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 코스메틱 - ‘화장품 골라주는 여자’ 이선배의 아이템별 최고의 화장품!
이선배 지음 / 지식너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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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나 월간지를 잘 보지 않는 나는 화장품에 대한 정보를 주로 백화점 매장 직원에게서 듣곤 한다. 매장 직원의 일이 판매이므로 당연히 자사 제품에 대한 홍보가 주된 정보라는 것을 알고있지만, 피부에 좋다는 무슨무슨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귀가 솔깃해지는 건 정말 어쩔수가 없다.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러가기에 앞서 필요한 제품만 구매하겠다고 다짐을 하곤 하지만, 생긋 웃는 얼굴로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새로운 제품을 권하는 직원의 말에 매번 깜빡 넘어가곤 해 생각지않은 제품을 구매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구매한 제품은 열이면 아홉은 몇 번 쓰지도 않고 굴리거나, 얼굴에 맞든 맞지않든 돈이 아까워서라도 억지로 쓰는 일이 잦다. 거기에 덤으로 주는 샘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수지맞는 기분으로 챙겨받을 때도 있지만, 화장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굴러다니는 샘플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꼼꼼하고 자상하게 이것저것 써보라고 챙겨주는 매장 직원의 선의 아닌 선의를 뿌리칠 수 없어 한뭉치씩 들고오곤 하는 것이다.

 

어디선가 백화점의 1층에 화장품 매장이 위치한 이유는 백화점 전체 매상 중에 화장품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은이 이선배도 프롤로그에서 얘기한 것처럼, '립스틱 효과'는 불경기거나 호경기거나 상관없이 여자들의 욕망을 가장 쉽게 자극하고, 여자들 또한 상대적으로 쉽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물건은 화장품이라는 의미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려한 조명발 아래 거울 앞에선 모습은 분명 평상시 모습과는 달라 보일테고, 기적의 무슨무슨 크림을 발라도 여배우와 같은 뽀얀 피부를 가질 수 있는 느닺없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저 그냥 그렇게 속고싶은 것이다.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아름다워 질 것이라는 그 속된 욕망에. 

 

월간지를 잘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미용실을 찾을 때마다 월간지의 화장품 사용기를 유심히 보곤 한다. 쉽게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 화장품이긴 하지만, 잦은 구매 실패는 아무래도 풍족하지 못한 주머니를 갖은 나로서는 타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추천별이 많은 제품을 위주로 자외선차단제나 파우더, 립스틱을 구매하게 되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성공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화학을 전공하고 패션 잡지에서 오랫동안 에디터로 일했으며, 어릴 때부터 '뷰티'에 관심이 많아 화장품 마니아로 산 세월이 적지않다는 이선배의 <잇 코스메틱>은 내게 너무 유용한 책이다.

 

화학 용어만 봐도 머리가 아픈 나로서는 제품 성분을 꼼꼼히 따지는 일 같은 건 이후로도 여전히 하지 않겠지만, 1장에 정리된 화장품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나, 내 피부에 맞는 아이템, 그리고 꼭 필요한 화장품 정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장품 매장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넘어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힘을 받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2장의 아이템별로 지은이 이선배가 추천하는 제품들이 간단하게 정리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성분은 모를뿐더러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않고 더불어 꼼꼼히 따지는 일은 더더욱 못하지만, 공정함과 균형감을 최대한 지킨 뷰티 책을 내고 싶었노라는 지은이의 말을 믿고싶은 것이다. 지은이의 그말이 진실이라면 화장품 추천에 있어 아무런 사심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추천 제품들을 써보고 내 피부에 맞는 제품인지는 내가 느껴야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것은 '팩'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인데, 푸석푸석하고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날 긴급처방으로 팩을 자주 사용하는 나로써는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시트팩에 대한 정보는 있다)

 

어쨌든 <잇 코스메틱>은 한번보고 말 책은 아니다. 마치 화장품 백과사전처럼 화장대 옆에 꽂아두고 필요한 제품의 구매에 앞서 한번씩 읽어보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더불어 부록으로 실린 '해외여행 시 화장품 알뜰 쇼핑 노하우'나 '해외 화장품 온라인 쇼핑몰' 그리고 '브랜드별 특징과 대표 제품' 조차도 너무나 유용한 정보라서 비싼거면 뭐든 좋은것이겠거니 막연하게 기대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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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가 2014-11-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요즘 이곳에서 글을 재미나게 읽고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과 느낌이 비슷하거나 명확하게 글로 전달받는것같아 잠시 님의글에 빠져있지요 ^ ^ 그냥 조용히 리딩만 하고있었는데 이부분에선 걍 지나칠수가 없네요 수년전에 읽은 <대한민국화장품의 비밀> 을 함 읽어보시라고 권하고싶네요 제가 그책 읽고 화장품 에 대한 환상을 깨게 됐거든요
 
