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 입헌운동과 의화단 사건 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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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 선생의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순전히 의화단의 난에 대한 궁금증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사를 다루다 보니 메인 테마인 의화단의 난은 맨 마지막으로 밀렸다. 그리고 그 전에 무술변법운동, 구한말 만민공도회, 독립협회 활동과 헌의 6조 그리고 일본 내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메인 디시를 먹기 위해서는 이런 전채도 먹어야 한단 말이지.

 

한중일 세계사 18편의 시작은 무술변법이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는 서태후였지만, 어쨌든 명목상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해서 부국강병을 이뤄 보자는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중체서용의 입장에서 서양의 앞선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청일전쟁을 통해 깨닫게 됐다. 강유위와 담사동을 필두로 한 개혁주의자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광서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변법, 근대화운동을 개시했다.

 

과거제 폐지와 신식 학교 시스템의 도입, 입헌군주제 시도, 군제 개혁 그리고 농공상업 등의 진흥을 도모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런 개혁에 반항하는 보수 수구세력들이 존재했고, 이들이 실권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해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혁명적 개조 없이 양무운동 이래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시늉에 불과한 근대화운동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했다. 결국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해 변법 실시 103일 만에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고, 담사동을 필두로 한 이른바 무술 6군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처형되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 무대는 조선이다. 1898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를 2년 앞둔 조선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작가에 따르면 우유부단한 통수의 왕 고종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황현필 선생은 조선의 3대 암군으로 선조, 인조 그리고 고종을 꼽았는데 결국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고종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 에피소드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근대적 의회 시스템은 중추원 구성을 위해 진력한 점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50명의 원구성을 위해 비록 현대적 차원의 선거에 의한 방식은 아니지만, 민의를 대변할 인사들을 선정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반대파는 어떤 근거로 독립협회가 추천한 이들이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제도라는 시스템이 발명된 게 아닌가. 물론 당시의 전제군주 통치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 때 중추원 고문으로 훗날 검머가 된 필립 제이슨, 서재필도 등장했던가.

 

통수 전문가 고종이 쿠데타로 일거에 중추원에 입각할 인사들을 투옥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격분한 한성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굽시니스트 작가는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투옥된 독립협회 소속 중추원 의원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이어나간다. 결국 민의를 이기지 못한 고종은 그들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도 조직적 시위를 이어 나가려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의 신원 회복에 나섰다가 고종을 비롯한 수구파의 역공을 받아 결국 중추원이 무산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메이지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일단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당파간의 분열로 무산이 되었다. 그리고 내각에 현직 육해군대신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훗날 군국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시리즈의 무대는 다시 중국으로 이동한다. 무술정변으로 다시 한 번 실력을 과시한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황제의 교체를 도모한다. 이 사건이 기해건저다. 단왕 재의의 아들인 부준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지만, 서양 세력들의 반대로 황제 교체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즈음 중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한 서양 세력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소위 의화단으로 알려진 비밀종교결사단체가 포진했다.

 

의화단 운동은 백련교에서 출발한 사이비 종교집단이 시발점이었다. 중국의 유구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역사는 아마 후한 말 장각의 태평도에서 출발했던가. 세상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흉흉해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이런 사이비 종교집단이었다. 아픈 사람을 낫게하고, 갑갑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서양 양귀들이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를 들여와 중국 전통을 마구 파괴하고 있는 마당에, 권법을 수련해서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솔깃한 프로파간다에 청나라의 이삼십 대 청년들은 열광했다.

