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인 <죄악>에서 목표물이었던 아기 요다를 구해낸 만도는 이제 갤럭시의 전설적 바운티 헌터에서 타겟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결국 만도를 의뢰인을 물먹인 게 아닌가. 의뢰인은 약속 대로 후하게 베스카르로 보답하지 않았던가. 아기 요다에 대한 만도의 연민이 사단이었다.

 

어느 평화로운 파란색 크릴 새우를 양식하는 마을을 약탈하는 일단의 무리들. 조용하게 지내고 싶었던 만도는 아기 요다와 함께 길드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소건 행성으로 찾아든다. 바에서 전직 반란군 쇼크트루퍼(공수부대?)였던 캐라 듄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그리고 크릴 새우 마을의 사람들이 푼돈으로 바운티 헌터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자기네 마을을 약탈하는 습격자들을 물리쳐 달라는 거다.

 


어때? 어디서 많이 본 상황 아닌가? 그렇다 바로 <7인의 사무라이>에서 모티프를 채용한 것이다. 만달로리안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축약과 변용 그리고 조력자라는 공통된 이야기 틀 안에서 시리즈를 진행시킨다. 일단 변용은 만도와 캐라 듄이 협력해서 크릴 새우 마을 사람들을 조직해서 외부의 침입자에 대항한다는 기본 줄거리다.

 

그 다음에는 인원의 구성에서부터 다르다. 원작에서는 7인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랑 만도와 캐라 듄 둘 뿐이다. 워낙 에피소드마다 짧다 보니, 긴 이야기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너튜브에 길들여진 요즘 독자들을 위해 디즈니 플러스는 축약의 미학의 정수를 그대로 뽑아 올린다.

 


다음 순서는 스토리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조력자들의 등장이다. 이미 전편에서 아르발라7 행성의 우그넛 퀼이 만도를 돕지 않았던가. 전투력이라면 만도에게도 뒤지지 않는 캐라 듄이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실력을 발휘한다. 아마조나스를 연상시키는 여전사로, 어지간한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뒤지지 않을 그런 실력의 소유자가 바로 캐라 듄이다.

 


자 이제 무대의 세팅이 끝났으니 본격적인 침입자들에 대한 대비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크릴 새우 마을 사람들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치고, 블라스터 건을 사용하는 법도 가르친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으로 대변되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까? 스페이스오페라에도 어김없이 숨어 있는 수정헌법 2조가 연상되기도 했다. 하긴 무기가 만달로리안들에게는 종교와도 같다고 했지 아마.

 

만도는 숲의 침입자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제국군 소속의 전지형 정찰 수송기 AT-ST. 제법 많은 AT-ST가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달랑 1기만 등장하더라. 그렇다 하더라도, 크릴 새우 마을 사람들에게는 상대하기 버거운 적수였다. 그래서 만도와 캐라 듄은 AT-ST를 잡기 위해 웅덩이 부근에 함정을 판다. , 이제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고 마을을 약탈하는 빌런들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기만 하면 된다.

 

한편, 아기 요다 일행은 당연히 마을의 환대를 받는다. 그 중에는 젊은 과부 오메라가 있다. 그녀는 만도와 아기 요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전에 무엇을 했는지 다른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사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아무리 크릴 새우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숨은 실력자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겠지.

 


조무래기 빌런들을 상대하는 만도와 캐라 듄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AT-ST의 위용을 보라. AT-ST의 막강한 화력 앞에 크릴 새우 마을 방어진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될 지경에 처한다. 그리고 AT-ST는 덫의 존재를 아는지 쉽사리 함정 부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어찌어찌해서 결국 AT-ST는 파괴되고, 빌런들은 모두 쫓겨난다.

 

오메라는 만도에게 마을에 머물라고 제안하지만, 아기 요다를 쫓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오메라가 만도에게 마을에 머물라고 하면서 그의 생명과도 같은 헬멧을 벗기려고 시도하는 장면이었다. , 그 순간에 저격수가 총탄이 날아올 뻔 했던가. 캐라 듄이 깔끔하게 처리한다.

