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지음, 한은주 옮김 / 서교출판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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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화소설로, 톰 슐만의 영화를 소설가 낸시 클라인바움이 각색해 책으로 출판했다.  원작이 책이 아닌 영화인 경우로, 나로서는 무척 독특한 경우라고 생각되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90년 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지만 그때 당시는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로빈 윌리암스의 경쾌한 매력에만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지난 주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간 생각이 깊어진 것인지, 대사 하나하나가 새록새록 가슴에 와 닿았다. 오늘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이라든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적 인간이 되라는 이야기라던가,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줄 알아야 한다는 키팅의 시도들은 대안교육을 고민하는 요즘의 내 고민과 딱 맞아떨어져 더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어쨌든 아름다운 화면과 내용에 감동이 깊어 책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책은 영화와는 다른 부분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책에서 키팅을 고발하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토드의 모습이 영화에서는 부모와 교장의 강압적 분위기에 밀려 금방 서명하고 마는 약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키팅으로 인해 변화한 토드의 모습 등을 책이 더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독특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주체적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더라면, 세상에는 다른 시각도 존재함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닐은 죽지 않았을까.

키팅의 부추김이 없었다면 하던대로 도서관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았을 것이라고 항변하는 카메룬의 외침은 한편으론 정말 그럴 것이라 수긍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길을 넘보며 주체적 활동을 꿈꿨던 닐은 죽음으로서만 '죽은 시인의 사회'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살지 못할 세계라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삶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있어야 오늘이든 내일이든 즐길 수 있는 것일테니까.

키팅의 획기적 교육방법, 죽은 시인의 사회, 닐의 자살, 그리고 교단을 떠나는 키팅.... 그래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웰튼 아카데미의 그들은 아이비리그를 꿈꾸며 이전의 삶의 방식을 이어간다. '죽은시인의 사회'는 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연극 '한여름밤의 꿈'과 같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도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이 책 역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도하는 자, 그대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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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3-12-2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번 다시 봐야겠군요. 대사도 음미하면서~~ 넘 오래되었어요. 지금을 즐기려면... 반갑습니다.

비의딸 2013-12-21 08:41   좋아요 0 | URL
네..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할 것이라 믿어요! 고맙습니다.
 
책 읽는 사람들 -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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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뒷표지에는 '<책 읽는 사람들>은 '독서의 기술'에 관한 명상록' 이라는 추천글이 있다. 책을 다 읽고나서도 나는 이 말이 무슨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책을 읽는 행위에 마치 어떤 조직화된 기술이 필요한 것처럼 표현된 이 말 자체에 이미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독서는 텍스트로 들어가, 개인적인 역량을 총동원해서 텍스트를 탐구하고 재창조해 다시 회수하는 능력(328쪽)'이라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주장이 단순히 '기술'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는 '기교'가 아니라는 부정과, 독서라는 행위가 숙련될 수 있는 기술로 폄하된 것 같아 그에 따른 불쾌함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라는 기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저 읽는다는 단순한 행위는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해독하는 기술로서 배우고 익혀 숙련할 수 있는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독서는 그런 단순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기 위한 '스스로 깨달음', '자발적 배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망구엘의 이 책에서 확인한 것이다.
 
독서는 창조적인 활동 중에서 가장 인간적 활동이다. 나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뭔가를 읽는 동물이며, 독서를 넓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 독서하는 능력이 우리 인간이란 종을 정의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것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려 한다. 풍경, 하늘, 타인의 얼굴에서는 물론이고 우리가 창조해 낸 이미지와 글에서도 이야깃거리르 찾아내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만이 아니라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까지 읽는다. 또 그림과 건물까지 읽고 해석하려 한다. (7쪽)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알베르토 망구엘이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과 강연록 등 39편의 글을 '독서'라는 매개로 묶어 출판한 책이니 만큼 책에서 전체적인 개연성을 찾기는 힘들다. 1부의 첫장, '체 게바라의 죽음' 부터 꽤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만큼 망구엘의 글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오오, 조국도 이념도 아닌 인간애에 겨워 게릴라가 된 투사라니.
그런데 1부 첫장을 읽고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체'의 죽음이 과연 책읽는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글을 읽는 즐거움, 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또 확실하지 않은 이유로 어떤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고, 경이로움이나 섬뜩한 기운, 또는 포근한 감정을 느닷없이 느끼는 즐거움도 있다. (9쪽)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독서의 기술'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책이 인간이라는 종에게 필요한 이유 즉,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평범한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상식적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에 만족하는 수동적이며 억눌린 성인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책읽기에 관한 주장이다. 불의가 지배하는 긴 밤의 역사 속에서 비판하고, 때로는 경계를 넘을 줄 아는 상상하는 사람으로 스스로 설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책 읽기라는 것을 주장인 것이다. 깊이가 있어 사색이 필요한 세계, 그것이 독서의 세계다.
 
