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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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죽음에 응답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회상, 희미한 언덕 능선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는 현재와 연결되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뒷표지 글 중에서)

 

세계2차대전 당시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해 두 도시를 파괴했고, 이로써 일본은 항복했으며 세계대전은 종전을 고했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했지만, 일본이니 미국이니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승리나 패배에 관계없이 실제로 이루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다. 전쟁의 참상은 승전국이나 패전국을 가리지않고 일반 시민을 참혹하게 하지만, 패전국민의 경우 그 고통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리라. 더구나 원폭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었다면 피붙이의 죽음, 쑥대밭이 된 삶터, 그리고 이어지는 공황상태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말없는 몸부림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야기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 중, 아이를 살해하는 여자를 본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살며, 새끼 고양이들에 애착을 품은채로 늘 경계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는 미국인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가고자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녀만의 이상국인 미국에는 결국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를 바라보는 주인공 에츠코는 전후임에도 번듯한 직장에 나가고 있는 남편 그늘에서 오두막의 아이와 엄마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의심이 감돌고, 서로를 믿지못하는 순간순간 섬뜩한 장면이 이어진다.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상은 전쟁 전,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품위있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지만 한마디로 속의 생각을 감추는 음흉함 또한 겸비하고 있다. 그것을 과거 일본의 모습이라고 역자는 후기에 적었지만, 국민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점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바르고, 성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최대 덕목으로 여기며 예의를 갖추는 것. 

일본적인 것의 여러가지를 좋아하는 '나'아지만, 역시 그런 모습은 존경스러운만큼 불편하기도 하다. 오가타상은 아들인 지로에게도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예의를 갖추지만, 그의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아들인 지로도, 며느리인 에츠코도, 그리고 그 자신 오가타도 잘 알고있다. 

 

이야기는 금방이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처럼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지만, 특별한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원자폭탄이라는, 너무도 엄청난 재앙 후의 나가사키에서는 이미 더이상 놀랄 일이 없는 것처럼 재건의 희망에 들떠있지만, 여전히 그속의 개개인은 힘들고, 피로하고, 지쳤으며, 삶이 버겁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전쟁에 고무되었던 과거를 회상하기도(오가타상), 희망의 땅에서 온 미국인을 붙잡기도(사치코),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 일에 매달리기도(지로, 후지와라 부인), 옛것을 추방하고 이제는 새로운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기도(공산당에 입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로의 친구이며, 오가타상의 제자이고, 현재는 교사인 마쓰다 시게오), 전쟁을 딛고 선 땅에 새로이 태어날 아기에게 희망을 걸기도(에츠코) 하는 것이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 역시 끝나지 않는다.

역자는 씌여진 것보다 씌여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너무도 평이하고 잔잔한 이야기지만 그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은 무한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거대한 소설이다. 음, 이렇게도 소설이 씌여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다. 너무도 평이하게, 너무도 잔잔하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순간순간이 긴장되고 때로는 공포스럽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주인공 에츠코 역시 두번째 결혼으로 영국인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첫번째 남편 지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게이코는 오랜 불행 끝에 자살한다. 그녀가 어떻게 불행했는지 작가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를 통해 나는 그녀의 불행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랜 불행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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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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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토미의 이 고백은 샴쌍둥이를 생각나게 한다. 자기들이 한몸인 것도 모른채 서로의 등이 붙은채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어린시절부터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토미와 캐시. 그들은 너무 늦게 서로의 사랑을 향해 용기를 내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짜피 그들은 조만간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둘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미는 캐시를 보내고, 캐시 역시 토미를 보낸다.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다른 선택은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그토록이나 운명에 순응해버린 것에 은근히 화가 난다.

 

이 책을 읽기 전, 토미와 캐시를 비롯한 해일셤의 학생들은 '클론'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생물학 용어인 '클론'은 단일 세포로 부터 무성생식을 통해 생긴 세포군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복제되었다는 소리다. 그렇다. 해일셤의 그 많은 학생들은 모두 클론이다. 뿐만 아니라 클론들의 학교는 헤일셤 외에도 작품의 배경인 영국 곳곳에 있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SF가 그렇듯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한 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인간을 구할 영웅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SF임에도 전혀 SF적이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더 섬뜩하고 무섭다.

세계대전 종결후 폭발적으로 발달한 과학의 결과물로 클론들을 '대량생산'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장기 이식'에 있다. 해일셤에서 클론들은 성장기간 내내 그들 삶의 최종 지점인 '기증'에 대해 주입받는다. 그래서 였을까.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그토록 순종적이였던 것은.