 

만도는 마치 예전 주말마다 방영되던 서부 드라마의 총잡이처럼 마을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기 요다와 다시 정처 없는 길에 나선다. 사실 배경이 우주의 광활한 갤럭시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서부극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구성이다. 그런 점에서 만달로리안 시리즈는 다시 한 번 변용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알고 있다, 빌런들의 추격은 의뢰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계속될 거라는 것을. 그렇다면 역시 시발점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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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스타워즈 팬이다. 누구처럼 자동전화 응답기에 "May the force be with you"라고 남길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오리지널 4-6편은 물론이고 다시 돌아온 1-3편도 모두 봤다. 그런데, 디즈니로 넘어간 뒤에 만난 시리즈들은 하도 이질적이어서 잠시 휴지기에 들어가 있었다. 극장에서 새로운 시리즈들이 개봉될 때마다, 아 나도 극장에 가서 보고 잡다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결국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외전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로그 원> 정도가 봐줄 만했다고나 할까. 루크 스카이워커의 귀환은 아에 보지도 않았다.

 

요즘에는 하도 영화나 미드를 안보다 보니, 소식도 어둡다. 그러다 얼마 전에 스타워즈 외전으로 <만달로리안>이라는 시리즈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다릴 수가 없더라. 당장 보기 시작했다. 매편당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길지 않은 시리즈라 그런지 잘 넘어가더라.

 

주인공 만도(페드로 파스칼 분)는 우주에서 현상금을 노리는 바운티 헌터다. 업계 최고의 실력자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비기닝에서 살짝 실력을 보여준다. 스타워즈라는 스페이스오페라가 왠지 모르게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연상시킨다. 결국 유사 이래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는 말로 귀결될 것인가. 모든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용될 뿐, 오리지널리티는 그대로인 걸까. 빌런들이 득시글거리는 바에서 만도는 현상금이 걸린 얼굴 파랑이 녀석을 라이벌들을 간단하게 무력으로 제압하고 차지한다. 물론 우주선을 타고 출발하기 전에, 갑자기 등장한 바다괴물에게 당할 뻔 했지만 말이다. 탈출 시도를 하는 녀석을 냉동시켜 버리는 만도.

 

제국이 망한 지 5년이 지난 시점으로, 제국 화폐로 현상금을 지불하려는 길드 리더 그리프 카가의 제안을 거부하는 만도. 그 대신, 그리프 카가는 만도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적인 미끼를 하나 던진다. 분명 제국과 연관이 있는 사나이는 트래커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행성만 알려주고, 만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베스카르를 선금으로 지불한다. 미션을 성공했을 적에는 상당한 보상을 뒤따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반드시 타겟을 산 채로 잡아 오라는 오더가 떨어진다.

 

선금으로 받은 베스카르를 들고 만달로르 조직의 제련소에 간 만도는 그것으로 오른쪽 견갑을 하나 만든다. 대장장이가 망치로 견갑을 내려칠 때마다, 자신의 부족(?)이 습격당하던 시절이 연상된다. 부모가 만도를 안전지대에 집어 넣는 장면에서는 왠지 행성 파괴 직전에 슈퍼맨의 부모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유사한 장면들이 많은지.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마치 게임의 퀘스트처럼 진행된다. 이것 역시 신세대 스페이스 오페라에 합당한 그런 것일까 싶다. 아르발라7 행성에 도착해서 정찰하던 만도를 블러그라는 괴물이 습격한다. 그 때 마침 등장한 원주민 쿠일의 도움으로 블러그를 물리친다. 쿠일의 도움으로 블러그를 길들이고, 타겟이 있을 법한 곳으로 이동하는 만도.

 


그곳에는 숱한 빌런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다. 단신으로 그 많은 빌런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때 역시나 조력자가 등장하니, 바로 로봇 바운티 헌터였다. 우습게 생긴 녀석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둘이서 현상금을 반띵하는 조건으로 빌런들을 퇴치하고, 마침내 타겟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알고 보니 녀석은 바로 아기 요다(편의상 그렇게 부르겠다)가 아닌가. 50세라고 했는데, 너무 아기아기하다. 로봇 바운티 헌터가 녀석을 블래스터 건으로 처리하려고 하자, 서부의 총잡이를 연상시키는 만도가 먼저 총을 뽑아 길드원이자 잠깐이나마 동료였던 로봇 바운티 헌터를 제거한다.

 


자 여기까지가 1편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21세기 폭스를 집어 삼킨 디즈니에서 발표한 스타워즈 스핀오프 시리즈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일단 1편에 해당하는 미션은 클리어됐다. 그 다음에는 아기 요다를 데리고,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일이 남아 있겠지.