책을 읽는 즐거움에 관해서라면 이보다 더 잘쓴 글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즐거운 책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직접적인 감각적 즐거움 외에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세세한 기쁨, 책을 읽고 글을 써서 밥벌이 하기를 원했던 꿈까지 어쩌면 그렇게 나와 꼭 같은지 이 망구엘 할아버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지금은 한마디로, '부럽다!'
헨리 제임스라는 사람은 한 작가의 전작에서 비밀 암호처럼 반복되는 주제를 가리켜 '카펫의 무늬'라고 칭했다 하는데, 망구엘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늬는 아마도 '책'이라는 씨실과 '읽는다'는 날실로 짜인 '독서'라는 무늬가 될 것이다. 그저 종이와 잉크로 된 인쇄물인 책, 즉 물질을 넘어 내용과 내용 사이를 흐르는 강과 같은 무늬를 조심스럽게 짜넣는 망구엘식 카펫. 그리고 나는 망구엘이 짜놓은 카펫의 기호를 내 나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해석해 나만의 무늬를 바로 나의 카펫에 새기고 있다.
 
책을 덮고, '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어도 좋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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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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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르는 이야기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해석해서 우리에게 강요할까 두렵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모르게 될까도 두렵다.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계획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계획으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이해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계획, 혹은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계획이 바뀌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책 읽는 사람들/알베르토 망구엘)

 

작가의 상상력 속 세계는 정말 무한대라는 것을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통해 또한번 실감했다. 나 역시 <개미>를 통해 그를 처음 알았고, <타나토노트>를 읽으며 상상력의 보고요 타고난 글쟁이인 베르베르의 이야기에 빠졌었지만, 재미있게 읽었던 두 편의 소설 뒤로는 어쩐지 그의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 베르베르의 무한한 상상 속 세계를 탐험하기엔 나는 줄곧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 혹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 사이에 줄 긋기 바빴고,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몇장의 종이 안에서 휘까닥 이뤄버리는 그의 세계가 나에게는 버겁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 그저 단순히 재미있게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는 베르베르의 상상 세계에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 그렇게 나는 베르베르를 잊었다.

 

그리고 몇년의 세월이 흐른뒤 다시 읽게된 베르베르. 현재와 수 천 수 억만 년 전 기억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며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인류의 미래 모습까지 오락가락해, 까닥하면 소설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인 이 장대한 과학소설에 나는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심정이다.

초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아틀란티스의 거인족이 지금 현 인류를 창조했고, 현 인류는 핵전쟁과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로 부터 생존할 수 있는 소인족을 탄생시킨다. 피라미드나 이스터섬의 거인석상, 페루의 나스카 지상화 등을 생각해보면 인류의 조상이 거인족이라거나, 갈수록 황폐해지는 지구환경을 생각해 볼 때 작아질 수록 생존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는 무턱대고 헛된 상상이라고 몰아부칠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지않는 나로서는 작가의 광대한 상상 속에서 매번 길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만 책을 덮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모든 것이 그냥 되풀이 될 뿐이기에 거인으로 부터 현 인류, 현 인류로부터 미니인간에 이르는 과정 또한 되풀이 된다는 주인공 다비드의 말은 <제3인류> 전체를 관통하는데, <개미>에 이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되풀이 해 짜집기한 것이 <제3인류>라는 생각이 들만큼 2권을 읽을즈음의 나는 편협해졌다.

 

무엇보다 거북스러웠던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인류 스스로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이용한 인간의 인위적 노력에 의해 인류가 진화해 왔고, 진화해 갈 것이라는 작가의 상상에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줄기세포니, 복제인간이니, 생명의 탄생과 죽음을 의도대로 조작하며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일을 늘 탐탁치않게 여겨왔던 나로서는 소설일 망정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다비드와 일군의 과학자 일행이 미니 인간을 창조해 내고, 그들에게 도덕관념과 규율을 가르치고 행하게 함으로써 타락과 범죄를 경계하게 하는 것이나, 죽음의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종교를 창시하는 과정 또한 인위적 조작에 의한 것으로, 그것이 비록 인류 역사에 진실일지언정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유쾌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다. 영 엉뚱한 상상이 아님에도 이 소설이 끝내 내게 불편했던 것은 생물학적이었든 사회과학적이었든 인간이 '인위적 조작'에 의해 진화해 나간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된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적 발상이 너무도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제3인류>는 베르베르의 첫소설 <개미>의 연장선 상에 있다.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되었고 인류가 절멸한 후에라도 살아남을 개미에게서 그 삶의 전략을 배우자는 것인데, 소형화와 여성화가 개미의 끈질긴 생멱력의 비밀로 인류가 진화해 나갈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개미에게도 자의식이 있을까?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의식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상상일지라도 인간의 개미화가 인류의 미래라니 어지간히 암담하게 여겨진다.

