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 읽기
김의기 지음 / 다른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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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감상 적기를 즐기는 나는 정작 다른 사람들의 서평은 잘 읽지않는다. 그러나 유독 서평서적은 좋아하는데, 그것은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본다. 다른사람이 적은 서평이 궁금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것보다는 읽고싶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골라내고 싶은 실용적인 욕심에서 서평서 읽기를 즐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읽은 책에 대한 평을 책으로 출판할 만큼 자신있게 추천하는 그들의 서평서 읽기는 기대한만큼 즐겁다. 저자가 추천하는 바로 그 책을 읽고싶은 흥분에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이미 읽은 책에 대해서는 나와 다른 지은이의 감상을 기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기대로 지금까지 수많은 서평서적을 읽었음에도 새로 출판되는 서평 책들은 마치 처음보는 책마냥 설레고 즐겁다.

 

제목만으로도 정말 유쾌해지는 <어는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지은이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WTO(World Trade Oragnization, 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에서 무려 24년간을 일하고 있으며, 또 국제기구 안의 북클럽을 통해 세계각국의 사람들을 책과 함께 만나고 있다고 했다. WTO와 FTA의 차이점도 제대로 모르는  나로서는 국제기구, 더구나 세계무역을 관장하는 기구에서 일하는 지은이의 이력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책들이 서로 다른 문명권의 멤버들이 북클럽에서 토의한 책들이라는 점에 몹시 끌렸다. 작은 동네 북클럽 회원들 조차도 같은 책을 읽고 다른 감상을 말하기 일수인데, 환경과 관습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북클럽의 토의는 어떤 장면일까 몹시 궁금했다. 지은이의 생각을 적은 서평들이지만, 분명 북클럽의 토의내용이 적지않은 부분 포함되어 있으리란 기대로 이 책을 펼치기가 더더욱 흥분이 되었다.

지은이는 프롤로그에서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작품에 대한 해석이 종래의 해석과 상당히 다르고 신선한 느낌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각각의 서평을 읽으며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의아스러울만큼 새롭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쩌면 다른 환경, 다른 문화 속의 사람들이라 해도 인간이 책을 통해 느끼는 감성은 생각만큼 크게 색다르진 않을수 있겠다 싶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글에는 책을 읽으며 떠오른 지은이의 생각과 지은이 자신의 삶이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작품들의 줄거리가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지은이가 추천하고 있는 책들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또 반대로 고전을 읽고 싶지만, 너무 생뚱맞거나 어려울듯 해 시도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미리보기 같은 역할을 할수도 있겠다.

지은이는 책을 시작하며 '독서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요, 세상과 나누는 대화'라 했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 책을 읽을 당시의 환경에 따라 미미하게 다른 감정을 느낄수 있다. 그것이 바로 책을 읽는 재미이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미 읽었던 책들조차도 다시 읽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한 아직 읽지않았지만 언젠간 읽어야지 했던 책, 예를 들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경우 당장 읽고싶은 흥분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책을 권하는 책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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뱁새족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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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뱁새족>은 일제시대 통영 땅이 배경인 <김약국의 딸들>보다 어째 더 읽기 쉽지않았다. 시간적 배경으로 본다면야 <김약국의 딸들>이 훨씬 이전이지만, 1960년대의 용어나 시대상이 익숙하지 않은 탓인가 보았다. 1960년대라면 50년 전쯤으로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건만 너무도 낯설어서 한 문장을 읽는데도 두세번을 반복해야 했다. 음미하고 느끼며 되새길 시간이 없을만큼 빠르게 우리나라의 사회 상황과 경제 상황이 달라진 탓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외국문학을 더 많이 접한 탓일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이것은 내 개인적 취향 탓일까, 출판계의 경향 탓일까? 거창하게 출판계 상황까지는 잘은 모르니 소견 좁은 내 취향 탓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소위 지식층과 상류층으로 불리는 계층의 허위허식을 비판한 이 책은 고급 주택가에 어울리지 않는 분뇨 냄새로 시작된다. 등장인물을 보자면 상류층으로 분류되는 그들은 대체로 모두 한결같이 웃고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주인공인 유학파 병삼은 이렇게 표현한다.
 
