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 아웃케이스 없음
마크 웹 감독, 조셉 고든 레빗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아마 20대 후반부터 나를 알아온 사람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도 운명같은 사랑을 꿈꾼 시절이 있다.

한 여자만 만나서, 평생 그 여자만 사랑하고, 결국은 그 여자랑 죽고싶다는... 꿈을 꾼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정말 얼굴만 보면 '이 여자가 내 여자!' 라는 도장이 쾅 찍혀있을 줄 알았다.

내 눈에 만큼은 김태희보다, 전지현보다 더 예뻐보이는 여자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난 한 여자만 사랑하고 싶었지만, 사랑이란 건 절대 일방적일 수 없는것 아닌가?

세상에 60억의 인구가 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지구 위에 60억개의 또다른 지구가 있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딱히 이티나 에일리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외계인과의 만남. 미지와의 조우에 필적하는 어마어마한 대 충돌인 셈이다. 하물며 남자와 여자, 게다가 연애라고 한다면 이건 뭐 거의 '지구 최후의 날' 수준일거다.

나의 사랑이 그녀(들)의 언어로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해!!"  가 "싸울래?" 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흐규~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대충 추측할 수 있을터. 암튼, 20살때 첫 연애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 연애인 28살까지(그래 햇수로는 2년. 실제로는 3년가까운 시간동안 솔로를 만끽하는 중이다. 참고로 마지막 연애는 100일도 못채웠다능!!!), 약 8년간의 시간동안 그닥 많은 여자들을 만난건 아니지만, 짧게 했어도, 횟수는 적었어도 연애는 연애. 어느정도 하고나니, 나의 꿈들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500일의 썸머> 라는 묘~한 제목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톰' 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있었다.

그도 운명을 믿었고, 운명의 여인을 믿었다.

근데, 그런 그가 첫눈에 보자마자 '오! 저 분이 나의 운명의 여인이야!!' 라고 느꼈던 여성이 하필이면 '썸머' 였다.

왜, '하필이면' 이었냐면, 이 썸머라는 아가씨는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파탄으로 이어진 이후,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하게 된 여성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도, '지구 최후의 날' 인데, 썸머와 톰의 만남은 '빅뱅'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터다.

아니, 어쩌면 썸머와 톰도 그냥 평범한 남녀이지만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세계관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세계관과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톰과 썸머는 그랬다.

 

운명적인 만남을 굳게 믿는 톰과, 운명은 커녕 사랑과 그 결실도 믿지 않는 썸머.

둘의 연애는 겉보기엔 엄청나게 평범하다.

성인 남자와 여자의 데이트는 겉보기에는 모두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함께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를 가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스킨쉽을 하고,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의 것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둘의 관계를 '규정' 함에 있어서 썸머는 톰을 '그냥 친구' 라고 생각하고, 톰은 '연인' 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톰은 시간이 지나면 썸머도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하리라고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서 둘의 관계는 아무리 봐도 그냥 친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썸머는 '관계'를 규정짓는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를 원치 않기때문이다.

할건 다 하지만, 떠나고 싶을때 훌쩍 떠날 수 있는 관계.

썸머는 그런 관계를 원했다.

 

난 예전엔 연애의 결실은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애란 언제나 상호간의 사랑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전제로 시작한 교제가 연애이고, 그것이 깊어지면서 현실이 되면, 결국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경험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내 경우에 대부분은 일방적인 사랑으로 연애가 시작됐다.

운명적인 연애라고 믿는 나의 사랑이 상대방의 관점에서는 무엇이 되어 다가갈지 전혀 알지 못했을 무렵이다.

난 나의 사랑을 맹목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터.

받은만큼 돌려줘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할 수 없기때문에 부담은 배가 되었을터다.

연애에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이 작품은 결국 연애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 '남녀관계' 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올바를터다.

물론, 남녀 관계에 연애와 결혼말고 무엇이 더 있겠냐마는. 그래서 결국 그 이야기가 주가 될 수 밖에 없지만서도.

작품 안에서는 남자인 톰이 좀 더 관계에 집착하고, 썸머가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욕구에 솔직한편이지만, 딱히 남녀의 역할 구분은 짓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줄곧 상충되던 두 세계관이 존재한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톰의 세계관과 그것을 절대 믿지 않는 썸머의 세계관.

이 둘은 성인이지만, 사실 자기만 고집하는 아이들과 같다.

 

결국 톰과 썸머의 애매모호한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삐걱거리게 된다.

톰은 자기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찾고 그 부분을 고치길 원하지만, 남녀간의 관계에서 사랑도, 문제도 모두 상호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반드시 둘이 함께 풀어나가야만 풀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소통'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톰은 이 소통을 겁낸다.

톰은 분명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고, 이것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쉽게 그 문제를 끌어 올리지 못한다.

그 문제를 수면위로 끌어 올렸다가, 오히려 배가 가라앉아 버릴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각자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었다.

안정적인 관계에 정착하고자 하는 톰, 그런 관계를 거부하는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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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처음 해보는 톰에게 가장 이상적인 조언자는 어린 여동생이다.

(영화 '킥애스' 에서 나쁜놈들을 썰고 총알을 박아넣던 귀여운 꼬맹이가 여기서는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꼬맹이...입술이 너무 예쁘다. 부디 이대로 잘 자라주길...)

이 거대한 문제 앞에 직면한 톰이 어린 여동생에게 묻는다.

 

톰: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레이첼: 물어봐

톰: 왜? 왜 잘 가는 보트를 세우냐는 거지.

