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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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 독특한 [엠브리오 기담]은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 아홉편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작품집이다. 

각 작품들은 한편씩 완결되는 단편의 구성을 갖고 있지만, 모두 이즈미 로안이라는 여행작가와 그 조수 미미히코가 여행하며 겪은 일들이니 연작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표제작인 [엠브리오 기담] 부터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까지 아홉편 모두 일본의 괴담 전문지에 실렸던 이야기로 각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여행의 주체인 여행작가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첫 만남부터 이즈미 로안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작품 배치는 물론 역자의 후기인 [독후 기담] 까지 어우러지며 전체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 뿐 아니라 매혹적인 표지 일러스트와 조금은 과해보이는 고급 장정까지 책 전체에 상당한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멋진 외양만큼 안에 꽉 차있는 작품 하나하나 역시 매혹적이다.


아홉편 모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라피스 라줄리 환상] 과 [지옥], 그리고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이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즈미 로안의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 린은 여행 도중 한 노파에게 푸른 돌을 얻게 된다. 

노파는 밑도 끝도 없이 '이 돌을 절대 몸에서 멀리 하지 말 것. 자살하지 말 것.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고 한다. 여행을 마친 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세 아이를 낳지만,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린은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게임에서 세이브와 로드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들은 모두 삭제되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라 린은 이미 경험했던 사건들을 예언해서 유명한 예언가로 살아보기도 하고, 지난 번 삶에서 만났던 남편이 아닌 다른 혼처를 구해 새로운 가정을 꾸려보기도 한다. 삶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려본다. 네번, 다섯번 삶을 반복한 린은 모든 삶을 지식 쌓는 것에 매진한다. 외국어를 공부하고, 의학을 공부해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린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그 업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지식은 남았다. 린은 그렇게 또 처음부터 책을 썼다.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떠나보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잊어갔다. 몇번이나 엄마가 되었다. 몇번이나 자식들을 키우고, 이별했다. 삶을 되풀이 할 때마다 만나는 자식들은 항상 달랐을터다. 그리고, 린은, 자신이 아무리 삶을 되풀이해도 항상 자신을 낳으면서 돌아가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몇 번 이나 삶을 살아도 영원히 볼 수 없는 어머니가 그리워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정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미성숙하던 시절의 한 순간이 사무치게 후회스러운 경우가 있을테니까.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불러온 파장이라던가, 알고도 지나친 참담한 사고의 징후라던가, 실수란 걸 알고도 멈출 수 없었던 순간이라던가. 

이러한 욕망들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 예로부터 아주 많이 쓰였더랬다. '삶의 리셋; 세이브&로드' 장르 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예로 헐리웃에서 [Edge of Tomorrow] 라는 영화로 제작된 일본 작가의 소설 [All You Need Is Kill] 이란 작품도 있고, 역시 영화로 큰 인기를 누렸던 [나비효과], 그 전에는 [사랑의 블랙홀]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의 엔딩은 [나비효과:감독판]의 엔딩과 흡사하지만, 주제의식과 전반의 정서는 엄청나게 다르다.

[나비효과:감독판]의 경우엔 주인공이 자신이 과거를 계속 수정하며 본의아니게 저지르게 된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라피스 라줄리 환상] 은 완벽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



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하고 있지만 [엠브리오 기담] 이라는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테마는 '부모' 이다.

표제작인 [엠브리오 기담] 이 부성애의 발현을 다정하게 다루고 있다면, 바로 뒤에 자리잡은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단순히 '모성애' 가 아닌 넓은 의미의 '어머니와 딸' 의 관계 자체를 다소 폭력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가급적이면 프로필을 상세히 살피지 않는 편이다. 가급적이면 성별도 모르기를 원하는데, 그 어떠한 편견도 갖고싶지 않아서이다. 작가는 언제나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독자로서 온전히 작품을 통해 인식하기를 원한다. 유사 부녀관계를 통해 부성애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선보였던 [엠브리오 기담] 뒤에 모녀관계를 다룬 [라피스 라줄리 환상] 을 읽으면서 작가가 남성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들이 보는 '어머니와 딸' 에는 뭔가 특별한게 있다. 

나에게도 꽤나 우애가 남다른 여동생이 있는데, 분명 어머니와 여동생의 연결고리는 나와 어머니 사이의 연결고리와는 전혀 다름을 느낀다.


린은 자신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를 위해 엄청난 댓가를 감수한다.

어머니와 아들이었다면, 전혀 설득력 없는 결말이었을테지만, [라피스 라줄리 환상] 속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는 나에게는 폭력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지옥]은 마치 [파리대왕]의 무삭제 성인판 같았다.

확실히 저자는 이 일련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특히 부모자식의 관계에 대해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또다시 역자후기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데,- 아, 이 자리를 빌어 저자에 대한 정보를 담아준 역자에게 깊은 감사를 ㅠㅠ-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을 연재하는 사이에 저자가 아버지가 되었다는 정보가 실려 있었다.(나는 이 역자후기를 보고 나서야 저자가 남자가 맞구나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여자들도 비슷할테지만 일단 내가 남자니까)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할것이다.

역자후기를 읽고 난 뒤 재독하는 [엠브리오 기담] 은 또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문장 깊이 숨겨있는 '부모가 되는 공포' 가 얼핏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이 되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는 다리] 에 있다면, '아비' 가 되는 공포는 [지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작품 안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우물같은 토굴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다.

괴물같은 부부의 자식들이다. 

한 사람의 본성은 대부분 태어난 뒤~3년 안에 형성된다고 한다. 부모의 역할이 너무너무 큰 것이다. 이 시기의 엄마 아빠의 따뜻한 포옹 한번과 말 한마디가 아이의 인성에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건강체질도 대부분 형성되는데, 먹는것과 잠자는 것, 방안의 온도와 습도등이 한 인간이 평생 안고 살 여러가지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지옥] 에서 가장 지옥 같았던 것은 미미히코가 빠진 우물 같은 지하감옥이 아니라 괴물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을 그렇게 만든 마을 공동체였으리라. 



["자, 가요. " 소년이 말했다] 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가장 신비한 이야기이다.

명색이 여행작가이면서, 지구 최강의 길치인 이즈미 로안의 어린시절을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학대당하는 한 여성의 입을 빌어 소개하고 있다. 여행의 주체인 이즈미 로안은 '초자연적인' 길치이다. 얼마나 심한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대로에서, 앞으로만 쭉 한시간쯤 걸어가면 나오는 곳까지 가는 데에도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대로 한가운데서 길을 잃는것이다. 이 현상은 주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데, 이즈미 로안과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만약 그 사람이 길잡이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고 만다.