간병사 캐시가 추억하는 어린시절의 '해일셤'에서는 한번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한번, 해일셤을 졸업한 후, 캐시가 포르노 잡지에서 자신을 닮은 근원자를 찾는다거나, 강한 성격에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걸 못견뎌하며, 그를 위해 자주 거짓말을 하는 루스가 자신의 근원자를 찾는 장면이 책의 중반에 연출될 뿐이다. 어쨌든 그들이 찾는 것은 부모가 아닌 근원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클론이라는 사실은 도입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음에도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마치 작은 균열을 통해 습관적으로 물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온통 곰팡이가 슬어버린 천장을 보는 것 같다. 물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천장 한귀퉁이에 넓게 지도가 그려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갑자기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해일셤의 클론들은 자신들이 '기증'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들어왔기에 그 사실이 결코 낯설지 않으며, 나 또한 당황하지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어느순간 갑자기 깨닫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던 것이였을까. 그랬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너무도 순종적이였다는 것이다. 그점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도망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토미와 캐시가 동반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작가였다면 그랬을 것 같다. 토미와 캐시는 어쨌든 서로가 평생 사랑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깨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행동했던 그들의 삶에 대해 다시 자각하고, 자신의 정해진 삶을 거부한다. 기증자로서의 삶도, 당분간 기증이 보류된 간병사로서의 삶도 거부하고 스스로 그들은 목숨을 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기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의 대사가 생각난다. 기차 밖으로 나가는 거라고 외치던.

그러나 문제는 클론의 존재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클론을 용인하고, 아니 클론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바라던 일이었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했단다. (중략)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360쪽)

 

문제는 클론의 존재에 있지않다. 클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내 삶과 내 가족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장기를 내놓고 죽어갈 그들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서도, 아닌척 빛의 쪽에서만 머물고 싶어하는 우리 대부분의 '이기'에서 이 모든 불행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라면 고민의 여지가 있겠지만, 내 남편이거나 내 아이가 장기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할때 나는 '클론'을 필요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진다. 섬뜩하다. 비굴하게도....

아아, 루시는 토미는 그리고 캐시는 그렇게 죽어갔다. 한번 두번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것을 허락한다. 아니 그것은 강제되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테지만.

 

캐시가 'never net me go'라는 흘러간 팝송을 틀어놓고 베개를 안고 몸을 흔드는 장면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캐시(클론은 생식능력이 없다. 이식만을 생각한다면 건강한 자궁 또한 필요할 것인데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복제인간이 생식능력 까지 갖춘다면 그 또한 큰일이겠다 싶긴하다)가 슬퍼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부모를 그리워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슬픔으로 보였기에 애처러웠다. 또한 루스가 캐시와 토미를 비롯한 몇몇과 노퍼드로 근원자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친부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연상했다. 부모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고자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궁금증일 테니까. 그러니까, 클론 그들도 당연히 사람인 것이니까...

 

이 책은 팟캐스트로 들은 'EBS 북카페'의 번역자 김남주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그녀는 26년간 번역일을 해왔고, 그일만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일이었다 라고 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특히 <나를 보내지마>를 언급할 때 특유의 조근거리는 목소리에 특히 힘을 주었다. 그길로 서점에 달려가 <나를 보내지마>와 <창백한 언덕풍경>을 구입했다. 아쉽게도 김남주의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서점의 재고불량으로 구입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구입해 읽을 생각이다. 

역자는 <나를 보내지마>에서 '기묘'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만큼이나 이 소설은 기묘한 이야기다. 실제로 한페이지에 '기묘'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자가 매번 '기묘하다'라고 번역했던 단어는 odd였을까, strange였을까? weird, peculiar  이상하다라고 번역되는 모든 단어가 적절히 번갈아가면서 씌이지 않았을까? 기묘하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소개하는 역자라는 직업이 새삼 매력적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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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터키 In the Blue 14
백승선 지음 / 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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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터키 이스탄불의 상징과도 같은 아야소피아. 터키를 소개하는 여러 책자를 통해 이미 내가 다녀온 곳인양 익숙한 곳이 아야소피야이긴 하지만, 백승선의 사진으로 보는 아야소피아는 마치 19세기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풍경화를 보듯 선명했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감있는 모습때문에 오히려 몽롱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풍의 여행서는 실제 모습보다 더 화려한 사진과 작위적이고 감상적인 지은이의 깨닫음으로 치장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백승선의 글과 사진으로 보는 터키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은이가 불필요한 개인적 감상을 줄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터키'를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리라.

