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코와 마들렌 여사
마키메 마나부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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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일회一期一會' -'다회에 임할 때는 주인과 손님 모두 인생에 한 번 오는 기회라는 마음가짐으로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뜻에서출발하여, 오늘날에는 평생 한 번뿐인 기회나 만남'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p. 32 역자 주)

 

 사람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될까?? 아침 출근 시간, 지하철 역만 나가봐도 세기도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깊은 우정을 나누거나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관계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가?? 깊은 우정이나 교감을 나누지 않아도, 우린 직장 상사의 한마디, 혹은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님의 한마디에 기분이 바뀌고, 컨디션이 바뀌고, 때론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좋던 나쁘던, 사람과의 만남을 "인연" 이라고 부른다.

 

 내가 개인적으로 주구장창 주장하는 바가 있는데,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큰 적이기도 하고, 반면 그것이 가장 생존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죽음' 이 '삶' 을 보다 열정적으로 만들 듯 말이다. 죽음이 있기에 한정적인 삶이 소중하듯, 외로움이 있기에 타인이 소중한 것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결과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인연에 집착한다.

 

 때론 깊은 고독감과 외로움은 사람이 아닌 동물로부터 위로받기도 한다.

특히 애묘인들은 고양이와의 인연에 고양이묘猫 자를 써서 '묘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애견인들 역시 애완견과의 만남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견연'이라고 부르지 않는건 그 어감때문일 터다.'구연'도 마찬가지일거고.) 애완동물과의 만남은 사람과의 만남만큼 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어린 고양이의 경우 강아지보다 죽을 확률이 좀 더 높다. 그리고 고양이의 천성은 충성심이 뛰어난 개와는 완전히 다르다. 개의 본성이 복종이라면, 고양이의 본성은 자유로움일 것이다. 개는 정을 아낌없이 준다고 한다면, 고양이는 자신이 받은만큼도 아니고, 받은 만큼에 반 정도만 돌려준다. 하루종일 잠자거나 자기 털을 고르는 잠꾸러기 나르시스트. 이런 독특한 매력에 끌리는 사람들이 꼭 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개도 사랑한다. 그리고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 개' 가 가장 예쁘지만,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고양이들이 다 예뻐보이는 경우가 많다. 무튼, 개와 고양이는 가장 오래전부터 인류의 동반자가 되어 고독과 외로움을 위로해준 고마운 존재들임은 확실하다.

 

 이 작품은 주인공 가노코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여자아이이다.

늙은 시바견 '겐자부로' 를 키우시는 부모님 덕에 자연스럽게 개와 함께 자랐고, 이제 학교에 들어가 '친구' 라는 부류를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같은 반 학우인 '스즈' 와 친해지고 싶어진 가노코.  그리고 억수로 비가 오던 날, 겐자부로의 개집에 비를 피하러 들어간 엉뚱한 고양이 '마들렌' .

 한편, 떠돌이 고양이 마들렌은 희안하게도 개인 겐자부로와 말이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고양이는 고양이들끼리 말이 통하는 게 당연하고, 개는 고양이와 말이 통하지 않는것이 당연한데 말이다. 고양이나 개와 인간과 대화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마들렌과 겐자부로는 서로 대화가 된다. 그렇다고 마들렌이 다른 개들과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고, 겐자부로 또한 다른 고양이들과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다. 수 많은 개들 중 한나인 겐자부로와 수많은 고양이들 중 하나인 마들렌. 이 둘은 기적처럼 서로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늙은 개 겐자부로와 고양이들 사이에서 '여사' 라고 불리기 시작한 마들렌의 기묘한 결혼생활은 그렇게 시작된다.

 

 작품은 가노코의 중심의 이야기와 마들렌 중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교차되며 , 때론 시간의 흐름이 뒤엉키기도 하지만, 비교적 순차적으로 펼쳐져 나간다. 가노코의 이야기는 학교 친구인 스즈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마들렌의 이야기엔 판타지적인 요소가 넉넉하게 묻어나있다. 가노코의 이야기에선 동심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인상적이다. 특히 "게릴라성 폭우" 를 발음하지 못해서 "고릴라 아닌 비!" 라고 표현하는 모습이나 고양이인 마들렌을 대하는 장면들도 아이들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풍성하게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 마들렌과 애완동물들의 세계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완벽히 인간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이야기의 큰 틀 안에 그들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특히 고양이들이 아침마다 모여 '뒷담화' 를 나누는 회합을 보면 아주머니들의 그것이 저절로 떠올라 키들거리게 된다. 특히 마들렌과 겐자부로의 모습은 오랜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 한켠이 아릿해지기도 했다.

