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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토미의 이 고백은 샴쌍둥이를 생각나게 한다. 자기들이 한몸인 것도 모른채 서로의 등이 붙은채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어린시절부터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토미와 캐시. 그들은 너무 늦게 서로의 사랑을 향해 용기를 내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짜피 그들은 조만간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둘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미는 캐시를 보내고, 캐시 역시 토미를 보낸다.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다른 선택은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그토록이나 운명에 순응해버린 것에 은근히 화가 난다.
이 책을 읽기 전, 토미와 캐시를 비롯한 해일셤의 학생들은 '클론'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생물학 용어인 '클론'은 단일 세포로 부터 무성생식을 통해 생긴 세포군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복제되었다는 소리다. 그렇다. 해일셤의 그 많은 학생들은 모두 클론이다. 뿐만 아니라 클론들의 학교는 헤일셤 외에도 작품의 배경인 영국 곳곳에 있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SF가 그렇듯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한 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인간을 구할 영웅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SF임에도 전혀 SF적이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더 섬뜩하고 무섭다.
세계대전 종결후 폭발적으로 발달한 과학의 결과물로 클론들을 '대량생산'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장기 이식'에 있다. 해일셤에서 클론들은 성장기간 내내 그들 삶의 최종 지점인 '기증'에 대해 주입받는다. 그래서 였을까.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그토록 순종적이였던 것은.
간병사 캐시가 추억하는 어린시절의 '해일셤'에서는 한번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한번, 해일셤을 졸업한 후, 캐시가 포르노 잡지에서 자신을 닮은 근원자를 찾는다거나, 강한 성격에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걸 못견뎌하며, 그를 위해 자주 거짓말을 하는 루스가 자신의 근원자를 찾는 장면이 책의 중반에 연출될 뿐이다. 어쨌든 그들이 찾는 것은 부모가 아닌 근원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클론이라는 사실은 도입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음에도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마치 작은 균열을 통해 습관적으로 물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온통 곰팡이가 슬어버린 천장을 보는 것 같다. 물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천장 한귀퉁이에 넓게 지도가 그려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갑자기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해일셤의 클론들은 자신들이 '기증'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들어왔기에 그 사실이 결코 낯설지 않으며, 나 또한 당황하지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어느순간 갑자기 깨닫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던 것이였을까. 그랬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너무도 순종적이였다는 것이다. 그점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도망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토미와 캐시가 동반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작가였다면 그랬을 것 같다. 토미와 캐시는 어쨌든 서로가 평생 사랑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깨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행동했던 그들의 삶에 대해 다시 자각하고, 자신의 정해진 삶을 거부한다. 기증자로서의 삶도, 당분간 기증이 보류된 간병사로서의 삶도 거부하고 스스로 그들은 목숨을 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기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의 대사가 생각난다. 기차 밖으로 나가는 거라고 외치던.
그러나 문제는 클론의 존재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클론을 용인하고, 아니 클론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바라던 일이었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했단다. (중략)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360쪽)
문제는 클론의 존재에 있지않다. 클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내 삶과 내 가족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장기를 내놓고 죽어갈 그들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서도, 아닌척 빛의 쪽에서만 머물고 싶어하는 우리 대부분의 '이기'에서 이 모든 불행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라면 고민의 여지가 있겠지만, 내 남편이거나 내 아이가 장기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할때 나는 '클론'을 필요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진다. 섬뜩하다. 비굴하게도....
아아, 루시는 토미는 그리고 캐시는 그렇게 죽어갔다. 한번 두번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것을 허락한다. 아니 그것은 강제되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테지만.
캐시가 'never net me go'라는 흘러간 팝송을 틀어놓고 베개를 안고 몸을 흔드는 장면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캐시(클론은 생식능력이 없다. 이식만을 생각한다면 건강한 자궁 또한 필요할 것인데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복제인간이 생식능력 까지 갖춘다면 그 또한 큰일이겠다 싶긴하다)가 슬퍼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부모를 그리워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슬픔으로 보였기에 애처러웠다. 또한 루스가 캐시와 토미를 비롯한 몇몇과 노퍼드로 근원자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친부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연상했다. 부모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고자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궁금증일 테니까. 그러니까, 클론 그들도 당연히 사람인 것이니까...
이 책은 팟캐스트로 들은 'EBS 북카페'의 번역자 김남주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그녀는 26년간 번역일을 해왔고, 그일만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일이었다 라고 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특히 <나를 보내지마>를 언급할 때 특유의 조근거리는 목소리에 특히 힘을 주었다. 그길로 서점에 달려가 <나를 보내지마>와 <창백한 언덕풍경>을 구입했다. 아쉽게도 김남주의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서점의 재고불량으로 구입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구입해 읽을 생각이다.
역자는 <나를 보내지마>에서 '기묘'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만큼이나 이 소설은 기묘한 이야기다. 실제로 한페이지에 '기묘'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자가 매번 '기묘하다'라고 번역했던 단어는 odd였을까, strange였을까? weird, peculiar 이상하다라고 번역되는 모든 단어가 적절히 번갈아가면서 씌이지 않았을까? 기묘하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소개하는 역자라는 직업이 새삼 매력적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