슬픔이여 안녕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13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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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분명 열 몇살의 소녀때 였을 것인데, 그것이 열다섯 무렵이였는지, 열 일곱 무렵이였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제 막 열다섯이 된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소녀시절 읽었던 책이였으며,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소녀가 읽기에 무리가 없는 성장기 였다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였다. 무심코 인터넷 서점을 통해 조카에게 책을 보내고, 책꽂이에서 함참을 뒤져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 후, 나는 이 소설이 열다섯살 소녀가 읽기에 좀 무리가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욕망에 충실한 바람둥이 아빠 때문만은 아니겠는데, 열일곱 살의 주인공 세실은 술도, 운전도, 담배도 서슴치 않는 이른바 '불량소녀'로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래도, 그렇긴 하지만 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다가 결국 인터넷 서점의 배송을 취소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세실이 스믈여섯의 청년과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에 맞닥드리게 되면서 였다.
물론 지금의 나는 성적인 것을 이 소설의 주안점으로 읽지 않을 만큼 성숙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세실이 새엄마 후보인 안느에게 갖는 컴플렉스나, 외딸을 키우며 사는 홀아비로서는 적당치 않는 세실 아빠의 성생활에 초점을 두고 책을 읽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지만 어쩐지 나는 조카가 세실을 자기와 동일시 하다 못해 남자 친구와 몹쓸 모험이라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제 나도 생의 안정을 갈구하는 '안느'와 같은 부류가 된 것이다.

프랑스와즈 사강. 매혹적인 작은 악마. 
<슬픔이여 안녕>의 스토리는 마치 사강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유한 실업가의 막내 딸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수도원에서 성장했다는 사강 그 자신이 바로 세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 그녀의 아버지가 이미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였기 때문에 사강조차도 욕망을 쫓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사강의 말에서 차용된 것이라니, 더더욱 놀랍다. 이십대의 그시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무던히도 휘청댔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모험이였고, 자유로워지고싶은 몸부림이였으며, 내 자신에 대한 파괴의 시절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너짐에까지도 나는 완전하지 못했다.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다른 성장배경이 있었다면, 한번쯤은 완벽하게 사강처럼 처절하게 바닥까지 무너져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번역가 김남주는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서 청춘의 절정에서도 사강과 같은 기개를 갖지 못했던 자신으로서는 사강을 선망하지 않을 수 없다 했는데, 나 역시 그렇다. 어느 곳에 매복해 있다 내 발목을 잡을 지 모르는 '삶(죽음이 아닌 삶)'에 철저하게 나를 저당잡힌 채로 살아온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이 무엇보다 우선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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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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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다. 사강은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물음 뒤에는 반드시 말줄임표를 써야 한다고 했다는데, 어쩌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냐는 물음의 대상은 브람스가 아니라 묻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아니였을까.

<슬픔이여 안녕>은 소녀 시절 읽었던 책이고, <한달 후, 일년 후>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인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를 읽은지도 이미 오래지만, 언젠가 드라마 제목으로도 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만큼은 겨우 오늘에야 읽을 수 있었다. 김남주의 <나의 프랑스식 서재>에 힘입어.
 