모두 한결같이 웃고 있었다. 슬픔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들은 얼굴을 주워 모아 웃기고 있는 만화의 한 컷 같았다. '단순하고 배짱 좋고 만사를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약고 재빠르며 능청스런 그네들... '(중략) 소심하고 복잡하며, 뽐내고 등쳐먹고 굽실거리는, 그래도 슬프니 말이다. 광대이기 때문에 슬픈거다. 광대는 자고로 남자였었다. 여자는 아름다워야 노리개가 되고 남자는 병신에다 못나야만 노리갯감이 된다. 슬프고 비참하지 않고서 어찌 남을 웃기겠는가. (62쪽)
 
이러한 시각으로 당대의 지식인과 상류층을 바라보는 병삼은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에서 그 자신 역시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밉살스런 소리를 잘도 하는 병삼이 마냥 밉기만 하지 않다. 그러나 욕망이 나쁜 것,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하류로 머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상류로 모여들기 마련이 아닐까? 모두가 한결같이 욕망을 쫓는 이 실타래에서 누가 진정 황새이고, 누가 황새를 쫓는 뱁새인지의 구분은 필요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본시 인간사회에 타고난 황새란 누구이며, 황새가 되고자 하는 뱁새는 누구인지 말이다. 인간은 모두 같은 인간일 뿐인데 굳이 상류, 하류의 구분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누구란 말인가. 정작 본인은 선택한 적도, 선택할 수도 없는 '태생'만으로 그런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면, 욕망을 쫓아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어째서 잘못인지 하는 황당한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황새가 되고 싶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더 안쓰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본질적으로 '부'로 계층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황당하고 우스운 것이다. 한마디로 이래저래 똥 폼 잡는 인간이 우스운 것이다.
 
일본 왕의 징표인 검, 곡옥(?), 거울을 '삼종신기'라 한다는데, 작가는 1960대 상류층의 삼종신기로 '텔레비전, 냉장고, 피아노'를 꼽았다. 2013년 오늘날 상류층의 삼종신기는 무엇일까. 한정판 외제차, 표나지 않는 명품백 뭐 그런것으로 상류층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놀라울만큼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고 그 결과로 텔레비전, 냉장고, 피아노 따위야 얼마든지 넘쳐나는 요즘에도 여전히 물질적인 것들로 상류를 나누는 시대이긴 하다.
병삼은 지적 충만함을 일등시민의 조건으로 보고있는데, 나 역시 병삼과 같은 부류로 물질적인 것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는 그들을 모멸과 질시를 담은 눈으로 보지만, 병삼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때 나역시 슬픔을 느낀다. 산다는 건 모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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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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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학교없는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때 사제였던 철학자 이반 일리치와 톨스토의 이반 일리치가 동일인물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동일인물은 아니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이고,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었으니 시기적으로도 당연히 동일 인물일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동명이인이라는 것 만으로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료들이 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족이 바라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느끼는 그 자신의 죽음과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인에 관한 이야기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으로 죽은자가 자신이 아님에 안도하며, 재판관이었던 그의 뒷자리를 누가 잇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나름 기대를 걸기도 하고, 그날밤 카드놀이 참석여부 따위에 신경을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이반 일리치의 아내는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얼마나 더 지급받을 수 있는지에 촉각을 세웠다. 이반 일리치는 동료나 가족의 이러한 모습을 미리 예견하고, 지레짐작하면서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집착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반 일리치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대할 때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맞는 주변인의 죽음 앞에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애통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장 나에게는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불행인양 안도한 적은 없었던가. 오롯이 그의 죽음이 슬프기만 했던 그런 기억은 너무도 멀다. 아마도 어린시절 맞았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나에게 미칠 영향따위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프기만 했던 죽음이었다면 그에비해 그후의 몇번 맞이한 지인들의 죽음은 무작정 슬프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주검앞에서 내 개인적인 안녕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매번 내 자신을 추스리기에 바빴다.

톨스토이가 인간과 어떻게 사는가에 집중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인것이 아닐까.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자신을 모델로 했던 레빈은 형의 죽음 앞에 고독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레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오히려 몇번의 자살 시도를 통해 벗어나고자 했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이강은 교수는 이반 일리치가 죽음의 고통으로 소리내어 울고 싶고, 누군가가 그런 그를 어린아이처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같이 울어주는 것만을 바라는 대목에서 이반 일리치와 함께 울었다고 했다. 나역시 그 대목에서 그럴수밖에 없었는데, 누구나 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것을 삶 속에서 이미 절절히 체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진심어린 위로가 절실한 것이 아닐까.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주변인이 아무리 많다해도, 결국 나혼자 가는 길이다. 내 고통을 오롯이 느껴주지 않는다 해서 그다지 슬퍼할 것도, 억울해 할 것도, 분해할 것도 없다. 나역시 타인의 죽음을 온전히 내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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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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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이 이야기>를 쓴 작가 얀 마텔이 자국인 캐나다의 수상에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해 달라는 의미로 보낸 101통의 구애편지다. 이 편지들은 거의 사년 간, 격주로 추천 도서와 함께 수상 집무실로 보내졌다.