 

초기 의화단원들은 주로 산동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양 사람들과 교류했던 남방과 달리 수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원에 사는 이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판이었다. 이렇게 잘 짜여진 판에 청나라 조정은 대중의 분노가 서양 세력에게 집중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환영이다, 안티 서양 운동이여.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조정에게 의화단 무리를 일소할 것을 주문했고, 청나라에서는 조선 총독 행세를 하던 원세개를 파견해서 의화단 진압을 명한다. 내부 반란 진압에는 능했던 원세개가 작전을 시작하자, 의화단 무리들은 박살이 났지만 풍선 효과로 의화단 활동이 산동성 인근 하남과 직례까지 퍼졌다고 했던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청나라 수구파들은 의화단 활동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이에 한껏 버프를 받은 의화단 무리들은 삼삼오오 집결해서 수도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19006월경에는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들의 수가 자그마치 1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서태후와 청나라 조정은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훗날 팔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8개국 연합군들이 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자금성 인근의 공사관 수비에 나섰다. 1963년에 제작된 앤드루 마튼 감독의 <북경의 55>은 바로 이 시절을 다룬 영화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한 의화단원들이 수백 명에 불과한 공사관 수비대에게 압도적 제파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가 무너지면 잔혹한 의화단원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결국 톈진 포대를 제압한 연합군 구원부대가 도착하면서 포위는 풀리고,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은 장안으로 도주하면서 결국 수도 베이징이 팔련군에게 함락당했다. 여기까지가 18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경할 당시 내세운 구호가 부청멸양이었다.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타도하자는 슬로건이었는데, 의화단의 뿌리였던 백련교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멸만흥한이었다. 시작부터 청나라 조정과 의화단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서로 간에 이질적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의화단은 10만이라는 군세를 과시했지만, 이들은 실제 전투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력을 보여준 허접한 집단에 불과했다. 칼이나 창 같이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의화단원들이 선진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소수의 팔련군 수비대에게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청나라는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진보는 더딘 반면, 보수 반동에 의한 정체 혹은 역진은 상대적으로 빨랐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과정이 얼마나 소모적인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서태후와 단왕 재의를 필두로 한 주전파들의 오판은 궁극적으로 중국의 마지막 제국 청나라의 몰락을 초래했다. 한수 아래로 봤던 일본에게마저 완패한 청나라가 무슨 수로 팔련군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도를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국가적 수치는 물론이고,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은 온전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존속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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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 : 근대 -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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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역사강사 황현필 선생의 <요즘 역사> 강의를 너튜브로 시청했다. 지난주에 시작한 프로그램인데, 한국 근대사 강의를 마치고 말미에 교보재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자신의 저작인 <요즘 역사 근대>편을 자신 있게 소개해 주었다. 말이 필요 없지. 어제 저녁 퇴근하고 나서 도서관에 가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미 흥선대원군 편을 읽고 또 최근에 굽시니스트 작가의 한중일 세계사로 단련이 되어 그런지 내용들이 쏙쏙 들어왔다. 금방 다 읽었다.

 

일단 근대사의 시작점에 작가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배치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대원군을 근대화를 저해한 정권욕에 불타는 독재자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의 다른 면들을 볼 수가 있었다. 우선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시킨 다음, 60년간 이어진 권문세족들의 세도정치를 일소해 버렸다. 임진왜란 이래, 비대해진 비변사도 해체하고 예전의 의정부 시스템으로 복귀를 시도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중수는 무리한 토목공사였다고 비판 받았지만, 이 역시 당시 기득권층의 프로파간다가 아니었나 싶다. 초기까지만 해도 경복궁 재건은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았지만, 화재로 두 번째 공사에 들어가면서 비용이 급증하고 또 일반 백성들의 노역까지 동원하게 되면서 비판이 일었다. 비용 문제로 원납전을 양반들에게 강제 징수하고, 당백전 발행으로 인플레이션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지역을 장악한 양반들을 겨냥해서 서원 철폐에 나서 기득권 타파한 점에 대해서도 작가는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문란해진 삼정을 바로 잡기 위해 양전사업으로 은결을 찾아내고 양반들의 토지겸병을 제한하면서 자영농 육성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호포제 실시로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기 시작했고, 무력화된 환곡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민간이 운영하는 사창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다만 병인박해로 무려 8,000여명에 달하는 천주교도들을 학살한 사실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결국 대원군은 며느리 민비와의 권력투쟁에서 일패도지해서 권불십년의 신화를 남기고 결국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19세기 초에만 대권을 잡았더라도, 과연 저자의 주장대로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피탈당하게 되었을까라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100년이 되지 않는 조선의 근대에는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을 필두로 해서, 저자가 조선 최고의 악녀로 꼽는 민비의 국가 사유화, 군인들의 반란이었던 임오군란을 막기 위해 청군의 개입, 일단의 개화파들의 의한 갑신정변, 동학교도들이 일으킨 동학운동, 이를 빌미로 조선에 개입한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 등등... 국운이 쇠하는 가운데,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연대순으로 이런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저자의 분석과 비판이 첨가된다. 청년 김옥균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취지는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엘리트 계급에 의한 개혁 시도는 다수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일본의 배신으로 단 3일 만에 진압되었다. 정변의 수괴 김옥균에 대해 앙심은 품은 고종과 민비를 자객을 보내 끊임없이 김옥균을 괴롭혔다. 물론 국내에 남은 정변을 주도한 이들의 가족들은 모두 참화를 당했다. 결국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 암살에 성공했다. 김옥균의 경우에서 보듯이 항상 이상주의가 냉혹한 현실을 담보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현충원에 안장된 서재필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갑신정변에 참가했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시민권들을 취득했다. 그가 과연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해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개인적으로 너튜브 방송에서 인간 서재필을 어떻게 다룰지 좀 궁금해졌다. 해방 공간에서 어쩌면 이승만을 대신해서 한국정부의 대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다고 했던가. 저자는 그가 현충원이 아닌 양화진의 외국인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나는 동조한다.