상상력의 결핍. 정해진 규칙과 규범을 익히고 행하며, 허황된 상상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배우고 믿고 자라온 탓이라고, 베르베르와 나 사이의 문화적 교육적 괴리 탓에 끝까지 즐겁게 <제3인류>를 읽을 수 없었노라고 슬그머니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

 

베르베르가 이 책에서 다루고 싶었던 것은 전쟁이나, 핵, 환경문제 등 인류사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당면 과제로 어쩌면 인류가 나아갈 바를 조명했다는 것에서는 높이 살만 하다. 그러나 진화를 위한 미니인간의 창조라는 명분으로 생산된 '에마슈'들이 첩보 활동을 위한 신인류라거나 전쟁은 허가받은 살인이며 전쟁과 자연재해를 통해 지구에게 버거운 인구 수를 조절해야만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거북함은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로봇과학을 언급하는 부분은 어쩐지 베르베르가 한국 독자를 의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것은 어쩌면 자격지심이겠지만) 순수하게 읽히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종교의 창시 과정 등을 짚어주는 현실적인 베르베르는 멋있었지만, 그 외의 인간 창조라든가 수천년 전 전생으로의 억지 귀향 따위가 그야말로 억지스러워 책을 읽는 동안 점차로 흥미가 떨어져갔고,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나로서는 무한대로 퍼져만가는 베르베르의 상상력의 가지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권인 것도 버거워 죽을 지경인데 시리즈로 계속 출판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헉!' 소리가 난다. 나는 이 두 권을 읽어낸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하느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가이아가 되었든 신의 존재를 믿는 나로서는 인간 스스로 신이 된다는 상상은 참으로 벅찬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세상을 해석해서 나에게 강요할까 두렵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 이상 모르게 될까도 두렵다. 내가 제대로 알고있던 계획이 이해하지 못하는 계획으로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설령 이해하더라도 아무런 감흥도 주지않는 계획, 혹은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계획이 바뀌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간은 역시 두렵다. 이모저모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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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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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20km를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한밤중에 12톤 트럭을 비롯한 여섯대의 차가 연쇄 추돌해, 여섯명이 숨지고 세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야기는 이 사고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신문사 주최의 아마추어 보도 사진전에서 연간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책을 저널리즘과 복수심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읽었다.

 

 

당장 인명 구조가 불가능했던 만큼,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현장을 담은 것은 보도사진에 뜻을 둔 야마가 씨 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촬영자가 언론 관계자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아마추어이므로 용서할 수 없다는 후지와라 씨의 비판은, 나에게는 감정에 치우친 의견으로 들린다. 또 이런 박력있는 보도사진은 '1만 분의 1혹은 10만 분의 1의 우연'을 만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인 만큼, 그런 의미에서 야마가 씨는 보도사진가로서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31쪽, 독자투고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반론글 중)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면서 아마추어 보도사진가인 야마가 교스케는 고속도로의 추돌사고 현장을 찍어 '격돌'이란 이름으로 신문사에 응모하고, 이 사진은 연간 최고상을 받게 된다. '격돌'은 교통사고의 일반적 보도 사진인 사고 후 처리 과정의 모습이 아니라, 사고 당시 뒤엉킨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한 장면을 생생하게 찍었다. 야마가 교스케는 야경을 찍기 위해 사고현장 주변의 고원을 돌던 중 우연히 사고장면을 목격했고, 촬영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심사위원장은 이를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고 표현하며 극찬한다.