문제는 이즈미 로안이 당도하는 '엉뚱한 곳' 이 가끔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거나, 때로는 평행 우주 안의 다른 세계([얼굴 없는 산마루] 라는 작품이 내겐 그렇게 해석되더라.), 게다가 바로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거의 차원이동;공간이동 수준의 '길잃음' 을 보여준다. 

이즈미 로안의 신비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연' 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지주에게 소작농의 딸이란 노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소작농의 딸인 '나'는 지주의 아들의 눈에 들어 시집을 왔지만, 팔려온 것이나 진배 없었을 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를 당연한 듯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사방이 단단히 막힌 외딴 창고 안에서 '길 잃은' 소년 이즈미 로안을 만나게 되고, 이 영특하고도 신비한 소년으로부터 '나' 는 매일 밤 글을 배우게 된다. 글을 배우면서 책을 읽게되고, 문자를 읽고 쓰는 행복감과 함께 스스로의 삶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르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의 주인공인 라일라를 떠오르게 했다.

작은 인연을 통해 책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이 지금껏 갇혀있던 단칸방만한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자신은 그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용기를 갖고 싸워야 쟁취할 수 있게 됨을 깨달아 간다. 

그 권리가 바로 자유다.  


이즈미 로안은 어렸을 때 부터 이렇게 자주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나' 와 이즈미 로안인 만난 곳은 어지간한 틈도 없는 꽉 막힌 공간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길을 잃고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건네주었다.



사실 아홉편의 이야기들이 모두 가슴에 큰 울림을 주고, 그 파문이 꽤나 오랫동안, 그리고 서서히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헬스장의 고정싸이클 위인데, 때문에 나에겐 책의 재미를 별점보다는 시간 대비 흘린 땀의 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땀을 한바가지를 흘리면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도 도무지 싸이클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하게 만든 책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다시 한번 펴보게 만들고, 주저없이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이다.

이즈미 로안과의 만남은, 나에게도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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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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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처음으로 [에브리맨]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뭐라 형용하기 어렵다. 
'아 죽음이란 거, 정말 별 것 아니구나' 와
'아 죽음이란 거, 정말 엄청난거구나' 가
동시에 느껴졌다. 
두께는 얄팍하지만, 무게는 장난아닌 그 책을 두번 세번 더 읽으며 이 아이러니한 느낌에 대한 근거를 약간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이 별 것 아닌 이유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라면, 아니,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빠짐 없이 ; 동물과 식물은 물론 사물과 심지어 지구와 태양, 우주에게도 너무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흔하디 흔한 것이 죽음이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 죽음이었다. 희소성의 가치로 생각해봐도 너무 별 것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란 게 정말 엄청난 이유는, 죽음이라는 전제 앞에서는 그 어떤 대단한 존재도 개미가 핥아먹는 진딧물 똥꼬에서 나오는 단물보다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역시 가슴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죽음 앞에서 지구의 운명이나 타인의 생명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나의 죽음만이 지구나 태양의 죽음, 우주의 죽음보다도 무겁다. 내가 죽는 순간, 나에게 타인의 생명은 물론 지구나 우주는 한없이 무의미해진다. 죽음의 거대함을 느끼는 순간, 삶의 거대함이 새삼 와닿았다.   
 
 단숨에 이 얄팍하고도 무거운 글들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뒤이어 필립 로스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한번 읽는 것으로 깊이 있는 이해가 힘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재독하는 습관이 없는 나였지만, 재독, 삼독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수십번 수백번 정련된 듯 한 그의 문장들에서, 삶의 불행과 행복에 관한 깊은 고민을 통해 도출해낸 그만의 결과들이 켜켜히 쌓여 이뤄낸 풍부한 통찰을 한 껏 느낄 수 있었다.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는 워낙 깊고 방대해서 한두마디로 압축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인상은 '정련' '견고함' 등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훌륭한 장인의 견고하고 숙련된, 그리고 더 할 수 없이 섬세한 손놀림으로 유목민이면서 정착민인,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며, 비주류이듯 주류인 미국내 유태인들이 갖고 있는 묘한 정서가 섞인 냉소적인 문체와 마초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한 남성성으로 삶의 불가해함을, 무자비함을, 불공평함을, 부조리함을 낱낱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든살이 넘은 1933년생인 필립로스는 1959년에 데뷔했으니, 20대부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바로 이 작품집,[굿바이, 콜럼버스]는 그의 길고 위대한 작품인생을 향한 작지만 위대한 첫 발자욱이다. 작품집을 발표한 이듬해에 [굿바이, 콜럼버스]가 전미도서상을 수상함으로 첫 걸음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깊은 자국을 냈다고 보면 될 것. 그와 함께 작품들이 유태인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니, 과연 필립 로스는 지금에 비해 한참은 '어리다' 고 해도 충분할 나이부터 신랄하고 거침없었구나 싶다.
 
표제작인 [굿바이, 콜럼버스] 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보니, 확실히 날것의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유대인의 개종] 과  같은 작품은 유태인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적 관습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얼마나 단순한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젊은 패기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유머와 해학이 가득 담겨 시종일관 키들키들거렸다. 아, 펜을 놀릴 때 필립 로스의 표정은 어땠을까? 대담한 표정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단숨에 써 나갔을 것만 같은 작품이다.

