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種)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쓰겠어.



<사건>의 모든 텍스트는 ”첫번째 세계“의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단절되는 “사건”이다. 


”그 언어로 자신들의 출신 세계를, 일상과 일, 사회에서 차지한 자리를 말하는 감정과 단어들로 일어진 첫 번째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하지만 글을 다시 쓰려는 순간, 이 작품들은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잘 쓰는 것‘, 아름다운 문장,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바로 그런 문장과 단절해야만 했습니다.“(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13) 


책에서 묘사하는 임신중지는 끔찍하다. 물리적인 시술 자체도 끔찍하지만(구체적인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머리에서 차단한듯) 그보다 더 몸서리치며 읽게 되었던 것은 이 여자가, 한 젊은 인간이, 여자라는 몸을 깨닫고, 그 몸이 사회 어디에 위치하는가, 를 차근차근 알아가는 총체적 과정으로서의 임신중지였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번째 수혜자였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 학위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섹스 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22


임신은 탄생만에 관한 서사일 수 없다. 섹스는 끝나지 않는다. 정사 후에도 섹스는 몸에, 여자라는 몸에, 운명과 낙인, 죽음을 부여했다. ‘나‘는 중절할 방법을 수소문하다가 어느 부인의 수술 후기를 듣게 되는데 ”나도 세면대가 부서질 정도로 꼭 쥘 각오“는 되어있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회고한다. 사회에서 배포하는 수치의 감각을 익히고 죽음을 바짝 끌어당겨 상상하는 것, “가임”은 그런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3707238?sid=102
‘대한민국 출산지도’, 가임기 여성수 지역별 순위까지? 비난 여론 ‘봇물’ [한국경제] 2016.12.29. 


낙태를 결심했지만 중절 수술해줄 의사, 병원, 아니면 “야매천사”라도, 누가 되든 ‘나’ 혼자서 방법을 찾기란 막막하다.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보지만 그럴수록 고립된다. 빈부, 학력, 지역이라는 “계급” 몇 가지는 “탈주”했지만 여자는 반복해서 경계로 되돌려진다. 그저 경계선에 불과했던 몸은 이제 이데올로기가 밀고 들어오는 최전선이다.

“이 이미지들을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바와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느끼는 충격은 그저 글쓰기를 하며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충격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며, 글쓰기라는 진실의 기호를 이룬다.61”


또한 <사건>은 사건에 대한 책이면서, 그 자체로 “사건에 대해 쓰기”에 관한 책이다. (도움을 받아서라도) 스스로의 바닥으로 내려가 당시의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현대인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한다면(인용은 아니고 내 감상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적기로. <생존자들>, 캐서린 길디너), 책은 그런 점에서 트라우마 쓰기의 교본이라고 할 만하다. 묘사의 생생함, 필력같은 수식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능력이다. 회상하는 글이 품을 법한 시차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과거를 묘사함에 어떤 잣대도 대지 않기 때문일까. 아직도 시대가 제자리 걸음이라서?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동시대성, 근거리 감각은 어디서 왔을까. 얼마 전 연설문을 읽으면서 그때의 궁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 힘과 분노는 문학에, 다양한 목소리의 총체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고야 말겠다는 욕망과 야심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제공하고, 문학에 맞서 반항하고 문학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비롯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바로 그 문학 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여성이자 계급 탈주자로서의 나의 목소리를 언제나 해방의 장으로 소개되는 그곳, 문학속에 기입하기 위해서.”(연설문, 26) 


작년에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땐 (띠지 달기 전의 책이라서 다행이야) 아니 에르노 역시..! 느낌표였다고 하면, 이번에 수상 연설문을 읽고 또 쟝쟝님 글 (트랙백 이렇게 쓰는 거 맞나요?) 읽고 좀 울음표가 되었고 책을 다시 읽었다. 읽고 나서 나도 나 자신의 탈주 혹은 이동, 나의 출산/반출산 경험에 대해 적으려고 해봤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이 지점이 아니 에르노에게 가장 경탄하는 지점이기도 한데.. 과거에 경험한 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절반은 기억으로, 절반은 원형으로 남아있다고 치면 나는 늘 비슷한 난관에 부딪힌다. 그 감정들을 “기입”하는 방식에 있어서 현재의 내가 그것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주입되고 내재화된 가치라 박살내고 싶은지 아닌지/ 자기혐오와 인정투쟁 사이의 지긋지긋한 핑퐁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길을 잃고 “사건”을 얘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adhd탓도 있겠지만 ㅋㅋ 자연스럽게 이 페이퍼 마무리도 물건너가네.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글을 쓰면서 증거가 필요할까, 매번 자문한다. 이 시기 일기장과 수첩을 제외하면 내 머릿속을 지나간 것들은 물질적이지도 않고 점진적으로 사라져 버렸기에, 감정이나 생각은 그 무엇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과 사물들 - 퓌이 쥐멜에 쌓인 눈이나 장 T.의 휘둥그레 튀어나온 두 눈, 혹은 시스터 스마일의 노래 - 에 품었던 감정을 기억하기만 해도 사실적인 증거가 나타난다. 유일하게 진실한 기억은 물질적이다. - P48