 

신문의 독자 투고 난에는 야마가 교스케의 '격돌'이 너무 자극적이라 차마 똑바로 보기조차 힘들정도로 비참하며, 더구나 아마추어 사진가의 현상공모 방식으로 찍은 사진을 보도하고 수상하는 것은 지양될 필요가 있고, 또한 아마추어 사진가의 지나친 경쟁을 부추기는 신문사의 현상공모에 거부감을 표하는 부류와 보도에는 프로와 아마추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특히 '우연'이라는 결정적 순간은 아마추어에게 더 적합한 순간이며, 보상이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주장을 펴는 부류로 나뉘게 된다. 이른바 저널리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된 것이다. 과연 보도에 프로와 아마추어가 있을 수 있을까.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한 인간에게 자행된 폭력에 관한 이야기 이다.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해서 어쩌면 고지식하기까지 한 가정관리사 카타리나 블룸은 댄스파티에서 만난 탈영병이자 횡령범과의 하룻밤 사랑 후, 경찰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완전히 뒤바뀐 사람이 된다. 그녀가 경찰의 추격을 받는 범죄자의 내연녀였다라는 추측성 보도로 그녀의 평범했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진다. 이전의 정직하고 성실했던 삶으로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적 매장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이 경우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은 이른바 아마추어 보도가가 아닌 프로 저널리스트에 의한 것이었다. 신문기자는 카타리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흉악범의 애인으로 단정지어질 만한 사진들을 신문 1면에 보도함으로써 대중적 흥미에 맞춰 카타리나 라는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신문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차이퉁'으로 대변된 언론은 카타리나에게 왜 그토록 잔인했을까.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한 언론이라는 허울 좋은 명제 아래 고의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비틀며, 왜곡하지 않았던가. <10만 분의 1의 우연>에는 그렇게 짜맞춰진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생생한 사진' 만이 신문에 실리는 보도 사진의 유일한 조건일까요? (26쪽, 독자투고의 글 중)

 

전문 보도자와 아마추어 보도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보도를 업종으로 삼는 사람의 보도라고 해서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다소 잔인하거나 확장되어도 상관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보도에 있어 그 수위 조절은 프로나 아마추어의 경계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요즘세상은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을 이용한 다양한 저널리즘이 무차별 다수에 의해 또다시 무차별 다수에게 공격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크게는 사건 사고로 부터 작게는 식당의 메뉴나 서비스 정보까지.

이 중 우리가 알앙야 하는 정보는 어느 정도나 될까. 그리고 보도되는 정보들에 대해 어느정도까지 신용해야 할까. 보도의 사명과 인명 구조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지를 묻기 이전에 무수한 익명의 대중으로서 뭔가 화끈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누가 무슨 일을 벌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389쪽, 미야베 미유키의 해설 중) 일은 없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무수한 익명의 아마추어 저널리스트로서 '알린다는 행위'를 통해 이기적인 공명심 따위를 갖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복수심에 관하여.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칼에는 칼, 이에는 이' 이보다 더 충실한 복수도 없겠지만, 살인자라고 해서 목숨으로 죄값을 치르는 것에는 반대한다. 인권의 차원이거나, 인간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강제로 남의 삶을 빼앗은 사람이 사형된다고 해서 죄값을 다 치른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렇다. 그자가 한순간의 죽음으로 모든 죄갚음을 끝내기 보다는 사사로운 자유마저도 빼앗긴채 더 오래도록 죄책감으로 고통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니까.

 

다시 카타리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면, 카타리나 역시 왜곡과 과장으로 보도를 일삼아 자신의 삶을 망친 저널리스트에게 복수를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후 그녀는 살인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약 7시간 동안 길을 방황해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수 없었노라고 진술한다. 그만큼 카타리나에게 있어 저널리스트라는 그는 죽어마땅한 자였던 것이다.

누마이 쇼헤이 역시 공공의 제재를 통하기 보다는 개인적 복수를 계획한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 이기심을 채우려 한 자들을 향한 누마이의 뿌리깊은 원한은 백번을 이해하고도 남지만, 복수 방법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저주받을 자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해서 가슴에 남은 한은 다 풀리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더 피폐해 질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누마이로써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보다는 그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명예'에 상처를 내주는 것이 어땠을까. 그들의 거짓을 만천하에 열어 보이고, 그에 상응하는 파멸을 맛보게 하는 것이 더 통쾌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싸구려 공명심에 왜 누마이 쇼헤이가 목숨을 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지독한 복수는 원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닐까.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 중 <10만분의 1의 우연>은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일이 없었다 라고 미야베 미유키는 밝히고 있지만, 내가 읽은 세이초의 작품 중에는 이 작품이 최고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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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3-12-1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죠. 여태 나온 책을 모두 사서 구입을 했는 데 읽지는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ㅋ
오우 출판사에 책까지 제공 받아 쓰시다니 대단하세염 ㅋ
서평을 알차게 잘 쓰시네요. 책의 적절한 소개와 자신의 의견의 결합...흠 부럽네요.
저도 이렇게 쓰고 싶은 데 -.-

