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59년에 씌여진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1959년이라는 연도가 너무 낯설다. 오히려 조선시대, 일제시대의 이야기라면 이토록 생경한 느낌은 아닐것이라고도 생각해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시대든, 일제시대든, 1959년이든 우리에겐 마치 과거가 없었던 듯 낯설다. 1959년이 지금으로 부터 그토록 오래전은 아니라는 것도 당황스러울 만큼 낯설다. 50~60년 새에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기 때문에 낯설음의 진폭이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앞으로 50년이 지난후, 2013년을 무대로 한 소설을 읽는다면 이처럼 낯설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지난 50년간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여온 우리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최근까지도 생존해 계셨던 작가 박경리의 명성 때문에라도 이 소설이 낯선데, 그것은 박경리하면 <토지>로 대변되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새롭기도 한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어쨌든 그 '옛날'이라고 여겨지는 1959년에도 불륜을 소재로한 소설이 쓰이곤 했던 것이다. 그 시절엔 새삼 불륜일 것도 없이 그저 후처라거나, 첩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은 흔히 외도를 일삼았을 듯 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니, 남자들의 외도를 '불륜'이라 이름하며 소재로 쓴 소설이 드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옛날'은 아닌 것이다.  

시대적으로 1959년을 낯설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없다. 물론 용어라던가 표현방식이 지금 사용되는 것과 달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저 시대에 따른 표현 방식일 뿐,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낯선 용어에 대한 나름의 해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인공 현회는 다방 마담이다. 그녀는 딸 아이와 노모, 그리고 배다른 동생을 부양하고 있다. 마담과 부양가족은 제법 통속적이지만, 색다른 것은 그녀는 6·25전쟁 전, 명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인텔리이며, 소설을 번역하고 원어민과의 영어 대화를 알아들을 만큼 어학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녀가 보통을 넘는 지적 능력과 함께 매우 진보적인 가치관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여성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생계를 위해 다방 마담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현회와 사랑에 빠지는 상현은 경제적으로도 사회계층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결혼하였다. 다만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생활감정을 고려해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한 것이 그가 방황하는 원인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애정이 있는 결혼생활을 하였더라도, 그시대의 남성들의 정조관, 혹은 연애관, 또는 여성관을 생각해 볼때, 외도는 그다지 별난 일은 아닐 수 있다 생각된다. 어쨌든 현회와 상현은 운명적 사랑이라고 일컫어지는 불륜에 빠져든다.  

 

 

만일 이 소설이 단순히 불륜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을 것이며, 박경리 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 불륜에 관한 소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작품해설에서 이것을 겉서사와 속서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거창하게 평론까지 아니여도,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며,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고독한 존재,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덮어보지만, 결국 사랑때문에 더 고독해지는 것이 인간이며 운명인 것이다. 

때문에 상현의 방황은 뒤늦게 찾은 진정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옭아매는 굴레로 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말이지 모든 것 잊어버리고 싶어. 부모, 자식, 사회, 가정, 이러한 것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나 봉사는 자벌적인 것이라야지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오. 우리는 소처럼 평생 달구지를 끌고 갈 수는 없어.(144쪽, 상현)

 

<표류도>라는 제목에 대해 책을 읽기 전에는 '방황기'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책을 읽는 중간, 그러니까 현회와 상현이 한참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이 둘이 둘만의 쉴곳을 찾아 표류한다는 의미인가보다 이해했다. 그러나 상현을 떠나 보내는 결말에는 인간은 흘러가는 고독한 섬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되새기게 된다. 그러나 그 흐름은 반드시 자의적인 것이어야 하며, 방향을 잃은 것이어서는 안된다.

책을 읽기 전 현회의 회상 중 '사람도 죽였고...' 하는 부분에 특히 관심이 갔다. 그녀는 정말 미친 사랑을 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불륜은 도덕적으로야 어떻든 옳지 못한 것이지만, 감정적으로도 그러한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미친 사랑'이라는 것도 인간의 작위적인 한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무료하기도 한 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현회와 상현은 어떻든 사랑을 했다고 믿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나로서는 그들이 미친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잠깐 정말 미쳤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살 수 없는 것이 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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