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의 제목에서부터 “엄마”가 등장한다(“밤은 엄마처럼 노래하며 별을 맞으러 나온다”, [예술]). 요즘 같아서는 책 읽다가 엄마같다는 말이 쓰여있으면 경계심부터 품게 되는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에서는 어떻게 변주될까 궁금했다. 책에 실린 모든 시가 모성을 다루거나 엄마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볼 때마다 비슷한 감상으로 읽고 덮고 했더니 생각들이 이 쪽으로 자리 잡고 모여든다. “엄마”라는 프레임을 두드리는 몇몇 시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여기 이 세계에서 모성이란 출산과 결혼을 해야만 성립하는 것처럼, 또 출산하(고 그에 따른 일련의 과정을 겪)기만 하면 완성될 것처럼 여겨지고 나 역시 그 사고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그런 거스러미를 긁고 벗겨내가며 읽는 것 같은 재미가 있다. 


사라 러딕에 따르면, 엄마들은 엄마 노릇에 짓눌려 실재하는 고통을 포착하거나 그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많은 사회에서 엄마됨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억압한다. 엄마됨 이데올로기는 엄마의 일을 건강과 즐거움, 야망을 희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정의한다. (…)

엄마들이 갖고 있다고들 하는 “평화로움”은 대개 상냥하고 배려 있는 온화함을 뜻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평화에 오명을 씌우며 엄마가 있거나 자신이 엄마인 거의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엄마들의 평화로움은 사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싸우는 방식이기도 하며, 온화한 만큼 험악하다.“273 사라 러딕 [‘엄마들’에 대해 말하기], <분노와 애정> 중에서














엄마는 본인에게 내재해 있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엄마로서의 효능감 밑에 두고 엄마 노릇을 수행한다(하고 있다). 근데 미스트랄의 시에 등장하는 엄마는 그런 역할 배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보인다. 엄마의 서늘한 면모랄지(“엄마 마음도 우리 아가 안에서 잠들었으면”[엄마의 슬픔]), 외로운 이를 끝까지 외롭게 두지 않는 모성애의 단면이랄지(“말해다오, 근심 걱정의 눈물을 외투처럼 뒤집어쓴 이가 나 말고 또 있는지”[별의 발라드]). 진정한 어머니라는 사회의 이중잣대, 자기 아이만을 향한 맹목, 혹은 맘충ㅋㅋㅋㅋ 이라는 안팎의 허상과 오명들이 덧칠된 여기에서의 모성상을 미스트랄의 시어들이 비(“하늘이 내린 물의 선물, 가로 누운 마비된 이 땅을 향하여”)처럼 씻어내리는 듯하다.


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이름을 처음 알았던 것은 그림책 덕분이었다. 노벨상 수상작가 미스트랄의 클래식 그림책 세트 중 <빨간 모자>.(노벨상&세트 으아 두 단어가 막 충돌한다ㅋㅋ) 아, 그림책. 역시 그림책. 그 때는 근데 깊이 읽지는 못했고, 겉핥기 식으로, 노벨문학상? 여자? 라틴 아메리카? 아이들 대상으로 쓴 <빨간 모자>를 원작에 이렇게 충실하게 썼다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시집으로 돌아와서, 엄마됨은 내가 즐길 수 있는 주제는 아닌지라 사실 내게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시는 [블랑카 언니에게]다. 언니에게 “내가 살던 곳의 흙을 가져와” 달라면서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언니는 우뚝 서있어”라며 당부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화자는 언니를 만나러 갈 날과 상황을 예비해둔다.

“내가 가면 들판이 얼지 않는 초여름,/ 훈훈하게 바람 부는 날일 거야./ 어쩌면 언니 꿈 언저리에라도,/ 사랑을 품고, 아무런 말이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상대는 흔치 않다. 꿈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만날 수 없으려나 싶고. 그런 불가능성을 감당하고라도 부탁한 흙을 쥐고 기다려 줄 사람이 블랑카 언니겠지. 여기까지 읽노라면 내게도 그러했던 사람들 몇몇이 떠오른다. 꼭 언니가 아니라도, 예고 없이 찾아가도 놀란 기색을 않던 이, 맥락 없이 연습장을 북 찢어 보내던 편지. 울다가 전화를 뚝 끊을 수 있었던 통화들 말이다.