사강을 말할 때 흔히 불꽃같은 그녀라고 했던가,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고 했던가. 어떤 성장 배경을 가졌기에 사강은 그토록 삶에 두려움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일까, 불량스럽게 보이던 그녀의 전생이 완전하게 부럽기만 한데... 그런 그녀도 역시 노쇠나 죽음을 두려워 하긴 했던 것일까. 아니, 내가 보기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조금 놀아본 언니로서 관조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마지막까지도 삶을 낭비하듯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완벽하고도 완전하게...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 ....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이라고 노년을 함축했다는 사강의 말은 젊은 애인 시몽을 사랑하지 못하고 지레 지쳐버린 연상의 그녀, 폴의 심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노년을 앞두고 있다기엔 서른아홉은 너무 지나치게 젊은 나이 아닌가? 하긴 열네살 연하인 시몽에 비한다면야 지나치게 무르익은 나이이긴 하다만.
그리고 사강이 이 작품을 쓴 나이는 스믈넷. 열아홉 살에 <슬픔이여 안녕>을 써 일약 스타가 된 그녀는 스피드광으로 22세에 자동차 사고로 이미 죽음의 문턱을 밟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했다고 한다. 그랬기때문에 자신은 정작 스믈넷이면서도 서른아홉 여인의 젊음에 대한 추억과 노쇠에 대한 갈망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익숙한 것과 결별하지 못할 때,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만남, 새로운 장소, 그런것들이 두려워지는 바로 그때가 생물학적인 시기와는 관계없이 노년의 초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강은 너무 일찍 삶을 알아버린 듯도 하고... 또 병으로 세상을 뜬 그녀의 나이가, 69세 였으니 생각보다는 오래 산듯도 하고... 아무렴 천재들의 박명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하니 오히려 69세까지 살 수 있었던 사강은 장수한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라면 어떨까. 이미 습관처럼 익숙한 로제를 완전히 잊고, 낯설기에 오히려 매력적인 시몽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역시, 사랑은 자신에 대한 투영인 것. 완벽하고도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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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 열세 명 어린 배낭여행자들의 라오스 여행기
김향미 지음 / 예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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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방학동안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아이를 홀로 여행을 떠나 보내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적당하다고 여겨진 여행은 6박 7일간의 필리핀 공정여행이었는데,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아이를 이 여행에 보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단지 우리 가족이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중학교 1학년씩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부모와 따로 떨어져 또래끼리 하는 여행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첫번째 였고, 외동인 아이가 방학동안 혼자서 집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 바쁘게 하자는 숨은 심산도 있었다. 

또한 우리보다 사회 경제적 여건이 떨어지는 곳에서 그간 안하던 고생으로 부모밑에서 누리는 호강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의미도 있었고, 편식이 걱정되어 반찬까지 밥위에 올려주며 오만 잔소리를 늘어놓는 엄마로부터 독립해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제 겨우 어린아이의 티를 벗고 제법 굵어진 목소리로 '싫어'를 연발하며 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외치는 아이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느껴보라는 의미도 다소간 있었으며, 무엇보다 네가 무엇을 해야할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순전히 즐기고 오라는 의미는 아니였던 것이다. 고작 6박7일간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랬는데 그토록 많은 숨은 뜻이 있었던 여행의 의미가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가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미래를 꿈꾸는데 꼭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피부로 느낀 후에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던가.

 

부모가 청소년기의 아이를 멀리 해외여행에 떠나보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체로 부모로 부터 독립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다양한 경험으로 큰 꿈을 품어보라는 것 두가지로 요약될 것 같다.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의 부모들 역시 그랬다. 열넷, 열다섯, 많게는 열 아홉까지 열 세명의 아이를 장장 26박 27일간의 라오스 여행에 떠나보냈던 부모들도 그런 심정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들이 원했던 것을 아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고도 충분하게 채우고 돌아왔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여행에서조차도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저 단순하게 보고 즐기면 안되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꼭 가슴에 담아서 꼭꼭 되씹어야 하는 것일까.

 

여행학교를 기획하고 실행한 김향미 양학용 부부는 아이들에게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흔한 것을 소중하게,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에 품을 별하나 심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여행은 자고로 관광이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어른은 아이들 스스로가 주어진 돈으로 숙소를 구하고, 식사를 해결하고, 할일을 결정해 지도를 들고 그 낯선 곳을 헤매였다는 생각을 하니 내 무릎이 다 떨리는 것 같다. 무사히 큰 사고없이 잘 지내고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만에 하나 무슨 사고라도 있었다면 어쨌을 것인가. 혹시 이 여행학교를 떠나보낸 부모들은 무슨 각서같은 쓴 것은 아니였겠지? 만에 하나라도 여행지에서 당하게 되는 불의의 사고에 대해 책임을 묻지않겠다는 그런 무시무시한 각서같은 것에 서명이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잃을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있지만, 아이일이다 보니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여행하는 이유'만을 생각해 본다면 여행중 만나는 크고작은 사고도 여행의 중요한 의미일 것 같다. 그것을 팔자라고 해야 하나,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저런 걱정을 뒤로 하고 아이가 여행을 통해 오로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즐겁게, 오늘을 즐겁게 지내고 나면 그이후의 날들도 충분히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얼마든지 아이를 떠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상상 못할 갖가지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렇다면 이번 겨울 방학엔 나도 용기를 내어 아이를 떠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내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색깔이든, 이번 여행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훗날 삶을 살아가다 팍팍하고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면 작더라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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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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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지 않기 위해. 혹은 과장되게 자신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게 된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이 인생인지 모르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살 때, 삶에 더 충실하게 되지 않았던가.