 

 마키에 마나부의 전작 [사슴남자] 를 읽어봤다. 마키에 마나부는 모리미 도미히코와 함께 '교토작가' 로도 불리고 있는 젊은 작가이다. 그들이 교토작가로 불리우는 이유는 출신지가 교토이기도 하지만, 간사이 지방 특유의 감성을 잘 살리고, 이야기의 배경이 대부분 그 지방이기 때문이라는 특징도 있다. 전작인 [사슴남자] 도 만화같은 상상력과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인간적인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수많은 고난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은 작가로서 보다 능숙해진 글솜씨를 보여준다. 특히 시점과 시간, 공간을 적당히 잘라서 이야기의 호흡에 맞게 재배열한 센스는 특히나 돋보인다.  

 

 이 짧은 동화같은 이야기가 시종일관 따뜻한 기운을 폴폴 내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관심' 와 '애정' 을 담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연의 시작은 '관심' 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쪽에 관심있어요" 라는 어필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들. 대화를 하고, 그것을 통해 나와 다름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교감하고 우정과 애정을 쌓아나가는 과정. 작품은 어린 가노코와 중년의 고양이 마들렌 여사를 통해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일기일회. 인연이란 때론 두번다시 오지 않는 기회이다. 그 기적같은 기회를 통해서 사람은 교감할 수 있는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 지구위에 있는 수십억 인구들 중 말이 통하는 몇사람. 마치, 고양이 마들렌과 늙은 개 겐자부로처럼 이성, 혹은 이종異種(동물이나 외계인) 이라면 그것은 더욱 더 기적같은 일일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하지만, 만난 사람은 언제나 떠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전학이든, 죽음이든. 어떤 기회를 잡아 기적처럼 만들어진 친구, 가족, 연인, 부인, 남편. 원인이 무엇이든 반드시 이별하게 되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거자필반.去者必反. 떠난 사람은 돌아오기 마련이다. 때론 다른 사람이 되서 돌아오기도 하고, 다른 동물이 되서 돌아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돌아온다. 그것 또한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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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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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를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책' 에 대한 무언가가 완벽하게 변화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화책만 보던 아이가 어린이용 세계문학을 접했을 때라고 하면 좋을까, 어린이용 세계문학만 접하던 소년이 판타지와 무협소설을 접했을 때라고 하면 좋을까, 판타지, 무협, 스릴러, 추리소설만 접하던 소년이 세계 문학전집의 완역본을 읽었을 때라고 하면 좋을까,한권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를 읽다가 제대로된 역사책을 읽게 되었을 때라고 하면 좋을까??

공지영 작가가 [맨발로 글목을 돌다] 라는 작품에서 말했던 것 처럼 어쩌면 1차 대전이 교과서에 적혀있던 대로 세르비아 황태자가 암살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발 제국주의 열강들과 후발 제국주의 열강들의 시장다툼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사실, 결국 돈때문에 세상은 미친듯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이란, '글' 이란 단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니, 결코 그 정도로 끝나면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의  생각, 사상, 감정, 경험. 삶 전체가 그저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이 찾아들면, 사람들은 '책' 과 '책 읽는 행위' 에 대한 모든 것이 변화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을까?? 스페인의 작가 '루이스 사폰' 은 [천사의 게임]이라는 작품을 통해 책은 각각 작가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 작가 뿐 아니라, 그 책을 읽었고, 그 책과 함께 살았고 꿈꾸었던 사람들의 영혼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잊혀진 책들이 모인 거대한 도서관을 그려낸다. 새로운 독자나 새로운 영혼의 손길을 기다리는 '잊힌 책' 들의 거대한 도서관. 그렇게 한 사람과 만난 책은 독자의 영혼을 뒤흔들고 삶을 바꾸어 낸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들은 내게 그런 하나의 거대한 울림과도 같았다.

진도 9.0의 대지진.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거대한 진동. 마음 속의 맨틀을 뒤흔들고 깊이 침잠되있던 지각판들을 수면 위로 솟구쳐 올린다. 그리고 영혼의 수면 위쪽에 있던 어줍잖은 대지들은 마음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히고 말았다.