얀 마텔의 편지와 책 선물을, 주기적이며 일방적으로 받아야 했던 캐나다 수상은 마지막 101번째 편지가 도착한 이후로도 이에 대해 어떠한 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드물게 수상 집무실의 문서담당관으로 부터 짤막하고 피상적인 감사의 인삿말을 담은 짧은 편지가 보내지기는 했다. 101통의 편지 중, 총 7통의 대리 답장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나라의 수반인 수상이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노닥거릴 여유가 없다는 뜻이였을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제안되는 독서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였을까? 아니면 수상은 원래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관심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수상이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얀 마텔과 수상간의 활발한 논의로 일방적인 책 추천이 얼마든지 바뀔 여지가 있었고, 또 근본적으로 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수상이라면 자국민의 주기적이고 장기적인 이러한 노력에 아주 작은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무래도 수상이라는 직책은 독서할 짬이 나지 않는다는 쪽으로 나는 추측한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작가가 수상에게 권하는 책이 어떤 것이였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추천도서 목록에서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깊은 밤 부엌에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우리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해 중학교 1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바로 그 모르스 샌닥의 그림책이 바로 수상을 위한 추천도서 목록에 있었던 거다.

얀 마텔은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는 뜻에서 두 권의 그림책을 고른 것인데, 무엇보다 문학의 힘이 '상상력'에 있다고 믿는 그는, 따분하고 편협만 마음을 가진 어른은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직책 때문에라도 늘 경직되어있을 수상에게 어린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상상력을 펼쳐 볼 것을 권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문학을 권하는 이유는 이 두권의 그림책을 고른 이유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물론 정치는 한 개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독자적인 의견으로 하는 것은 아닌, 여럿이 함께 모여 나누어야 하는 가장 사회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정치는 타협의 예술이며, 어쩌면 가장 덜 창의적인 분야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상상력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풍부해질 수록 이성과 감성에서 모두 유능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를 내려놓고 남과의 타협을 이끌어내려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상상력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수상에게 보내진 책들은 소설과 희곡, 시, 동화와 만화, 그림책과 몇편의 논픽션이 있었으며, 놀랍게도 '할리퀸 로맨스'까지 포함되어있었다. 이 역시 그림책과 마찬가지로 쪼그라들지 않는 상상력을 위한 추천서였다. 과연 수상은 얀 마텔이 보낸 책들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 또 만약 읽었다면 얀 마텔의 기대대로 조금이라도 더 현명해졌을지 살짝 궁금하다. 그랬다면 그렇게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둘만의 특별한 독서클럽을 끝내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캐나다에 대해, 그리고 수상 스티븐 하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얀 마텔에 의하면 캐나다의 수상 스티븐 하퍼는 자신의 원칙과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기대하는 원칙주의자이다. 얀 마텔은 나라의 지도자에게 이런 모습은 바람직 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현시스템에서 '나'라는 개인은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라의 지도자인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며,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가 그의 학력이나, 경력, 재산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또한 책을, 문학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서 바른 생각과 깊은 사색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얀 마텔은 수상에게 둘만의 특별한 독서 클럽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가 얀 마텔의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작은 일방적인 것이였더라도 만약, 작가와 수상의 특별한 독서 클럽이 주고받는 관계속에서 이어졌더라면, 이는 어쩌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사례로 오래도록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어떤 작가라도 박근혜 대통령께 둘만의 특별한 독서 클럽을 제안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캐나다 수상처럼 작가와 노닥거릴 짬이 도저히 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한나라의 수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한사람의 독서광으로 얼마든지 특별한 독서 클럽에 흠뻑 빠져들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추천서들 중 캐나다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그중 캐나다 자유당 당수를 지냈다는 마이클 이그나티에프의 <덜 악한 것>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아프리카인과 유럽인의 만남이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간 이유는 어느 한쪽이 열등했기 때문이 아니라 둘 모두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427)이라고 쓴 치아누 아체베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를 꼭 읽어야 겠다.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는 더 현명한 사람이 되려 한다.