자매애를 경계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언니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여자로 사는  좋은 점 중 하나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어떻게 보면 나는 늘 언니를 찾아다녔던 셈이다. (혼자 망상으로나마) 누군가를 내가 찾아갈 언니로 삼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쓰는 방법이기도 하고.


“모든 걸 버린 너와 나/ 그래서 서로를 얻은 너와 나/ 시새움에서 벗어나/ 해방된 삶을 사는 너와 나/ 그 빛 아래 선 너와 나/ 우리는 하나로 짠 면직물 같아” [행복한 여자]


옮긴이의 말과 작가 연보를 읽으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구비진 삶의 궤적을 좇다 보면 어떤 자매로,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지에 생각이 미친다. 시집 한 권으로 그의 면모를 다 헤아릴 수 없을테고 이 선집에 실리지 않은 시들이 궁금해진다. 내가 본 슬픔과 허무, 신랄한 깨우침의 시들 반대편에는 발랄하고 대담한 모습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잠이 든 여자에게/ 이 세상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더 나은 곳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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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5-2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책 참 예뻐서 저도 좋게 읽었답니다 반갑네요 ㅎㅎ

유수 2023-05-22 18:21   좋아요 2 | URL
서곡님 니나 시몬 게시글에서도 제가 댓글을 달다 말았지만 우리 그림책 얘기좀 해야겠어요!!😍😍

서곡 2023-05-22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엌 ㅋㅋㅋ 네 그림책은 마음의 양식 ㅎㅎㅎ

비로그인 2023-05-23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올해에만 속초 두번째인데 바다를 좋아하는 딸 따라다니다 이젠 내가 여기를 진심 좋아하게 된 것이다. 아.. 근데 집에 오니 책이 없네. 짐 풀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책만 없다. 그러게 누가 바다까지 꾸역꾸역 가져가래. 도서관 책 아니라 다행이다……으헝.. 누군가 모래묻은 이 책 주우시면 재밌게 읽어주세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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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5-18 1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아까비 ㄷㄷㄷ 누군지 득템하실 분 행운이십니다~~~

유수 2023-05-18 22:06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사람 손에 들어가길(?) 바라면서도 또 아침에 차를 이잡듯이 뒤져보려는(없을 확률 99프로..) 마음도 반입니다 ㅋㅋㅋ

서곡 2023-05-18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찾는 게 베스트죠 어디선가 갑툭튀하길 바랍니다 꼭요 안녕히 주무세요!

유수 2023-05-18 22:35   좋아요 1 | URL
흐흐 서곡님도 굿밤되세요!!

2023-05-19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9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23-05-19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악

유수 2023-05-19 16: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ㅋㅋㅋㅋ한창 재밌게 보는 중이었단 말이죠…

공쟝쟝 2023-05-19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너무 예쁜데... 이쁘게 찍히고 장렬히 몫을 다하고 사라졌구나...

유수 2023-05-22 18:06   좋아요 0 | URL
쟝님 정리가 깔끔한데 읽으니까 스스로가 바보같다 ㅋㅋㅋㅋ

난티나무 2023-05-21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 못 찾으신 거…????? ^^;;;;;;;; 바다 보고 시퍼요!!!!

유수 2023-05-22 18:07   좋아요 0 | URL
악!! 못찾았어요. 또 삼..
 


직접적인 무기(간접적인 무기도 별로 없는 것으로 판명) 없는 ”저희“가 어떻게 ”이해 관계를 초월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전쟁에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고학력 남성의 요청, 여성 대학 개축비를 후원해달라는 재무관리자의 요청대로 1기니를 후원한다면 그 조건으로 무엇을 내걸 것인가.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탐구, 언설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쟁과 국가주의에 기여하게 됐던 당시 명문대학의 효용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짐.

