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클래식 - 우리 시대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
정민 외 36명 지음, 어수웅 엮음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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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에 '우리 시대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이라고 되어있지만, 이 책에 101명과 그들의 추천책이 전부 실려있는 것은 아니다. '101 파워 클래식'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조선일보>문화부의 연중 기획물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101명 추천의 고전 읽기인줄로만 알고 덜컥 책을 구입한 나로서는 서문을 읽다가 '헉!' 소리나게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문화와 책을 사랑한다면, 주체측이 어디건 무슨 상관이랴. 오히려 돈 많은 주체측으로 인해, 더 푸짐한 기획물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인데 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성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 섭외라는 문제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돈많은 주체측의 기획은 더 유용하고도 폭넓은 섭외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목차에 정민, 김정운, 박웅현. 시작부터 나쁘진 않았다.

 

서문을 읽고, 추천서와 추천인이 적인 목차를 읽고, 책을 권하는 책이니만큼 맨 뒤의 추천 도서 목록을 읽었다. 가장 많이 추천된 책은 <그리스인 조르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장자>, <마담 보바리> 등으로 일반적으로 많이 추천되는 책들을  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고전 중의 고전이것만, 여전히 나는 제목만으로도 읽기 싫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던가, <논어>, <반야심경>까지 두루두루 추천되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 같은 책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삼십세>나 <이기적 유전자>같은 책은 고전이 아니잖아?

 

책 권하는 책을 즐기는 나로서는 산더미 같은 책더미를 알록달록한 표지사진으로 취하고 제목마저도 '파워 클래식'인 이 책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여타의 다른 책 권하는 책에 비해 특별히 건진 책은 없다. 그렇지만 일간지의 기획물로 일주일에 한번씩 추천되는 책에 대한 명사들의 이야기는 꽤 훌륭하다 싶다.

특별히 어떤 책에 꽂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의 박웅현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구입해두고도, '광고'에 대한 거부감과 박웅현이라는 인물이 유명세를 치를수록 그의 책이 싫어지는 기이한 내 성격 때문에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읽을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파는 것이 목적인 '광고'는 아무리 인문학적 접근이라 해도 달갑지않아 읽기 시작한지 30분만에 다시 덮고 말았다. 대신, 그의 다른 책 <책은 도끼다>를 하루의 배송도 기다리기가 싫어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달려가 지르고 말 정도로 매혹된 박웅현의 글은 이랬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 어릴 때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그런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나는,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한 대가의 꼼꼼한 시선을 느꼈다. 족탈불급. 그들을 따라갈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이해 범위에 들어온다. 적어도 그들이 어떻게 소설을 구성했는지는 그려진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의 머릿속 풍경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철학적 사고와 역사적 문맥, 시대적 통찰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절묘하게 녹여 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의 주제를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 신학과 철학으로 변주해 나갈 수 있는지. 그 직조의 기술이 나에게는 도무지 파악되지 않는다. (31쪽)

어쨌든 <파워 클래식>을 읽고 박웅현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당장 참을 수 없을만큼의 강도로 궁금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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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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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청춘의 찬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자신의 문학의 출발점을 '카뮈'로 꼽는 작가 김영래가 카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엮은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영래가 본 카뮈를 쓴 책이라기 보다는 카뮈의 잠언집 혹은 카뮈 문학의 발췌본인 것이다.