평소에도 터키는 내게 로망이지만, 백승선의 사진들을 보면서 터키에 대한 나의 로망이 점점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카파도키아를 보기 위해 오른 열기구들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그 어디보다도 나는, 하늘빛을 담은 신들의 온천 '파묵칼레'에 가보고 싶다. 터키어로 '목화의 성'을 뜻하는 파묵칼레는 지은이의 말에 의하면 정말 솜으로 만든 요새처럼 보인다고.

사진으로 보는 파묵칼레는 엄청난 파도가 일으키는 바다 거품같기도, 혹은 수정바위 틈틈이로 푸른물이 고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직접 보면서도 눈앞의 광경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그곳.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이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라는 지은이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이 신비로움을 꼭 두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마구 용솟음침을 느낀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놓은 이 신비한 결정체를 보고나면 벗어나고 싶을 만큼 지루한 내 일상에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그건 알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지루하기만 한 내 일상이 더더욱 지겨워질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가 우러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겠다. 어디를 여행하건 여행의 목적은 그곳을 통해 바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니까.

 

터키 여행을 앞두고 있다거나, 혹은 나처럼 터키를 오랜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다거나, 그도 아니면 여행이 남일처럼 아득한 사람일지라도 백승선의 <두 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터키>를 읽어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사진만으로도 가슴이 트이고, 무엇인가 꿈 꿀수 있음에 문득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터이니.

 

 

평생 사용한 감탄사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는 터키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와 하루 종일 앉아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 곳, 파묵칼레와 그리고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여행은 조만간 꼭 이루어야 할 나의 소망 중 하나로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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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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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를 뒤흔든 위대한 소설' '20세기를 마무리 하는 작품' '우엘벡 최고!' 와 같은 미사여구로 치장되는 우엘벡의 <소립자>를 드디어 읽었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은 하드커버임에도 장정이 가볍다는 것 말고는 빽빽한 글 때문에라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빽빽한 자간과 행간에 적응되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특히 <소립자>의 경우 미셸 우엘벡이란 작가의 이름도 어렵지만, 소립자라는 과학용어도 몹시 낯설었음으로 책을 펼치기까지 어떤 각오가 있어야 했다. 20세기 최고의 작품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소립자가 뜻하는 것이 파편화된 각 개인이라는 것을 알겠다. 현대의 각 개인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종교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쾌락을 쫓는다. 어떻게 살아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삶은 천하고 비열하기에 말초적인 관계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인 사랑은 없다. 우엘벡은 혹시 인간에겐 본시 남녀간의 사랑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민도 없다는 그 말을 하고자 어쩌면 변태적으로 여겨질만 한 그렇게 많은 성애 장면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서구인들이 <소립자>를  세기말을 반영하는 최고의 소설로 지칭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우엘벡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이슬람은 가장 어리석은 종교'라고 칭할 만큼 종교에서 조차도 편파적이다. 또한 우엘벡은 육체조건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치 않으며, 이는 유성생식을 하는 인류 대신 무성생식을 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의 예고로까지 이어진다. 인간 존엄의 가치를 최고로 치며, 가부장적 권위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가족간의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휴머니즘을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동양에서조차 우엘벡의 소설이 찬사를 받는 것에 다소 어리둥절한 것이다. 어쩌면 겉으로 드러나 추구되어온 가치와는 다른, 추함을 뒤집어쓰고 숨겨져있던 본성을 드러내줬기 때문에 더 환영받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서구사회는 1970년대를 전후해 피임의 합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적인 해방을 맞고, 사회 전반에 쾌락을 쫓는 기류가 형성된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은 육체의 미적 가치와 젊음의 정도로 판단된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해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쾌락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젊은 육체만이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러한 세계는 점차로 인간적인 가치들이 메말라가며 황폐해진다.

동양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미셸 제르빈스키의 인간에 대한 기계적이고 비정한 세계관이 그다지 거북스럽지 않았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고통을 벗어나 늘 행복한 혹은 도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또 서로 우월해지려는 다툼없이 합리적 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인간 외의 다른 종으로 진화된다한들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사랑이란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이고 보면, 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음에도, '흰머리 파뿌리되도록'이란 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적 가치만이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한 인간을 억제한다고 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게 곪은 사회가 더 무서운 사회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것은 이미 누구나가 느끼는 바가 아닌가.