반면, [신앙의 수호자] 와 같은 작품에서는 무척 인상 깊게 읽었던 [울분]의 조각이 만져졌다. 
[울분] 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인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이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5년 5월 경에 시작되는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나'로 이야기의 화자가 되는 막스 하사는 치열하던 유럽 전선에서 미국 본토의 크라우더 기지로 발령받는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당시 유럽 전선과 태평양은 독일군의 최후의 발악으로 그야말로 병사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구덩이였기에 끊임없는 병력 보충이 필요했다. 때문에 전선해서 실제 전투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고급 전투요원들은 신병 훈련을 위해 다시 불러들여졌다. 칼 막스 하사도 그런 경우로, 크라우더 기지에서 그는 신병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은 당시 미국의 신진 세력으로 급부상하던 유태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작용하고 있다.) 
미주리 주 크라우더 기지의 훈련 중대로 배속받은 막스 하사는 중대 내의 여러 사병들 중 소수의 유태인 무리 리더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그로스바트 이병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막스 하사와 그로스바트는 평범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막스 하사는 희극적이지만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로스바트는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치게 될 상황에 처하고 만다. 아마 그 결과 역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것일 터다.
그로스바트의 이야기는 마치 [울분]의 마커스를 꼭 닮아 있다.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플롯 자체는 대단히 비슷하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도 상당히 비슷하다. 
데뷔 작품집에 실렸던 작품이니, [신앙의 수호자] 야 말로, 시기적으로 후에 등장하게 될 [울분]의 영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보다는 더 시니컬하고 날렵한 필체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여섯편의 단편들은 모두 현재의 필립 로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뭐랄까, 갓난 아이의 사진을 봐도 '아 이건 너구나!' 싶은 경우가 있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경계인이자 주류인 유태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있는 가운데 남성스러움이 깊이 배여있다.   
표제작이자, 작품집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전체 작품집 470여페이지 중 220여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중편에 가까운 [굿바이, 콜럼버스]는 바로 그런 남성스러움과 함께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경계에서 애매모호하게 머물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가 절묘하게 그려진다. 
위에 언급한 [신앙의 수호자] 에서 [울분]으로 승화되었을 영감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굿바이, 콜럼버스] 는 '주커먼 시리즈' 로 향하는 모티베이션; 주커먼의 태동을 발견할 수 있다.
 [굿바이, 콜럼버스] 의 1인칭 화자인 닐의 이야기를 꼼꼼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주커먼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필립 로스의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미묘한 동일시의 효과와 주커먼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적인 면이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필립 로스의 오랜 팬들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작가인 필립 로스를 작품 속 캐릭터인 주커먼과 동일시 하거나 최소한 페르소나 정도로 인식하곤 하는데, [굿바이 콜럼버스] 의 닐은 그가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커먼의 성향에 적확하게 부합한다. 아마도 필립 로스를 순서대로 읽었다면, 자연스럽게 닐 역시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로 인식했을테고, 주커먼 역시 또다른 닐, 작가의 또다른 페르소나라고 인식했을테니 필립 로스 = 닐 = 주커먼 의 공식으로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었을터다. 
 정착한 유태인들의 세계에 쉽게 귀속되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여자친구에 대한 욕망은 감추지 못하면서, 가난한 길거리의 거렁뱅이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꽤나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쉬이 기성 세대에게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하는 소심한 닐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뽐내게 되는 주커먼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꽤 높아보인다.      

필립 로스는 2012년 절필을 선언했다.
1997년 [미국의 목가] 에서 육신의 늙어감을 성욕에 빗대어 유머러스하게 고백했던 주커먼은 2007년 [유령 퇴장] 에서는 병들고 기억력도 희미한 노작가로 등장한다고 한다.([미국의 목가]는 읽었고, [유령 퇴장]은 아직 못 읽었다.)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은 축복이다.
그의 최초작을 뒤늦게 만나봤다는 점에 아쉽다는 마음보다 뒤늦게라도 만나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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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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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말 2000년대 초. 세기말초라고 부르면 되려나??

어쨌든, 나도 10대 후 20대 초반이었던 그 시기.

그 시기의 나는 그야말로 판타지 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실제로 한국 출판계도 전국적으로 성행한 대여점을 등에 업고, 옛날 대본소 만화처럼 공장식으로 판타지, 무협 소설들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었고, 각 권의 판매 부수보다는 누적 부수에 열을 올리며 질적인 발전을 거의 무시하던 시기였다. 사실상 그 시기의 성공을 발판삼아 진흙 속의 진주처럼,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재능을 번득이는 작가들 덕에 한국의 판타지, 무협 '문학' 은 질적으로도 꾸준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한국 문단에서 판타지 문학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잡문에 가깝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타지 장르는 전 세계적으로 깊은 역사를 갖고 있고,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장르. 어쨌든 세기말초는 한국의 판타지 매니아들에게도 그야말로 '노 난' 시기였다.

 판타지의 전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의 '반지 전쟁' 의 껍데기를 벗고 최초로 완역되어 한국에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역시 새로운 세대의 판타지적 상상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작품들은 그야말로 우주수준까지 높아진 영상기술에 힘입어 영화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그야말로 상상속의 '판타지 세계' 를 눈 앞에 펼쳐냈다. 

 한국에서는 PC통신 세대가 발굴해낸 천재 스토리텔러 [퇴마록]의 이우혁 작가가 [왜란 종결자] 에 이은 [치우천왕기]로 한국형 판타지의 효시를 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이영도 작가가 [드래곤 라자]의 후속작인 [퓨쳐 워커]와 [폴라리스 랩소디]로 한국 판타지 문학의 격을 한껏 끌어올렸다.'휘긴경' 홍정훈 작가의 [비상하는 매] 와 [월야환담: 채월야] 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깜짝 등장했던 미즈노 료의 [마계마인전]이 개정되어 다시 등장했으며(현재는 원제목인 '로도스도 전기' 가 양장본으로 출간 된 상태), 지금은 [왕좌의 게임] 으로 잘 알려진 '조지 R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도 원제목 그대로 이 당시에 첫 선을 보였다. 

그와 함께 소위 '라이트 노벨' 들이 본격적으로 런칭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쪽은 완전히 관심 밖이었어서 읊어댈 정도로 타이틀을 알고 있지는 않다. 여하튼, 한국 판타지 매니아들에게는 천국이었고, 소위 말하는 '오덕' 들이 PC통신과 월드와이드웹(WWW)의 교체기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늘 리뷰할 [십이국기] 역시 바로 이 시기의 판타지 열풍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인기까지 업고 대한해협을 건넌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오노 후유미는 [시귀] 라는 호러 작품으로 먼저 만났더랬다. 이우혁의 [퇴마록]이 한국 퇴마물의 장막을 걷어 올렸고, 때를 놓칠 새라 일본산産 '제마制魔'문학이 정신없이 쏟아졌더랬는데, 자극적인 작품들 사이에 이런 걸작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십이국기]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었는데, 애니메이션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작화 붕괴와 어이없는 회상장면 반복으로 모든 팬들의 질타를 받았던- 에야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 원작자가 바로 그 때 그 [시귀]의 작가라는 점에 화들짝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소설도 쓰는 작가였구나!!' 했더랬다. 

