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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쟁 - 인류사상 최대 단일전, 독일-소련 전쟁 1941-1945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8월
평점 :
독소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타임라이프 <월드워2> 시리즈로 다져진 나의 세계전사 내공은 조금은 밀덕에 가깝지 않나 싶다. 예전에 절판된 리처드 오버리 작가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 중고서점에 나오면 사려고 등록해 두었는데 지난달에 대망의 재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나왔고, 지난주에 받아서 주말 내내 읽어서 독파하는데 성공했다. 역시 그동안 해당 분야의 책들을 열심히 읽어서인지 진도가 쑥쑥 나가더라.
저자와 역자도 인정하듯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파시스트 집단을 패망에 이르게 한 승리의 원동력은 영미 연합군이 아닌 소련군이었다. 독일군 전체 피해자의 80%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나온 것을 보면 더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전쟁기계 독일군을 상대한 소련군의 피해는 그것을 초월했다. 그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리처드 오버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독재자들이 맞붙은 독소전쟁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종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머리말에서 리처드 오버리 작가는 IBP 영화사에서 1997년에 만든 10부작 다큐멘터리에서 <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검색해 보니 다큐멘터리의 소제목과 책의 소제목들이 일치했다. 너튜브에서 27년 전의 자료를 검색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볼 수 있다면 좋은 참조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논픽션의 시작은 1941년 독일 기갑부대의 매서운 공격으로 적도 모스크바가 함락 직전에 몰렸을 시기를 연상시키는 시퀀스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1919년 10월 반혁명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을 당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었다.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도시의 모든 이들이 엉성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다는 영웅서사는 이미 22년 전에 만들어진 사실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태어난 신생국가 소련은 압도적 독일의 위세 앞에 혁명을 지키기 위해 1918년 3월 독일과 치욕스러운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 시절 유지하던 상당 부분의 영토들을 잃었다. 폴란드, 베사라비아, 몰도바를 비롯해 동부유럽의 지분의 상당 부분이 그에 해당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일국 사회주의 체제를 강조하며 독재자의 자리에 오른 이오시프 스탈린은 엔카베데 같은 비밀경찰을 동원한 무자비한 공포정치로 소련 인민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열악한 경제적 상황을 갖추고 있던 소련은 집단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서방 세계를 따라잡기 위한 공업화에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다. 이런 무지막지한 정책의 실시는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대량 기아 사태를 초래했지만,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 정권은 이런 부수적 피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점들이 훗날 전시 경제체제에서 모든 면에서 자신들을 앞선 독일을 능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스탈린이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있었다면, 반대편 파시스트 진영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전설의 악당이 존재했다. 일단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체제는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필요악이었을까? 스탈린이 대숙청으로 체제를 공고히 하고,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부상하던 1930년대 유럽 대륙의 이 두 악당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악으로 규정한 공산주의 종주국의 리더 스탈린에게 손을 내미는 국가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방에서는 독일을 필두로 한 세력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는 내전에도 개입했던 일본의 위협이 가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안슐루스와 주데텐란트 합병 등으로 중부 유럽의 질서를 깨는 행동을 서슴지 않자,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방은 즉시 견제에 나선다. 문제는 히틀러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 의지가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뮌헨까지 날아가서 결국 체코를 내주는 대가로 평화를 샀다.
독일에 대한 서방의 견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에 손을 내민 게 바로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과 폴란드 분할 등으로 강철의 독재자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유화정책을 구사했다. 이에 소련의 지도자는 대량의 곡물 수출 같은 경제적 보상으로 화답했다. 문제는 처음부터 히틀러는 소련을 지구상에서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그리고 소련의 광활한 대지는 게르만 민족을 위한 레벤스라움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모든 걸 의심하던 소련의 지도자를 철저하게 기만한 히틀러는 대군을 동원해서 결국 1941년 6월 22일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 격멸에 나섰다. 소련 침공 작전이 발동되기 전까지 숱한 정보들이 독일의 기습전을 예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게 된다.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소련군은 전쟁 초기 압도적 화력을 앞세운 독일 기갑부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1930년대 대숙청의 여파와 정치위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소련 군인들은 전장에서 제대로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독일의 3개 집단군은 각기 목표를 지니고 소련의 대평원을 휩쓸었다. 북부집단군은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 함락을, 중부집단군은 수도 모스크바를 그리고 남부집단군은 소련의 곡창지대이자 유전지대를 겨냥해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군은 바로 소련의 수도를 노린 중부집단군이었다. 이미 추축동맹국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발칸반도 작전으로 6주라는 소중한 작전 시간을 허비했고, 민스크-스몰렌스크 축선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중부집단군이 바로 모스크바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남부집단군을 지원하라는 군사 비전문가 총통의 명령에 따라 키예프 공략을 나서면서 소련의 수도는 결정적인 구원을 얻었다.