 

조선시대 선조, 인조 듀오와 더불어 최악의 암군이라고 저자가 규정한 고종이야말로 구한말의 문제적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군주들은 보국안민이라는 기치 아래 백성들을 통치했다. 하지만, 대원군의 섭정이 끝난 이래 민비의 사주 덕분인지 어쩐지 고종은 국가 조선의 이익에 앞서 개인의 사욕과 안위를 우선했다. 매관매직 30년으로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혔고, 그렇게 공직에 오른 탐관오리들은 상전들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본격적인 가렴주구를 시전했다.

 

설상가상으로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의 파견군 사령관 위안스카이는 이후 십년간 조선에서 왕노릇을 했다. 파도처럼 몰려드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적절하지 못한 대처로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어 망국의 군주가 되지 않았던가. 이런 암군에게 무슨 동정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의 파트너였던 민비 역시 부창부수였다. 오죽하면 임오군란 당시,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의 구호가 '민비를 죽이자'였을까. 군인들의 손에 민비가 잡혔더라면, 일본 낭인이 아닌 조선의 군인들에게 죽음을 맞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제 후대의 창작물에서 각색된 명성황후 타령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일단 <요즘 역사> 근대 첫 번째 이야기는 이완용을 필두로 한 친일파 대신들이 무기력하게 일본에게 조선을 팔아먹은 경술국치로 마무리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는데, 여전히 매국뽕으로 가득한 인사들이 정치인 행세를 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폄하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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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6-1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현필 님 너튜브는 저도 애시청합니다. 이 책, 유익해 보입니다~추천 감사드려요~

레삭매냐 2024-06-20 00:15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 분을 미처 보지 못했네요.
오늘 시간 내서 감상하려구요.

<요즘 역사> 독서는 유익했습니다.
 
의화단 1 : 소년의 전쟁
진 루엔 양 지음, 윤성훈 옮김 / 비아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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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를 열독 중이다. 어제도 최근작인 18편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가장 궁금한 파트가 바로 <의화단>이었는데 아직 그 지점까지 가지 못했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헌의6>를 발표하고, 나름대로 디모크라시가 진행되는 지점까지 읽었다.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의화단>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작가가 그린 그래픽노블을 읽게 됐다. 내가 그 전에 이 책을 읽었던가? 그런데 왜 리뷰 기록이 없는 걸까. 게을러서 리뷰를 쓰지 않았던 걸까.

 

이야기는 의화단 운동이 시작되기 6년 전인 1894년 산둥성의 어느 마을에서 출발한다. 시골 소년 바오는 서양 출신 천주교 베이 신부의 뒷배를 믿고 시장에서 설치는 마을의 무뢰한을 권법으로 단박에 제압하는 아버지의 실력에 감탄한다. 참고로 바오는 당시 거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경극 매니아였다. 청조 말기,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이기지 못한 서태후의 청나라(황제는 광서제였다)는 나라의 이권을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하나하나 침탈당하고 있었다.