비의딸 2013-12-10 19:10   좋아요 0 | URL
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지만, 정작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는 좋아하지 않아요. 때문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위대함을 저는 전혀 못알아보겠더라구요.. 해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표작들에서는 별로 감흥을 받지 못하겠던데, 이 책은 좀 맘에 들었어요. 마쓰모토 세이초를 정말 좋아하시는 루신님이라면 좀 실망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시작부터 답이 뻔하거든요.
그리고 출판사 서평이라면,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말씀하시는거죠. ^^;
신간을 잘 안사보게 되는데 신간평가단을 하면 신간을 받아볼 수 있잖아요.. 그 욕심 때문이에요.
서평을 잘 쓰는 것 같진 않아요. 그저 내 나름의 감상을 잘 남기고 싶어요.
읽고, 쓰는 것이 참 좋아요. 내가 느낀걸 내가 다시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루쉰님의 꾸밈없는 생활글이 늘 부럽죠. 저야 말로 책을 읽고 내 개인적 이야기와 잘 조화하고 싶은 사람인걸요. 그게 참 힘들어요. 내가 본거, 느낀걸 글로 정리하는게.
칭찬에 칭찬을 되돌리는 이 어색함을 그저 웃음으로 넘기렵니다. 하!하!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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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읽으며 생각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아마추어 저널리즘으로 인해 발생한 살인 사건 이야기인데, <카타리나 불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경우도 역시 저널리즘의 폭력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는 프로 저널리즘이긴 하지만 말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은 것은 검찰과 언론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 날이 서있었을 때 였다. 그렇긴 했어도 나는 저널리즘의 폭력성에 초점을 두고 읽었었던가 보았다. 이번에 다시 읽다보니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여자의 사생활이 낱낱이 조사되고, 까발려지는 것에 새삼스럽게 경악했던 것이다.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경찰 조사라는 것이 물론 그렇겠지만, 예를 들면 그녀의 인간관계, 생활 습관, 은행 거래 내용은 당연한 것이고, 하다못해 가재도구와 속옷들을 구입한 돈의 출처, 지인들과 주고받은 온갖 사소한 편지, 평소 주행거리까지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목적과 이유가 불분명한 행동에 대해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카타리나는 의심을 받았다.

한 인간의 행동을 수면위로 끌어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자면, 말이 안되는 또는 앞뒤가 안맞는 행동이나 버릇같은 것은 종종 있기 마련이며, 이런 경우 그런 모든 것들이 괴상하게 보이고, 범죄와 연결된 어떤 도화선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카타리나는 때때로 비가 올 때면 아무 목적없이 차를 몰고 헤메기도 했다라고 증언하는데, '아무 목적없이 무작정'이라는 그녀의 해명은 깨끗하게 묵살당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놀랐는데, 어떤 인간도 모든 행위를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사를 받는 카타리나에게 사적이며 내밀한 개인적 비밀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조사 받는 중의 카타리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묵살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마치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 앉아 카타리나 라는 한 인간을 천천히 해부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한 개인으로써 자신의 사생활을 지킬 수 없도록 하는 것, 그것보다 더 가혹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범죄자가 받는 일련의 처벌 중에 가장 괴롭고 비참한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이지점의 카타리나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단지 범죄자를 도주시켰을 수도 있는 자, 혹은 범죄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자로서 의심을 받고 그에 대해 조사받는 중이었을 뿐이다.

그런 조사과정의 억측은 비틀리고 왜곡되며, 부풀려진채로 언론에 보도된다. 그저 다정함을 원했을 뿐이라는 카타리나의 변명은 탕녀의 그것처럼 오도되고, 그녀는 탈영병이며 횡령범인 루드비히의 숨겨진 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관계된 주변인물들은 공산주의자이거나, 과격한 좌파, 혹은 비종교적인 파렴치한으로 매번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된다. 다분히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보도로 카타리나는 모욕을 당하고, 그렇게 취급됨으로써 그녀는 평범했던 삶으로는 도저히 되돌아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라는 거창한 명제 앞에 한 인간의 삶은 무참히 짓밟힌다.

카타리나는 왜곡된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지점에 이르자 기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카타리나의 심문을 맡은 바이츠메네를 향해 총을 쏘고 싶었다. 사적이며 내밀한 한 개인의 비밀을 모두 앞에서 까발리며 왜곡하고 빙글빙글 웃어대던 그 파렴치한의 얼굴을 향해. 정신이 바로 설 수 없는 상태라면 그건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니까.

 

두번째 읽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개인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했는데, 특히 '사물'에 관한 것이었다. 카타리나의 불행을 보면서 그녀 소유의 사물들과 흔적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상황이 너무도 끔찍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그토록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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