레닌그라드에서도 포위된 도시를 강력한 충격으로 일거에 함락시키지 않고 봉쇄를 명령하면서 결국 레닌그라드 포위 900일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북부집단군은 신속하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전력을 중부집단군에 집중했어야 했다. 결국 오만한 독재자 스탈린은 만주 할힌골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하고, 군사 지휘의 전권을 주면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수도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모스크바를 사수하는데, 독재자 스탈린이 후방으로 후퇴하지 않고 수도를 지키기 위해 잔류했다는 점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다.
개전 초기, 압도적 독일의 공격에 소련 서부에 있던 공장과 설비 그리고 숙련 노동자들을 모두 안전한 우랄 산맥 너머 동방 축선으로 옮긴 것은 소련에게는 신의 한수 같은 결정이었다. 역시 독재국가답게 무지막지한 전시동원으로 인력과 자원을 갈아 넣으면서, 조금씩 전시 생산체제를 가동시켰다. 소련 시민들을 위한 소비재 생산은 일절 무시하고 오로지 적과 싸우기 위한 전차와 항공기, 대포 그리고 탄약과 포탄 생산에 전념했다. 소련이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에서 미영의 무기대여법에 의한 원조 역시 큰 몫을 했다. 물론, 소련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변곡점을 만들어내면서 미영 연합군이 지원한 막대한 물량의 전쟁물자들 가운데 스팸과 스튜드베이커 트럭은 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독일군은 여전히 시대에 뒤쳐진 우마를 보급 수송에 사용했는데, 소련군은 미국에서 공여 받은 미제 트럭들을 사용해서 전장으로 필요한 탄약과 보급물자 그리고 예비병력들을 실어 날랐다.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62군을 위해 축차적으로 구원부대를 보내는 대신 천왕성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독일 최정예 부대라는 6군을 포위한다는 주코프의 신박한 전략이 등장했다. 물론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장이라도 점령될 것 같은 독재자의 이름을 딴 볼가 강의 도시에서는 그야말로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독 안의 든 쥐 같은 신세였던 추이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62군은 악착같이 버텼고, 마침내 구원이 도착했다.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 야전부대가 스탈린그라드 북부 전선을 담당했던 루마니아-이탈리아군을 분쇄하고 강력한 두 개의 집게발로 스탈린그라드의 30만에 달하는 독일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충분히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현지 사수를 엄명한 미치광이 총통의 오판 덕분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실패했다. 파파 호트와 만슈타인이 프리드리히 대장의 고립된 제6군 구원에 나섰지만, 몇 겹으로 둘러싼 포위망 돌파는 역부족이었다. 이 장대한 전투의 결과, 동방에서 독일이 승리할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이후에 이어지는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 그리고 1944년 소련군의 복수에 해당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주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개전 당시, 실패의 이유를 곱씹고 1930년대 투하쳅스키 장군이 설계한 종심작전을 기반으로 한 제병합병 작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존의 소련군과는 달리 새로운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다. 역시 전쟁에서 경험만한 게 없다는 진리일까. 그리고 전장에서 정치위원의 역할을 줄이고, 현장지휘관들의 판단을 중시하게 되면서 소련군의 사기는 고양되었다.
저자 리처드 오버리는 이런 점들에서 소련인들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품고, 독일과의 전투에서 파시스트 짐승들을 격멸하기 위해 자진해서 싸우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희망 사항이었고, 전쟁이 끝난 뒤 독재자는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부역자 처벌을 필두로 해서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들을 갖은 이유로 숙청한다. 최고 전쟁영웅 주코프마저 한직으로 밀려날 정도니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더 했을지 모른다.