 

마을 대표로 현장에게 천주교 신부의 개입에 대한 항의를 하러 길을 나섰던 아버지는 서양 군대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결국 폐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마을에 나타난 주홍등이라는 청년이 의술로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마을 청년들에게 권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주홍등은 대도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인공 바오도 주홍등에게 권법을 배우려고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손위 형님들처럼 정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홍등은 바오가 가진 권법 재능을 보고 그에게 남몰래 권법을 가르쳐 준다.

 

대도회의 부름으로 양귀들과 상대하기 위해 주홍등은 마을을 떠나면서 바오에게 비밀쪽지를 하나 남긴다. 마을 근처에 있는 산에 사는 배불뚝이 도사를 찾아가 그에게 제대로 된 권법을 배우게 되는 바오. 바오가 처음에 땅에 박혀 있는 배불뚝이 도사의 칼을 뽑으려는 장면은 아더왕 전설의 엑스칼리버 생각이 났다. 역시 서사는 이렇게 변주되어 반복되는 법인가.

 

바오가 의화단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주홍등의 죽음이었다. 대도회 활동에 나섰던 주홍등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등장한 관군을 상대로 바오가 배불뚝이 도사에게 배운 주술을 이용해서 타격을 가하면서 비로소 바오의 의화단 활동이 시작된다.

 

일단 <부청멸양>이라는 기존의 존왕양이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나라 인민들은 양귀들을 상대로 학살을 일삼았다. 바오는 의화단 5개조를 주장하면서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해치면 안된다고 동지들을 제지했지만, 전투 주술 의식에서 경극의 검은 상제 그러니까 진시황으로 등장하는 경극 분신(?)은 계속해서 바오를 자극한다. 그런 소의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모든 양귀들과 그들에게 부역하는 모든 중국인들도 과감하게 처단하라고 사주한다.

 

중국식 민족주의 운동이 태아가 된 의화단의 강령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시행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결국 바오는 베이 신부가 죽고 그의 성당에 모여든 사람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다. 바로 이 지점이 의화단 운동의 성패가 갈린 그런 지점이 아닐까.

 

그리고 계속되는 황군과의 전투에서 서양식 무기인 총에 맞아 같이 기의한 동지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자신의 형제들도 차례로 전사했다. 여성 동지인 메이원이 홍등조가 되어 양귀들과의 전투에서 남성 동지들 못지 않은 전투력을 과시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역사에 실제로 십대소녀들로 구성된 홍등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들을 보면, 진 루엔 양이 상당히 많은 고증을 거쳐 <의화단 소년의 전쟁>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는 중국 각지에서 날뛰는 무법자 집단을 황군을 동원해서 제압해 달라는 서양 열강의 요청을 무시했다. 오히려, 근친왕인 애신각라 재의(단왕)는 은밀하게 의화단을 지원하기도 했다. 감군을 지휘하던 동복상군과 만나 바오군도 잠시 긴장모드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훗날 아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1900년 여름 바오군은 드디어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에 진입했다. 단왕과 동복상 제독의 지원을 받던 의화단의 기세가 찌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거의 사이비 집단에 가까웠던 의화단 운동의 한계는 분명했다. 아무리 권법을 수련한다고 해서,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을 이길 수는 없었다. 굽시니스트도 한중일 세계사에서 언급했다시피, 민중의 운동과 엘리트 계급이 서로 협력해야 무언가 새로운 개혁이 그나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막무가내로 서양인들을 양귀 취급하던 의화단 활동에 청나라 지식인들은 넌더리를 쳤다. 물론 나중에 의화단 진압에 나선 서구 열강 역시 의화단이나 다를 바 없는 그런 모습을 주였지만 말이다.

