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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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 독특한 [엠브리오 기담]은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 아홉편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작품집이다. 

각 작품들은 한편씩 완결되는 단편의 구성을 갖고 있지만, 모두 이즈미 로안이라는 여행작가와 그 조수 미미히코가 여행하며 겪은 일들이니 연작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표제작인 [엠브리오 기담] 부터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까지 아홉편 모두 일본의 괴담 전문지에 실렸던 이야기로 각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여행의 주체인 여행작가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첫 만남부터 이즈미 로안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작품 배치는 물론 역자의 후기인 [독후 기담] 까지 어우러지며 전체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 뿐 아니라 매혹적인 표지 일러스트와 조금은 과해보이는 고급 장정까지 책 전체에 상당한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멋진 외양만큼 안에 꽉 차있는 작품 하나하나 역시 매혹적이다.


아홉편 모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라피스 라줄리 환상] 과 [지옥], 그리고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이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즈미 로안의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 린은 여행 도중 한 노파에게 푸른 돌을 얻게 된다. 

노파는 밑도 끝도 없이 '이 돌을 절대 몸에서 멀리 하지 말 것. 자살하지 말 것.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고 한다. 여행을 마친 린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세 아이를 낳지만,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고 린은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게임에서 세이브와 로드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들은 모두 삭제되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라 린은 이미 경험했던 사건들을 예언해서 유명한 예언가로 살아보기도 하고, 지난 번 삶에서 만났던 남편이 아닌 다른 혼처를 구해 새로운 가정을 꾸려보기도 한다. 삶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려본다. 네번, 다섯번 삶을 반복한 린은 모든 삶을 지식 쌓는 것에 매진한다. 외국어를 공부하고, 의학을 공부해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린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그 업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지식은 남았다. 린은 그렇게 또 처음부터 책을 썼다.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떠나보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잊어갔다. 몇번이나 엄마가 되었다. 몇번이나 자식들을 키우고, 이별했다. 삶을 되풀이 할 때마다 만나는 자식들은 항상 달랐을터다. 그리고, 린은, 자신이 아무리 삶을 되풀이해도 항상 자신을 낳으면서 돌아가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몇 번 이나 삶을 살아도 영원히 볼 수 없는 어머니가 그리워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정하고 싶은 과거가 있다.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미성숙하던 시절의 한 순간이 사무치게 후회스러운 경우가 있을테니까.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불러온 파장이라던가, 알고도 지나친 참담한 사고의 징후라던가, 실수란 걸 알고도 멈출 수 없었던 순간이라던가. 

이러한 욕망들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 예로부터 아주 많이 쓰였더랬다. '삶의 리셋; 세이브&로드' 장르 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까운 예로 헐리웃에서 [Edge of Tomorrow] 라는 영화로 제작된 일본 작가의 소설 [All You Need Is Kill] 이란 작품도 있고, 역시 영화로 큰 인기를 누렸던 [나비효과], 그 전에는 [사랑의 블랙홀]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의 엔딩은 [나비효과:감독판]의 엔딩과 흡사하지만, 주제의식과 전반의 정서는 엄청나게 다르다.

[나비효과:감독판]의 경우엔 주인공이 자신이 과거를 계속 수정하며 본의아니게 저지르게 된 실수들을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라피스 라줄리 환상] 은 완벽하게 이타적인 마음으로 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



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하고 있지만 [엠브리오 기담] 이라는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테마는 '부모' 이다.

표제작인 [엠브리오 기담] 이 부성애의 발현을 다정하게 다루고 있다면, 바로 뒤에 자리잡은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단순히 '모성애' 가 아닌 넓은 의미의 '어머니와 딸' 의 관계 자체를 다소 폭력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는 가급적이면 프로필을 상세히 살피지 않는 편이다. 가급적이면 성별도 모르기를 원하는데, 그 어떠한 편견도 갖고싶지 않아서이다. 작가는 언제나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독자로서 온전히 작품을 통해 인식하기를 원한다. 유사 부녀관계를 통해 부성애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선보였던 [엠브리오 기담] 뒤에 모녀관계를 다룬 [라피스 라줄리 환상] 을 읽으면서 작가가 남성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들이 보는 '어머니와 딸' 에는 뭔가 특별한게 있다. 

나에게도 꽤나 우애가 남다른 여동생이 있는데, 분명 어머니와 여동생의 연결고리는 나와 어머니 사이의 연결고리와는 전혀 다름을 느낀다.


린은 자신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를 위해 엄청난 댓가를 감수한다.