 

독서에는 고급과 저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수많은 현인들은 양서(良書) 와 악서(惡書) 를 구분하기도 했지만, 현대에 그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다고 본다. 글이 반드시 삶을 담고 있어야 진수이자 정수이고, 독자에게 상상력과 말초적인 즐거움만 준다고 쭉정이이고 해악이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던 변화의 순간은 어찌보면 단지 관점의 변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들이 내게 준 거대한 지진은 단지 책과 글을 받아들이는 내 자신의 관점의 변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것은 단지 내면의 변화일 뿐으로, 내가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주구장창 리얼리즘이 가득한 책만 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듯, 수많은 독자들이 있고, 수많은 감동들이 있을것이며, 수많은 욕과 불평 또한 찬사와 칭찬 만큼 있을것이다.

 

 이 작품이 내게 준 큰 울림은 최근 몇 해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삶이란 그러해서 그런것이다' 라는 문장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삶이란 그러해서 그런것이고, 그러해서 그런것이기이 그 어떤 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마치 카프카의 [변신] 에서 그레고리가 아침에 눈을 떴을때, 자기가 벌레가 되있었을 때 처럼 말이다. 어느날 문득 병원을 가보니 말기 암 진단을 받듯이, 어느날 문득 산 로또에 당첨 되듯이, 어느날 문득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듯이 말이다.

 사실 삶의 모든 일들에 꼬치꼬치 하나하나 엄청나게 꼼꼼한 계획처럼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조물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새옹지마' 처럼 지금 일어난 이 일이 나중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새옹은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말 한마리를 가져왔을 뿐이지 않은가?? 현실이란 대부분 그렇다.

 

 삶의 모든 순간은, 언제나 단지 그러해서 그럴 뿐이다.

멍때리는 순간에도, 잠자는 순간에도. 응가를 하기 위해 괄약근을 조이는 순간에도, 음식을 비운 식기를 개수대로 가져가는 순간에도. 그저 그러해서 그렇ㅔ 순간 순간이 차곡차곡 포개져간다.

 

인간과 삶의 위대함은, 바로 그러한 '순간' 들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삶은 단지 그냥 그렇게 그러해서 흘러갈 뿐이지만, 그 순간 인간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신이 될 수도 있다. 이 순간이 지옥이 될 수도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그냥 그렇다. 매초, 매분, 매시간. 아니, 구분할 수 없는 수많은 감각의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다. 그 순간의 기억을. 기분을. 느낌을. 마음을.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은 바로 그 순간을 붙들어서 박제해 놓은 것만 같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바닥에 떨어져 먼지들을 피어 오르게 하고, 흙속에 스며들이 젖은 흙냄새와 먼지냄새를 솟구치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 그 기분, 그 느낌. 그 순간을 붙들어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로 붙들어 놓는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지고,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냥 단지 나의 상상일 뿐인걸까?

루이스 사폰의 말처럼 책 속에 레이몬드 카버의 영혼이 피어올라서 책을 읽는 나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순간인 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영혼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영혼을 만나기 위해 나에게서는 잊혀지겠지.  

 

인간은 언제나 지금'만' 산다. '지금' 이라는 '순간' 들이 모이고 모여 '삶' 이 된다.

삶이란, 그냥,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내일 외계인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난, 그렇더라도, 그냥 그래서 그런거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최대한 만끽할 것이다.

 

내일 커피가 엄청 맛있게 내려졌으면 좋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엄청 맛없게 내려졌더라도, 일단은 그냥 그래서 그런거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욕을 해가며 그 맛없는 커피를 꾸역꾸역 다 맛볼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들을 읽기 전과 읽은 뒤 나에게 찾아온 변화는, 뭐, 그 정도이다. 

 

 

 

읭????!!!!!       

 

     

변한게 없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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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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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절반까지는 이 작품이 소년 소녀들의 성장이야기를 담고 있는 줄 알았다.

보다 내밀하고 노골적이긴 했지만, 소년 소녀들의 눈이 담아낸 현실이라고 보였다. 주인공인 신이치와 그의 친구인 하루야, 나루미는 모두 초등학교 5학년. 우리 나이로 따지면 12살정도. 이제 막 질풍노도의 시기에 발을 살짝 담근 아직은 '어린이' 에 가까운 10대 초반의 청소년들. 작품은 여느 성장 소설과 다름 아니었다. 최근의 청소년 소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요즈음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일종의 '성장 소설' 들이 거의 충격에 가까울정도로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점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10대 고교생들의 원조교제, 낙태, 담뱃불로 피부를 지지는 학원폭력은 물론, 교사들에 의한 성추행, 오토바이 폭주족등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소재들이 공공연하게 씌여지고 있다. 그렇다. 10년 전만 해도 그런 일들은 흔치 않았다.