📑 아비에게 굴종하는 것보다는 직업에 굴종하는 것이 훨씬 덜 지독한 형태의 굴종이라는 점은 귀하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인정하실 것..32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대학교를 안 나온 누이는 대학교를 나온 오라비가 얻을 수 있었던 그 모든 직업들 중에서 어느 것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누이 쪽은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리라고, 따라서 교육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누이 쪽이 훨씬 더 강했으리라고..51

📑 그리고 폭력과 소유욕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전쟁을 막는 쪽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할 때 대학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9

📑 그 사람들이 이 가난한 대학으로 온다면, 그 이유는 이 대학이 위계가 없는 곳이라서, 부유함과 가난함, 똑똑함과 멍청함이라는 한심한 구분이 없는 곳이라서, 갖가지 등급과 갖가지 종류의 정신들, 육체들, 영혼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함께 가치로워지는‘ 곳이라서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젊은 대학을, 이렇게 가난한 대학을 세우자.
(..)
여기까지 쓰다가 말았습니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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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5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23-05-16 2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3기니 시작하셨군요!!!

유수 2023-05-17 01:32   좋아요 0 | URL
너무 좋더라고요. 우리 같이 읽을까요.

2023-05-17 0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7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7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에서는 딸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남근을 주지 않아서 원망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클라라 톰슨은 ‘남근 선망’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는데, “남근은 우리의 문화에서 하나의 특정한 경쟁 상황, 즉 남성과 여성 간의 경쟁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의 상징이며 … 그렇기 때문에, 남근에 대한 선망이라 불리는 태도는 아무런 특권도 없는 집단이 권력집단에 대하여 갖는 태도이다”라고 말하였다. 279,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필립 호드슨은 일부 남자아이와 남성이 소위 ‘자궁 선망’에 시달린다고도 말했다.

“남자아이는 누나나 여동생과 비교할 때 자신에게는 생물학적으로 부족함이 있다는 걸 깨닫게 돼요. …반면 남자아이는 아기를 낳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창조의 신비에서 배제되죠. 진화 심리학의 표현을 빌자면, 남성의 정자는 여성의 난자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테스토스테론의 이끌림에 따라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추구해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자기가 존재했음을 입증할 방법은 그것뿐이니까요.”

“제가 보기에 남성 성기를 선망하는 건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예요. 남성들은 침대 안팎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겨뤄요. 서열에 집착하고 임원용 주차 구역을 차지하려고 전전긍긍하죠. 점수를 매기고 기록해 두고요. 남성은 여성의 생물학적 창조성을 의식하든 못 하든 부러워하고 분하게 여겨요. (…)” 389, <평등하다는 착각>


모성에 대해 함부로 오해하고 숭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온 우주를 감싸고 품을 거대한 자궁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성을 대단한 것으로 올려다 보면 안된다. 이 모성에는 섬뜩한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남자들은 힘들고 지치면 어린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다시 엄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온전히 다 안겨 출렁이고 싶어한다. 그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늘 그립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어머니 배 밖으로 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궁은, 아니 자궁과 가장 유사한 곳은 무덤뿐이다. 자궁이 영어로 ‘womb’이고 무덤이 ‘tomb’인 이유이다. 모성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사람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모성을 끊어내야 한다. 자신 내면의 무의식 세계로 하강해서 어머니와 연결된 심리적인 탯줄을 끊어내야 한다. 222,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

















조이스 박 선생님의 글은 <베오울프>에서 소년의 통과의례(남성성 혹은 정당한 권력 획득)를 짚어가며 원시모성과의 분리(두번째 조건)를 통한 소년의 성장에 대한 부분이라 조금 맥락은 다른데. 인간의 선망, 근원적 욕구, 그걸 추구/저지하는 사회상을 구현한 옛이야기 분석으로 나한테 개안을 주신 분이라(나는 강의로 들음) 가져왔다. 조이스 박 선생님 책 얘기도 꼭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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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種)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어.



<사건>의 모든 텍스트는 ”첫번째 세계“의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단절되는 “사건”이다. 


