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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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처음으로 [에브리맨]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뭐라 형용하기 어렵다. 
'아 죽음이란 거, 정말 별 것 아니구나' 와
'아 죽음이란 거, 정말 엄청난거구나' 가
동시에 느껴졌다. 
두께는 얄팍하지만, 무게는 장난아닌 그 책을 두번 세번 더 읽으며 이 아이러니한 느낌에 대한 근거를 약간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이 별 것 아닌 이유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라면, 아니,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빠짐 없이 ; 동물과 식물은 물론 사물과 심지어 지구와 태양, 우주에게도 너무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흔하디 흔한 것이 죽음이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 죽음이었다. 희소성의 가치로 생각해봐도 너무 별 것 아니지 않은가?  
죽음이란 게 정말 엄청난 이유는, 죽음이라는 전제 앞에서는 그 어떤 대단한 존재도 개미가 핥아먹는 진딧물 똥꼬에서 나오는 단물보다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역시 가슴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죽음 앞에서 지구의 운명이나 타인의 생명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나의 죽음만이 지구나 태양의 죽음, 우주의 죽음보다도 무겁다. 내가 죽는 순간, 나에게 타인의 생명은 물론 지구나 우주는 한없이 무의미해진다. 죽음의 거대함을 느끼는 순간, 삶의 거대함이 새삼 와닿았다.   
 
 단숨에 이 얄팍하고도 무거운 글들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뒤이어 필립 로스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한번 읽는 것으로 깊이 있는 이해가 힘들었다. 어지간해서는 재독하는 습관이 없는 나였지만, 재독, 삼독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수십번 수백번 정련된 듯 한 그의 문장들에서, 삶의 불행과 행복에 관한 깊은 고민을 통해 도출해낸 그만의 결과들이 켜켜히 쌓여 이뤄낸 풍부한 통찰을 한 껏 느낄 수 있었다.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는 워낙 깊고 방대해서 한두마디로 압축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인상은 '정련' '견고함' 등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훌륭한 장인의 견고하고 숙련된, 그리고 더 할 수 없이 섬세한 손놀림으로 유목민이면서 정착민인,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며, 비주류이듯 주류인 미국내 유태인들이 갖고 있는 묘한 정서가 섞인 냉소적인 문체와 마초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한 남성성으로 삶의 불가해함을, 무자비함을, 불공평함을, 부조리함을 낱낱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든살이 넘은 1933년생인 필립로스는 1959년에 데뷔했으니, 20대부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바로 이 작품집,[굿바이, 콜럼버스]는 그의 길고 위대한 작품인생을 향한 작지만 위대한 첫 발자욱이다. 작품집을 발표한 이듬해에 [굿바이, 콜럼버스]가 전미도서상을 수상함으로 첫 걸음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깊은 자국을 냈다고 보면 될 것. 그와 함께 작품들이 유태인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니, 과연 필립 로스는 지금에 비해 한참은 '어리다' 고 해도 충분할 나이부터 신랄하고 거침없었구나 싶다.
 
표제작인 [굿바이, 콜럼버스] 부터 천천히 읽어나가보니, 확실히 날것의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유대인의 개종] 과  같은 작품은 유태인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적 관습들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얼마나 단순한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젊은 패기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유머와 해학이 가득 담겨 시종일관 키들키들거렸다. 아, 펜을 놀릴 때 필립 로스의 표정은 어땠을까? 대담한 표정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단숨에 써 나갔을 것만 같은 작품이다.

반면, [신앙의 수호자] 와 같은 작품에서는 무척 인상 깊게 읽었던 [울분]의 조각이 만져졌다. 
[울분] 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인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이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5년 5월 경에 시작되는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나'로 이야기의 화자가 되는 막스 하사는 치열하던 유럽 전선에서 미국 본토의 크라우더 기지로 발령받는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당시 유럽 전선과 태평양은 독일군의 최후의 발악으로 그야말로 병사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구덩이였기에 끊임없는 병력 보충이 필요했다. 때문에 전선해서 실제 전투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고급 전투요원들은 신병 훈련을 위해 다시 불러들여졌다. 칼 막스 하사도 그런 경우로, 크라우더 기지에서 그는 신병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은 당시 미국의 신진 세력으로 급부상하던 유태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작용하고 있다.) 
미주리 주 크라우더 기지의 훈련 중대로 배속받은 막스 하사는 중대 내의 여러 사병들 중 소수의 유태인 무리 리더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그로스바트 이병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막스 하사와 그로스바트는 평범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막스 하사는 희극적이지만 충동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로스바트는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치게 될 상황에 처하고 만다. 아마 그 결과 역시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것일 터다.
그로스바트의 이야기는 마치 [울분]의 마커스를 꼭 닮아 있다.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플롯 자체는 대단히 비슷하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도 상당히 비슷하다. 
데뷔 작품집에 실렸던 작품이니, [신앙의 수호자] 야 말로, 시기적으로 후에 등장하게 될 [울분]의 영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보다는 더 시니컬하고 날렵한 필체로 거침없이 펼쳐지는 여섯편의 단편들은 모두 현재의 필립 로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뭐랄까, 갓난 아이의 사진을 봐도 '아 이건 너구나!' 싶은 경우가 있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경계인이자 주류인 유태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있는 가운데 남성스러움이 깊이 배여있다.   
표제작이자, 작품집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전체 작품집 470여페이지 중 220여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중편에 가까운 [굿바이, 콜럼버스]는 바로 그런 남성스러움과 함께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경계에서 애매모호하게 머물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가 절묘하게 그려진다. 
위에 언급한 [신앙의 수호자] 에서 [울분]으로 승화되었을 영감의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면, [굿바이, 콜럼버스] 는 '주커먼 시리즈' 로 향하는 모티베이션; 주커먼의 태동을 발견할 수 있다.
 [굿바이, 콜럼버스] 의 1인칭 화자인 닐의 이야기를 꼼꼼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주커먼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필립 로스의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미묘한 동일시의 효과와 주커먼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적인 면이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필립 로스의 오랜 팬들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작가인 필립 로스를 작품 속 캐릭터인 주커먼과 동일시 하거나 최소한 페르소나 정도로 인식하곤 하는데, [굿바이 콜럼버스] 의 닐은 그가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커먼의 성향에 적확하게 부합한다. 아마도 필립 로스를 순서대로 읽었다면, 자연스럽게 닐 역시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로 인식했을테고, 주커먼 역시 또다른 닐, 작가의 또다른 페르소나라고 인식했을테니 필립 로스 = 닐 = 주커먼 의 공식으로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었을터다. 
 정착한 유태인들의 세계에 쉽게 귀속되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여자친구에 대한 욕망은 감추지 못하면서, 가난한 길거리의 거렁뱅이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꽤나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쉬이 기성 세대에게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하는 소심한 닐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뽐내게 되는 주커먼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꽤 높아보인다.      

필립 로스는 2012년 절필을 선언했다.
1997년 [미국의 목가] 에서 육신의 늙어감을 성욕에 빗대어 유머러스하게 고백했던 주커먼은 2007년 [유령 퇴장] 에서는 병들고 기억력도 희미한 노작가로 등장한다고 한다.([미국의 목가]는 읽었고, [유령 퇴장]은 아직 못 읽었다.)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은 축복이다.
그의 최초작을 뒤늦게 만나봤다는 점에 아쉽다는 마음보다 뒤늦게라도 만나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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