 

 이 작품 또한 그런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암으로 아빠를 잃고 엄마와 할아버지, 세 가족이 살고 있는 신이치. 재미삼아 자식을 폭행하고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와 한가족인 하루야, 사고로 엄마를 잃고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나루미. 한 반에 서너명 씩은 꼭 있을 '결손' 가정의 아이들. 이 세 아이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간다.

현실을 담담하게 담아가면서 현실속에서 변화해 나가는 아이들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디테일하고 면밀하게 그려져 나간다.

작품의 시점은 3인칭 이지만, 주인공인 신이치의 시점에서 서술되어진다.즉, 신이치의 내면묘사만이 직접적이고 하루야와 나루미의 심리는 신이치의 입장에서 추측한 내용만이 그려진다. 결국, 작품은 아버지를 잃은 신이치와 새로운 연인이 생긴 어머니, 그리고 하루야와 나루미 사이의 묘한 삼각관계가 중심이 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달과 게] 라는 소설이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작품의 중반까지 신이치의 마음 속 갈등은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홀몸이 된 어머니에게 생긴 새로운 연인이 중점이 된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신이치에게 단순한 가족의 상실 그 이상이다. 그에게 아버지의 상실이란 세상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것과 같다. 최초의 상실. 사랑, 존경, 의지의 대상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것은 신이치의 마음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신이치가 성장하면서 점차 메꿔질테지만,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 가 된다. 즉, 작품속에서 신이치가 겪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 안에서 어떤 계기로 '게' 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신이치는 아버지의 상실이라는 빈 공간을 어머니로 채우려고 하지만, 어머니에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나이때의 아이들은 마음의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잊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신이치는 아버지를 잃은지 2년이 다 되었지만, 그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버지를 상실하던 그 순간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빈자리를 '빈자리' 로 인식하고 '어머니' 라는 존재를 통해 메꾸어 내려고 하지만, 어머니는 뜻밖에도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실을 경험했던 신이치는 이번엔 어머니를 상실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어떤 존재에 공포감을 갖게되면,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 자체를 망각코자 노력한다. 그 대상이 '사람' 이라면, 단연 그 방법은 '미움, 증오' 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신이치는 어머니가 만나는 새로운 남자를 미워하게 되고, 그런 남자를 만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게된다. 결국 신이치는 유일한 친구인 하루야와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하게 되고, 둘은 필연적으로 단짝이 되고 만다.

 

 같은 반 급우인 나루미가 신이치와 하루야 사이에 끼어들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중반부부터 이야기는 보다 무겁고 농밀해진다. 10대 초반은 충분히 이성에 대한 연애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나이이다. 10세에서 15세의 사이. 남자든 여자든 이 시기에 신체적, 심리적으로 '성' 을 알아간다. 신이치는 나루미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하루야에게 나루미를 서서히 빼앗겨 감을 느끼면서 급격한 심리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장' 이 아니다. 신이치가 경험하는 심리변화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거의 비슷하게 경험하며, 그 행동양상 또한 거의 비슷하게 일어난다. '사랑' 은 파괴적인 감정이다. 결국 신이치는 아버지의 상실과, 그에 맞먹는 어머니의 상실의 주범인 '어머니의 남자친구' 를 증오하고 저주하지만, 그로 인한 감정과 행동이 하루야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버지 - 어머니 - 어머니의 남자친구

신이치 - 나루미 - 하루야

 

라는 대치구도가 완성되면서 소년들의 이야기는 어른들의 이야기와 정교하게 부합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어두운 감정들은 결국 사랑, 애정, 집착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과 그 맥을 함께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인간의 본성들 중 하나라는 사상 또한 기저에 깔려있다.

 

 인간의 '성장' 이란 '인격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성장기' 의 소년, 소녀들은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감정' 들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억눌러야 할 본성과 끌어올려도 되는 본성들을 발견하고,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그것들을 구분해낸다. 신이치와 나루미, 그리고 하루야는 자신들의 본성을 발견해냈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부분들과 밝은 부분들을 구분해냈지만, 신이치와 하루야가 본성을 드러내고 억누르는 방법은 사뭇 달랐다. 그래도 비교적 따뜻한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고 자랐던 신이치와 인간을 가장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폭력' 속에서 자라온 하루야. 