일단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하다. 만도는 자신의 부족이 몰살당한 과거의 상처를 지닌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오리지널의 다스 베이더처럼,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나중의 에피소드에서 아기 요다 구출 작전에 나서는 걸 보면, 선한 것 같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운티 헌터라는 직업이 뭐 그렇지 않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다는 점도 그렇다. 만달로르에게 무기는 종교 같다고 했던가. 일단 충분한 밑밥들이 던져졌다. 왜 과거의 제국 추종 세력은 아기 요다를 찾는 것일까? 만도가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베스카르는 오로지 제국만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궁금하다. 아마 그런 궁금한 점들을 풀어 나가는 게 앞으로 전개될 사가(saga)에서 다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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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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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의 책들을 주파하고 있는 중이다. 전작읽기가 될 진 모르겠지만... 그의 대표작이라는 <한 밤의 아이들>은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뭐랄까 주변부부터 공략하고 있다고나 할까. 일단 최근에 나온 <28개월 28일 밤>부터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지 20일 정도 되었는데, 내일이 반납이라 부지런히 읽고 리뷰를 쓴다.

 

고전 다시쓰기는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된 모양이다. 루슈디는 셰헤라자데의 <천일야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자신만의 <28개월 28일 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하계에 해당하는 인간계의 과학과 이성이 상계인 마계에 사는 각종 흑마족들의 비이성과 주술의 투쟁인 이계전쟁에 방점을 찍는다. 인간이 그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흑마족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인간계에 퍼져 있는 두니아자트의 존재론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195년 안달루시아의 루세나에는 이븐루시드라는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칼리프의 총애를 받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던 주치의이자 철학자인 이븐루시드는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던 광신도들의 미움을 받은 결과, 주치의 자리에서 쫓겨나 루세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출발이 광신에 의한 점에 주목하자.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묘령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두니아. 알고 보니 그녀는 마족인 진니아, 페리스탄 출신의 번개공주였다. 두니아와 이븐루시드는 28개월 28일 동안 수많은 방사를 치르고 많은 자식들을 생산했다. 칼리프로부터 귀양살이가 풀린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의 곁을 떠난다. 두니아의 자손들, 그러니까 마족의 후예들은 귓불이 없는 모습으로 두니아자트라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이성과 과학 그리고 논리를 신봉하는 이븐루시드의 맞수로 투스에 사는 가잘리라는 철학자가 살았다고 한다. 이계전쟁의 단초를 제공하는 이가 바로 가잘리로 흑마족이자 거마 주무루드 샤를 불러낸 이가 바로 가잘리였다.

 

그로부터 800년 정도 지난 뒤, 세계의 중심 뉴욕 시티에서 이계전쟁이 시작된다. 역시 두니아자트인 정원사 제로니모 마네제스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인도 출신으로 신부의 사생아인 제로니모는 미국으로 건너와 사랑하는 아내와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러다 아내가 장인처럼 번개를 맞아 죽었던가. 자신이 정원사로 일하던 라 인코에렌차에 억만장자의 상속녀이자 일명 철학녀로 알려진 수재 알렉산드리아 블리스 파리냐의 양해를 구해 그곳에 아내를 묻는다.

 

그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무시로 등장하는데, 일단 나트라지 히어로의 창조주인 지미 카푸르를 필두로 해서 훗날 이계전쟁에서 사악한 네 명의 흑마족들을 상대로 용맹을 떨치는 테리사 사카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의 어느 시점에서, 죽은 지 800년도 더 지난 투스의 가잘리가 흑마족 주무루드를 구해준 대가로 약속한 소원을 지키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신을 경외할 수 있도록 공포심을 심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굳이 흑마족인 주무루드는 이제는 티끌이 되어 버린 인간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지만, 원래 자신의 본업인 파괴와 살상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가잘리의 소원을 받아 들인다. , 이제 비로소 인간계와 마계 간의 이계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비행 항아리를 타고 2-300여명에 달하는 마족들이 지구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세상은 그야말로 케이오스에 빠지게 된다. 이미 그전부터 흑마족들의 농간으로 정원사 제로니모는 공중부양을 하기 시작했다지. 그전에도는 시장 로자 패스트에게 배달된 기적의 아기가 부정부패를 일삼는 이들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천일야화라는 스토리를 기본축으로 삼아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 영상물에나 등장할 법한 선과 악의 대결,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그야말로 괴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 살만 루슈디는 우리가 사는 인간계가 기본적으로 과학과 이성 그리고 논리로 개화된 시기이고 주무루드 샤를 비롯한 마족들의 세계가 비이성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이계전쟁의 와중에 독자들이 깨닫게 되는 바는 그들의 세계나 인간계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탐욕과 공포는 주술의 세계를 넘나들며 모든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루슈디가 대단한 작가라는 점은 그 경계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허무는 기술자라는 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는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 신봉론자일 지도 모르겠다.

