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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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말 2000년대 초. 세기말초라고 부르면 되려나??

어쨌든, 나도 10대 후 20대 초반이었던 그 시기.

그 시기의 나는 그야말로 판타지 문학에 푹 빠져 있었다. 

실제로 한국 출판계도 전국적으로 성행한 대여점을 등에 업고, 옛날 대본소 만화처럼 공장식으로 판타지, 무협 소설들을 찍어내기에 여념이 없었고, 각 권의 판매 부수보다는 누적 부수에 열을 올리며 질적인 발전을 거의 무시하던 시기였다. 사실상 그 시기의 성공을 발판삼아 진흙 속의 진주처럼,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재능을 번득이는 작가들 덕에 한국의 판타지, 무협 '문학' 은 질적으로도 꾸준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한국 문단에서 판타지 문학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잡문에 가깝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타지 장르는 전 세계적으로 깊은 역사를 갖고 있고,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장르. 어쨌든 세기말초는 한국의 판타지 매니아들에게도 그야말로 '노 난' 시기였다.

 판타지의 전설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의 '반지 전쟁' 의 껍데기를 벗고 최초로 완역되어 한국에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역시 새로운 세대의 판타지적 상상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작품들은 그야말로 우주수준까지 높아진 영상기술에 힘입어 영화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그야말로 상상속의 '판타지 세계' 를 눈 앞에 펼쳐냈다. 

 한국에서는 PC통신 세대가 발굴해낸 천재 스토리텔러 [퇴마록]의 이우혁 작가가 [왜란 종결자] 에 이은 [치우천왕기]로 한국형 판타지의 효시를 쏘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이영도 작가가 [드래곤 라자]의 후속작인 [퓨쳐 워커]와 [폴라리스 랩소디]로 한국 판타지 문학의 격을 한껏 끌어올렸다.'휘긴경' 홍정훈 작가의 [비상하는 매] 와 [월야환담: 채월야] 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90년대 중반 깜짝 등장했던 미즈노 료의 [마계마인전]이 개정되어 다시 등장했으며(현재는 원제목인 '로도스도 전기' 가 양장본으로 출간 된 상태), 지금은 [왕좌의 게임] 으로 잘 알려진 '조지 R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 도 원제목 그대로 이 당시에 첫 선을 보였다. 

그와 함께 소위 '라이트 노벨' 들이 본격적으로 런칭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쪽은 완전히 관심 밖이었어서 읊어댈 정도로 타이틀을 알고 있지는 않다. 여하튼, 한국 판타지 매니아들에게는 천국이었고, 소위 말하는 '오덕' 들이 PC통신과 월드와이드웹(WWW)의 교체기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늘 리뷰할 [십이국기] 역시 바로 이 시기의 판타지 열풍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인기까지 업고 대한해협을 건넌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오노 후유미는 [시귀] 라는 호러 작품으로 먼저 만났더랬다. 이우혁의 [퇴마록]이 한국 퇴마물의 장막을 걷어 올렸고, 때를 놓칠 새라 일본산産 '제마制魔'문학이 정신없이 쏟아졌더랬는데, 자극적인 작품들 사이에 이런 걸작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십이국기] 역시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었는데, 애니메이션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작화 붕괴와 어이없는 회상장면 반복으로 모든 팬들의 질타를 받았던- 에야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 원작자가 바로 그 때 그 [시귀]의 작가라는 점에 화들짝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소설도 쓰는 작가였구나!!' 했더랬다. 

 

 판타지 소설이 넘쳐나던 시기, 개인적으로 좋은 판타지를 가늠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했다.