”그 언어로 자신들의 출신 세계를, 일상과 일, 사회에서 차지한 자리를 말하는 감정과 단어들로 일어진 첫 번째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하지만 글을 다시 쓰려는 순간, 이 작품들은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잘 쓰는 것‘, 아름다운 문장,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바로 그런 문장과 단절해야만 했습니다.“(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13) 


책에서 묘사하는 임신중지는 끔찍하다. 물리적인 시술 자체도 끔찍하지만(구체적인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머리에서 차단한듯) 그보다 더 몸서리치며 읽게 되었던 것은 이 여자가, 한 젊은 인간이, 여자라는 몸을 깨닫고, 그 몸이 사회 어디에 위치하는가, 를 차근차근 알아가는 총체적 과정으로서의 임신중지였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번째 수혜자였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 학위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섹스 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22


임신은 탄생만에 관한 서사일 수 없다.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 정사 후에도 섹스는 몸에, 여자라는 몸에, 운명과 낙인, 죽음을 부여했다. ‘나‘는 중절할 방법을 수소문하다가 어느 부인의 수술 후기를 듣게 되는데 ”나도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쥘 각오“는 되어있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회고한다. 사회에서 배포하는 수치의 감각을 익히고 죽음을 바짝 끌어당겨 상상하는 것, “가임”은 그런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3707238?sid=102
‘대한민국 출산지도’, 가임기 여성수 지역별 순위까지? 비난 여론 ‘봇물’ [한국경제] 2016.12.29. 


낙태를 결심했지만 중절 수술해줄 의사, 병원, 아니면 “야매천사”라도, 누가 되든 ‘나’ 혼자서 방법을 찾기란 막막하다.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보지만 그럴수록 고립된다. 빈부, 학력, 지역이라는 “계급” 몇 가지는 “탈주”했지만 여자는 반복해서 경계로 되돌려진다. 그저 경계선에 불과했던 몸은 이제 이데올로기가 밀고 들어오는 최전선이다.

“이 이미지들을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바와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느끼는 충격은 그저 글쓰기를 하며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충격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며, 글쓰기라는 진실의 기호를 이룬다.61”


또한 <사건>은 사건에 대한 책이면서, 그 자체로 “사건에 대해 쓰기”에 관한 책이다. (도움을 받아서라도) 스스로의 바닥으로 내려가 당시의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현대인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한다면(인용은 아니고 내 감상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적기로. <생존자들>, 캐서린 길디너), 책은 그런 점에서 트라우마 쓰기의 교본이라고 할 만하다. 묘사의 생생함, 필력같은 수식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능력이다. 회상하는 글이 품을 법한 시차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과거를 묘사함에 어떤 잣대도 대지 않기 때문일까. 아직도 시대가 제자리 걸음이라서?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동시대성, 근거리 감각은 어디서 왔을까. 얼마 전 연설문을 읽으면서 그때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 힘과 분노는 문학에, 다양한 목소리의 총체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고야 말겠다는 욕망과 야심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제공하고, 문학에 맞서 반항하고 문학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비롯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바로 그 문학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여성이자 계급 탈주자로서의 나의 목소리를 언제나 해방의 장으로 소개되는 그곳, 문학속에 기입하기 위해서.”(연설문, 26) 


작년에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땐 (띠지 달기 전의 책이라서 다행이야) 아니 에르노 역시..! 느낌표였다고 하면, 이번에 수상 연설문을 읽고 또 쟝쟝님 글 (트랙백 이렇게 쓰는 거 맞나요?) 읽고 좀 울음표가 되었고 책을 다시 읽었다. 읽고 나서 나도 나 자신의 탈주 혹은 이동, 나의 출산/반출산 경험에 대해 적으려고 해봤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 지점이 아니 에르노에게 가장 경탄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과거에 경험한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절반은 기억으로, 절반은 원형으로 남아있다고 치면 나는 늘 비슷한 난관에 부딪힌다. 그 감정들을 “기입”하는 방식에 있어서 현재의 내가 그것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주입되고 내재화된 가치라 박살내고 싶은지 아닌지/ 자기혐오와 인정투쟁 사이의 지긋지긋한 핑퐁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길을 잃고 “사건”을 얘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adhd탓도 있겠지만 ㅋㅋ 자연스럽게 이 페이퍼 마무리도 물건너가네.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글을 쓰면서 증거가 필요할까, 매번 자문한다. 이 시기 일기장과 수첩을 제외하면 내 머릿속을 지나간 것들은 물질적이지도 않고 점진적으로 사라져 버렸기에, 감정이나 생각은 그 무엇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과 사물들 - 퓌이 쥐멜에 쌓인 눈이나 장 T.의 휘둥그레 튀어나온 두 눈, 혹은 시스터 스마일의 노래 - 에 품었던 감정을 기억하기만 해도 사실적인 증거가 나타난다. 유일하게 진실한 기억은 물질적이다. - P48