 

주무루드 샤를 필두로 한 나머지 세 빌런 조력자들의 면모도 화려하다. 발광마 루비, 흡혈마 라임 그리고 주무루드에 버금가는 주술마 자바르다스트는 통제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들을 대변하는 빌런의 상징이다. 개인적으로 주무루드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한 가잘리에게도 통속적인 인간들처럼 어마어마한 재산, 큰 성기 그리고 권력으로 대변되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 없음을 증명이라고 빈정대는 장면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그대로 저격한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페리스탄, 카프산의 주인이 된 여제 번개공주 두니아는 자신의 후손들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동족인 네 빌런들을 해치우기 위해 본격적인 이계전쟁에 나서게 된다. 엔딩이 어떻게 끝나는 지에 대해 공개하면 아무래도 스포일러겠지? 그 부분은 패스~

 

살만 루슈디는 인간계가 과학과 논리 그리고 이성을 표방하는 곳이라는 세계관으로 출발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마족들의 탐욕을 능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들만 취사선택해서 신봉하는 모습이 어디가 이성적인가. 아니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본성은 마족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수백년 전에 죽은 철학자가 마족을 불러내어 약속을 이행하라고 따지고, 웜홀을 통해 두 개의 전혀 다른 세상이 서로 적대적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이성적이지 않나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하긴 우린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얼토당토 않은 히어로 영화에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 그 히어로 영화들의 원작이 만화라는 점을 깜빡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히어로 나트라지 히어로, 아니 지넨드라 카푸르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짚어낸 루슈디의 보다 심오해 보이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12세기 말, 안달루시아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처럼 인간과 마족의 이종교배로 태어난 두니아자트 역시 우리 인간 세상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러니 서로 다름을 수용하고, 이성과 관용의 힘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역시나 냉소적으로 엔딩에서 이계전쟁 이후, 밤을 지배하던 꿈이 실종되었다는 가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혁신적으로 창조해내겠다는 인간의 꿈은 점점 사라져 가는 모양이다. 바로 그 점을 이 노대가는 지적한 게 아닐까 싶다.

 


<28개월 28일 밤>은 할리우드에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서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른바 꿈의 공장이라는 할리우드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아니 정교한 할리우드보다는 좀 엉성하기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더 나을까? 마지막으로 표지에도 등장한 1001이라는 네 자리 숫자는 소설 <28개월 28일 밤>을 상징하는 동시에 유한한 인간 존재 소멸에 대한 계시처럼 보인다.


[뱀다리1] 이계전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두니아가 주무루드인가를 찾는 장면에서 ZZ Top은 어디에 있지라는 장면은 가히 최고였다. 이런 식의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니, 루슈디는 천재가 분명하다.

 

[뱀다리2]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이븐루시드는 실존인물로 라틴명은 아베로에스라고 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12세기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자였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주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정도라고 한다.

 

보라산 투스의 가잘리(이도 실존인물이다!)의 종교지상주의에 맞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주장하며 코란에도 오류가 있다는 급진적 주장을 하다가 광신자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자신의 저서가 불살라지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종교적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뱀다리3] 젊은 날의 이븐루시드/아베로에스가 다시 한 번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발견해서 주문장을 날렸다. 무려 프랑스 출신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쓴 드문 소설이라고 한다. 왜 이런 책들은 죄다 절판되는지 모르겠다. 루슈디의 <28>은 이븐루시드 말년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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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0 10: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리우드 스타일에 한표! ٩(๑′∀ ‵๑)۶•*♪*•♪.♪♪

레삭매냐 2021-02-20 16:27   좋아요 1 | URL
요즘 발리우드 영화의 퀄이
상당히 좋아져서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bookholic 2021-02-20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의 친절한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레삭매냐 2021-02-20 21:43   좋아요 1 | URL
읽는 내내 이런저런 일들이 동시다발적
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제대로 읽지 못
하고 완독에 치중한 듯 합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리뷰가 북홀릭님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감사합니다.