작가 김영래는 중학교 입학식 때부터 카뮈를 즐겨 읽었다라고 하니, 지금 오십대라는 김영래 작가는 말그대로 문학 인생을 카뮈와 함께 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30년을 넘게 카뮈를 사랑하고, 카뮈를 읽어왔다면 나름의 카뮈 전문가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가 권해주는 카뮈의 잠언은 카뮈를 이해하는데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뮈가 가장 좋아했다는 열 개의 단어를 바탕으로 한 메모들과 중요한 문장들, 잠언 따위의 글을 정리한 1부와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과 <페스트>의 주요부분을 발췌 수록한 2부, 그리고 카뮈의 강연과 편지, 인터뷰 등을 실은 3부로 나뉜다. 작가 김영래는 자신의 의견 또는 감상을 최소한으로 싣고, 오로지 카뮈의 육성을 전달하고자 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흩어진 조각들을 엮어 놓은 것처럼 산만한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카뮈에 대해 전율할 정도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그저 어설프게라도 카뮈를 이해하고 싶었던 나는 이 책에 흥미를 가지고 도전했지만, 기대만큼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며 자신을 고집했던 뫼르소의 이야기인 <이방인>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었지만,  <페스트>는 시간차를 두고 여러번 읽기를 시도했음에도 매번 실패했다. 페스트 발병이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한 도시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나한테는 어쩌면 그렇게 지루했던지, 읽기를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조각이불처럼 기워진 이 카뮈의 잠언록 혹은 발췌록이 더더욱 수월치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김영래 작가가 보는 카뮈, 어떤 감동을 어느 부분에서 어느만큼 받았는지 하는 구체적인 감상이 더 많이 담겼더라면,  문외한인 나로서는 카뮈를 이해하기에 더 좋았겠다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랬다면 이에 탄력을 받아 <페스트>를 완독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어쨌든 작가 김영래의 카뮈 사랑은 몹시 부러운 것이지만, 김영래 작가가 카뮈에게서 느끼는 감동을 나역시 함께할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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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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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엾은 이 꼬마를 어쩌면 좋을까. 달려가는 구급차에 아는 누군가가 타고 있을까봐 마음을 졸이는 이 아이를.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혼자 어디서 쓰러졌을까봐 두려워하는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가족, 친구 심지어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보호해 주고 싶은 모두를 감싸고도 남을 만큼의 호주머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작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오스카는 9.11테러로 아빠를 잃었다. 아빠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던 때에 죽었고, 그 순간 오스카에게 발신중이 였다.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너 거기 있니?

두려움으로 도저히 전화를 받을 수 없었던 아홉살 소년 오스카는 아빠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롭다. 또한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아빠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벌써부터 새 남자친구를 집에 들이는 엄마가 밉다. "엄마는 아직 스크래블 게임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거울을 볼 때가 아니라든지, 필요 이상으로 전축을 크게 틀어놓으면 안된다든지, 그런일은 아빠한테도 옳지않고 나한테도 옳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 어째서 아들들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엄마탓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카에 빠져들 수록 알 것 같았다. 어린 오스카는 슬픔보다는 죄책감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아빠가 죽었다는 슬픔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해 자꾸만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역사 속의 개인은 늘 피해자이다. 인간의 역사는 근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폭력 앞에서 하릴없이 상처입는 개인의 삶이 반복되는 이야기다. 한 개인이 원하는 것은 국가도 이념도 아닌 그저 가족과 단란하게 사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란 말이냐. 2001년의 오스카는 테러로 아빠를 잃고,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2차대전 당시 드레스덴 폭격으로 가족과 사랑하는 이, 그리고 아이를 잃었다. 이 야기는 오스카의 할아버지로 부터 오스카까지 이어지는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않는 전쟁의 역사 속에 상처입은 개인의 이야기이다. 

 

그런 한편으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모두가 모두를 보내고, 모두가 모두를 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왔다가 가버리냐!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라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놔야해!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이 떠날 땐 잡지도 말아야지!" 누군가에게 내 생명의 무게를 지운다는 것은 행복한 일 일까, 걱정스런 일 일까. 남는 사람은 누구나 오스카처럼 죄책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지 않을까. 슬픔을 담느라 말을 지웠던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어린 오스카의 슬픔앞에 마음을 연다. 다행히도 상처는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지는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그들은 가족이며, 결국은 사람들이다.

 

미스터 블랙 씨의 사람에 대한 한마디 정의가 재미있다. 체 게바라-전쟁, 마하트마 간디-전쟁(엥? 그는 평화주의자인데?), 톰 크루즈-돈, 수전 손택-사상, 요한 바오로 2세-전쟁, 마릴린 몬노-섹스, 나-책? ㅎㅎㅎ즐겁다.