 

일찍이 중국 사상 처음으로 분서갱유로 악명을 날린 진시황 분신은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수천년 역사가 담긴 한림원을 불태우라고 바오를 부추긴다. 결국 바오는 한림원에 불을 지르고, 지식인을 대표하는 메이원은 불타오르는 한림원에서 책을 구하다 허무하게 죽고만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의화단 동지들을 규합해서 다시 한 번 공격에 나서지만, 구원에 나선 열강 군대에 의해 전장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중국은 이 의화단 운동의 실패로 결국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자국의 이익을 침탈하는 외세를 배격한다는 취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폭력적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의화단원들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이용했고 나중에 필요가 다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외면해 버렸다. 처음부터 의화단이 가지고 있던 무력은 서구 열강들의 무력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청나라 황실이 도주하고 빈 베이징을 점령한 열강들은 무차별적 약탈과 방화에 나섰다. 특히 독일 외교관이 살해당한 독일 제국군의 복수가 심했다고 한다.

 

아까 내친 김에 <의화단 소녀의 전쟁>도 마저 빌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오가 중국 측에서 의화단을 바라본 시선이라면, <소녀의 전쟁>의 주인공인 비비아나는 반대편의 시각이라고 한다. 굽시니스트 작가의 <의화단>을 마저 읽으면 좀 더 의화단 운동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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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6-17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기 작품 중 펄벅의 대지 3부작이 제일 먼저 생각나네요. 아마도 제일 먼저 만난 작품이어서일 듯해요. 이 책 저도 언젠가 읽어보겠습니다. < 본격 한중일 세계사>도 함께!

레삭매냐 2024-06-19 14:15   좋아요 1 | URL
펄 벅의 <대지>도 읽어 보고 싶긴
한데... 마음에 드는 출판사가 없네
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요즘 역사
이렇게 셋트 구성으로 읽다 보니
아주 재밌네요.
 
무지갯빛 트로츠키 1
야스히코 요시카즈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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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알게 된 <무지갯빛 트로츠키>라는 유사 역사만화를 읽었다. 어느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책인데, 해당 게시글에는 만화로도 충분히 역사를 알 수 있다는 논쟁이 부록으로 딸려 있더라. 어떤 사람은 만화 대신 책을 읽으라는 충고를 해주고 있었고, 반대 논쟁자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을 떠나, <무지갯빛 트로츠키>는 일본의 극우적 시선이 담긴 아주 위험한 책이라는 점을 먼저 알고 접해야 할 것 같다.

 

주인공은 아버지 후카미 게이스케와 몽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움보르트다. 만주사변의 원흉이자 하극상의 달인 이시와라 간지와 작전의 신이라는 허울 좋은 별명으로 불린 츠지 마사노부가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때는 1938, 중국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관동군이 운영하던 건국대학에 편입된 움보르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그야말로 소설처럼 전개된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순식간에 만주를 장악했던 것처럼,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 전역을 단기간에 장악하겠다는 일본의 야심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도 함락시켰지만, 공간을 내어 주고 시간을 번다는 전략으로 장제스는 일본군을 중국 대륙이라는 수렁에 빠뜨려 버렸다.

 

귀신 참모가 아닌 일본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이후의 거의 모든 전역에서 망신을 산 츠지 마사노부가 등장한다. 노몬한 전투와 과달카날에서의 처참한 패전의 이면에는 츠지 마사노부가 빠짐 없이 등장한다. 오래 전, 소련의 스탈린과 갈등하던 레프 트로츠키를 기용해서 소련의 분열을 유도하겠다는 이른바 <트로츠키 계획>이라는 게 존재했다. 하지만, 이미 용도 폐기된 이 전략으로 중일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것이 이 만화에 등장하는 츠지 마사노부의 계획이다.

 

만화에서 계속 등장하는 만주국의 대부격인 이시와라 간지의 오족협화라는 슬로건도 훗날 대동아공영권으로 포장되는 프로파간다의 시발점이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오족 간의 평등과 평화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관동군을 필두로 한 일본군은 어디까지나 해방군이 아닌 철저한 침략군이었고, 독일 나치의 레벤스라움처럼 만주 역시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협동과 공존의 장소가 아닌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식민지일 따름이었다.