어머니와 아들이었다면, 전혀 설득력 없는 결말이었을테지만, [라피스 라줄리 환상] 속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는 나에게는 폭력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지옥]은 마치 [파리대왕]의 무삭제 성인판 같았다.

확실히 저자는 이 일련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특히 부모자식의 관계에 대해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또다시 역자후기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데,- 아, 이 자리를 빌어 저자에 대한 정보를 담아준 역자에게 깊은 감사를 ㅠㅠ- 이 작품집에 실려있는 작품들을 연재하는 사이에 저자가 아버지가 되었다는 정보가 실려 있었다.(나는 이 역자후기를 보고 나서야 저자가 남자가 맞구나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여자들도 비슷할테지만 일단 내가 남자니까) 아버지가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할것이다.

역자후기를 읽고 난 뒤 재독하는 [엠브리오 기담] 은 또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문장 깊이 숨겨있는 '부모가 되는 공포' 가 얼핏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이 되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는 다리] 에 있다면, '아비' 가 되는 공포는 [지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작품 안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우물같은 토굴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다.

괴물같은 부부의 자식들이다. 

한 사람의 본성은 대부분 태어난 뒤~3년 안에 형성된다고 한다. 부모의 역할이 너무너무 큰 것이다. 이 시기의 엄마 아빠의 따뜻한 포옹 한번과 말 한마디가 아이의 인성에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건강체질도 대부분 형성되는데, 먹는것과 잠자는 것, 방안의 온도와 습도등이 한 인간이 평생 안고 살 여러가지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지옥] 에서 가장 지옥 같았던 것은 미미히코가 빠진 우물 같은 지하감옥이 아니라 괴물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을 그렇게 만든 마을 공동체였으리라. 



["자, 가요. " 소년이 말했다] 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따뜻하고 가장 신비한 이야기이다.

명색이 여행작가이면서, 지구 최강의 길치인 이즈미 로안의 어린시절을 남편과 시댁식구들에게 학대당하는 한 여성의 입을 빌어 소개하고 있다. 여행의 주체인 이즈미 로안은 '초자연적인' 길치이다. 얼마나 심한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대로에서, 앞으로만 쭉 한시간쯤 걸어가면 나오는 곳까지 가는 데에도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대로 한가운데서 길을 잃는것이다. 이 현상은 주변 사람에게도 적용되는데, 이즈미 로안과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만약 그 사람이 길잡이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고 만다.

문제는 이즈미 로안이 당도하는 '엉뚱한 곳' 이 가끔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거나, 때로는 평행 우주 안의 다른 세계([얼굴 없는 산마루] 라는 작품이 내겐 그렇게 해석되더라.), 게다가 바로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거의 차원이동;공간이동 수준의 '길잃음' 을 보여준다. 

이즈미 로안의 신비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연' 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지주에게 소작농의 딸이란 노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소작농의 딸인 '나'는 지주의 아들의 눈에 들어 시집을 왔지만, 팔려온 것이나 진배 없었을 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를 당연한 듯 감내하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중, 사방이 단단히 막힌 외딴 창고 안에서 '길 잃은' 소년 이즈미 로안을 만나게 되고, 이 영특하고도 신비한 소년으로부터 '나' 는 매일 밤 글을 배우게 된다. 글을 배우면서 책을 읽게되고, 문자를 읽고 쓰는 행복감과 함께 스스로의 삶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르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의 주인공인 라일라를 떠오르게 했다.

작은 인연을 통해 책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이 지금껏 갇혀있던 단칸방만한 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자신은 그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용기를 갖고 싸워야 쟁취할 수 있게 됨을 깨달아 간다. 

그 권리가 바로 자유다.  


이즈미 로안은 어렸을 때 부터 이렇게 자주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나' 와 이즈미 로안인 만난 곳은 어지간한 틈도 없는 꽉 막힌 공간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길을 잃고 이 곳으로 왔다.

그리고 '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건네주었다.



사실 아홉편의 이야기들이 모두 가슴에 큰 울림을 주고, 그 파문이 꽤나 오랫동안, 그리고 서서히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헬스장의 고정싸이클 위인데, 때문에 나에겐 책의 재미를 별점보다는 시간 대비 흘린 땀의 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땀을 한바가지를 흘리면서 숨이 턱까지 차올랐는데도 도무지 싸이클에서 내려올 생각을 못하게 만든 책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다시 한번 펴보게 만들고, 주저없이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이다.

이즈미 로안과의 만남은, 나에게도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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