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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6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평점 :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정이 이룬 엄청난 사회적 변화와 그것이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미미하고 재산도 없던 일개 중위의 신분이였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황제가 되어 신속하고도 매우 획기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법적, 정치적 질서로 엄격한 계층적 구분이 존재하던 대혁명 전의 사회는 대혁명을 계기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전 사회에 공표한 것이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실각 후, 귀족과 왕당파 사제들은 왕정복고를 꿈꾸며, 그들만의 특권을 위한 더 강력한 왕권과 귀족계급의 권위를 세우려하지만, 젊은이들의 피 속에는 이미 '만인의 평등'이라는 계몽적 사상이 녹아있던 시대 상황이 이 소설의 배경인 것이다. 주인공 쥘리엥은 나폴레옹을 가슴 속 영웅으로 간직하며 '출세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골백번이고 죽는 편을 택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쥘리엥을 전적으로 무구한 반항의 순교자로만 취급하는 것은 파렴치한 출세주의자로만 모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비평의 태도일 것이다. 쥘리엥은 자신의 출신 계층 내에서나 그가 발붙이려고 애쓰는 상류 계층 내에서나 다같이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환경 속에서 낯선 사람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철저하게 뿌리 뽑힌 자이며 항상 '대양 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홀로있는' 이 외로운 이방인은 상층 계급뿐만 아니라 시대 전체, 시대의 가치관 및 이상 전체와 대립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445쪽)
이 이야기를 계급의식에 짓눌려 두려움에 떨지 않음으로써 고고하게 죽어간 정신이 고결한 하층민의 이야기로 볼 것이냐, 계급을 넘어 사랑을 꿈꾼 혹은 신분상승을 꿈꾼 천박한 출세주의자의 스캔들로 볼 것이냐 하는 이 두가지 차원의 논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을 만큼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적절히 녹아있다.
목수의 막내 아들이며, 농부인 쥘리엥은 두 형과 아버지의 멸시와 반목 속에 가족으로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고립되어 혼자 책을 읽는 등으로 소일한다(죽음을 앞둔 쥘리엥이 그를 찾아온 아버지와 대면하는 장면은 경악 그 자체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채 명을 다하게 된 아들의 주제넘은 욕망을 질책하는 아버지나 그를 무마하려고 돈을 제시하는 아들이라니, 쥘리엥이 목수의 아들이 아닌 어느 귀족의 숨겨진 아들이였다는 마틸드 아버지의 설정이 혹시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러나 쥘리엥은 변함없이 시골 목수의 셋째 아들이였으며, 단지 우연히 알게된 퇴역한 군의관으로 부터 글을 배웠고, 약간의 책을 물려 받게 된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였다. 차라리 두 형처럼 운명에 순응했더라면 스물두살의 나이에 목이 잘리는 그런 불상사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스탕달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만연해진 사회 계급적 불평등 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방종의 결과는 기로틴행 뿐이라는...
쥘리엥은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라틴어 실력을 인정받아 상류층 가정에 가정교사로 지내게 되면서 이른바 출세 길로 접어들지만, 상류층 가정에서도 귀족들의 살롱에서도 경멸의 시선을 걷을 수 없는 고독한 영혼이다. 쥘리엥의 이런 모습은 시대적 불화로 읽히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스탕달이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쥘리엥을 그렸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쥘리엥의 불만은 계급에 있다기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쥘리엥이 꿈꾸었던 것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 자신이 속한 계급인 하층민들 속에 있건, 귀족들의 살롱에 있건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천박한 인간군상의 무리 속에서 홀로 고독을 느꼈다. 그러한 쥘리엥은 인간 존재에 대해 어떠한 희망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고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이러한 추측은 스탕달이 이름한 쥘리엥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대양 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홀로 있는' 고독한 이방인.
신분상승도, 사랑에 대한 미련도 모두 포기해 버리고 높은 탑에 갇혀 오만한 고독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리는 쥘리엥의 모습은 대양 가운데 버려진 고독한 조각배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한 쥘리엥의 고독한 모습에 나 또한 감동받고 평화를 느꼈다. 계급이며, 사랑이며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살아왔건 인간이라면 결국 죽음음 속에서만 평화를 맛볼 수 있는데.
<적과 흑>을 읽은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적과 흑이 가르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역자는 적과 흑이 의미하는 것은 '군'과 '종교'라고 설명했지만, 내 생각에 '적'은 '피'를, '흑'은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검은 속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전복은 결국 누군가의 '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스탕달의 역사 의식이 아니였을까.
계몽 사상가들의 충실한 제자로서 스탕달은 주저없이 특권에 반대하여 평등의 편에 선다. 그가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체제가 혁명에 의해 단죄된 특권을 옹호하고, 특권 의식에 의해 사회를 재조직하여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획책한다는 데 있다. 스탕달은 특권의 적으로서 사회적 구분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이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층 계급의 사람이 상층 계급의 구성원보다 개인적 가치와 능력이 열등할 어떠한 선험적 이유도 없는 것이다. 스탕달의 인간관은 소속 계급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계급적 편견에 정면으로 맞선다.(444쪽, 작품해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