 

이시와라 간지 같은 고위직 장성들이 무슨 말로 포장을 하더라도, 일선의 일본군들과 일본 관리들은 내지 운운하며 만주인들과 몽골사람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항일연군이라는 이름으로 관동군에게 저항한 자무츠(이명 손일문)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특무 출신 쿠스베 카네치키 같은 악질 관헌들이 그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주인공 움보르트 역시 쿠스베에게 잡혀 고문당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움보르트는 최근 10년간에 대한 기억상실(참 편한 기법이다,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로 아버지 후카미 게이스케를 비롯한 모든 기억을 잃어 버렸다. 건국대학에 다니면서 미래의 일본군 부역자로 훈련을 받기도 하다가, 또 중국 비적단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다가 다시 몽골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위만군 소속이 흥안군의 일원으로 노몬한 전장에 배치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대의 풍운아 같은 모습으로 연출된다.

 

사실 애장판 1-2-3편 모두 마지막 권에 등장하는 노몬한 전투를 위한 워밍업 정도가 아닐까 싶다. 선한 일본인도 있었다는 식의 저자의 의견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렇게 선한 일본인들이 많았다면, 왜 그런 일본 제국군의 막무가내식 침략전쟁과 확전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은 막부 말 개항 이래, 전쟁의 수혜로 성장한 국가다. 일본의 다수 시민들은 전쟁이 자국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계속된 전쟁으로 국가 재정과 인명이 손실 되도 '콜래트럴 데미지'라고 생각하고 받아 들였다.

 

한국에서 선전한 내선일체나 만주경영에 도입한 오족협화는 모두 빚 좋은 개살구였다. 모든 민족 위에 침략자인 일본인들이 상위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들은 그들을 위한 이등 시민 혹은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움보르트의 동포인 몽골 사람들 역시 땅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진정한 협력을 갈구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있긴 했지만, 대세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에게 아부하기 위해 만주 어딘가에 독일이나 소련에서 배척된 유대인들을 위한 자치주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겠다는 독일의 계획만큼이나 허황된 플랜일 따름이다. 아무리 만화라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말이다. 우선 만주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유대인들이 오려고 할 것인가. 온다고 하더라도, 열강의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던 지역을 이방인들에게 누가 넘겨준단 말인가.

 

사실 움보르트라는 존재는 만주국이라는 거대한 실체에 비해 사소한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만주국과 관동군에 연루된 많은 이들에게 움보르트는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것 또한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개 만주군 휘하 흥안군 소속의 소위가 아무리 노몬한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친다고 해도, 소련의 주코프 사령관이 이끄는 압도적 기계화 부대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츠시 마사노부의 주장대로, 1938년 장고봉 전투에 이어 1939년 노몬한에서 소일 양군이 크게 한바탕 붙었지만 적군(red army)35년 전에 상대한 러시아 제국군으로 과소평가했다. 이 또한 관동군 지휘부의 적정에 대한 판단착오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군이 동원한 전차는 소련군의 중전차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련 기계화병단을 상대하는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 모두 문제투성이였다.

 