이뿐호빵 2021-02-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리뷰 보며 또 이 책이 읽고싶어 욕심이 생깁니다

큰일입니다!!

요즘, 읽고 싶은 욕망은 무럭무럭~~
근데 ...

여튼 챙겨 담았습니다~
언젠가는 읽겠지 그러면서 말입니다ㅋ

레삭매냐 2021-02-21 05:46   좋아요 0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입니다.

자크 아탈리가 쓴 소설,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에도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책을 주문했습니다.

루슈디의 신간 만큼이나 기대가 되네요.

12세기 안달루시아로의 초대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입니다, 사두시면 언젠가는 읽게
됩니다. 반다시.

뒷북소녀 2021-02-22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뱀다리 장인이시네요. 이런 걸 어떻게 찾으셨대요?
일단 너무 판타스틱해서 제 취향은 아니더라구요.

레삭매냐 2021-02-22 13:24   좋아요 0 | URL
후반으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
해져야 하는데 어째 동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암튼 말미에 가서
는 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이븐루시드를 찾아 보니
아베로에스까지 도달하게 되더라구요.
 
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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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이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어느 독일인 이야기>.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저자의 책 중(4)에 최고였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참고로 올해 만난 26권의 책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연간 베스트로 꼽아도 좋을 듯 싶다.

 

7세 소년 하프너에게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놀이였다. 여름 휴가를 지내던 소년의 가족은 서둘러서 베를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전쟁 초기, 연전연승하며 프랑스군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시절 소년과 또래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쟁 전문가가 되었다.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매일 후방에 게시되는 전황보고서가 전하는 환상에 젖어 있던 독일 시민들은 4년 뒤에 전쟁에 패한 것도 아닌데 진 사실을 갑자기 강요받는다.

 

반란과 혁명으로 이어지는 대혼란기 속에서 카이저는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지리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했지만, 이미 다음 전쟁을 위한 불온한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15년 뒤, 합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국가사회주의자 다시 말해 나치들은 이미 우파 테러조직으로 그 전신을 드러냈다. 하프너는 초반에도 언급했다시피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역사가 아닌, 비극의 시대를 체험한 한 소시민의 자격으로 자신의 시대를 증언한다. 바로 그 점이 <어느 독일인 이야기>의 귀중한 가치를 역설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후 혼란한 시기에 어쩌면 독일이야말로 붉은 혁명이 일어날 만한 가장 적합한 조건의 나라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그런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위정자들은 폭력을 동원해서 일체의 불온한 움직임들을 분쇄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그 유명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했으며, 혁명 조직들은 우파 폭력조직의 잔혹한 테러 앞에 와해되었다.

 