 

 적어도 신이치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

"게는 먹어도 되지만 가니는 먹으면 안되"

(...)

가니란 말이다, 이 검은 부분이란다. 이거 보렴, 배에 붙은 이 바나나 같은 거. 여기에 독이 있단다."

p. 8~9

 

사람이 먹는 게에 먹어도 되는 부분과 먹으면 안되는 부분이 있듯, 인간의 마음에도 먹으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검은 부분] 바로 감정의 어두운 면.

신이치는 시시각각 찾아오는 어두움과 확연하게 대치한다. 그것은 신이치가 아버지를 잃었건, 어머니를 잃어가고 있건, 올바른 인격을 가진 부모의 역할 덕분이다. 신이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과의 관계를 통해 억눌러야 하는 부분과 꺼내 올려야 하는 부분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반면, 하루야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장난으로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뭐고 니 진심으로 받아들인기가. 내가 니 때리고 걷어찬 거 진심으로 받아들있나. 그런 거 전부 농담이다. 이카더라. 그런 아부지를 보이까. 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엄따는 생각이 들더라. " p. 402

 

자신의 하루하루를 지옥으로 만든 폭력이 '농담' 이었음을 느낀 하루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손목을 담뱃불로 지지던 그 고통이 농담이었다니. 12세 소년의 더이상 어둠과 밝음의 경계따위는 무의미해졌다.

 인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역시 가족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 자녀의 교육은 공동체 전체의 몫이었다. 부모들은 어렸을 때 부터 자녀들에게 사람의 도리가 적혀있는 책을 외우게 했다. 그리고, 이웃들은 부모의 인격과 교육 방식을 검사했고, 높은 인격을 지닌 어른이 공동체의 어린이들을 모두 모아 공부를 시켰다. 나의 자녀는 모두의 자녀였고, 모든 자녀가 나의 자녀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화내고 혼내면서 감정 소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귀찮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잘 잘못을 깨우쳐 주지도 않는다.

 

"달빛이 말이다, 위에서 내리비쳐서...바다 속에 게의 그림자가 생기거든.

(...)

자신의 그 그림자가 너무 추해서...게는 무서운 나머지 몸을 움츠리지... 그러니까 달밤의 게는 말이야..."

p. 391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고 몸을 움츠렸던 신이치와,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하루야.

 

 이 두 소년의 성장기는 이제부터이다.

과연 신이치와 하루야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우리 세대의 아이들은.

과연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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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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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그렇다. 나에게 아주 복잡 다단한 사정이 있듯,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잡하기 짝이없는 상황들에 빠져있다.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 가족간의 갈등,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과의 갈등과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10년 남은 주택 대출금과 그 이자들, 미래를 위해 적립하고 있는 각종 보험금들, 매 달 날아오는 신용카드 사용 내역서와 한도가 다 되어가는 마이너스 통장들, 자동차 보험료에, 적금과 곗돈, 각종 모임 회비, 통신비와 같은 돈관계. 밤마다 터져나오는 이유를 알수 없는 기침과 때만되면 쑤시는 관절, 이유없이 찾아오는 위통, 두통. 옷정리 할 것도 한가득, 책정리, 책상정리, 대청소, 화장지도 다 떨어져가고, 식재료도 부족하다. 반찬도 없을거고, 쌀은 언제 사야 되더라. 세일이 언제지? 어디서 사는게 제일 싸더라?? 이번 달에 들어올 돈은 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지?? 게다가 일주일 전에 온라인으로 구매한 상품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전화를 해봐야 할까, 아니 그 전에 게시판에 글을 먼저 올릴까.

 이런 단순한 신변잡기만 나열해도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데. 여기에, 각종 업무나 나의 미래나 장래에 관한 고민이 개입되면, 그야말로 위가 꼬일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인다. 갈등에 갈등, 고민 또 고민. 얽힌 매듭을 잡아 당기면 당길수록 매듭은 더 꽉 조여진다. 내가 처음 잡아당긴 부분이 어떤 매듭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도 잊고 만다. 애초에 이 매듭이 무엇 때문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매듭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꽉 막혀오다가, 이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 앞에 뭔가 투명한 막이 끼인 것 처럼 먹먹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위를 들어 매듭을 마구 잘라댄다. 매듭 사이에 끼인 뭔가가 함께 난자되면서 끈적거리고 비릿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누구에게나 그런 '선' 이 존재한다.