"이 이미지들을 생각하면서, 그 당시 내가 느꼈던 바와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느끼는 충격은 그저 글쓰기를 하며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충격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며, 글쓰기라는 진실의 기호를 이룬다. - P61

상상력을 동원해 보거나 혹은 기억을 통해 떠올리는 일은 글쓰기의 운명이다.그런데 ‘떠올린다.‘라는 말은 내가 다른 삶, 지나가 버린, 그리고 잃어버렸던 삶을 다시 만났다는 감정이 드는 순간을 기록할 때 사용한다. 그 감정은 "내가 거기에 다시 있었던 것처럼"이라는 표현으로 아주 정확하고도 자연스럽게 번역된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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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1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 저도 오늘 병원 갔다 아니에르노 읽었는데요(무슨 책인지는…맞춰보세요 위에 중에 없음 그래도 신간 ㅋㅋ) 그런데 저한테는 잘 흡수가 안 되는 문장들이어요…

유수 2023-05-11 21:40   좋아요 1 | URL
왕..! 뭐 읽으셨어요? 여자아이기억,그거일까요? 저렇게 썼지만 아니 에르노 안읽어본 것도 많고 지금보다 나이 절반일 때 읽은 것들도 있어서 막상 축적된 밑천(?)이 없네요. 아니 에르노 늘 호오 갈리지만 제 주변은 <남자의 자리> 공통적으로 평이 좋던데.. 연설문 읽고 마음이 동하기도 하고 담엔 이거보려고요. 반님 재활치료 꾸준히 다니시나보다. 더 더워지기 전에 살살 나아라 발목!

반유행열반인 2023-05-12 12:11   좋아요 1 | URL
우왕 딩동댕동 저 아직은 더 읽어봐야 겠지만 왠지 이거 읽고 또 더 안 읽다 몇 년 지나서 또 읽어볼까…하고 다른 거 읽고 별로야…반복할 거 같아요 ㅋㅋㅋ저도 얼마 안 봤고 사진의 용도, 세월, 단순한 열정 이렇게 세 개만 봤거든요… 그런데 제 안목이 아 좋다…할 만큼은 못 따라갑니다 ㅋㅋㅋ그냥 솔직한 거를 잘써서 칭송받는다면 아 나도 한 솔직하는데…하고 괜히 질투만 늘어감…가랑이 찢어짐 ㅋㅋㅋㅋ

공쟝쟝 2023-05-12 0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유수님! 유수님, 맞아요! 트랙백 걸린 글 잘 읽었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연설문은 정말 ㅜ_ㅜ 문학에 없던 애정이 생겨나려고 합니다. 애정을 가지려면 문학을 읽어야 할텐데요… 난 또 이 페이퍼에서 <생존자들> 만 장바구니에 담고 있고요?….
마무리 무리해서 짓지 마시고 (그런 글 치고는 마지막 인용 문구가 수미쌍관하듯 매우 근사합니다?) 꾸준히 좀 더 쓰세요!! ㅋㅋㅋ 명료할 필요도 어떤 입장을 선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수 2023-05-12 09:48   좋아요 2 | URL
저도 아니 에르노 몇 권 못 읽어본 차에 연설문 읽고 방향이 바뀌었어요. 특히 읽기 힘들었던 부분 어떻게 받아들일지 힌트가 됐는데..그게 꼭 좋은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제 맘대로 이리저리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아니 에르노!
생존자들 ㅜㅜ너무 좋음.. 제가 천착하는 주제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요. 저한테 쓰세요!!하시는 분들 은인이라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2023-05-12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