    내 말은 다 잘 되고 있는데, 거기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하는건 죽음의 키스같은거야.

    그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레이첼: 무슨 얘긴지 알아. 나하고 션이 그랬거든.

톰: 션이 누군데?

레이첼: 남자친구, 마크 전에.

톰: 그래서 무슨 얘길 하려는거야?

레이첼: 가서 물어봐야 한다고.

           틀림없어. 오빠는 자기가 바라지 않는 대답을 들을까봐 무서운거야.

           그래서 지난 몇 달 간의 아름다운 환상에 숨으려는거지.

           하지만 봐, 만약에 내가 오빠라면 당장 물어보겠어.

           쉽게 생각해, 오빠.

           겁내지 말라고.

 

 

사랑에 빠진 남자는 어린아이가 된다. 남자는 '관계' 에 있어서는 정말 세상 없어도 단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명적인'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톰은 더더욱 단순하다.

반면, 연애를 하는 여자는 정말 복잡하다.

초등학생에 불과한 여동생 레이첼이 자신의 경험(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연애를 한다!!OTL)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주는데, 톰의 상태는 정말로 레이첼이 사귀는 초등학생 남자들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ㅋㅋㅋㅋ

고집쟁이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겁이 많으며, 대화를 두려워하는 부분들이 말이다.

 

운명을 믿지 않는 썸머는 사실, '관계' 라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 하는것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관계가 언젠가 반드시 끝나게 되있고, 그 순간의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마음의 벽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치고, 타인이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마치 휴전선 부근의 군인들처럼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쏘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애초부터 그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썸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확실하게 연애를 '즐기는' 쪽을 택한 것이다.

 

연애에는 정말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10명의 커플이 있다고 친다면, 최소한 10개 이상의 케이스가 생성된다.

이것들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게 다르기도 하다.

그런 반면에, 잘 들어보면, '어? 나도 그랬는데!' 라는 부분이 있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연애란 전쟁이다.

 

남자와 여자. 기본적으로 남자는 정자를 '방출' 하는 종족이고, 여자는 그것을 '받아서 품는' 종족이다.

일단 이런 기본적인 역할 자체의 차이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기본을 결정한다. 완벽하게 차별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은 2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완벽하게 다른 가정에서 자라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먹고, 입는것이 모두 다르다. 다닌 학교, 사귄 친구들, 선생님과 부모님..더 말 할 것도 없을터다.

그 환경은 고유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수많은 다른 것들을 첨가하여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남자라고 무조건 '싸지르는' 법을 배우지 않고, 여자라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남성성은 여성성과 융화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각자 자기의 고유한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톰의 세계관과 썸머의 세계관인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남성과 여성의 만남은 일종의 문명의 충돌, 문화의 충돌, 종교의 충돌, 물리적 충돌이다.

 

그리고 그 충돌, 그 전쟁은 자신의 모든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이다.

유치하고, 치졸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남자와 여자의 내면 깊숙한 모든것들이 몽땅 드러난다.

이런 처절한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정도는 다 비슷하다.

그리고, 누구나 연애하면서 겪는 부분이다.

 

결국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톰과 썸머의 경우 같은 케이스라면 과연 그것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자기 세상을 양보할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스스로 구축해 놓은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톰과 썸머의 소통은 절대 합치될 수 없는 소통이다.

톰이 용기를 내서 썸머에게 "우리 어떻게 되는거야?" 라고 물었을때, 썸머는 "몰라, 무슨 상관이야. 난 행복해, 자긴 안 행복해?" 라고 되묻는다.

톰은 "행복하지." 라고 말하자, 썸머는 "됐네, 그럼" 이라며 소통을 단절시킨다.

톰에게 일방적으로 자기의 세계관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면, 서로의 관계를 끊임없이 규정하려 앴는 톰 역시, 썸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세계관을 요구한다.

마치 초딩들이 책상에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죽어!! 라며 투닥거리는 것과 똑같다.

 

결국은 각자의 세계관이 와르르 무너져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 둘은, 진정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리다.

자기의 세계관만을 고집하고, 상대방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인들은 지하철 안이건 화장실 안이건, 배고프면 밥달라고 죽어라 울어대는 어린아이들과 다름없다.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톰의 모습은, 자신의 세계관이 깨진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깨지는 것은 미치도록 힘든일이다.

 

그 순간  또 어린 여동생 레이첼의 한마디가 톰의 가슴을 파고든다.

"오빠가 썸머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알겠는데, 난 아니라고 봐.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기억하고 있는거야.

다음번에 다시 생각해보면 오빠도 알게될거야."

 

 

그렇게 상실의 고통을 마주하고, 톰은 아주 조금 성장한다.

 

 

운명은 있다, 없다고 단정짓긴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한가지는, 그것은 우리가 하루에 겪는 수많은 우연들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톰은 500일만에 자신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간다.

 

톰과 썸머.

둘 중 옳은 사람도 없고, 그른 사람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만남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을 낳고, 헤어짐은 또다른 만남을 낳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정말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온다.

작년에 봤을때 다르고, 올해 볼 때 또 다르다.

누군가가 마음속에 있을때 다르고, 없을때 역시 또 다르다.

과거의 실연들을 추억할 때 다르고, 잊었을때 역시 또 다르다.

 

 

하지만, 이 엔딩만큼은 언제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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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대부분의 날들은 평범하다.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고.

그 사이에 남겨지는 추억도 없이

대부분의 날들은 인생에 있어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는다.

톰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건 전 우주적 의미를  단순히 지구적 이벤트로 치부래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우연

 

항상 일어나는 그것이다.

 

우연,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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