'이성의 끈'이 매듭지어서 줄줄이 연결되어있는 '선'. 마치 거대한 괴물이 봉인되어있는 커다란 항아리를 두겹 세겹 둘러싸고 있는 결계의 새끼줄 같은 선이 말이다. 매듭이 하나만 끊어져도 이성의 끈은 쉽게 풀어지고 항아리 안에서 거대한 괴물이 뛰쳐나온다. 이 매듭은 남들이 보기에 아주 어이없는 일이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엔도 마유미' 는 자신을 항상 '당신' 이라고 부르는 제멋대로인 딸 '아야카' 를 꾿꾿하게 참아내고 있는 엄마였다. 화가나면 손에 닿는 물건을 뭐든지 집어 던지며 악을 써댄다. 짐승같이 소리지르며 자신을 '할망구' 라며 각종 욕을 쏟아내는 중학생 딸을 보며 마유미는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자신에게 왜 저렇게 상처를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까. 마유미는 딸을 이해 하기를 포기하고 무조건 수용하고 포용하기로 한다. 남보다 더 남같은 남편, 엔도 게이스케에게는 수용과 포용을 넘어 포기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런 마유미의 이웃집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엘리트 의사 부부의 집. 고급 주택가 안에서도 상당히 고급 단독 주택인 다카하시 가족의 집. 장남은 유명 대학 의학부에 다니기 위해 독립해 있고, 차남과 차녀도 유망한 사립학교에 다니며 성적도 상당하다. 엘리트 가정의 분위기를 폴폴 풍겨내는 다카하시 가족의 저택 주변에 각종 보도진들과 경찰차가 가득하다. 피살자는 가장인 다카하시 히로유키. 그리고 범인은 그 부인인 준코. 아이돌 가수와 비슷한 외모의 우등생 다카하시 신지는 사건에 연루된 듯 행방불명 상태이다. 대체 그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나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가 가장 깊고, 가장 고통스러우며, 가장 치명적이다. 너무 당연한 말일까... 어쩌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유일한 것은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는 상처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상처이다. 절친한 친구, 가족. 부모, 형제, 자매.  역시 너무 당연한 말일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상대들이기에, 그들이 주는 상처는 맨살에 파고드는 비수처럼 쉽고 간단하게 마음을 파고들어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낸다. 하지만, 역시, 마음을 열어보이는 상대들이기에 참고 또 참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연인, 가족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이다.

 

 살인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야행 관람차]을 쉽게 장르소설이라고 분류하기는 모호하다. 본 작품은 최근 10년 사이에 일본 장르소설에서 감지된 크고도 의미있는 변화인, '사회파' 장르소설들의 대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건은 그다지 미스테리하지 않고, 무슨 트릭이나 비밀이 있는것도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보다는 사건의 주변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살인자의 가족들, 이웃들. 그리고 그들에겐 어떤 사정이 있는가. 그들에겐 어떤 어두움이 자리잡고 있는가. 똑똑하고 착한 남편과 잘 성장하는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마유미의 집처럼 히스테릭하게 엄마를 욕하며 물건들을 벽에 집어 던져서 깨뜨리는 딸이 아닌,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예쁜 딸과 말 잘듣는 착한 아들이 있는 다카하시 씨네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천상 귀부인 같던 엘리트 의사 출신인 다카하시 준코는 어떤 경로로 남편을 살해하게 된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갈등들과 문제들, 고민들, 그리고 어둠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온화하다면 온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어둠이 선을 뚫고, 봉인을 뚫고 나와 괴물이 되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작용하는 것일까?? 크고도 끈적거리는 새카만 어둠이 속에서 튀어나와 한 사람을 집어 삼키게 되는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하는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강한 살의를 품어도 죽였다는 사실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사이에는 크나큰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을 뛰어넘을 것인지, 눈앞에서 그칠 것인지, 결정은 의지가 크게 좌우한다고 믿었다. 윤리관, 이성, 인내심.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나는 지금쯤 살인자 신세다. 말려주는 사람의 유무가 결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결코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p. 285~6"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역할이란 과거의 그것보다 더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가족 사회에서 자식의 역할은 집안의 어른 전체의 몫이었다. 자식은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당신의 부모님에게 하는 것을 보며 자란다. 할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에게서 웃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요즘은 바쁜 부모 아래에서 홀로 자라는 자식들이 훨씬 많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어둠을 제어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다. 바빠서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자식들의 욕망을 모두 수용하고 포용함으로서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망치는 일이 될터다.

