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시장과 전장 박경리 장편소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시장과 전장>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씌여진 소설이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나, 전투 장면보다는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소외된 채 인민군과 군국, 또는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서 이리저리 내몰리는 민중 속 개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지영은 작가 자신의 경험치를 투영하고 있다고 한다. 박경리라는 작가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녀가 한때 선생을 할 정도의 인텔리 여성이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권위 속에 허덕이던 그시절 보통의 여성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적어도 20대 까지의 삶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 박경리는 1955년 등단 후,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로 부터 탈출해 자의식을 팽배히 들어내며 작가다운 통찰력으로 주관과 객관 사이를 넘나들게 된다.

 

<시장과 전장>에서 지영의 자의식은 전쟁발발 직 후 드러나게 되는데, 전쟁 전 일상 속에서 그는 가부장적 권위 아래, 남편과 어머니에게 눌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었다. 지영이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살림을 봐주는 친정어머니로 부터 도망치듯 떠나 낯선곳에서 선생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지영은 아직 어린 애기들이 있음에도, 집을 그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낯선 곳에서 오래도록 선생을 하기를 원한다. 나는 지영의  그러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여 아이들이 시아주버니인 기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을 정도로 지영은 가정에 대해,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냉담한 모습이다. 그러나 지영의 이런 생활감정의 메마름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자의식이 다시 살아나고, 활발히 표출됨으로써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친정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되살려 준다. 초반에 이해할 수 없던 지영의 냉담함은 남편과 어머니라는 권위 속에 질식 직전까지 감으로써 무기력했던 그녀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기 전 <시장과 전장>이라는 제목에서 내용을 추측하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정도였다. 인간해방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시작되었지만, 한 개인의 삶에는 무슨무슨 '주의'보다는 산다는 행위 자체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며,  시장도 전장도 목적이기 보다는 수단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전쟁 중에도 남대문 시장이 버젓이 영업을 했고, 피난의 와중에도 식료품이며 의류는 물론이고, 미제 그릇까지 사고팔렸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전쟁이라는 것은 다만 폐허일 뿐이고, 살기위한 허덕임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쟁 속에서도 나름의 체제와 문화와 사회가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전쟁 속에서도 사람과 상품은 소모될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자, 작가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상실되는 인간성, 혹은 전쟁을 통해 꾀해졌던 이득은 그 누구에도 돌아가지 못했다거나, 이데올로기는 로맨티스들의 한낱 환상일 뿐이라는 이야기이기보다는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자의식'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삶에는 '주의'나 '역사'보다는 생활이, 산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가장 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되, 이끌려 억지로 가느냐 자의식을 가지고 꿋꿋하게 자발적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사람다워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역시 작가라는 일은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작가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렇다. 또한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시절 억눌린 자의식을 품고, 박경리 그녀는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또 한편 글을 통해 자신을 풀어내면서 얼마나 흥겨웠을까. 그러나 이렇게든 살든 저렇게든 살든 인간은 죽는다. 창작을 통해 자신을 풀어내며 시대를 앞서갔던 한 여자도 그렇게 죽었다. 죽음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역설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박경리의 작품을 읽으며 그 말이 정말 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로니에북스에서 출판한 박경리 시리즈를 읽는 것이 <김약국의 딸들>, <뱁새족>, <표류도>와 그리고 이번 책 <시장과 전장>까지 모두 네권 째이다.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로 제목을 박은 겉표지 속에 파스텔 빛깔의 하드커버들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살펴보다가 겉표지 속에 숨겨진 박경리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했다. 마치 의외의 보물 지도를 발견해 낸 것처럼 깜짝 놀랐다. 글 속에서 자신을 열정적으로 표현했던 작가의 죽음을 애달프게 여기다 발견한 사진이라 그 놀라움과 즐거움이 더 컸다.  

 

<토지>외에는 아는 작품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가 외국문학에만 젖어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의 이야기임에도 너무 낯선 시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박경리와 같은 멋진 작가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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