87번째로 보내진 책 <정다운 고향 시카고>에 관한 에피소드는 오래 생각하고 싶다. 얀 마텔은 문화 친화적인 페스티벌에서 <정다운 고향 시카고>를 쓴 작가 애슈턴 그레이로 부터 직접 이 책을 샀다. 애슈턴 그레이는 이 소설을 자비로 출판하고 페스티벌에서 직접 판매까지 했는데, 얀 마텔은 이 책이 결함도 많고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불분명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에게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작품의 질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는 애슈턴 그레이의 열망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작가에게서 태어난 이야기는 병을 탈출하려는 요정처럼 누군가에게 공유되기를 원한다는 얀 마텔의 설명도 근사했지만, 무엇보다 애슈턴 그레이가 다음해인 2011년 캠핑도중 급사했다는 작가 이력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명의 소설가이거나, 한 나라를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이거나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 있는 똑같은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며 미친듯이 일만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채 어느날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읽지않거나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나는 사라질 수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 나는 삶을 절실히 느끼고 싶다. 관대하고 싶고, 겸손하고 싶다. 물론 책을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장장 600쪽의 장서였지만,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좋은 책이였다. 다만 아쉽게도 소소한 오타가 너무 많아서 속상했다. 철자의 실수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얀 마텔인듯 한데, 정작 자신의 책이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렇게 오타 투성이로 출판된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내심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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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인생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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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톨스토이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톨스토이 말년에 썼다는 <부활>이나, 이사야 벌린이 쓴 <고슴도치와 여우> 읽고서는 생기지 않았던 관심이었다.  '안나'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묘사와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으로 봐도 좋을 도덕적인 청년 '레빈'에게 깊은 감흥을 느꼈다. 안나의 불안이 나 자신의 불행했던 기억과 겹치면서 묘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면, 건실한 청년 레빈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에 가까운 인물이라서 였을 것이다. 때문에 내가 읽었던 문학동네 판이 아닌, 민음사에서 출판된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작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니 톨스토이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는 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중점으로 하되 톨스토이의 다른 소설 <전쟁과 평화>,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가정의 행복>과 지은이 석영중이 '설교'라고 표현한 저작들 <나의 참회>, <인생에 대하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 작품에 나타난 톨스토이를 이야기 한다. 석영중에 의하면 말년의 톨스토이는 '도덕에 미친 노인'에 불과했다. 무엇이 그토록 톨스토이를 '도덕'에 목매도록 했던 것일까. 아마도 톨스토이 자신이 방탕한 젊은 시절을 온몸으로 체험 한 후에 내린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은 설교, 혹은 잔소리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 법이 아니던가.

톨스토이가 대문호라고 하지만 제아무리 설교한들 육체적 관계를 기피해 인류가 절멸될 리도, 모든 사람이 시골로 돌아갈 리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톨스토이의 말년 설교는 한마디로 '헛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렇다고 석영중이 톨스토이의 문학적 역량이나 그의 영향력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먼저 톨스토이가 대문호며 매혹적인 작가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렇더라도 실천가능성이 없는 이상주의적 설교를 늘어놓는 늙은이로의 돌변은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 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인간은 변한다. 따라서 진리도 변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가진 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톨스토이가 평생에 걸쳐 제아무리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발견했을 지언정, 강요는 곤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강요한다고 해서 실천할 대중은 많지 않을테지만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의 지은이 석영중이 톨스토이를 도덕에 미친 늙은이쯤으로 몰아부치는 것 또한 유쾌하지는 않았다. 도덕적으로 미친 늙은 톨스토이에 대한 비판이 부담스러웠는지 마지막 에필로그에 지은이는 실천 불가능한 주장을 한 톨스토이이지만, 그의 가르침과 설교는 잘 간추리면 결국 절제와 나눔과 베풂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는 혼돈의 시대에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근본적인 가치임을 주장한다. 이를 '진리'로 묶어 실천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한층 강조하고 있지만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는 것에는 반대한다. 예술에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설이 따로 필요치 않듯(톨스토이는 예술론에서 예술에 대한 전문가의 해석은 필요치 않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나의 평소 생각과 일치한다. 이런 소소한 것들로 볼때 나는 톨스토이주의자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나면 본인 스스로 해석하는 <안나 카레니나>가 변색될 수 있으리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갈증은 커졌으며, 많은 부분에서 톨스토이의 주장이 이상적이지만, 옳은 이야기를 것을 거부할 수 없으며 한층 톨스토이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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