 

 누구에게나 어두움은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제어하는 장치와 함께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 또한 공존하고 있다.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의 힘을 클수록, 어둠은 더 쉽게 튀어나와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집어삼킨다.

당신에겐. 그리고, 나에겐 어떤 어둠이 있는가.

그 어둠을 촉발시키는 방아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걸 말려줄 사람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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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 을 즐기는 방법은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소설을 즐기는 데에는 최소한 세가지의 방법이 있다.

즉, 한 편의 소설을 읽을때 최소한 세가지의 관점에서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인데, 등장인물, 특히 화자나 주인공에 감정이입해서 읽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을 이러한 방법을 따르고 있고, 작가들 또한 독자들을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곤 한다. 아주 평범해서 어떤 독자라도 거울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보편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이야기를 진행하게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엔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가 바라보는 제3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화자인 경우도 많은데, 이런 경우엔 서술시점 또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독자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화자에게 이입될 수 있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듯, 혹은 화자의 실제 경험담을 듣는 듯한 착각을 경험할 수 있다.

 

 두번째는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한 방법인데, 등장인물들 중 화자와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에게 집중해서 읽는 방법이다. 어느정도 볼륨이 있는 직품이라면 주인공이나 화자 외에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안타고니스트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니, 그렇게 프로타고니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들 주변에는 흥미로운 조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 [배트맨] 시리즈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는 '배트맨' 이다. 당연히 안타고스트는 '조커' 나 '펭귄' '캣우먼' 등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조연들이 있으니, 바로 고담시의 형사과장이자 배트맨의 조력자인 '짐 고든' 형사. 그리고 배트맨의 오랜 친구이자 웨인가의 집사인 '알프레드' 이다. 그 밖에 배트맨의 사이드킥인 '로빈' 이나 고든의 딸인 '오라클' 그리고 후에는 강력한 안타고니스트로 변모하는 투페이스 '하비 덴트' 검사 등도 있다. 이런 주변 인물에 집중해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알프레도의 입장에서 '배트맨' 영화를 다시 보아도 아주 새로운 느낌일 것이다.

 

 세번째는 작가의 다른 작품군을 폭넓게 읽어봐야 가능한 방법인데,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며 읽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책을 정독해서 읽고, 읽은 뒤에 그 내용을 곱씹어 사색해보는 타입이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엔 '장 도미니크 보비' 의 [잠수복과 나비] 나 '키토 아야'의 [1리터의 눈물] 을 접한 뒤에야 진지하게 생각해본 방법이다. 고등학교 때 까지는 오로지 언어영억 문제풀이를 위한 독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속독법엔 몇가지 스킬이 있는데, 아마 왠만한 분들은 다 아실만한 방법들이다. 눈으로 읽는 단계를 거쳐, 대각선으로 읽기, 주어구와 서술구 나눠 읽기, 동사만 읽기, 명사만 읽기 등등 말이다. 20대 중반까지는 나 역시 이런 독학한 속독법에 익숙해져서 '정독' 을 하는 책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듯, 눈을 깜빡거려서 한권의 책을 완성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복과 나비]를 손에 들었을 때, 그렇게 쉽게 술렁술렁 읽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전신이 마비된 장 도미니크 보비가 힙겹게 완성한 한 권의 얇은 책. 과연 그 안에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담았을까. 나비처럼 날고 싶은 영혼을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잠수복 같은 육체안에 갖혀서,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철자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나아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모든 작품들엔 그와 같이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가지 방법만 이용하더라도 책 한 권 읽는데 한주일은 우습게 넘어간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동안 설렁설렁 읽은 책들도 다시 손에 들게 된다.

내가 놓친 인물들 한명 한명들이 다 사랑스러워 진다. 5번도 더 통독한 폭풍의 언덕에서도 새로운 인물들과 메시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이후에 만난 작품들 중에 '루이스 사폰' 의 [천사의 게임] 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다른 작품들도 접하게 되었다.

유럽 특유의 모호함과 서양 특유의 뚜렷한 분할, 스페인 특유의 음울함과 유럽 특유의 낙천적임이 말도 안되게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소설이었다.