 

 판타지 소설이 넘쳐나던 시기, 개인적으로 좋은 판타지를 가늠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했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영감을 자극한다면 소장목록에 들어갈 가치가 충분했지만, 나름의 좁은 식견에서 파생시킨 기준을 통해서라도 '완성도' 라는 것을 가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 중 첫번째이자 거의 유일한 기준은 세계관의 꼼꼼한 설정은 둘째치고, '그래, 그 세계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였다. 마차가 있던 시대의 세계관과 자동차가 있는 시대의 세계관이 완벽하게 다르고, 편지를 보내던 시대의 세계관과 휴대폰을 사용하는 시대의 세계관이 다르다. 하루가 24시간인 세계의 세계관과 하루가 100시간인 세계의 세계관 또한 같을 리 없다. 평균수명이 40세인 세계의 세계관과 평균수명이 70세인 세계관 역시 같다면 거짓말일 것이고. 산속에 들어가도 사람만 보면 슬슬 피하는 굶고 늙은 개나 고양이만 그득한 세계의 세계관과 사람을 잡아먹으려 안달인 맹수들이 드글드글한 세계의 세계관 역시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불을 뿜고 마법을 쓰며 엄청나게 똑똑한 무적의 존재인 드래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고, 과학대신 마법이 발달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사상과 패러다임 역시 지금의 우리와는 완벽하게 다를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당연히 인물들이 갖고 있는 사상과 개념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중요한데, '이쪽 세계의 인물이 다른 쪽 세계로 이동하여 벌어지는 일' 을 다루는 판타지의 하위 장르 ; 소위 '이계理界물' 좀 더 세밀하게 세계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현실 세계와 작가의 세계의 차별점들이 주요 에피소드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설픈 설정은 금방 들통나 버리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설정빵꾸' 라고 한다.)

 정말 훌륭한 판타지는 이러한 부분에서 거의 완벽한 디테일을 선보이곤 한다. 이상하게, 공감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는 뚜렷한 논리적 개연성을 풀어서 보여주곤 한다는 것이다. 

 

'이계물' 은 멀게는 병든 아버지의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세계로 떠나는 바리공주 신화나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옥으로 간 오르페우스의 그리스 신화는 물론, 가깝게는 '피터팬'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소재로 SF, 모험물을 포함한 판타지 장르 전반을 통해 정말 많이 활용된다. 이異세계로 떨어진 연약한 소녀와 그 세계를 안내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 의 페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레퍼런스이다. 

[십이국기]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역시 거대한 서사시의 도입부로 그와 같은 이계물로써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회오리 바람에 실려간 도로시나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연약하고 평범한 소녀인 요코는 역시 자기 의사와 관계 없이 다른 세계로 '끌려' 가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그 세계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요코가 떨어진 세계는 딱히 이름이 없다. 이런 설정 부터 꽤 재미있다. 나라 이름 말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관념적으로 아우르는 통칭은 물론 열두개의 국가 외에 대륙 전체의 이름도 없다. 열 두개의 국가가 얼마나 독립적이고, 배타적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열 두 국가들은 서로의 국정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내전이 일어나 국민들이 학살당해도 옆 국가에서 도와줄 수 없는 정치적 폐쇄​성을 갖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 비록 학자라고 할 지라도 개념적으로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글로벌한' 개념으로 확장시켜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작품 안에서 요코가 깨닫게 되는 사람들의 종교관이나, 그에 대한 행동 패턴들 역시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과 빼어난 상상력이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펼쳐낸다. 위에 언급했던 개인적인 '좋은 판타지' 의 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디테일들을 선명하게 찾아낼 수 있다.

 한편, 주인공 요코는 오즈의 도로시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는 달리 '야만'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무엇보다 '야만' 이라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갈등은 몸 안에 심어진 '조유' 라는 존재가 자동으로 해결해 주고, 요코 본인은 오롯하게 내적인 갈등의 해결에 집중하는 점도 이채로운 부분이다. 과거의 자아, 일본이라는 국가에서 살던 자아를 버리고, 현재의 자아, 야만으로 가득찬 전근대적인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전체가 내적인 갈등에 집중되면서 이계물이라는 장르적 완성도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작가의 세계관과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전달된다.  

 

 사실 [십이국기] 라는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요코가 이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 아니다. 수많은 장르소설 작가들은 대부분은 '장르를 표현하기 위해' 장르를 선택하기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데에 '장르소설' 만 한 장치가 없기 때문에 장르를 선택한다. [십이국기] 역시 지금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독창적인 국가관과 군주론, 군신론을 펼쳐내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반드시 그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작가가 갖고 있는 복잡다단하고 독창적인 이러한 개념을 가장 쉽게 '설명' 하기 위한 장치로 현실세계의 평범한 여고생 요코를 끌어들인 셈이다. 거대한 세계관을 쉽게 펼쳐내기 위해 독자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10대 소녀를 끌여들였고, 제 1부를 통해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다.  

 

위에도 언급했듯, 난 이미 1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도 다 보았고, 당시 발간되었던 -초역 이라고 할 수 있을- [십이국기] 소설도 8~9권께까지 읽은 기억이 있다. 솔직히 번역이 어떻고, 저렇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 오타쯤이야 문장이 이해되면 상관 없고, 수동문과 능동문의 차이 역시 단락이 이해되면 크게 개의치 않는 건 둘째치고, 난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번역을 문제삼을 깜냥이 없었다!!!!(지금도 없기는 마찬가지.흠흠) 훨씬 뒤에야 인터넷을 통해 진정한 덕심 넘치는 블로거들이 원문과 당시 초역본의 문장을 비교해가며 완전히 '틀린' 부분들을 짚어냈을 때는 이미 그정도로 발번역이네 어쩌네, 하며 호들갑 떨 시기는 지났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엘릭시르의 고유명사 번역에 대한 고집을 존중한다. 옆집인 애니북스의 [조조] 시리즈가 기존의 팬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려 애쓰는 부분과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결코 비난할 생각도 없다. 게이키이건 케이키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물론 기존의 애니 팬들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게이키라는 이름 자체가 [경국의 기린] 이란 의미 아니던가. 한국에서는 '경' 국이니까, '게'이키 인거라고 어설프게 대신 변명해보련다.(내가 뭐라고? 그래도 고전부 시리즈의 '지탄다'는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싫었다. 일단 어감이 싫어.ㅋㅋ애니는 물론 코미컬라이즈화 된 만화책에서도 그녀는 '치탄다'인데, 정작 시기적으로 나중에 출간된 원작에서는 '지탄다'인게 똥고집처럼 느껴진 건 비단 나 뿐 만이 아닐듯.ㅋㅋ 그래도 역시 존중은 한다. 개인 취향일 뿐. 원작 번역팀으로써 그 정도 고집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십이국기] 의 제 1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는 단순한 도입부에 불과하다. 일종의 '프롤로그' 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앞으로 등장할 잠깐의 이야기를 더 소개하자면, 요코는 게이키가 택한 경국의 왕이지만, 좀 더 오랫동안 갈등하게 된다.