문제는 여유인지 모른다. 먹고 사는 문제의 여유. 생각할 여유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부패하게 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안으로 곪아들어갈 소지가 있는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자, 끊임없이 노동하라.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해서. 삶에 찌들은 얼굴로는 시선을 밖에 둘 여유가 없을테니.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담 보바리를 읽은 내 감상.

마치 겉과 속이 다른 고해성사를 했을 때처럼 미적지근하고 껄끄러운 느낌이다. 엠마만큼 타락하고 싶지 않았다고 내 스스로를 고해할 수 있을까. 엠마만큼 실패하지 않았기때문에 지금껏 살아있노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까.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아닌 다른 타인을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일시적인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환상은 물리학적으로도 2년이면 족하다고 하지 않는가. 대상을 바꿔줘야 하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어쩌면 바람둥이 만이 진정한 사랑을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끝내 바람둥이가 되지 못하고 한가정에 안주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그러나 엠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사랑도 아니고, 간음도 아닌다. 단지 그녀의 끝을 모르는 사치와 허영이었을뿐. 시대는 바뀌어도 물질에 대한 가치와 정신의 가치는 바뀌지 않고 돌고도는 쳇바퀴 속 다람쥐와 같다. 오늘의 불륜 드라마 속에서 수없는 엠마를 보며 내 속에 사는 꺼지지않는 욕망의 엠마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7월 10일 작성

 

그리고 4년 하고도 2개월 남짓 후,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

불현듯 보바리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팟 케스트에서 들은 책 읽어주는 프로 때문이었다. 진행자와 북매니저로 불리는 두 명의 게스트들은 보바리 부인의 불행이 '책' 때문이라고 했다. 엠마가 수녀원에서 쌓은 지적능력과 어설픈 독서들로 인해 욕망의 방종이라는 결과를 낸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엠마 불행의 원인이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 엠마에 비해 보바리는 책을 읽지 않는 남자이며, 더불어 욕망도 패기도 없는 남자였기 때문에 보바리 부부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그랬던가. 엠마가 바로 책 읽는 여자였던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과도한 욕심이 없는 남자 보바리가 과연 그들 불행의 원인이었던가.

2009년에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보니 역시 문제는 엠마의 '내면의 허기'가 문제였다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는 여자였다면서 엠마는 어째서 스스로 욕망을 다스릴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일까. 내 경우는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수많은 욕망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어설픈 책 읽기가 문제였던 것일까?

 

1857년 출간된 <마담 보바리>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더불어 각각 소설과 시의 '현대'의 출발점이라고 여겨진다는데, 1857년은 제2회 '만국산업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 그 이듬해이다. 즉 <마담 보바리>의 배경은 산업혁명도 대혁명도 다 지난 개화의 시기였고, 더불어 한 남자의 아내로서 복종이 강요되었던 부인들의 의식도 개화된 시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계급에 관계없이 욕망을 키워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는 플로베르의 보바리는 유부녀의 연애 사건과 자살이라는 통속적인 내용보다는 글의 '스타일'의 중요성이 부각된 작품이라는데, 글쓰기의 스타일이나 작품의 구도 따위를 보는 눈이 없는 나로서는 역시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심리에 촛점을 맞추고 책을 읽는다.

해서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는 엠마의 욕망에 더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다. '한 때는 나도..'라고.

한편 2009년의 감상과 다른점이 있다면, 프로베르는 샤를르 보바리의 감정이나 생각에 관해서는 무척 인색하게 표현했다는 것이였다. 나로서는 도대체 샤를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엠마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닌데 샤를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더더욱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샤를르는 배신감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는다. 샤를르의 시점에서 소설이 씌여도 좋지 않았을까.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마담 보바리>도 그렇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불행해진 여인들의 욕망과 불안한 심리, 그리고 그에 따른 몰락의 과정을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는 욕망에 굴복한 아내를 둔 남자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세상에 그토록 순종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남자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안정과 평화를 가장한 남편들의 바로 그 '무신경'이 안나와 엠마로 하여금 자식까지도 내버리고 자신의 욕망 만을 갈구하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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