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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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의 책들을 주파하고 있는 중이다. 전작읽기가 될 진 모르겠지만... 그의 대표작이라는 <한 밤의 아이들>은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다. 뭐랄까 주변부부터 공략하고 있다고나 할까. 일단 최근에 나온 <28개월 28일 밤>부터 읽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지 20일 정도 되었는데, 내일이 반납이라 부지런히 읽고 리뷰를 쓴다.

 

고전 다시쓰기는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된 모양이다. 루슈디는 셰헤라자데의 <천일야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자신만의 <28개월 28일 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하계에 해당하는 인간계의 과학과 이성이 상계인 마계에 사는 각종 흑마족들의 비이성과 주술의 투쟁인 이계전쟁에 방점을 찍는다. 인간이 그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흑마족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인간계에 퍼져 있는 두니아자트의 존재론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195년 안달루시아의 루세나에는 이븐루시드라는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는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칼리프의 총애를 받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하던 주치의이자 철학자인 이븐루시드는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던 광신도들의 미움을 받은 결과, 주치의 자리에서 쫓겨나 루세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출발이 광신에 의한 점에 주목하자.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묘령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두니아. 알고 보니 그녀는 마족인 진니아, 페리스탄 출신의 번개공주였다. 두니아와 이븐루시드는 28개월 28일 동안 수많은 방사를 치르고 많은 자식들을 생산했다. 칼리프로부터 귀양살이가 풀린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의 곁을 떠난다. 두니아의 자손들, 그러니까 마족의 후예들은 귓불이 없는 모습으로 두니아자트라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이성과 과학 그리고 논리를 신봉하는 이븐루시드의 맞수로 투스에 사는 가잘리라는 철학자가 살았다고 한다. 이계전쟁의 단초를 제공하는 이가 바로 가잘리로 흑마족이자 거마 주무루드 샤를 불러낸 이가 바로 가잘리였다.

 

그로부터 800년 정도 지난 뒤, 세계의 중심 뉴욕 시티에서 이계전쟁이 시작된다. 역시 두니아자트인 정원사 제로니모 마네제스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인도 출신으로 신부의 사생아인 제로니모는 미국으로 건너와 사랑하는 아내와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러다 아내가 장인처럼 번개를 맞아 죽었던가. 자신이 정원사로 일하던 라 인코에렌차에 억만장자의 상속녀이자 일명 철학녀로 알려진 수재 알렉산드리아 블리스 파리냐의 양해를 구해 그곳에 아내를 묻는다.

 

그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무시로 등장하는데, 일단 나트라지 히어로의 창조주인 지미 카푸르를 필두로 해서 훗날 이계전쟁에서 사악한 네 명의 흑마족들을 상대로 용맹을 떨치는 테리사 사카도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의 어느 시점에서, 죽은 지 800년도 더 지난 투스의 가잘리가 흑마족 주무루드를 구해준 대가로 약속한 소원을 지키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신을 경외할 수 있도록 공포심을 심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굳이 흑마족인 주무루드는 이제는 티끌이 되어 버린 인간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지만, 원래 자신의 본업인 파괴와 살상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가잘리의 소원을 받아 들인다. , 이제 비로소 인간계와 마계 간의 이계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비행 항아리를 타고 2-300여명에 달하는 마족들이 지구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세상은 그야말로 케이오스에 빠지게 된다. 이미 그전부터 흑마족들의 농간으로 정원사 제로니모는 공중부양을 하기 시작했다지. 그전에도는 시장 로자 패스트에게 배달된 기적의 아기가 부정부패를 일삼는 이들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천일야화라는 스토리를 기본축으로 삼아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 영상물에나 등장할 법한 선과 악의 대결,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연들이 중첩되면서 그야말로 괴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저자 살만 루슈디는 우리가 사는 인간계가 기본적으로 과학과 이성 그리고 논리로 개화된 시기이고 주무루드 샤를 비롯한 마족들의 세계가 비이성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이계전쟁의 와중에 독자들이 깨닫게 되는 바는 그들의 세계나 인간계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탐욕과 공포는 주술의 세계를 넘나들며 모든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루슈디가 대단한 작가라는 점은 그 경계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허무는 기술자라는 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는 철저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 신봉론자일 지도 모르겠다.