앳된 몽골소년대를 노로 고지 전투에 투입해서 숱한 인명이 갈려 나가는데도, 관동부 지휘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몬한 주전장을 맡은 고마츠바라 미치타로의 일본군 23사단은 전투 경험이 일천한 이선 부대 정도였다. 정예 7사단이나 2사단을 투입하자는 의견은 무시되고 오로지 정신력만 강조하는 일본군 특유의 허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피와 살이 튀는 전장에 움보르트의 연인 여화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장면도 스토리의 개연성을 파괴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가가 과연 이야기를 어디로 인도할까 싶었는데, 원대한 시작과 달리 엔딩은 좀 허무했다. 애장판의 끝마다 달려 있는 후기 역시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주관적인 견해겠지만, 난 그런 글들이 하나 같이 일본의 위성국 만주국의 기원에 대한 변명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명백한 침략전쟁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배상과 사과를 외면하는 입장과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어도, 무수히 얻어맞아도 불사조처럼 살아남는 움보르트의 신상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이 정도면 뭐 거의 히어로급 전사가 아닌가 말이다. 움보르트 개인의 노력으로 일본의 위성국으로 만주에서 존재했던 만주국의 성격이 바뀐단 말인가. 계속해서 언급되는 오족협화 타령에 어느 순간 질려 버렸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유사 역사에 대해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가가 <무지갯빛 트로츠키>를 위해 당시 시대사 고증에 공을 들인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과연 어떤 시각에서 일본이 중국에서 폭주하던 시절을 그리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그들의 침략을 미화하고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당시 침략전쟁에 나선 일제의 실체와 본질을 "그래도 당시에 선한 일본인이 있었"고 나름의 오족협화를 추구했다라는 방식으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1세기 전의 침략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역사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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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5-24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지 마사노부는 무능함때문에 제국육군의 3대오물과 비교되는 평가를 받으며 위선자이자 간신배란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요.이런 인물이 전쟁범죄자 신분을 면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한심하지만 그 죄가 탓인지 61년에 베트남에 갔다가 의문의 실종을 하게 됩니다.
 
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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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궁 모임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미루고 있던 존 윌리엄스의 <부처스 크로싱>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밀러가 버펄로 사냥대를 이끌고 들어간 비밀의 계곡에서 미친 사냥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밀러의 광기가 번득이는 순간까지였다. 그리고 일행에게 이번 버펄로 사냥에서 가장 큰 고난이 이제 막 시작될 판이다.

 

'완벽한 소설'로 널리 알려진 <스토너>로 처음 만난 존 윌리엄스가 196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 바로 <부처스 크로싱>이다. 참고는 그는 평생 네 편의 소설만 썼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 책이 육지판 <노인과 바다>라는 생각과 버펄로 사냥에 미친 밀러의 모습에서 <모비딕>의 에이햅 선장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부 하버드 출신 23세의 청년 윌 앤드루스가 캔사스에 있는 가공의 마을 부처스 크로싱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서부는 미국 청년들에게 하나의 이상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의 영향을 받은 윌은 버펄로를 잡아 보겠다는 호승심에 힘입어 사냥대를 조직한다. 그는 버펄로 사냥에 경험은 없지만, 사냥대를 조직할 만한 넉넉한 돈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역시 쩐주에게 힘이 실리는 법이다. 아버지의 소개로 알게 된 버펄로 가죽 거래업자 JD 맥도널드를 찾아가 조력을 구하는 윌. 노련한 장삿꾼은 헛심 쓰지 말라고 애송이를 타일러 보지만 어디 애송이들이 경험자들의 말을 듣던가.

 

패기에 넘치는 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버펄로 사냥꾼 밀러를 만나 자신이 원하던 버펄로 사냥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10년 전, 버펄로 떼로 넘치는 평원이 있다는 밀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서부 콜로라도로 향한다. 물자를 잔뜩 실은 마차는 밀러의 파트너 찰리 호지가 맡고, 역시 버펄로 가죽 벗기는데 탁월한 실력을 가진 프레드 슈나이더도 팀에 합류한다.

 

, 그럼 그들이 예상 대로 쉽게 버펄로 떼를 찾아냈을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버펄로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 버펄로 사냥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진 바람에 버펄로들은 거의 멸종 위기에 처했다. 그러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오지로 도망갔을 것이다. 밀러 팀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강줄기를 타고 가지 않고,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황야길을 선택했다가 물을 구하지 못해 거의 탈수증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투덜이 슈나이더는 끊임없이 팀의 리더인 밀러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순전히 감만 가지고 오래 전 기억을 더듬어 일행을 인도하는 밀러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사실 황야에서 길을 잃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것도 사실 밀러 때문이 아니던가. 팀의 물자 수송을 담당한 말과 소들이 물을 마시지 못해 탈수로 거의 죽을 뻔한 장면을 묘사할 때는 마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중계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위기 정도는 극복해내야 비로소 자신들이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삶의 간단한 진리를 존 윌리엄스는 아주 간단하게 포착해냈다.