물론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영감을 자극한다면 소장목록에 들어갈 가치가 충분했지만, 나름의 좁은 식견에서 파생시킨 기준을 통해서라도 '완성도' 라는 것을 가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 중 첫번째이자 거의 유일한 기준은 세계관의 꼼꼼한 설정은 둘째치고, '그래, 그 세계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였다. 마차가 있던 시대의 세계관과 자동차가 있는 시대의 세계관이 완벽하게 다르고, 편지를 보내던 시대의 세계관과 휴대폰을 사용하는 시대의 세계관이 다르다. 하루가 24시간인 세계의 세계관과 하루가 100시간인 세계의 세계관 또한 같을 리 없다. 평균수명이 40세인 세계의 세계관과 평균수명이 70세인 세계관 역시 같다면 거짓말일 것이고. 산속에 들어가도 사람만 보면 슬슬 피하는 굶고 늙은 개나 고양이만 그득한 세계의 세계관과 사람을 잡아먹으려 안달인 맹수들이 드글드글한 세계의 세계관 역시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불을 뿜고 마법을 쓰며 엄청나게 똑똑한 무적의 존재인 드래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고, 과학대신 마법이 발달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사상과 패러다임 역시 지금의 우리와는 완벽하게 다를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를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당연히 인물들이 갖고 있는 사상과 개념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중요한데, '이쪽 세계의 인물이 다른 쪽 세계로 이동하여 벌어지는 일' 을 다루는 판타지의 하위 장르 ; 소위 '이계理界물' 좀 더 세밀하게 세계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현실 세계와 작가의 세계의 차별점들이 주요 에피소드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설픈 설정은 금방 들통나 버리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설정빵꾸' 라고 한다.)

 정말 훌륭한 판타지는 이러한 부분에서 거의 완벽한 디테일을 선보이곤 한다. 이상하게, 공감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는 뚜렷한 논리적 개연성을 풀어서 보여주곤 한다는 것이다. 

 

'이계물' 은 멀게는 병든 아버지의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세계로 떠나는 바리공주 신화나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옥으로 간 오르페우스의 그리스 신화는 물론, 가깝게는 '피터팬'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소재로 SF, 모험물을 포함한 판타지 장르 전반을 통해 정말 많이 활용된다. 이異세계로 떨어진 연약한 소녀와 그 세계를 안내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 의 페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레퍼런스이다. 

[십이국기]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역시 거대한 서사시의 도입부로 그와 같은 이계물로써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회오리 바람에 실려간 도로시나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연약하고 평범한 소녀인 요코는 역시 자기 의사와 관계 없이 다른 세계로 '끌려' 가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그 세계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요코가 떨어진 세계는 딱히 이름이 없다. 이런 설정 부터 꽤 재미있다. 나라 이름 말고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관념적으로 아우르는 통칭은 물론 열두개의 국가 외에 대륙 전체의 이름도 없다. 열 두개의 국가가 얼마나 독립적이고, 배타적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열 두 국가들은 서로의 국정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내전이 일어나 국민들이 학살당해도 옆 국가에서 도와줄 수 없는 정치적 폐쇄​성을 갖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사는 사람; 비록 학자라고 할 지라도 개념적으로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글로벌한' 개념으로 확장시켜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작품 안에서 요코가 깨닫게 되는 사람들의 종교관이나, 그에 대한 행동 패턴들 역시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과 빼어난 상상력이 논리적으로 결합되어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펼쳐낸다. 위에 언급했던 개인적인 '좋은 판타지' 의 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디테일들을 선명하게 찾아낼 수 있다.

 한편, 주인공 요코는 오즈의 도로시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는 달리 '야만'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무엇보다 '야만' 이라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갈등은 몸 안에 심어진 '조유' 라는 존재가 자동으로 해결해 주고, 요코 본인은 오롯하게 내적인 갈등의 해결에 집중하는 점도 이채로운 부분이다. 과거의 자아, 일본이라는 국가에서 살던 자아를 버리고, 현재의 자아, 야만으로 가득찬 전근대적인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전체가 내적인 갈등에 집중되면서 이계물이라는 장르적 완성도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작가의 세계관과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전달된다.  