소설에 씌인 많은 사진과 다양한 타이포그래피는 지은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실험이었다고 한다. 마구 뒤엉킨 언어들이 중복되어 쏟아져 나와 무슨말인지 도대체 읽을 수 없었을 때,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실루엣을 되 돌리던 페이지들이 등장인물들의 슬픔을 더 한층 이해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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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시장과 전장 박경리 장편소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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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시장과 전장>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씌여진 소설이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나, 전투 장면보다는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소외된 채 인민군과 군국, 또는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서 이리저리 내몰리는 민중 속 개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지영은 작가 자신의 경험치를 투영하고 있다고 한다. 박경리라는 작가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녀가 한때 선생을 할 정도의 인텔리 여성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권위 속에 허덕이던 그시절 보통의 여성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적어도 20대 까지의 삶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박경리는 1955년 등단 후,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로 부터 탈출해 자의식을 팽배히 들어내며 작가다운 통찰력으로 주관과 객관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시장과 전장>에서 지영의 자의식은 전쟁발발 직 후 드러나게 되는데, 전쟁 전 일상 속에서 그는 가부장적 권위 아래, 남편과 어머니에게 눌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었다. 지영이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살림을 봐주는 친정어머니로 부터 도망치듯 떠나 낯선곳에서 선생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지영은 아직 어린 애기들이 있음에도, 집을 그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낯선 곳에서 오래도록 선생을 하기를 원한다. 나는 지영의  그러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여 아이들이 시아주버니인 기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을 정도로 지영은 가정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냉담한 모습이다. 그러나 지영의 이런 생활감정의 메마름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자의식이 다시 살아나고, 활발히 표출됨으로써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친정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되살려 준다. 초반에 이해할 수 없던 지영의 냉담함은 남편과 어머니라는 권위 속에 질식 직전까지 감으로써 무기력했던 그녀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기 전 <시장과 전장>이라는 제목에서 내용을 추측하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정도였다. 인간해방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시작되었지만, 한 개인의 삶에는 무슨무슨 '주의'보다는 산다는 행위 자체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며,  시장도 전장도 목적이기 보다는 수단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전쟁 중에도 남대문 시장이 버젓이 영업을 했고, 피난의 와중에도 식료품이며 의류는 물론이고, 미제 그릇까지 사고팔렸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전쟁이라는 것은 다만 폐허일 뿐이고, 살기위한 허덕임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쟁 속에서도 나름의 체제와 문화와 사회가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전쟁 속에서도 사람과 상품은 소모될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자,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상실되는 인간성, 혹은 전쟁을 통해 꾀해졌던 이득은 그 누구에도 돌아가지 못했다거나, 이데올로기는 로맨티스들의 한낱 환상일 뿐이라는 이야기이기보다는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자의식'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삶에는 '주의'나 '역사'보다는 생활이, 산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가장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되, 이끌려 억지로 가느냐 자의식을 가지고 꿋꿋하게 자발적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사람다워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역시 작가라는 일은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작가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렇다. 또한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시절 억눌린 자의식을 품고, 박경리 그녀는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또 한편 글을 통해 자신을 풀어내면서 얼마나 흥겨웠을까. 그러나 이렇게든 살든 저렇게든 살든 인간은 죽는다. 창작을 통해 자신을 풀어내며 시대를 앞서갔던 한 여자도 그렇게 죽었다. 죽음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역설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박경리의 작품을 읽으며 그 말이 정말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로니에북스에서 출판한 박경리 시리즈를 읽는 것이 <김약국의 딸들>, <뱁새족>, <표류도>와 그리고 이번 책 <시장과 전장>까지 모두 네권 째이다.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제목을 박은 겉표지 속에 파스텔 빛깔의 하드커버들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살펴보다가 겉표지 속에 숨겨진 박경리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했다. 마치 의외의 보물 지도를 발견해 낸 것처럼 깜짝 놀랐다. 글 속에서 자신을 열정적으로 표현했던 작가의 죽음을 애달프게 여기다 발견한 사진이라 그 놀라움과 즐거움이 더 컸다.  