 

결국 이런 간난신고 끝에, 일행은 버펄로들로 가득한 비밀의 계곡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자 이제부터 광기 어린 버펄로 사냥이 시작될 판이다. 일행은 사냥에 앞서 버펄로들을 사냥하는데 쓸 납탄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주 엉터리 같은 집단일 줄 알았는데 나름 준비가 철저하다. 그리고 바로 광기 어린 버펄로 사냥이 시작된다.

 

인간의 총탄 공격에 무력한 버펄로들은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져 간다. 버펄로들이 평화롭게 살던 공간을 침략한 인간 무리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특히 무려 십 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기다린 밀러에게는 특히나. 계곡의 모든 버펄로들을 죽여야 그간의 한이 풀리겠다는 듯, 밀러는 쉴 새 없이 버펄로들에게 총알 세례를 퍼붓는다.

 

한편, 윌 앤드루스는 버펄로 사냥에 나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앳된 소년에 가까운 청년이었다면 이런 광란의 버펄로 사냥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다음 단계의 인간으로 변신한다. 이런 과정은 어쩌면, 폭력과 전쟁으로 점철된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사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내면에는 어쩌면 이런 일련의 폭력적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국가적 성장 그리고 나아가 개인이 삶에서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없는 그런 부족한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소설 <부처스 크로싱>의 정점은 거의 버펄로 사냥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눈폭풍이 발생시킨 위기상황이었다. 그것은 마치 죄 없이 죽어간 버펄로 떼들을 위한 거대한 자연의 복수라고나 할까. 역시나 우리의 투덜이 슈나이더는 밀러 탓을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결국 그들은 차고 넘치는 버펄로 가죽으로 방한자루를 만들어 동사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다. 밀러의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그 자리에서 눈보라에 휩싸여 얼어 죽었을 것이다.

 

폭설로 계곡에 갇힌 4인조 버펄로 사냥대는 눈이 녹아 계곡을 탈출하게 될 날을 6개월 동안 기다린다. 참을 수 없는 침묵과 서로를 향한 비난 그리고 통나무집 열병(cabin fever)으로 알려진 서로간의 불화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계속해서 계곡을 떠나자는 슈나이더를 말리던 밀러는 드디어 봄이 와서 땅이 녹자 부처스 크로싱으로 귀환을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버펄로 도살자들의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물론 아니다.

 

부처스 크로싱에서 사냥대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하나 같이 좋지 않은 소식들뿐이다. 그들이 떠날 때와 너무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그들이 부처스 크로싱에 돌아온 1874, 가죽 시장의 판도는 완전 달라졌고, 맥도널드의 사업도 완전 망해 버렸다. 버펄로 가죽의 인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연을 알고 싶어서, 서부를 알고 싶어서 먼 길에 나선 윌 앤드루스에게 상상 속 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무엇이었다.

 

문명화되었다고 착각하는 인간은 대자연의 비밀과 속내를 알고 싶어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연이 미약한 존재들인 인간을 타는 목마름과 압도적으로 출렁이는 물로 징벌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결국 많은 재화를 약속했던 들소 가죽이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어 버리자, 광기에 사로 잡힌 밀러가 모두 불 질러 버리는 장면은 찰리 호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성경에 나오던 <소돔과 고모라>의 불의 징계가 연상됐다.

 

자연을 알아보겠다고 나선 윌 앤드루스의 모험은 그렇게 부질없이 끝나 버렸다. 존 윌리엄스는 정통 서부 소설을 통해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겠다는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 이들의 손에 쥐어진 건 결구 푸른 허무와 덧없음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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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4-05-23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 앞에 영화 한 편 지나간 것 같아요@_@;;;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4-05-24 13: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니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 내일 출격하기 전에 오늘 저녁에
한 번 봐야지 싶습니다.

블리저드 장면과 버펄로 가죽을 마차에
싣고 강물을 건너는 장면이 어떻게 연출
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레이스 2024-05-27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햅과 노인과 바다라니 급 관심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4-06-17 13:00   좋아요 1 | URL
책이 상당히 재밌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니콜라스 케이지
가 나오는 영화 버전도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