 

 사실 [십이국기] 라는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요코가 이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 아니다. 수많은 장르소설 작가들은 대부분은 '장르를 표현하기 위해' 장르를 선택하기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데에 '장르소설' 만 한 장치가 없기 때문에 장르를 선택한다. [십이국기] 역시 지금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독창적인 국가관과 군주론, 군신론을 펼쳐내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반드시 그 세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작가가 갖고 있는 복잡다단하고 독창적인 이러한 개념을 가장 쉽게 '설명' 하기 위한 장치로 현실세계의 평범한 여고생 요코를 끌어들인 셈이다. 거대한 세계관을 쉽게 펼쳐내기 위해 독자들이 쉽게 이입할 수 있는 10대 소녀를 끌여들였고, 제 1부를 통해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다.  

 

위에도 언급했듯, 난 이미 1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도 다 보았고, 당시 발간되었던 -초역 이라고 할 수 있을- [십이국기] 소설도 8~9권께까지 읽은 기억이 있다. 솔직히 번역이 어떻고, 저렇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 기억나지 않는다. 오타쯤이야 문장이 이해되면 상관 없고, 수동문과 능동문의 차이 역시 단락이 이해되면 크게 개의치 않는 건 둘째치고, 난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번역을 문제삼을 깜냥이 없었다!!!!(지금도 없기는 마찬가지.흠흠) 훨씬 뒤에야 인터넷을 통해 진정한 덕심 넘치는 블로거들이 원문과 당시 초역본의 문장을 비교해가며 완전히 '틀린' 부분들을 짚어냈을 때는 이미 그정도로 발번역이네 어쩌네, 하며 호들갑 떨 시기는 지났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엘릭시르의 고유명사 번역에 대한 고집을 존중한다. 옆집인 애니북스의 [조조] 시리즈가 기존의 팬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려 애쓰는 부분과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결코 비난할 생각도 없다. 게이키이건 케이키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물론 기존의 애니 팬들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게이키라는 이름 자체가 [경국의 기린] 이란 의미 아니던가. 한국에서는 '경' 국이니까, '게'이키 인거라고 어설프게 대신 변명해보련다.(내가 뭐라고? 그래도 고전부 시리즈의 '지탄다'는 개인적으로 너무너무 싫었다. 일단 어감이 싫어.ㅋㅋ애니는 물론 코미컬라이즈화 된 만화책에서도 그녀는 '치탄다'인데, 정작 시기적으로 나중에 출간된 원작에서는 '지탄다'인게 똥고집처럼 느껴진 건 비단 나 뿐 만이 아닐듯.ㅋㅋ 그래도 역시 존중은 한다. 개인 취향일 뿐. 원작 번역팀으로써 그 정도 고집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십이국기] 의 제 1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는 단순한 도입부에 불과하다. 일종의 '프롤로그' 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앞으로 등장할 잠깐의 이야기를 더 소개하자면, 요코는 게이키가 택한 경국의 왕이지만, 좀 더 오랫동안 갈등하게 된다.

그러면서 '대국'의 사건에 말려들고, '안국'의 사건에도 말려든다. 요코가 왕이 되기까지는 아직 조금 멀었지만, 1부에서 등장한 매력적인 인물들, 라크슌은 물론 안국의 왕 연과 안국의 기린인 엔키도 쭉 등장한다. 더 매력적인 인물들 역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요코는 그렇게 여러 사건에 말려들고, 여러 나라의 사정을 경험하며, 수많은 인연들 속에서 고뇌하고 사색하면서 진정한 왕의 길을 찾아 나간다.  

누군가는 명쾌한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비논리적인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누구든 한번 발을 들이면 그렇게 파고들게 될 정도로 깊이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주변에 1,2부(구판으로 1~4권쯤)만 보고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았다.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기도 하고, 다이내믹한 액션 장면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연출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니까. 주인공이 이렇게 개고생 하는 작품도 흔치 않다. 게다가 10대 소녀인데. 취향을 꽤나 탈 만한 특징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3부 이상 보고 (오)덕심을 품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국가와 군주, 그리고 선택과 선택받음.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 위에서 나풀대는 인간들. 

그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명쾌한 세계가, 바로 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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