독소전 개전 3주년을 맞아 그나마 건재했던 독일의 중부집단군을 겨냥해서 발동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소련은 독일에게 침략당한 자국의 영토를 모두 되찾는데 성공한다. 정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소련은 철저하게 주공 방향을 비밀로 감추는데 성공하고, 벨라루스 프리야트 습지대를 돌파해서 독일군 주력부대들을 차례로 분쇄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이 그렇게 원하던 유럽대륙 제2전선을 연 미영 연합군이 노르망디 북부의 빌라 보카주에 갇혀 악전고투하는 동안, 주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엄청난 진군 속도로 지리멸렬한 독일군을 격파하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인근 비스와 강까지 도달했다. 소련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르샤바에 있던 폴란드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폴란드 국내군이 봉기해서 독일군에 대항했지만, 빈약한 무기로 미쳐 날뛰는 나치 친위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바르샤바가 해방되면 공산주의 소련에 영향력 아래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며 선제적으로 봉기에 나섰던 폴란드 민족주의자 세력들은 나치에 의해 일소됐다.
스탈린이 일부러 폴란드 국내군의 봉기를 좌시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비스와 강에 도달할 무렵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 있었고 총통의 소방수로 알려진 발터 모델 원수의 우주방어로 결국 소련군의 공세를 멈추게 할 수가 있었다. 바르샤바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다음해 1월까지 기다려야했다.
결국 히틀러의 제3제국 패망은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1943년과 1944년 잘 짜인 전략으로 전선에서 병력 감소를 최대한으로 줄인 소련군이, 파시스트 소굴 베를린 점령전투에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승리의 트로피인 적국의 수도 점령을 위해 주코프와 코네프가 적극적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인명을 경시하는 소비에트 시절의 못된 버릇이 다시 도졌고, 4년 전과 달라진 조국 수호를 위해 광신적 저항을 하는 독일군을 상대하게 된 소련군의 사상자 수가 격증하기 시작했다. 요새화된 정중앙 젤로 고지 전투에서 주코프가 고전하는 동안, 남부 전선 공략을 맡은 코네프가 보다 유리했다. 그래도 어쨌든 전쟁을 거의 주도하다시피한 주코프에게 적국의 수도 함락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던가.
천년왕국을 꿈꾸던 히틀러의 제3제국이 그렇게 몰락해 버리고, 이제는 전후 질서를 위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어쩌면 제3제국의 멸망이 미래의 냉전 잉태를 예고하고 있었던 걸까. 전쟁이 끝나기 전, 영국의 처칠과 스탈린은 동부 유럽에서 각각 자국의 지분을 두고 경쟁했다. 처칠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였던 스탈린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나마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종전을 앞두고 사망하면서 반공 노선의 트루먼이 후계자가 되면서 연합군 내부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자국이 해방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스탈린의 논리가 우세하게 되면서 동유럽이 스탈린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전에, 나치 전범들을 약식재판으로 처형하자는 미영의 의견에 스탈린이 반대하면서 결국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전쟁 중에 폴란드에서 저지른 카틴 숲 학살 사건 같은 케이스는 아예 불문에 붙였다. 철저하게 나치 독일을 상대로 벌인 선전전에 불과했다. 결국 전범재판은 엔카베데를 동원해서 고문과 자백을 통한 재판 결과를 연출할 수가 없었던 소련의 쇼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전이라는 책의 표제처럼, 5년간 치러진 독소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수많은 인명이 무고하게 살상되고, 재산이 잿더미가 되고 도시의 건물들이 불타 버렸다. 소련이 결국 독일을 무찌르고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최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만, 소련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손실은 막대했다.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또 다른 막대한 강제 인력동원이 소요됐다. 나치 독일을 상대하는데 효과적이었던, 소련의 전체주의 시스템이 바뀌리라는 희망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대조국전쟁의 승리로 소련 대중이 더 행복해지거나 부유해졌을까? 리처드 오버리는 독일과 소련 양국의 참전용사들의 전후 삶을 비교하면서 그렇지 않았다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패자에게도 그리고 승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