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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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마무리하던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의 종지부를 찍게 해준 문장이 하나 있었다.

무척 자주 인용해서, 오랜 블로그 이웃들은 잘 알테지만,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드]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이 문장과 맞닿아있는, 이 문장에 대한 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또다른 문장인 필립 로스의 [울분]의 마지막 문장은 내게 30대 이후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여러 의미로 이 작품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역시 이 두 문장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우리의 삶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문제들로 가득차 있다. 예측이나 예상은 빗나가기 일쑤고, 그 어떤 준비도 기대를 저버린다. 
오히려 어지간한 일에 시시콜콜 어깃장을 놓고 백태클을 날리는 일이 이 '삶'이라는 녀석의 주특기이며, 우리 행성 대기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오 헨리 조차 인생의 대부분은 눈물로 가득 차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언제나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 만은 아니다. 불행이 더 많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행복은 금방 잊지만, 불행은 오래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은 무궁무진하지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생각보다 꽤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에서 엄청난 위로를 얻고, 꽤 거대한 희망을 얻는다.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연적인 사건들의 총합이며, 인연 역시 비논리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또 어떠한가?  평범한 두 남녀가 만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두 남녀간의 문제로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어머니의 골반을 부숴야만 하는 문제적인 대 사건을 거쳐야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 삶 자체가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 아니던가. 

여기 이 남자의 삶 역시 그렇다. 
100세 생일을 코앞에 둔 알란 엠마누엘 칼손. 스웨덴 출신의 전前폭약 전문가. 지금은 양로원 탈출을 코앞에 둔 고령의 노인으로 [미국의 목가] 를 두번이나 읽은 뒤에, 몇 주에 걸쳐 감상을 적어내는 고단한 시간들 사이사이 내게 큰 평안을 가져다 준 분이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칼손은 마을 제일가는 고령자로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평생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어떤 이념에도 깊이 치우치지 않고,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았던 칼손은 몸이 좀 약해졌다고 심신을 옭아매는 양로원 생활에 진력이 나 있었기에, 자신의 100세 생일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양로원 직원들의 눈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린다.
겨우 1층, 허리 높이의 야트막한 벽이었지만, 100세 노인인 칼손에게는 꽤나 힘겨운 일이었을 터. 
평안하고 안락한 삶에서 탈출해 진정한 자유를 향해 떠난다.
과거와 현재가 챕터별로 교차되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명랑한 필체를 유지하며 스케일 큰 농담처럼 진행된다. 
특히 과거 칼손이 했던 평범하고 우연적인 선택들은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배꼽잡게 희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사실 초반에 큰 에피소드를 읽어보면 어느정도 그 패턴이 읽혀서 중반을 넘어서면 금새 식상해지고 마는데, 이러한 식상함은 사이사이에 놓여있는 현재 칼손의 챕터들을 통해 상당부분 상쇄된다. 
챕터별로 교차되어 있긴 하지만, 칼손의 과거 부분과 현재 부분은 유머러스함과 명랑함의 코드는 같지만​ 확연히 다른 플롯을 사용함은 물론, 이야기의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 
칼손의 과거가 시종일관 운명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끊임없는 우연이 중첩된다면, 칼손의 현재는 보다 면밀하게 짜여진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필연을 중첩시킨다. 이렇듯 전체적인 지향점이 다른 두 줄기의 큰 이야기를 적절하게 나누어 교차시킨 작가의 선택 덕분에 꽤나 두꺼운 볼륨에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가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칼손의 과거사보다는 현재의 이야기가 훨씬 깊이 와닿았다.
칼손의 과거사는 마치 한편의 거대한 농담, 혹은 꿈결처럼 읽히지만, 현재의 칼손이 하고 있는 행동과 처한 상황, 성격등에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설득력과 깊이를 더해준다. 뿐만 아니라, 노화로 온몸의 관절들이 삐걱거리는 묘사들이 유머러스에 가려있지만, 생각보다 꽤 뜨끔하게 와닿는다. 

100살까지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아니, 아니다. 늙음을 온몸으로 체감해 나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삶의 막바지에 다달았다는 느낌. 죽음이 성큼 다가왔음을 온 몸으로 실감하는 느낌.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느낌. 
남아있는 모든 시간들이 화살처럼 눈 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
관절 하나조차 마음먹은대로 제어할 수 없고, 또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맞닥뜨림을.

근 10년 사이에 연로하신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몇 년 터울로 차례로 떠나보냈다.
어느 분은 몇년동안 누워만 계시다가, 어느 분은 비록 수술은 몇차례 했지만, 비교적 정정하시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어느 분은 대체로 건강하신 줄 알았는데, 한 번 자리에 누우시더니 한 달 만에 영원히 일어날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외할머니는 이미 수년째 뇌출혈과 뇌경색의 여파로 육체의 반을 이미 땅 속에 묻어두고 누워계신다. 
그럼에도 정신은 총명하셔서, 얼마전 추석때는 나에게, 결혼을 못하는거니, 안하는거니, 못하는거지? 돈이 없어서? 차가 있어야 하지, 아참 돈이 없댔지??? 라며 우스개를 하셔서 가족들이 빵 터지기도 했다.
그 순간, 이 책의 내용과, 불과 한 달 전에 외할머니처럼 육체의 반을 지불하고라도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던 친할머니도 퍼뜩 떠올랐다. 늙어감과, 늙어감의 끝. 외할머니야말로 장 도미니크 보비 처럼 반신이 굳어버린 육체에 갇혀 하릴없이 삶의 종착지로 달음쳐가는 스스로를 목도하고 계신 분이 아닌가. 나의 삶.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에 묶여 있는가. 얼마나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가.

늙는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터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광란의 질주를 시작하지만, 그 과정은 고단하며, 그 결승점 역시 행복하고 유쾌하지는 않으리라,생각했다. 몇 번이고 언급하게 되는 필립 로스는 '노년은 학살이다' 라고 했으니. 학살의 끝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괴짜 할아버지 - 사실은 그다지 괴짜도 아니고, 단순히 무척 낙천적이고, 매 순간을 즐겼던 칼손을 보니,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그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 역시, 생각보다 훨씬훨씬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100살먹은 할아버지도, 모험을 시도하고, 타인들을 만나고, 사랑을 찾고, 심지어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삶이 한달이 남았건, 십년이 남았건, 삶은 살아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향해 정신없이 달음치는 내 삶을 바라만 볼 것인지,
비록 종착역은 소멸로 귀결되지만,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달려 볼 것인지. 
우리 삶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단, 어떤 일이든 시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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