그러면서 '대국'의 사건에 말려들고, '안국'의 사건에도 말려든다. 요코가 왕이 되기까지는 아직 조금 멀었지만, 1부에서 등장한 매력적인 인물들, 라크슌은 물론 안국의 왕 연과 안국의 기린인 엔키도 쭉 등장한다. 더 매력적인 인물들 역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요코는 그렇게 여러 사건에 말려들고, 여러 나라의 사정을 경험하며, 수많은 인연들 속에서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진정한 왕의 길을 찾아 나간다.  

누군가는 명쾌한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비논리적인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누구든 한번 발을 들이면 그렇게 파고들게 될 정도로 깊이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주변에 1,2부(구판으로 1~4권쯤)만 보고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았다.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기도 하고, 다이내믹한 액션 장면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연출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니까. 주인공이 이렇게 개고생 하는 작품도 흔치 않다. 게다가 10대 소녀인데. 취향을 꽤나 탈 만한 특징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3부 이상 보고 (오)덕심을 품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국가와 군주, 그리고 선택과 선택받음.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 위에서 나풀대는 인간들. 

그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명쾌한 세계가, 바로 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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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캐서린 오플린 지음, 정숙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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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984년 영국의 어느 날, '케이트 미니' 라는 귀여운 소녀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초등부 3학년(9~10세. 영국의 공립초등학교 학제는 유아부 3년과 초등부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케이트는 열렬한 조력자인 아빠와 20살도 넘은 옆 상가의 에이드리언의 지지를 받아 차근차근 탐정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케이트의 주 활동 지역은 '그린옥스' 라는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당시 영국 최대의 면적을 자랑하던 곳으로 케이트가 아주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거대한 공단이었다. 케이트는 매일 그린옥스 안에서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우리나라도 90년대에 어린이 탐정 시리즈가 열풍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이 탐정들이 나오는 아동 소설들이 넘쳐났고, '탐정이 되는 법' 류의 아동 실용 서적(!!)도 많았더랬다. '형사 콜롬보' 나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중년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수사물의 외화도 절찬리에 방영했던 기억이 난다. '맥가이버' 역시 모험활극의 형태였지만, 수사물에 가까웠고. 어린이용 드라마에서도 '검은별' 같은 악당이 나오는 ~~수비대, ~~오인조 같은 어린이 탐정물이 유행이었다.  나 역시 그런 책들도 많이 보고, 장난감 화약총 - 화약 소리가 무서워서 화약을 재워넣지는 않았지만-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옆 아파트 단지 내의 오래된 창고를 수색하는 놀이를 하곤 했는데, 시기만 조금 일렀을 뿐이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나와 달리 케이트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은 의연함으로 잘 대처해 내며 탐정 활동과 학교 생활을 성실히 이어간다.

 

 작가는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케이트의 일상을 뒤쫓는다. 소탈하고 똑똑한 에이드리언은 친오빠처럼, 혹은 친구같은 아빠처럼 케이트를 바라봐주고, 10살도 더 어린 꼬맹이 케이트를 항상 대등한 시점으로 바라봐준다. 아마, 에이드리언에게 리사라는 케이트 보다 한두살 많은 여동생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야기는 갑자기 점프, 같은 장소에 시간대만 약 10년 뒤, 2003년으로 변한다.

케이트의 이야기는 오간데 없어지고, 거대 쇼핑몰 그린옥스의 경비원인 커트와 음반매장 매니저 리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시각이 등장인물들에게 무척 친근하고 다정한 것은 여전하지만 케이트의 이야기가 발랄하고 순수한 청소년 성장물 같다면, 커트와 리사의 이야기는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영국인 특유의 블랙 코미디가 가득한 직장 배경의 시트콤 같다. 케이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아빠 미소가 끊이질 않는데, 커트와 리사의 2003년이야기; 특히 리사의 이야기는 웃프긴 하지만, 키득거림을 멈출수가 없다. 직장생활에 대한 묘사가 기가 막힌데, 그린 옥스의 직원들과 주고받는 대사들이 정말 감칠맛난다. 아아, 직장생활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되고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인듯!!!(종결어미를 꼭 이렇게 써야할 듯!!!)

 

 

이 작품은 일단 시기적으로 1984년, 2003년, 1984년,2004년으로 네 챕터가 분류되어있는데, 1984,2003 두 챕터가 거의 모든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 1984챕터는 오롯하게 케이트 미니의 이야기가 정겹게 펼쳐지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케이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아주 교묘하게 서늘한 느낌들이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서늘함은 1984년 챕터가 끝나고 2003년 챕터가 등장하면 비로소 정체를 깨닫게 된다. (사실은 제목을 읽는 순간부터, 소싯적에 소설 좀 읽었다, 싶은 독자들은 명랑하고 따뜻한 앞 챕터를 읽어 나가는 동안에도 걱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아 작가님, 이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ㅠㅠ )

 

일단, 이 리뷰에서는 절대 안 알랴줌.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맨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더니, 충분히 납득된다.

개인적으로 무한신뢰하는 몇개의 상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문학동네소설상이랑, 외국에서는 맨 부커, 휴고, 네뷸러를 꼽는다. 퓰리쳐 픽션부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중 휴고와 네뷸러는 SF/판타지라는 장르에 한정되어 있고, 퓰리쳐 픽션부문은 퓰리쳐라는 상의 성격 때문인지 리얼리즘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반면 맨 부커상은 영어권 출판업자들이 후보를 선정하여 엄선된 심사위원들이 뽑아내는 것으로 그 성격이 남다르다. 출판업자들이 선정하는 후보이니, 막말로 '읽는 맛' 이 좋지 않으면 후보에 선정되기도 쉽지 않을터다.다른 상들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읽어본 맨 부커상 작품들은 판타지가 가미되었던지, 미스테리 스릴러등의 장르적인 기법이 활용되었다던지, 여하튼 읽는 맛이 쏠쏠한 작품들이 많다. [한밤의 아이들]을 예로 들 수 있겠고,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도 맨 부커 수상작이다. 20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스 먼로도 맨 부커를 수상한 작품이 있었고, 2000년 퓰리쳐 픽션 부문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역시 맨 부커 최종심에서 경쟁했던 작품이다. 

