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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지 않기 위해. 혹은 과장되게 자신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게 된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이 인생인지 모르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살 때, 삶에 더 충실하게 되지 않았던가.
문제는 여유인지 모른다. 먹고 사는 문제의 여유. 생각할 여유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부패하게 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안으로 곪아들어갈 소지가 있는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자, 끊임없이 노동하라.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해서. 삶에 찌들은 얼굴로는 시선을 밖에 둘 여유가 없을테니.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담 보바리를 읽은 내 감상.
마치 겉과 속이 다른 고해성사를 했을 때처럼 미적지근하고 껄끄러운 느낌이다. 엠마만큼 타락하고 싶지 않았다고 내 스스로를 고해할 수 있을까. 엠마만큼 실패하지 않았기때문에 지금껏 살아있노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까.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아닌 다른 타인을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일시적인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환상은 물리학적으로도 2년이면 족하다고 하지 않는가. 대상을 바꿔줘야 하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어쩌면 바람둥이 만이 진정한 사랑을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끝내 바람둥이가 되지 못하고 한가정에 안주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그러나 엠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사랑도 아니고, 간음도 아닌다. 단지 그녀의 끝을 모르는 사치와 허영이었을뿐. 시대는 바뀌어도 물질에 대한 가치와 정신의 가치는 바뀌지 않고 돌고도는 쳇바퀴 속 다람쥐와 같다. 오늘의 불륜 드라마 속에서 수없는 엠마를 보며 내 속에 사는 꺼지지않는 욕망의 엠마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7월 10일 작성
그리고 4년 하고도 2개월 남짓 후,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
불현듯 보바리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팟 케스트에서 들은 책 읽어주는 프로 때문이었다. 진행자와 북매니저로 불리는 두 명의 게스트들은 보바리 부인의 불행이 '책' 때문이라고 했다. 엠마가 수녀원에서 쌓은 지적능력과 어설픈 독서들로 인해 욕망의 방종이라는 결과를 낸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엠마 불행의 원인이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 엠마에 비해 보바리는 책을 읽지 않는 남자이며, 더불어 욕망도 패기도 없는 남자였기 때문에 보바리 부부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그랬던가. 엠마가 바로 책 읽는 여자였던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과도한 욕심이 없는 남자 보바리가 과연 그들 불행의 원인이었던가.
2009년에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보니 역시 문제는 엠마의 '내면의 허기'가 문제였다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는 여자였다면서 엠마는 어째서 스스로 욕망을 다스릴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일까. 내 경우는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수많은 욕망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어설픈 책 읽기가 문제였던 것일까?
1857년 출간된 <마담 보바리>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더불어 각각 소설과 시의 '현대'의 출발점이라고 여겨진다는데, 1857년은 제2회 '만국산업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 그 이듬해이다. 즉 <마담 보바리>의 배경은 산업혁명도 대혁명도 다 지난 개화의 시기였고, 더불어 한 남자의 아내로서 복종이 강요되었던 부인들의 의식도 개화된 시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계급에 관계없이 욕망을 키워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는 플로베르의 보바리는 유부녀의 연애 사건과 자살이라는 통속적인 내용보다는 글의 '스타일'의 중요성이 부각된 작품이라는데, 글쓰기의 스타일이나 작품의 구도 따위를 보는 눈이 없는 나로서는 역시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심리에 촛점을 맞추고 책을 읽는다.
해서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는 엠마의 욕망에 더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다. '한 때는 나도..'라고.
한편 2009년의 감상과 다른점이 있다면, 프로베르는 샤를르 보바리의 감정이나 생각에 관해서는 무척 인색하게 표현했다는 것이였다. 나로서는 도대체 샤를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엠마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닌데 샤를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더더욱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샤를르는 배신감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는다. 샤를르의 시점에서 소설이 씌여도 좋지 않았을까.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마담 보바리>도 그렇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불행해진 여인들의 욕망과 불안한 심리, 그리고 그에 따른 몰락의 과정을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는 욕망에 굴복한 아내를 둔 남자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세상에 그토록 순종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남자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안정과 평화를 가장한 남편들의 바로 그 '무신경'이 안나와 엠마로 하여금 자식까지도 내버리고 자신의 욕망 만을 갈구하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