그 다음에는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앞선 흥청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투기가 난무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일개 고등학생들도 주식 시장에 뛰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왠지 최근 과열된 우리 주식시장이 연상되었다. 이십대 초반의 은행장이 등장하는 등 그야말로 기존의 가치와 질서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그런 아노미적 시대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프로이센 고위 관료인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얌전하게 제도 교육권 아래 교육을 받은 다음, 사법시험을 치르고 판사나 변호사가 되길 희망했다. 아버지는 자유주의자로 일체의 혁명적 움직임을 혐오했다. 청년 하프너 역시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청년다운 패기 없이 아니면 독일 민족성을 따라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하프너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나치가 소리 없이 부상하고, 권력을 잡게 되는 과정에 대한 알레고리가 담겨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돌프 히틀러가 1923년 뮌헨의 맥주홀 폭동으로 국가권력 전복을 시도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치는 허접한 지역 조직이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나 갖은 간계로 그들이 권력을 잡고 궁극적으로 독일 민족을 패망으로 몰고 가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바로 그런 독일 제국 내부의 실상에 대한 하프너의 상세한 리포트야말로 역사적 가치를 가진 기록이다. 우선 정치가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위정자들의 무책임한 방임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정치무대에 나치의 부상을 도왔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취미 생활이 독일 사람들에게는 없었다는 점도 저자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물론 철학이나 사유 혹은 다른 예술 방면에서도 게르만 민족은 특출난 재능을 보였었다. 하지만 개인의 취미생활보다는 프리데리쿠스 이래 형성된 집단주의적 성향은 체제에 순응하는 시민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보불전쟁의 승리로 유럽의 신흥강국의 자리에 오른 다음, 판단 착오로 영국-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패배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지불하게 된 수모를 당하게 독일 사람들은 민족적 수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구라도 내재된 불만에 불만 당겨준다면 총화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부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 내부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흥청거리던 1920년 초반은 예상하지 못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파산이라는 청구서를 받아들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런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같은 해 10월 렌텐마르크의 등장으로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회경제적 현상으로 하프너의 아버지 같이 가장 성실하게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온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대신 이번에도 막대한 빚을 내어 투기에 나선 이들만 배를 불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이런 일련의 사회적 부조리는 나치라는 괴물이 등판할 수 있는 최선의 무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독일인 특유의 근면성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히틀러와 나치가 연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초반에 나치 혁명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조차 그들의 체제 선전에 넘어가 버렸다. 그들의 조직적 기만 전술과 심리전에 독일 국가 전체가 넘어가 버린 것이다. 국가의 올바른 대의에도 독일 시민들은 맹렬하게 돌진했지만, 반대로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방향을 바꾸지 않고 레밍 떼처럼 지도자의 영도를 따랐던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그것도 아주 효과적이고 성실하게 말이다. 그 결과, 히틀러 일당이 최종해결책이라는 미명 아래 유대인 절멸정책을 수행할 때조차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반인류적인 범죄에 그야말로 무엇에 홀린 듯 기계적으로 동참했던 것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던 하프너는 당연히 그런 나치에 동조할 수 없었다. 사법시험을 앞둔 사법 연수생이었던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엄정한 프로이센의 법 체제가 조용하게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다. 히틀러가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제국 총리에 임명되면서 1933년 봄과 여름에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일련의 가공할 범죄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유능한 유대인 대법관을 필두로, 체제에 찬성하지 않는 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불평불만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주위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만약 이런 일들이 대놓고 공개적으로 처리되었다면 분명 거센 반발을 유발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공포를 유포하는 방식을 이미 나치 선전기계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은밀하고 조용하게, 소곤거리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을 그들을 기가 막히게 이용했다. 나치 제3제국은 이런 식으로 비밀경찰(게슈타포)이 암약하는 경찰국가로 변해갔다. 물론 나치 혁명 초반 돌격대(SA)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중에 보다 세련된 방식의 친위대(SS)가 그 역할을 이어 받았다.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으로 위기감을 느낀 현명한 유대인들은 조국을 등지기 시작했다. 하프너의 절친이었던 프랭크 란다우가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문명국가에서 폭력이 횡행하는 야만국가로 변하기 시작한 독일 제국에 더는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폭력 앞에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또 다른 이들은 망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등지고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타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청년 하프너 역시 기괴한 형태로 변해가는 조국의 현실 앞에 좌절하고 정치적 망명을 꿈꾸 시작한다. 같이 스터디 모임을 하던 인물들 중에서도 나치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개화된 지식인들이 아니었던가? 히틀러 일당이 날조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이들은 어떤 말로도 토론이 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답정너라고나 할까. 한 때 점잖게 지식과 문화, 예술을 토론하고 향유하던 이들이 적대자로 변하는 과정을 하프너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스터디 모임의 몇몇 지인들은 결국 나치 부역자로 변신했다. 그나마 하프너 자신을 비밀경찰에게 고발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 정도였다.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어느 독일인 이야기>의 수고를 망명지 영국에서 1939년경에 작성했다고 한다.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으로, 여전히 서방 세계를 대표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유화정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외교정책이나 부분적 영토 할양으로 미치광이 독재자를 달랠 길은 없다는 점을 서방의 지도자들은 몰랐다. 하지만 하프너는 히틀러가 권력을 얻기 전부터 바이마르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들을 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독일 민족의 명운을 걸고 도박판에 나선 독재자를 과소평가했던 게 문제가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합리적인 독일 시민들은 히틀러와 나치 일당이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과정에서 어떤 조직적 저항도 보여주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에서 이루지 못한 최종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의식이 독일 시민들 사이에 갑자기 팽배하기 시작했던 걸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되돌리려고 했을 적에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하프너처럼 그런 야만적 시스템 아래서 왜 그들은 자신이 모욕 받고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수의 그런 이들이 등장해서 저항에 나섰더라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굴러갔을까.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육성으로 들려주는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 주었다. 여전히 미스터리한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과 권력 장악 그리고 최종 파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있어 하프너가 저술한 <어느 독일인 이야기>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 준다. 아직 2월이지만, 올해 만난 최고의 책으로 꼽을 만한 저술이다. 책을 읽으면서 기대를 충족시키는 책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 책이 이룬 성취는 대단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도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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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2-15 14: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해라야 이제 2개월 반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26권이라굽쇼? 대단하네요.
연말이 되면 몇권을 만나시게 되나요?
암튼 홧팅입니다!^^

