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 입헌운동과 의화단 사건 본격 한중일 세계사 18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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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시니스트 선생의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는 순전히 의화단의 난에 대한 궁금증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사를 다루다 보니 메인 테마인 의화단의 난은 맨 마지막으로 밀렸다. 그리고 그 전에 무술변법운동, 구한말 만민공도회, 독립협회 활동과 헌의 6조 그리고 일본 내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메인 디시를 먹기 위해서는 이런 전채도 먹어야 한단 말이지.

 

한중일 세계사 18편의 시작은 무술변법이다.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는 서태후였지만, 어쨌든 명목상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해서 부국강병을 이뤄 보자는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중체서용의 입장에서 서양의 앞선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청일전쟁을 통해 깨닫게 됐다. 강유위와 담사동을 필두로 한 개혁주의자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광서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변법, 근대화운동을 개시했다.

 

과거제 폐지와 신식 학교 시스템의 도입, 입헌군주제 시도, 군제 개혁 그리고 농공상업 등의 진흥을 도모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런 개혁에 반항하는 보수 수구세력들이 존재했고, 이들이 실권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해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혁명적 개조 없이 양무운동 이래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시늉에 불과한 근대화운동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했다. 결국 보수파의 쿠데타에 의해 변법 실시 103일 만에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하고, 담사동을 필두로 한 이른바 무술 6군자들은 모두 검거되어 처형되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 무대는 조선이다. 1898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를 2년 앞둔 조선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작가에 따르면 우유부단한 통수의 왕 고종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황현필 선생은 조선의 3대 암군으로 선조, 인조 그리고 고종을 꼽았는데 결국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고종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 에피소드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근대적 의회 시스템은 중추원 구성을 위해 진력한 점이 나의 주목을 끌었다. 50명의 원구성을 위해 비록 현대적 차원의 선거에 의한 방식은 아니지만, 민의를 대변할 인사들을 선정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반대파는 어떤 근거로 독립협회가 추천한 이들이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제도라는 시스템이 발명된 게 아닌가. 물론 당시의 전제군주 통치국가였던 조선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 때 중추원 고문으로 훗날 검머가 된 필립 제이슨, 서재필도 등장했던가.

 

통수 전문가 고종이 쿠데타로 일거에 중추원에 입각할 인사들을 투옥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에 격분한 한성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굽시니스트 작가는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투옥된 독립협회 소속 중추원 의원들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이어나간다. 결국 민의를 이기지 못한 고종은 그들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그 당시에도 조직적 시위를 이어 나가려면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의 신원 회복에 나섰다가 고종을 비롯한 수구파의 역공을 받아 결국 중추원이 무산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메이지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일단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당파간의 분열로 무산이 되었다. 그리고 내각에 현직 육해군대신이 참가하게 되었는데 훗날 군국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시리즈의 무대는 다시 중국으로 이동한다. 무술정변으로 다시 한 번 실력을 과시한 서태후와 수구파들은 황제의 교체를 도모한다. 이 사건이 기해건저다. 단왕 재의의 아들인 부준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지만, 서양 세력들의 반대로 황제 교체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즈음 중국 내정에 깊숙이 개입한 서양 세력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소위 의화단으로 알려진 비밀종교결사단체가 포진했다.

 

의화단 운동은 백련교에서 출발한 사이비 종교집단이 시발점이었다. 중국의 유구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역사는 아마 후한 말 장각의 태평도에서 출발했던가. 세상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고 흉흉해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이런 사이비 종교집단이었다. 아픈 사람을 낫게하고, 갑갑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서양 양귀들이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를 들여와 중국 전통을 마구 파괴하고 있는 마당에, 권법을 수련해서 이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솔깃한 프로파간다에 청나라의 이삼십 대 청년들은 열광했다.

 

초기 의화단원들은 주로 산동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양 사람들과 교류했던 남방과 달리 수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원에 사는 이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판이었다. 이렇게 잘 짜여진 판에 청나라 조정은 대중의 분노가 서양 세력에게 집중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대환영이다, 안티 서양 운동이여.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 조정에게 의화단 무리를 일소할 것을 주문했고, 청나라에서는 조선 총독 행세를 하던 원세개를 파견해서 의화단 진압을 명한다. 내부 반란 진압에는 능했던 원세개가 작전을 시작하자, 의화단 무리들은 박살이 났지만 풍선 효과로 의화단 활동이 산동성 인근 하남과 직례까지 퍼졌다고 했던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청나라 수구파들은 의화단 활동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이에 한껏 버프를 받은 의화단 무리들은 삼삼오오 집결해서 수도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19006월경에는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들의 수가 자그마치 1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서태후와 청나라 조정은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훗날 팔련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8개국 연합군들이 의화단의 공격에 맞서 자금성 인근의 공사관 수비에 나섰다. 1963년에 제작된 앤드루 마튼 감독의 <북경의 55>은 바로 이 시절을 다룬 영화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한 의화단원들이 수백 명에 불과한 공사관 수비대에게 압도적 제파공격을 가했지만, 수비대가 무너지면 잔혹한 의화단원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결국 톈진 포대를 제압한 연합군 구원부대가 도착하면서 포위는 풀리고,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은 장안으로 도주하면서 결국 수도 베이징이 팔련군에게 함락당했다. 여기까지가 18권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경할 당시 내세운 구호가 부청멸양이었다.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타도하자는 슬로건이었는데, 의화단의 뿌리였던 백련교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멸만흥한이었다. 시작부터 청나라 조정과 의화단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서로 간에 이질적이었나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의화단은 10만이라는 군세를 과시했지만, 이들은 실제 전투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력을 보여준 허접한 집단에 불과했다. 칼이나 창 같이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의화단원들이 선진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소수의 팔련군 수비대에게 도저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청나라는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진보는 더딘 반면, 보수 반동에 의한 정체 혹은 역진은 상대적으로 빨랐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과정이 얼마나 소모적인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서태후와 단왕 재의를 필두로 한 주전파들의 오판은 궁극적으로 중국의 마지막 제국 청나라의 몰락을 초래했다. 한수 아래로 봤던 일본에게마저 완패한 청나라가 무슨 수로 팔련군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도를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국가적 수치는 물론이고,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은 온전히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존속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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