 

주무루드 샤를 필두로 한 나머지 세 빌런 조력자들의 면모도 화려하다. 발광마 루비, 흡혈마 라임 그리고 주무루드에 버금가는 주술마 자바르다스트는 통제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들을 대변하는 빌런의 상징이다. 개인적으로 주무루드가 자신의 봉인을 해제한 가잘리에게도 통속적인 인간들처럼 어마어마한 재산, 큰 성기 그리고 권력으로 대변되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의 상상력 없음을 증명이라고 빈정대는 장면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그대로 저격한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페리스탄, 카프산의 주인이 된 여제 번개공주 두니아는 자신의 후손들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동족인 네 빌런들을 해치우기 위해 본격적인 이계전쟁에 나서게 된다. 엔딩이 어떻게 끝나는 지에 대해 공개하면 아무래도 스포일러겠지? 그 부분은 패스~

 

살만 루슈디는 인간계가 과학과 논리 그리고 이성을 표방하는 곳이라는 세계관으로 출발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마족들의 탐욕을 능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들만 취사선택해서 신봉하는 모습이 어디가 이성적인가. 아니 어쩌면 우리 인간들의 본성은 마족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수백년 전에 죽은 철학자가 마족을 불러내어 약속을 이행하라고 따지고, 웜홀을 통해 두 개의 전혀 다른 세상이 서로 적대적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 자체부터가 이성적이지 않나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하긴 우린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얼토당토 않은 히어로 영화에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 그 히어로 영화들의 원작이 만화라는 점을 깜빡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히어로 나트라지 히어로, 아니 지넨드라 카푸르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내가 짚어낸 루슈디의 보다 심오해 보이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12세기 말, 안달루시아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처럼 인간과 마족의 이종교배로 태어난 두니아자트 역시 우리 인간 세상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러니 서로 다름을 수용하고, 이성과 관용의 힘으로 조화로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역시나 냉소적으로 엔딩에서 이계전쟁 이후, 밤을 지배하던 꿈이 실종되었다는 가설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혁신적으로 창조해내겠다는 인간의 꿈은 점점 사라져 가는 모양이다. 바로 그 점을 이 노대가는 지적한 게 아닐까 싶다.

 


<28개월 28일 밤>은 할리우드에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서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른바 꿈의 공장이라는 할리우드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아니 정교한 할리우드보다는 좀 엉성하기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더 나을까? 마지막으로 표지에도 등장한 1001이라는 네 자리 숫자는 소설 <28개월 28일 밤>을 상징하는 동시에 유한한 인간 존재 소멸에 대한 계시처럼 보인다.


[뱀다리1] 이계전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두니아가 주무루드인가를 찾는 장면에서 ZZ Top은 어디에 있지라는 장면은 가히 최고였다. 이런 식의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니, 루슈디는 천재가 분명하다.

 

[뱀다리2]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이븐루시드는 실존인물로 라틴명은 아베로에스라고 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12세기 최고의 아리스토텔레스 학자였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주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정도라고 한다.

 

보라산 투스의 가잘리(이도 실존인물이다!)의 종교지상주의에 맞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주장하며 코란에도 오류가 있다는 급진적 주장을 하다가 광신자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자신의 저서가 불살라지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종교적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뱀다리3] 젊은 날의 이븐루시드/아베로에스가 다시 한 번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발견해서 주문장을 날렸다. 무려 프랑스 출신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쓴 드문 소설이라고 한다. 왜 이런 책들은 죄다 절판되는지 모르겠다. 루슈디의 <28>은 이븐루시드 말년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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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0 10: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발리우드 스타일에 한표! ٩(๑′∀ ‵๑)۶•*♪*•♪.♪♪

레삭매냐 2021-02-20 16:27   좋아요 1 | URL
요즘 발리우드 영화의 퀄이
상당히 좋아져서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bookholic 2021-02-20 2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의 친절한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레삭매냐 2021-02-20 21:43   좋아요 1 | URL
읽는 내내 이런저런 일들이 동시다발적
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제대로 읽지 못
하고 완독에 치중한 듯 합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리뷰가 북홀릭님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감사합니다.

이뿐호빵 2021-02-20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리뷰 보며 또 이 책이 읽고싶어 욕심이 생깁니다

큰일입니다!!

요즘, 읽고 싶은 욕망은 무럭무럭~~
근데 ...

여튼 챙겨 담았습니다~
언젠가는 읽겠지 그러면서 말입니다ㅋ

레삭매냐 2021-02-21 05:46   좋아요 0 | URL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입니다.

자크 아탈리가 쓴 소설,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에도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책을 주문했습니다.

루슈디의 신간 만큼이나 기대가 되네요.

12세기 안달루시아로의 초대를 기대해
봅니다.

물론입니다, 사두시면 언젠가는 읽게
됩니다. 반다시.

뒷북소녀 2021-02-22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뱀다리 장인이시네요. 이런 걸 어떻게 찾으셨대요?
일단 너무 판타스틱해서 제 취향은 아니더라구요.

레삭매냐 2021-02-22 13:24   좋아요 0 | URL
후반으로 갈수록 더 흥미진진
해져야 하는데 어째 동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암튼 말미에 가서
는 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이븐루시드를 찾아 보니
아베로에스까지 도달하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