 어쨌든 맨 부커상은 그 해 동안 아마존 영미소설 판매 10위권에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작품들이 후보에 올라 엄선된 심사위원들을 통해 문학성과 시의성으로 걸러져 선정된다는 말씀.

즉, 후보에 오른 것 만으로도 대부분 재미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솔직히, 정말 큰 기대 없이 펴든 책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훨씬 재미있었다.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는 듯, 독자의 감정들을 이리 태웠다 저리 태웠다 하는 기술도 상당하고, 인물과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감각도 탁월하다. 드라마와 미스테리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읽는 내내 혼을 쏙 빼놓는다.  

특히, 그린 옥스라는 거대 쇼핑몰 안에서 리사와 커트를 통해 표현되는 이야기들은 마침 지금 읽고 있는 [21세기 자본]과 절묘하게 맞물려 소비사회에 매몰되어, 인간이 단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쉬지않고 돌아가는 작은 부품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서글프게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두 단어를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취미'와 '관심분야'라니. 어쩌라고?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밑에는 달랑 이 인치 남짓한 여백이 있을 뿐이다. 이 좁은 칸 안에 그럴듯한 대답이 될 단어들을 나열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p. 256

 

매장 매니저에 지원하기 위해 리사가 이력서를 쓰는 장면이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했던 부분이 아닐까? 

리사는 윗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 비굴하게도 자신이 현재 쇼핑몰에서 하는 일과 관련된 '쇼핑하기' 와 '잡지 읽기' 로 이 공간을 채워낸다. 그린옥스에서 매일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취미와 관심분야는 잊은지 오래였다. 

 

그런 부수적인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커트와 리사,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1984년의 케이트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모두 케이트로 인한 거대한 상처를 안고 살고 있었고, 과거에 얽매여 하루하루를 그린옥스의 톱니바퀴로 그륵그륵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은 때론 직장 생활 시트콤처럼, 때론 공포 호러처럼, 때론 미스테리 스릴러처럼, 또 때론 평범한 로맨틱 소설처럼 인물들을 그려내며 그들이 갖고 있는 과거에 집중한다. 각각 작은 챕터 말미에 다른 폰트로 누군가가 무기명으로 어딘가에 적어놓은 것들이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등장인물 중 누구의 글일지 유추해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그야말로, '읽는 즐거움' 을 가득가득 채워놓은 멋진 소설이다.

 

어째서 인간은 갈수록 더 고독해지며, 어째서 인간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까? 

 

삶이란, '시간' 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차근차근 부스러져 가는 과정이다. 

시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는다. 살아있건 죽어있건, 모두 모래시계 안의 그것처럼 잘게 부수어 허무 속에 흩뿌린다.

한 없이 강할 것만 같은 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랑조차도, 시간은 탐욕스럽게 씹고 또 씹어 잘디잘게 부숴버린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정수리 위에 시퍼렇게 번득이는 시간의 이빨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들은 살아가기 위해 '모른척' 하기로 했다.

시간이란 건 사랑스러운 연인을 만나기로 한 광장 한 가운데의 시계탑이나, 오븐 안에서 닭요리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동안에만 예민하면 되지, 나의 죽음, 나의 소멸과 관련 되었을 때는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정한 것이다. 정수리 위에 번득이는 시간의 칼날은 없는 셈 치기로 했다. 모른 척 하고, 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이란 녀석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 처럼, 심지어 나의 마지막 한 숨 조차도 시간은 결코 뺏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것이, 시간이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삶이라는 녀석 역시, 시간만큼이나 심술궂고 잔혹한 존재라, 가장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시간 앞에 내어주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면, 시간은 보다 더 우리 자신의 삶에서 유리된다. 더 모른 척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먹고 살아가나 보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면, 우리는 보다 더 고독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은 고독해 지나보다. 

 

현실을 마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 커트와 리사처럼 하면 된다. 

 

 이 책은 1984년의 어느 날, '케이트 미니' 라는 귀여운 소녀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초등부 3학년(9~10세. 영국의 공립초등학교 학제는 유아부 3년과 초등부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케이트는 열렬한 조력자인 아빠와 20살도 넘은 옆 상가의 에이드리언의 지지를 받아 차근차근 탐정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케이트의 주 활동 지역은 '그린옥스' 라는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당시 영국 최대의 면적을 자랑하던 곳으로 케이트가 아주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거대한 공단이었다. 케이트는 매일 그린옥스 안에서 거동이 수상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해 나갔다. 

 

우리나라도 90년대에 어린이 탐정 시리즈가 열풍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이 탐정들이 나오는 아동 소설들이 넘쳐났고, '탐정이 되는 법' 류의 아동 실용 서적(!!)도 많았더랬다. '형사 콜롬보' 나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중년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수사물의 외화도 절찬리에 방영했던 기억이 난다. '맥가이버' 역시 모험활극의 형태였지만, 수사물에 가까웠고. 어린이용 드라마에서도 '검은별' 같은 악당이 나오는 ~~수비대, ~~오인조 같은 어린이 탐정물이 유행이었다.  나 역시 그런 책들도 많이 보고, 장난감 화약총 - 화약 소리가 무서워서 화약을 재워넣지는 않았지만-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옆 아파트 단지 내의 오래된 창고를 수색하는 놀이를 하곤 했는데, 시기만 조금 일렀을 뿐이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몇 페이지 넘기지도 않았는데, 나와 달리 케이트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은 의연함으로 잘 대처해 내며 탐정 활동과 학교 생활을 성실히 이어간다.

 

 작가는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케이트의 일상을 뒤쫓는다. 소탈하고 똑똑한 에이드리언은 친오빠처럼, 혹은 친구같은 아빠처럼 케이트를 바라봐주고, 10살도 더 어린 꼬맹이 케이트를 항상 대등한 시점으로 바라봐준다. 아마, 에이드리언에게 리사라는 케이트 보다 한두살 많은 여동생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야기는 갑자기 점프, 같은 장소에 시간대만 약 10년 뒤, 2003년으로 변한다.

케이트의 이야기는 오간데 없어지고, 거대 쇼핑몰 그린옥스의 경비원인 커트와 음반매장 매니저 리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시각이 등장인물들에게 무척 친근하고 다정한 것은 여전하지만 케이트의 이야기가 발랄하고 순수한 청소년 성장물 같다면, 커트와 리사의 이야기는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영국인 특유의 블랙 코미디가 가득한 직장 배경의 시트콤 같다. 케이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아빠 미소가 끊이질 않는데, 커트와 리사의 2003년이야기; 특히 리사의 이야기는 웃프긴 하지만, 키득거림을 멈출수가 없다. 직장생활에 대한 묘사가 기가 막힌데, 그린 옥스의 직원들과 주고받는 대사들이 정말 감칠맛난다. 아아, 직장생활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되고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인듯!!!(종결어미를 꼭 이렇게 써야할 듯!!!)