지금 막 종장을 덮은 [한밤의 궁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선과 악 - 그리고, 그 중 악에 속한 부분은 한없이 잔인하고 끔찍한것으로 이분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점을 가지고 메시지를 또렷하게 전달하고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며 뚜렷한 인과관계 속에서 개연성 있는 스릴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며, 권선징악의 동화적인 결말 또한 너무 2차원적이다. 

 확실히 가장 최근작인 [천사의 게임] 에 비하면 여러 부분에서 아쉬움을 준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콱 박혀진 베이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 내내 평면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지만, 루이스 사폰이라는 작가가 초기작부터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한밤의 궁전]의 이야기는 인도의 캘커타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려진다. 

캘커타의 한 보육원에 살고 있는 7명의 고아 소년들. 절친한 친구사이인 동갑내기 소년둘 중 리더인 '벤' 의 출생의 비밀과 무시무시한 악당인 '자와할' 과의 숙명적인 대결. 작가는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성장을 디테일하게 그리려는 의도를 완전히 배재하고, [대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벤과 소년들은 피할 수 없는 [대결] 을 인지하고 그것을 준비해 나간다. 등장인물들의 성장이 그려지는 부분은 이 부분에서 아주 잠깐이다. 단호하게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에 맞설 수 밖에 없음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 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된다.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대결] 그 자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벤' 이 아닌 평범하기 짝이없는 소년 '이언' 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중간 편지문을 등장시킴으로서 이야기의 화자가 '이언' 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주지시킨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캘커타] 라는 도시 또한 상징적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던 인도. 모든 유럽인들이 황금이 넘치는 낙원.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던 신화와 전설의 나라, 인도. 각종 도시 괴담들과 정령,악령, 불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트레이트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이미지를 훌륭하게 자리잡아 나간다.

 

작품은 확실히 작가의 초기작답게 이야기를 간결하고 적확하게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적당히 독자들을 속이기도 하는데, 그 부분은 '자 이제부터 독자들을 속일겁니다' 라는 암시를 드러내 버려서 오히려 더 긴장하고 집중하게 만든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나를 속이는 걸까? 어느 부분을 어떻게 속이는 걸까?' 라고 의심하며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대결부분에 대한 정신없고 스펙타클한 묘사도 굉장하다. 아마 책의 클라이막스부분에서 책장을 덮은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오싹함과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 독자들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 사폰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낯설지만 익숙하다.

흔히들 서양 문학의 정서 전달은 보다 직접적이고, 한국 문학은 보다 우회적이라고들 한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호러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면, 헐리웃 작품은 베고 썰고 죽이는 살인마들이 눈 앞에 불쑥 불쑥 등장하며 깜짝 깜짝 놀래킨다. 한편, 한국 영화는 뭔가 있는데, 뭔지는 모르겠고, 나올락 말락 하다가, 웃음소리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며 소름끼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루이스 사폰은 독자들의 감정을 그 두가지를 아주 잘 활용하며 쥐락 펴락 한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우며 대단히 능숙하다. 명확하지만 몽환적이고, 뚜렷하지만 음울한데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낯섦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 역시 참 다들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벤의 이야기가 중심이기에 큰 비중 없이 배치되어 있지만, 한 명 한 명이 모두 개성적이다.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더욱 길게, 많이, 오래 보고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주변에 멤돌게만 할 수 있었을지. 작가도 아주 아쉬웠을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에 악을 품고 있다.

위에도 언급했듯, 선과 악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지만, 누구나 양심이 가로지른 라인이 존재한다. 그 라인의 이쪽 편은 선이고, 저쪽편은 악이다. 때로는 선과 악이 혼합된 영역도 있으며, 그 두 가지가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삶의 대부분의 일에서 사실 선과 악을 구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너무나 완벽한 '악' 을 분별하는 방법은 있다. 바로 그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파생되었는지 생각해내는 것이다. 때론 사랑에서 파생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증오에서 파생된 행위가 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경우는 없다. 증오는 언제나 악이다. 이분법적인 구분을 싫어한다고 몇번이나 언급했지만, 싫어한다고 해서 안 한 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수 많은 것들 중에서 두 가지를 나눠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 경우일 터다.

증오는 반드시 악을 파생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한다면, 삶은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언제나 지글거리며 나의 살을 태워낼 뿐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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