 

<토지>외에는 아는 작품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가 외국문학에만 젖어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의 이야기임에도 너무 낯선 시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박경리와 같은 멋진 작가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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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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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씌여진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1959년이라는 연도가 너무 낯설다. 오히려 조선시대, 일제시대의 이야기라면 이토록 생경한 느낌은 아닐것이라고도 생각해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시대든, 일제시대든, 1959년이든 우리에겐 마치 과거가 없었던 듯 낯설다. 1959년이 지금으로 부터 그토록 오래전은 아니라는 것도 당황스러울 만큼 낯설다. 50~60년 새에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에 낯설음의 진폭이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앞으로 50년이 지난후, 2013년을 무대로 한 소설을 읽는다면 이처럼 낯설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지난 50년간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여온 우리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최근까지도 생존해 계셨던 작가 박경리의 명성 때문에라도 이 소설이 낯선데, 그것은 박경리하면 <토지>로 대변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새롭기도 한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어쨌든 그 '옛날'이라고 여겨지는 1959년에도 불륜을 소재로한 소설이 쓰이곤 했던 것이다. 그 시절엔 새삼 불륜일 것도 없이 그저 후처라거나, 첩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은 흔히 외도를 일삼았을 듯 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남자들의 외도를 '불륜'이라 이름하며 소재로 쓴 소설이 드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옛날'은 아닌 것이다.  

시대적으로 1959년을 낯설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없다. 물론 용어라던가 표현방식이 지금 사용되는 것과 달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저 시대에 따른 표현 방식일 뿐,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낯선 용어에 대한 나름의 해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 현회는 다방 마담이다. 그녀는 딸 아이와 노모, 그리고 배다른 동생을 부양하고 있다. 마담과 부양가족은 제법 통속적이지만, 색다른 것은 그녀는 6·25전쟁 전, 명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인텔리이며, 소설을 번역하고 원어민과의 영어 대화를 알아들을 만큼 어학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녀가 보통을 넘는 지적 능력과 함께 매우 진보적인 가치관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생계를 위해 다방 마담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현회와 사랑에 빠지는 상현은 경제적으로도 사회계층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결혼하였다. 다만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생활감정을 고려해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한 것이 그가 방황하는 원인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애정이 있는 결혼생활을 하였더라도, 그시대의 남성들의 정조관, 혹은 연애관, 또는 여성관을 생각해 볼때, 외도는 그다지 별난 일은 아닐 수 있다 생각된다. 어쨌든 현회와 상현은 운명적 사랑이라고 일컫어지는 불륜에 빠져든다.  

 

 

만일 이 소설이 단순히 불륜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을 것이며, 박경리 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 불륜에 관한 소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작품해설에서 이것을 겉서사와 속서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거창하게 평론까지 아니여도,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고독한 존재,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덮어보지만, 결국 사랑때문에 더 고독해지는 것이 인간이며 운명인 것이다. 

때문에 상현의 방황은 뒤늦게 찾은 진정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옭아매는 굴레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말이지 모든 것 잊어버리고 싶어. 부모, 자식, 사회, 가정, 이러한 것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나 봉사는 자벌적인 것이라야지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소처럼 평생 달구지를 끌고 갈 수는 없어.(144쪽, 상현)

 

<표류도>라는 제목에 대해 책을 읽기 전에는 '방황기'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책을 읽는 중간, 그러니까 현회와 상현이 한참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이 둘이 둘만의 쉴곳을 찾아 표류한다는 의미인가보다 이해했다. 그러나 상현을 떠나 보내는 결말에는 인간은 흘러가는 고독한 섬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되새기게 된다. 그러나 그 흐름은 반드시 자의적인 것이어야 하며, 방향을 잃은 것이어서는 안된다.

책을 읽기 전 현회의 회상 중 '사람도 죽였고...' 하는 부분에 특히 관심이 갔다. 그녀는 정말 미친 사랑을 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불륜은 도덕적으로야 어떻든 옳지 못한 것이지만, 감정적으로도 그러한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미친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의 작위적인 한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무료하기도 한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현회와 상현은 어떻든 사랑을 했다고 믿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나로서는 그들이 미친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정말 미쳤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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