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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그렇다. 나에게 아주 복잡 다단한 사정이 있듯,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잡하기 짝이없는 상황들에 빠져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 가족간의 갈등,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과의 갈등과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10년 남은 주택 대출금과 그 이자들, 미래를 위해 적립하고 있는 각종 보험금들, 매 달 날아오는 신용카드 사용 내역서와 한도가 다 되어가는 마이너스 통장들, 자동차 보험료에, 적금과 곗돈, 각종 모임 회비, 통신비와 같은 돈관계. 밤마다 터져나오는 이유를 알수 없는 기침과 때만되면 쑤시는 관절, 이유없이 찾아오는 위통, 두통. 옷정리 할 것도 한가득, 책정리, 책상정리, 대청소, 화장지도 다 떨어져가고, 식재료도 부족하다. 반찬도 없을거고, 쌀은 언제 사야 되더라. 세일이 언제지? 어디서 사는게 제일 싸더라?? 이번 달에 들어올 돈은 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지?? 게다가 일주일 전에 온라인으로 구매한 상품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전화를 해봐야 할까, 아니 그 전에 게시판에 글을 먼저 올릴까.
이런 단순한 신변잡기만 나열해도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데. 여기에, 각종 업무나 나의 미래나 장래에 관한 고민이 개입되면, 그야말로 위가 꼬일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갈등에 갈등, 고민 또 고민. 얽힌 매듭을 잡아 당기면 당길수록 매듭은 더 꽉 조여진다. 내가 처음 잡아당긴 부분이 어떤 매듭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도 잊고 만다. 애초에 이 매듭이 무엇 때문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매듭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혀오다가, 이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 앞에 뭔가 투명한 막이 끼인 것 처럼 먹먹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위를 들어 매듭을 마구 잘라댄다. 매듭 사이에 끼인 뭔가가 함께 난자되면서 끈적거리고 비릿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누구에게나 그런 '선' 이 존재한다.
'이성의 끈'이 매듭지어서 줄줄이 연결되어있는 '선'. 마치 거대한 괴물이 봉인되어있는 커다란 항아리를 두겹 세겹 둘러싸고 있는 결계의 새끼줄 같은 선이 말이다. 매듭이 하나만 끊어져도 이성의 끈은 쉽게 풀어지고 항아리 안에서 거대한 괴물이 뛰쳐나온다. 이 매듭은 남들이 보기에 아주 어이없는 일이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엔도 마유미' 는 자신을 항상 '당신' 이라고 부르는 제멋대로인 딸 '아야카' 를 꾿꾿하게 참아내고 있는 엄마였다. 화가나면 손에 닿는 물건을 뭐든지 집어 던지며 악을 써댄다. 짐승같이 소리지르며 자신을 '할망구' 라며 각종 욕을 쏟아내는 중학생 딸을 보며 마유미는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자신에게 왜 저렇게 상처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까. 마유미는 딸을 이해 하기를 포기하고 무조건 수용하고 포용하기로 한다. 남보다 더 남같은 남편, 엔도 게이스케에게는 수용과 포용을 넘어 포기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런 마유미의 이웃집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엘리트 의사 부부의 집. 고급 주택가 안에서도 상당히 고급 단독 주택인 다카하시 가족의 집. 장남은 유명 대학 의학부에 다니기 위해 독립해 있고, 차남과 차녀도 유망한 사립학교에 다니며 성적도 상당하다. 엘리트 가정의 분위기를 폴폴 풍겨내는 다카하시 가족의 저택 주변에 각종 보도진들과 경찰차가 가득하다. 피살자는 가장인 다카하시 히로유키. 그리고 범인은 그 부인인 준코. 아이돌 가수와 비슷한 외모의 우등생 다카하시 신지는 사건에 연루된 듯 행방불명 상태이다. 대체 그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나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가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러우며, 가장 치명적이다. 너무 당연한 말일까... 어쩌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유일한 것은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는 상처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상처이다. 절친한 친구, 가족. 부모, 형제, 자매. 역시 너무 당연한 말일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상대들이기에, 그들이 주는 상처는 맨살에 파고드는 비수처럼 쉽고 간단하게 마음을 파고들어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낸다. 하지만, 역시, 마음을 열어보이는 상대들이기에 참고 또 참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연인, 가족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이다.
살인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야행 관람차]을 쉽게 장르소설이라고 분류하기는 모호하다. 본 작품은 최근 10년 사이에 일본 장르소설에서 감지된 크고도 의미있는 변화인, '사회파' 장르소설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그다지 미스테리하지 않고, 무슨 트릭이나 비밀이 있는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보다는 사건의 주변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살인자의 가족들, 이웃들. 그리고 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는가. 그들에겐 어떤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가. 똑똑하고 착한 남편과 잘 성장하는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마유미의 집처럼 히스테릭하게 엄마를 욕하며 물건들을 벽에 집어 던져서 깨뜨리는 딸이 아닌,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쁜 딸과 말 잘듣는 착한 아들이 있는 다카하시 씨네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천상 귀부인 같던 엘리트 의사 출신인 다카하시 준코는 어떤 경로로 남편을 살해하게 된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갈등들과 문제들, 고민들, 그리고 어둠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온화하다면 온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어둠이 선을 뚫고, 봉인을 뚫고 나와 괴물이 되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작용하는 것일까?? 크고도 끈적거리는 새카만 어둠이 속에서 튀어나와 한 사람을 집어 삼키게 되는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하는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강한 살의를 품어도 죽였다는 사실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사이에는 크나큰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을 뛰어넘을 것인지, 눈앞에서 그칠 것인지, 결정은 의지가 크게 좌우한다고 믿었다. 윤리관, 이성, 인내심.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나는 지금쯤 살인자 신세다. 말려주는 사람의 유무가 결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결코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p. 285~6"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역할이란 과거의 그것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 자식의 역할은 집안의 어른 전체의 몫이었다. 자식은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당신의 부모님에게 하는 것을 보며 자란다. 할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에게서 웃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요즘은 바쁜 부모 아래에서 홀로 자라는 자식들이 훨씬 많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 바빠서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자식들의 욕망을 모두 수용하고 포용함으로서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망치는 일이 될터다.
누구에게나 어두움은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제어하는 장치와 함께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 또한 공존하고 있다.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의 힘을 클수록, 어둠은 더 쉽게 튀어나와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당신에겐. 그리고, 나에겐 어떤 어둠이 있는가.
그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말려줄 사람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