사방에 끼고 자기만의 하렘을 만들기도 한다.

확실한 건 현실은 현실, 상상은 상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상도 거대한 심연과 같다.

이 거대한 심연속에 사로잡힌다면, 현실은 물론 삶 조차도 못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 나 역시 작가를 꿈꾼다. 여전히, 그리고, 아마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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