 

한편 이 소설은 인간 공통의 고통과 쾌락을 떠나, 미셸과 뷔르노의 개인사이기도 하다. 미셸과 뷔르노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둘 모두 어머니의 사랑은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와의 유대'라는 초기경험이 둘 모두에게 전무한 샘인데, 이는 미셸과 뷔르노의 이후 삶에 정반대의 모습으로 발현된다.

미셸은 사랑도 쾌락도 추구하지 않은채로 비정하고도 기계적인 감정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종'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한 미셸도 전 인생을 통해 바라는 게 있었다면,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였다고 고백한다. 반대로 뷔르노는 쾌락을 쫓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주고받는 말초적 쾌락 속에서 뷔르노는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5세 이전의 초기경험을 중요시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의지의 경험은 개별적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니던가.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 '인드라망'이 생각난다. 인드라라는 한없이 넓은 그물에 꿰인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라는 인드라망. 우리는 모두 인드라의 넓은 그물에 걸린 구슬이다.

 

미셸이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괴물같은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과, 절대적 쾌락의 표현으로 뷔르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크리스티안의 최후의 모습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최정례 시인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 본처들은 급습해 첩의 머리끄뎅이를 끌고 간다 / 상투적 수법이다 /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미셸 체르빈스키의 연구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죽음'도 모르는 그런 종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너나 할 것없이 우리 모두가 슬픔 속에 지척대는 이유는 언제 어느순간 덮칠지 모르게 매복해있는 '죽음' 때문이려니. 체르빈스키처럼 비정함은 갖추지 못한 나는, 인간 '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런 반면 뷔르노와 크리스티안의 성애장면은 외설스럽기보다 지루하고도 지루해, 우엘벡이 포르노에 가까운 장면에 왜 이토록 집요하게 집착하는 것인지 다소 당황스럽기도 한 한편으로, 인간 모두가 '죽음'이 두려운 만큼 '성'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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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다 - 독서본능 문정우 기자가 만난 울림 있는 책
문정우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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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문정우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시사IN>에서 '독서여행'과 '독서본능'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서평을 묶은 것이다. 서평이란 말을 쓰는 것은 항상 조심스러운데 사실 나는, 평론적 의미가 짙은 '서평'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느낌', 혹은 '독서 감상문' 정도의 글을 좋아한다. 내 자신이 무엇을 읽고 평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이런 저런 평이 담긴 글은 읽기에도 피곤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잘 안다면 직접쓰지, 하는 억하심정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굳이 서평이란 부제가 달린 책은 피하려 한다. 이것은 아마도 기질적인 문제로, 내가 타고난 '삐딱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 속에는 글을 쓸 당시 지은이의 경험과 세계관, 즉 그 자신이 오롯이 녹아있으니, 글을 평한다는 것은 곧 글을 쓴 사람을 평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며, 또한 당시의 감정이나 세계관은 이후에도 많은 변화를 겪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누가 누구를 평한다는 그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은이가 이 책을 자신이 썼다고 우기는 대신 많은 작가들이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하기만 했다는 그의 말은, 책을 읽고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행위를 몹시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이야기였다.

어쨌든, <나는 읽는다>는 시사IN의 전 편집장이기도 했던 문정우 대기자가 쓴 '책을 권하는 책'인 것인데, 그간 읽어온 '책 권하는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읽고싶은 도서 목록을 마치 쇼핑목록 고르듯 쉽게 훌훌 넘길 정도로 가볍지도, 그렇다고 평론의 성격이 짙어 읽기에 지레 지칠 정도로 무겁지도 않은 개인적 감상과 전문적 설명의 중간쯤에 속하는 독서 에세이, 혹은 독서 칼럼 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여기 실린 책들도 인문학, 사회과학, 교육, 경제, 그리고 무엇보다 쉽지않은 자연과학 정도의 책들로 가볍게 읽을 책들은 아닌 것이다. 지은이 자신도 평소 소홀했던 경제나 과학 분야의 책도 비교적 열심히 읽어 상실(경제), 뒤틀림(역사), 인간, 행성(과학) 등의 네 가지 분야로 배분해 책을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내용(뉴스, 정치, 과학, 교육, 교역, 종교를 포함)이 오락적 형태를 띄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와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는 황주환의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을 읽는다고 해서 나가 곧바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탄생되지는 않을 테지만, 어쨌든 나는 라캉이 말한 '그것'이 있는 인간으로 차츰 나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읽는다. 그렇기에 문정우와 같은 책읽기의 선배, 달인, 혹은 대가들은 무엇을 읽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아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역할에 아주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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