 

 

이 작품은 일단 시기적으로 1984년, 2003년, 1984년,2004년으로 네 챕터가 분류되어있는데, 1984,2003 두 챕터가 거의 모든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 1984챕터는 오롯하게 케이트 미니의 이야기가 정겹게 펼쳐지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케이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아주 교묘하게 서늘한 느낌들이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서늘함은 1984년 챕터가 끝나고 2003년 챕터가 등장하면 비로소 정체를 깨닫게 된다. (사실은 제목을 읽는 순간부터, 소싯적에 소설 좀 읽었다, 싶은 독자들은 명랑하고 따뜻한 앞 챕터를 읽어 나가는 동안에도 걱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아 작가님, 이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ㅠㅠ )

 

일단, 이 리뷰에서는 절대 안 알랴줌.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맨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더니, 충분히 납득된다.

개인적으로 무한신뢰하는 몇개의 상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문학동네소설상이랑, 외국에서는 맨 부커, 휴고, 네뷸러를 꼽는다. 퓰리쳐 픽션부문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중 휴고와 네뷸러는 SF/판타지라는 장르에 한정되어 있고, 퓰리쳐 픽션부문은 퓰리쳐라는 상의 성격 때문인지 리얼리즘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반면 맨 부커상은 영어권 출판업자들이 후보를 선정하여 엄선된 심사위원들이 뽑아내는 것으로 그 성격이 남다르다. 출판업자들이 선정하는 후보이니, 막말로 '읽는 맛' 이 좋지 않으면 후보에 선정되기도 쉽지 않을터다.다른 상들에 비해 좀 더 대중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읽어본 맨 부커상 작품들은 판타지가 가미되었던지, 미스테리 스릴러등의 장르적인 기법이 활용되었다던지, 여하튼 읽는 맛이 쏠쏠한 작품들이 많다. [한밤의 아이들]을 예로 들 수 있겠고,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도 맨 부커 수상작이다. 20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엘리스 먼로도 맨 부커를 수상한 작품이 있었고, 2000년 퓰리쳐 픽션 부문을 수상한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 역시 맨 부커 최종심에서 경쟁했던 작품이다. 

 어쨌든 맨 부커상은 그 해 동안 아마존 영미소설 판매 10위권에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작품들이 후보에 올라 엄선된 심사위원들을 통해 문학성과 시의성으로 걸러져 선정된다는 말씀.

즉, 후보에 오른 것 만으로도 대부분 재미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솔직히, 정말 큰 기대 없이 펴든 책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훨씬 재미있었다.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는 듯, 독자의 감정들을 이리 태웠다 저리 태웠다 하는 기술도 상당하고, 인물과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감각도 탁월하다. 드라마와 미스테리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읽는 내내 혼을 쏙 빼놓는다.  

특히, 그린 옥스라는 거대 쇼핑몰 안에서 리사와 커트를 통해 표현되는 이야기들은 마침 지금 읽고 있는 [21세기 자본]과 절묘하게 맞물려 소비사회에 매몰되어, 인간이 단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쉬지않고 돌아가는 작은 부품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서글프게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두 단어를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취미'와 '관심분야'라니. 어쩌라고? 엄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밑에는 달랑 이 인치 남짓한 여백이 있을 뿐이다. 이 좁은 칸 안에 그럴듯한 대답이 될 단어들을 나열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p. 256

 

매장 매니저에 지원하기 위해 리사가 이력서를 쓰는 장면이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했던 부분이 아닐까? 

리사는 윗사람에게 잘보이기 위해 비굴하게도 자신이 현재 쇼핑몰에서 하는 일과 관련된 '쇼핑하기' 와 '잡지 읽기' 로 이 공간을 채워낸다. 그린옥스에서 매일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취미와 관심분야는 잊은지 오래였다. 

 

그런 부수적인 즐거움도 즐거움이지만, 커트와 리사,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1984년의 케이트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모두 케이트로 인한 거대한 상처를 안고 살고 있었고, 과거에 얽매여 하루하루를 그린옥스의 톱니바퀴로 그륵그륵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은 때론 직장 생활 시트콤처럼, 때론 공포 호러처럼, 때론 미스테리 스릴러처럼, 또 때론 평범한 로맨틱 소설처럼 인물들을 그려내며 그들이 갖고 있는 과거에 집중한다. 각각 작은 챕터 말미에 다른 폰트로 누군가가 무기명으로 어딘가에 적어놓은 것들이 실려 있는데, 그 글들이 등장인물 중 누구의 글일지 유추해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그야말로, '읽는 즐거움' 을 가득가득 채워놓은 멋진 소설이다.

 

어째서 인간은 갈수록 더 고독해지며, 어째서 인간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까? 

 

삶이란, '시간' 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차근차근 부스러져 가는 과정이다. 

시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는다. 살아있건 죽어있건, 모두 모래시계 안의 그것처럼 잘게 부수어 허무 속에 흩뿌린다.

한 없이 강할 것만 같은 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랑조차도, 시간은 탐욕스럽게 씹고 또 씹어 잘디잘게 부숴버린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정수리 위에 시퍼렇게 번득이는 시간의 이빨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들은 살아가기 위해 '모른척' 하기로 했다.

시간이란 건 사랑스러운 연인을 만나기로 한 광장 한 가운데의 시계탑이나, 오븐 안에서 닭요리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동안에만 예민하면 되지, 나의 죽음, 나의 소멸과 관련 되었을 때는 철저히 무시하는 것으로 정한 것이다. 정수리 위에 번득이는 시간의 칼날은 없는 셈 치기로 했다. 모른 척 하고, 내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시간이란 녀석에게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 처럼, 심지어 나의 마지막 한 숨 조차도 시간은 결코 뺏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것이, 시간이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삶이라는 녀석 역시, 시간만큼이나 심술궂고 잔혹한 존재라, 가장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시간 앞에 내어주곤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면, 시간은 보다 더 우리 자신의 삶에서 유리된다. 더 모른 척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먹고 살아가나 보다.

하지만, 그렇게 과거에 얽매이면, 우리는 보다 더 고독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은 고독해 지나보다. 