"이 이미지들을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바와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느끼는 충격은 그저 글쓰기를 하며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충격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며, 글쓰기라는 진실의 기호를 이룬다. - P61

상상력을 동원해 보거나 혹은 기억을 통해 떠올리는 일은 글쓰기의 운명이다.그런데 ‘떠올린다.‘라는 말은 내가 다른 삶, 지나가 버린, 그리고 잃어버렸던 삶을 다시 만났다는 감정이 드는 순간을 기록할 때 사용한다. 그 감정은 "내가 거기에 다시 있었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아주 정확하고도 자연스럽게 번역된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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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1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 저도 오늘 병원 갔다 아니에르노 읽었는데요(무슨 책인지는…맞춰보세요 위에 중에 없음 그래도 신간 ㅋㅋ) 그런데 저한테는 잘 흡수가 안 되는 문장들이어요…

유수 2023-05-11 21:40   좋아요 1 | URL
왕..! 뭐 읽으셨어요? 여자아이기억,그거일까요? 저렇게 썼지만 아니 에르노 안읽어본 것도 많고 지금보다 나이 절반일 때 읽은 것들도 있어서 막상 축적된 밑천(?)이 없네요. 아니 에르노 늘 호오 갈리지만 제 주변은 <남자의 자리> 공통적으로 평이 좋던데.. 연설문 읽고 마음이 동하기도 하고 담엔 이거보려고요. 반님 재활치료 꾸준히 다니시나보다. 더 더워지기 전에 살살 나아라 발목!

반유행열반인 2023-05-12 12:11   좋아요 1 | URL
우왕 딩동댕동 저 아직은 더 읽어봐야 겠지만 왠지 이거 읽고 또 더 안 읽다 몇 년 지나서 또 읽어볼까…하고 다른 거 읽고 별로야…반복할 거 같아요 ㅋㅋㅋ저도 얼마 안 봤고 사진의 용도, 세월, 단순한 열정 이렇게 세 개만 봤거든요… 그런데 제 안목이 아 좋다…할 만큼은 못 따라갑니다 ㅋㅋㅋ그냥 솔직한 거를 잘써서 칭송받는다면 아 나도 한 솔직하는데…하고 괜히 질투만 늘어감…가랑이 찢어짐 ㅋㅋㅋㅋ

공쟝쟝 2023-05-12 0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유수님! 유수님, 맞아요! 트랙백 걸린 글 잘 읽었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연설문은 정말 ㅜ_ㅜ 문학에 없던 애정이 생겨나려고 합니다. 애정을 가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할텐데요… 난 또 이 페이퍼에서 <생존자들> 만 장바구니에 담고 있고요?….
마무리 무리해서 짓지 마시고 (그런 글 치고는 마지막 인용 문구가 수미쌍관하듯 매우 근사합니다?) 꾸준히 좀 더 쓰세요!! ㅋㅋㅋ 명료할 필요도 어떤 입장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수 2023-05-12 09:48   좋아요 2 | URL
저도 아니 에르노 몇 권 못 읽어본 차에 연설문 읽고 방향이 바뀌었어요. 특히 읽기 힘들었던 부분 어떻게 받아들일지 힌트가 됐는데..그게 꼭 좋은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제 맘대로 이리저리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아니 에르노!
생존자들 ㅜㅜ너무 좋음.. 제가 천착하는 주제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저한테 쓰세요!!하시는 분들 은인이라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2023-05-12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