레삭매냐 2021-02-15 15:40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굽시니스트 선생의 만화와
이러저러한 그래픽 노블로 꼼수를
부른 덕분이지효 핫하 ~!

한참 달릴 적에는 300권도 돌파했었
는데 이제는 노쇠하야 -

일단 연초의 목표는 120권이었습니다.

scott 2021-02-15 15: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년 매냐님 독서 이력 26권 0=260권! 홧팅!

레삭매냐 2021-02-15 15:41   좋아요 1 | URL
욕심 내지 않고 달리기로 했습니다.

일다가 꼭 연말에 가서 무리하게
되더라구요. 그게 무슨 의미라고 말이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독서할랍니다.
 
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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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영혼을 두들겨 대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이 있다. 또 어떤 책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적인 그런 정보를 전달해 주는 책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연휴에 작정하고 만난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맹인 악사>는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 책일까 물어본다.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하지 않지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광대한 우크라이나의 대자연과 삶에서 비극을 만난 이들이 겪는 일상이 잔향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다. 읽을 때보다 오히려 다 읽고 나서 더 생각할 거리들을 만드는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블라디미르 코볼렌코, 역시나 처음 들어보는 러시아 작가다. 아니 우크라이나 작가라고 해야 할까. 제정 러시아 시대 사람이니 아무래도 러시아 사람으로 분류해야지 싶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지토미르 출신으로 수도 모스크바의 페트로프 농림업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지식인 그룹이 아닐까 싶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인민주의 운동에 투신해서 시베리아에 유형을 두 번이나 살았다지. 나중에 복귀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했고, <맹인 악사>는 저자의 인도주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맹인 악사>에서는 모두 4편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첫 작품은 <마카르의 꿈>이다. 타이가 지역 찰란에 사는 시골 농부 마카르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에 보드카가 없으면 못사는 주정뱅이다. 왠지 그의 삶에서 신산한 러시아 농민들의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성탄절 전야에 그 좋아하는 보드카도 한 병 살 돈이 없는 마카르는 장작 다섯수레를 담보로 1루블을 땡겨서 보드카를 사서 질탕 퍼마신다.

 

원래 그 보드카는 아내하고 같이 마셔야 하는 술이었는데. 그 결과, 아내에게 내쫓겨 사냥을 위해 놓은 덫에 걸린 여우라고 잡을 속셈으로 타이가로 향한다. 호기로운 타이가행이 우리의 주인공 마카르의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나. 죽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이반 신부의 안내로 대심판관 토이온 앞에 선 거짓말쟁이이자 주정뱅이 마카르는 심판의 저울대 앞에 선다. 누가 봐도 마카르의 운명은 빤해 보였지만, 예상과 달리 토이온 앞에서 조목조목 자신을 변론하는 마카르. 저자 코롤렌코는 마카르를 통해 러시아 인민들에게도 자신들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식인 계급에게 알리고자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부자들이 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성경의 구절도 있지 않은가.

 