 

현실을 마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 커트와 리사처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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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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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마무리하던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의 종지부를 찍게 해준 문장이 하나 있었다.

무척 자주 인용해서, 오랜 블로그 이웃들은 잘 알테지만,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드]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이 문장과 맞닿아있는, 이 문장에 대한 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또다른 문장인 필립 로스의 [울분]의 마지막 문장은 내게 30대 이후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여러 의미로 이 작품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역시 이 두 문장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리의 삶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예측이나 예상은 빗나가기 일쑤고, 그 어떤 준비도 기대를 저버린다. 
오히려 어지간한 일에 시시콜콜 어깃장을 놓고 백태클을 날리는 일이 이 '삶'이라는 녀석의 주특기이며, 우리 행성 대기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오 헨리 조차 인생의 대부분은 눈물로 가득 차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언제나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 만은 아니다. 불행이 더 많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행복은 금방 잊지만, 불행은 오래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은 무궁무진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생각보다 꽤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에서 엄청난 위로를 얻고, 꽤 거대한 희망을 얻는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연적인 사건들의 총합이며, 인연 역시 비논리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또 어떠한가?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두 남녀간의 문제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어머니의 골반을 부숴야만 하는 문제적인 대 사건을 거쳐야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 삶 자체가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 아니던가. 

여기 이 남자의 삶 역시 그렇다. 
100세 생일을 코앞에 둔 알란 엠마누엘 칼손. 스웨덴 출신의 전前폭약 전문가. 지금은 양로원 탈출을 코앞에 둔 고령의 노인으로 [미국의 목가] 를 두번이나 읽은 뒤에, 몇 주에 걸쳐 감상을 적어내는 고단한 시간들 사이사이 내게 큰 평안을 가져다 준 분이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칼손은 마을 제일가는 고령자로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평생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어떤 이념에도 깊이 치우치지 않고,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았던 칼손은 몸이 좀 약해졌다고 심신을 옭아매는 양로원 생활에 진력이 나 있었기에, 자신의 100세 생일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양로원 직원들의 눈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린다.
겨우 1층, 허리 높이의 야트막한 벽이었지만, 100세 노인인 칼손에게는 꽤나 힘겨운 일이었을 터. 
평안하고 안락한 삶에서 탈출해 진정한 자유를 향해 떠난다.
과거와 현재가 챕터별로 교차되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명랑한 필체를 유지하며 스케일 큰 농담처럼 진행된다. 
특히 과거 칼손이 했던 평범하고 우연적인 선택들은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배꼽잡게 희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사실 초반에 큰 에피소드를 읽어보면 어느정도 그 패턴이 읽혀서 중반을 넘어서면 금새 식상해지고 마는데, 이러한 식상함은 사이사이에 놓여있는 현재 칼손의 챕터들을 통해 상당부분 상쇄된다. 
챕터별로 교차되어 있긴 하지만, 칼손의 과거 부분과 현재 부분은 유머러스함과 명랑함의 코드는 같지만​ 확연히 다른 플롯을 사용함은 물론, 이야기의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 
칼손의 과거가 시종일관 운명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끊임없는 우연이 중첩된다면, 칼손의 현재는 보다 면밀하게 짜여진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필연을 중첩시킨다. 이렇듯 전체적인 지향점이 다른 두 줄기의 큰 이야기를 적절하게 나누어 교차시킨 작가의 선택 덕분에 꽤나 두꺼운 볼륨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가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칼손의 과거사보다는 현재의 이야기가 훨씬 깊이 와닿았다.
칼손의 과거사는 마치 한편의 거대한 농담, 혹은 꿈결처럼 읽히지만, 현재의 칼손이 하고 있는 행동과 처한 상황, 성격등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설득력과 깊이를 더해준다. 뿐만 아니라, 노화로 온몸의 관절들이 삐걱거리는 묘사들이 유머러스에 가려있지만, 생각보다 꽤 뜨끔하게 와닿는다. 

100살까지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아니, 아니다. 늙음을 온몸으로 체감해 나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삶의 막바지에 다달았다는 느낌. 죽음이 성큼 다가왔음을 온 몸으로 실감하는 느낌.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느낌. 
남아있는 모든 시간들이 화살처럼 눈 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
관절 하나조차 마음먹은대로 제어할 수 없고, 또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맞닥뜨림을.

근 10년 사이에 연로하신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몇 년 터울로 차례로 떠나보냈다.
어느 분은 몇년동안 누워만 계시다가, 어느 분은 비록 수술은 몇차례 했지만, 비교적 정정하시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어느 분은 대체로 건강하신 줄 알았는데, 한 번 자리에 누우시더니 한 달 만에 영원히 일어날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외할머니는 이미 수년째 뇌출혈과 뇌경색의 여파로 육체의 반을 이미 땅 속에 묻어두고 누워계신다. 
그럼에도 정신은 총명하셔서, 얼마전 추석때는 나에게, 결혼을 못하는거니, 안하는거니, 못하는거지? 돈이 없어서? 차가 있어야 하지, 아참 돈이 없댔지??? 라며 우스개를 하셔서 가족들이 빵 터지기도 했다.
그 순간, 이 책의 내용과, 불과 한 달 전에 외할머니처럼 육체의 반을 지불하고라도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던 친할머니도 퍼뜩 떠올랐다. 늙어감과, 늙어감의 끝. 외할머니야말로 장 도미니크 보비 처럼 반신이 굳어버린 육체에 갇혀 하릴없이 삶의 종착지로 달음쳐가는 스스로를 목도하고 계신 분이 아닌가. 나의 삶.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가. 얼마나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가.

늙는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터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광란의 질주를 시작하지만, 그 과정은 고단하며, 그 결승점 역시 행복하고 유쾌하지는 않으리라,생각했다. 몇 번이고 언급하게 되는 필립 로스는 '노년은 학살이다' 라고 했으니. 학살의 끝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괴짜 할아버지 - 사실은 그다지 괴짜도 아니고, 단순히 무척 낙천적이고, 매 순간을 즐겼던 칼손을 보니,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그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역시, 생각보다 훨씬훨씬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100살먹은 할아버지도, 모험을 시도하고, 타인들을 만나고, 사랑을 찾고, 심지어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삶이 한달이 남았건, 십년이 남았건, 삶은 살아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향해 정신없이 달음치는 내 삶을 바라만 볼 것인지,
비록 종착역은 소멸로 귀결되지만,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달려 볼 것인지. 
우리 삶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단, 어떤 일이든 시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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