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근이 때문에 세근 들다
경상도 사투리에 '세근'이란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철들다, 의젓하다, 분별력있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끝 자인 ‘근’자는 사람 이름에도 많이 쓰인다. 갑근이, 을근이...... 등등으로.
국민학교 고학년 때였다. 우리집 골목 옆에 골목에 장세근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사람이 아니라 우리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되기 전까지 그는 그냥 우리 동네 청년이었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동네 아주머니들은 “세근아, 니 언제 세근 들래?” “세근이 뭐꼬, 세근이, 남자가 열 근은 돼야지” “니는 장∼(항상) 세근이라서 열 근은 못 채우겠제?”하고 놀리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우리도 그냥 우리끼리는 동네에서 세근이, 세근이하고 불렀다.
그런데 이 장세근 선생님은 우리보다 나이가 열다섯은 더 먹었고 매부리코에 찢어진 눈, 꼬리가 처진 팔자 눈썹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면 좀 무섭게 생겼고 실제로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은 그를 무서워했다.
그런 세근이 선생님이 장가를 간다는 소문이 들리던 어느 일요일, 우리반 아이들과 조기 청소를 마치고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쪽 삼거리 길에서 멋진 코트를 쫙 빼입은 세근이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일직을 하러 학교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아주 작은 소리로 “야, 저기 세근이 간다. 세근이 간다.”하고 속삭이다가 내가 “야∼ 세근아∼어디 가노∼”하고 희희덕거렸다.
그런데 저쪽에서 길을 가던 선생님이 멈칫멈칫 하더니 딱 뒤돌아서서 우리들을 부르신다. “야, 너희들 이리 와 봐라.” 친구가 그런다. “야, 니 목소리 들은 것 아이가?” “에이, 설마.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하고는 주춤주춤 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은 특유의 그 무서운, 찢어진 눈으로 우리들을 내려다보시며 “조금 전에 내 이름 부른 애 나와.”하신다. 딱 걸렸다.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서 풀 스피드로 난무한다. ‘아이쿠, 죽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렇게 귀가 밝을 줄이야.’ 하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도, 나 때문에 친구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장렬하게 전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쓱- 나서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가 했습니다.”했다. 그랬는데 세근이 선생님, 옆 골목에 사는 나를 알아 볼만도 했을 텐데, 아니면 정말 몰랐을까? 안면 몰수다. “따라와!”하신다.
그래서 그날 아침에만 두 번째로 학교에 등교했다. 교무실에서 실컷 벌 받고, 다음날 우리 담임 선생님께 고자질해서 불려가서 또 꾸중 듣고, 또 사과하고, 암튼 악몽 같은 이틀이었다.
다행히 부모님께는 꼬지르지 않았는데 그 사건으로 나는 큰 교훈을 얻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세근이가 듣는다”는, 그래서 이후로 나는 세근이 들었다. 절대로 남의 뒷담화를 안 한다. 큰소리로는,ㅋㅋㅋ
“세근이 선생님 그때는 미안했심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