저자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나쁜 패거리>에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주인공 소년이 마을에서 추방된 소위 나쁜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는 과정을 담겼다. 19세기 러시아 역사에 대해 일천한 관계로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자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기득권 계급에 의해 배척된 일명 노숙자나 부랑자들은 당장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섬의 폐허가 된 성에 주거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빌런 야누슈의 소탕 작전으로 쫓겨나고, 지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소외와 배척이 어떤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하는지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주인공 바샤는 무리들의 리더 격인 귀족 틔부르치 드랍의 아이들은 발렉 그리고 마루샤와 어울리게 된다. 기묘하게 구성된 사회적 계급제도 때문에 어른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새로운 세대인 아이들 간의 교류를 통한 신분제 타파의 메시지까지 간다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 바샤는 자신에게 씌워진 부랑아, 나쁜 패거리의 일원이라는 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소한 방종과 자잘한 악덕 그리고 부패를 지닌 틔부르치 집단과의 교류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생 소냐의 인형 소동에 이은, 소녀 마루샤의 죽음으로 갱스터 활동은 중단된다.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의 울창한 타이가를 연상시키는 <숲이 술렁거린다>는 폴레시예 지방의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독자를 숲으로 인도한다. 남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지방의 지주/귀족이라는 판은 로만에게 옥사나를 아내로 얻어 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 어째 설계부터 파국을 향한 무언가가 슬쩍 비치는 느낌이다. 거친 대자연에 사는 이들은 어쩌면 난폭할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확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강의 윤곽선으로 살펴 볼 때 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사건에서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반역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이제 표제작인 <맹인 악사>를 만날 차례가 되었다. 어쩌면 앞선 세 개의 이야기들은 본 프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주의 아들 표트르 포펠스키는 날 때부터 저주 받은 아이였다. 이유는 그가 맹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시각적 심상을 느껴 보지 못한 맹인은 꿈을 꿀 수 없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 본다. ‘맹인 악사. 그렇다면 좀 클리셰이 같긴 하지만, 우리의 표트르가 맹인 답게 타고난 청력을 바탕으로 악사가 된다는 말일 게다.

 

코롤렌코 작가는 표트르가 아이에서부터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막심 야첸코라는 한 때 열렬한 갈리발디주의자로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참여했다가 불구가 된 소년의 외삼촌을 전진 배치한다. 항상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한 시절 혁명가는 소년의 성장기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소년 표트르에게 진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무 출신 이오힘이었다. 우크라이나 스타일의 나무 피리 연주의 대가였던 이오힘은 어린 표트르에게 음악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에 소년의 어머니 안나는 마치 배틀이라도 하듯, 물 건너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수해온다. 그리고 젊어서 배운 현란한 피아노 기술을 동원해서 이오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초반 승부는 소년이 더불어 자라는 우크라이나의 대자연의 모습을 담은 이오힘에게 기울었으나, 장애를 가진 자녀의 어머니였던 안나 역시 만만치 않은 맞수였다.

 

작가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며, 자신의 존재 의미에 회의하는 표트르의 내면 묘사에 할애한다. 보통의 청소년들도 성장 과정에서 숱한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데,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의 보유자인 표트르 포펠스키는 오죽했을까. 그나마 그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지주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승을 자처하는 외삼촌 막심의 후원이었다. 이웃 소녀인 에벨리나가 합류하면서 표트르가 느끼는 지평의 세계는 확장에 들어간다.

 

어느새 청년이 표트르의 고민은 실존적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신의 시력 장애가 저주 받은 것이며, 악의적일 지도 모른다는 유추에 도달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접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주변사람들이 표트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해 봐야, 자신의 각성 이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잔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교활한 수도원 종지기 예고르가 반면교사가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은 자신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이 더 행복하다는 그의 생각은 결국 상대적인 게 아니었을까?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추체험하지 못한 청년 표트르는 결국 외삼촌 막심과 짜고 키에프로 피아노 유학 간다는 핑계로 대고, 걸인 패거리에 합류해서 거리의 삶에 도전한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표트르의 엄마 안나는 길길이 날뛰지만, 마침내 길고 회의적이었던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빛의 세계에 진입할 준비를 마친 표트르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한다.

 

결국 인도주의 작가답게 코롤렌코는 <맹인 악사>의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에벨리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그는 빛을 본 것이다. 그것은 사나이에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로 구원의 메시지 전파에 나선다.

 

후반으로 갈수록 동어 반복과 주인공 표트르 포펠스키 내면세계의 쟁투가 좀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19세기 역동적인 역사의 움직임이 꿈틀대던 러시아-우크라이나로 떠난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계획대로 이번 명절 연휴 동안에 책도 다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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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14 2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연휴에 읽으려고 샀지만...! 못 읽었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2-15 09:05   좋아요 3 | URL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의
수작은 아니지만, 잔잔바리로
삶과 존재 이유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고.고.씽.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의 당선 ! 추카!추카!
맹인 악사 주섬 주섬 장바구니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