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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6년 동안, 세 번이나 타리크 알리 작가의 <술탄 살라딘>을 읽었다. 리뷰를 쓰기 전에 주문 내역을 찾아보니 나는 이 책을 두 번 샀더라. 13년 전에 한 번 그리고 6년 전에 중고서점에서 한 번. 아마 처음 산 책은 분실한 모양이다. 지난 3일 동안, 중고서점에서 산 <술탄 알라딘>을 다시 읽었다.
두 번이나 읽었던 기시감 덕분인지 책의 진도를 쑥쑥 나갔다. 그만큼 익숙하고 또 흥미진진하다는 이야기겠지. 나의 쇠락하는 기억력 덕분에 마치 새로 만나는 그런 책처럼, 또 새롭게 다가왔다.
파키스탄계 영국 작가 타리크 알리의 걸작 <술탄 살라딘>은 1181년 카이로에서 출발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유대인 역사학자 그리고 술탄의 총애 받는 서기가 되는 이삭 이븐 야쿠브(야곱)다.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술탄은 이븐 마이문의 추천으로 이븐 야쿠브를 자신의 회고록을 쓸 서기로 발탁한다. 일찍이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게 호메로스 같은 저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하던가. 영웅의 일대기를 위해서라도, 중세 기사들을 시종하며 그들을 칭송하던 트루바두르 같은 이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타크리트 산골짜리 출신의 쿠르드 족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서기에게 자신의 웅대한 꿈을 살짝 비친다. 그것은 바로 프랑크 족에게 90년 간 점령당한 알 쿠드스(예루살렘)를 탈환하겠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프랑크 족의 알 쿠드스 점거는 신자들에게 치욕의 상장이었다. 하지만, 무슬림 세계 내부의 분열 때문에 단일대오를 형성해서 강력한 프랑크 족 기사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와 그의 숙부 시르쿠가 섬기던 술탄 장기가 이미 프랑크 족에 대한 지하드를 시작했다. 에데사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리던 장기는 환관에 의해 어이 없이 죽고 만다. 왠지 이름도 비슷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비가 연상되는지. 이슬람의 두 보석 중의 하나라는 다마스커스의 지배자이자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이집트에 파견해서 분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는 실권 없이 와지르들에게 휘둘리는 상태였다. 상시적 내부분열을 달고 살던 당대 무슬림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공동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 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릭은 해안 도시들을 제압하고, 무슬림 세계의 이러한 내부 분열을 이용해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카 살라흐 앗 딘을 대동한 시르쿠는 이집트로 달려가 와지르 일당을 소탕하고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영광의 순간에, 시르쿠는 식탐 때문에 어이 없이 죽고 만다. 바로 곁에서 이것을 목격한 살라흐 앗 딘은 평생 검소한 식생활을 하게 된다. 병약한 살라흐 앗 딘을 주변인들은 무시했지만, 삼촌 시르쿠를 따라 다니면서 전쟁을 배우고 아버지 아이유브로부터 가장 중요한 인내심을 배운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실제적인 지배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의 부상을 우려한 다마스커스의 누르 앗 딘은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지만,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의 현명한 대처로 시간을 번 살라흐 앗 딘은 결국 누르 앗 딘이 죽은 뒤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로 부상한다. 누르 앗 딘 사후, 다마스커스에 도착한 살라흐 앗 딘은 알레포와 모술을 차례로 공략해서 정복하고 드디어 알 쿠드스 원정에 나서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더해 타리크 알리는 살라흐 앗 딘의 최측근에서 그에게 고언을 마다하지 않는 샤디라는 가상의 인물을 배치한다. 샤디는 사실 살라흐 앗 딘의 삼촌으로 술탄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런 존재였다. 역시 가상의 인물인 이븐 야쿠브 역시 술탄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그의 삶을 양피지에 옮긴다. <술탄 살라딘>이 매력적인 전기소설이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역사의 빈 공간을 타리크 알리의 상상력이 채운다는 설정이다.
단순한 역사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작가 타리크 알리는 술탄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술타나 자밀라/할리마 그리고 여러 환관들을 통해 이븐 야쿠브(아마도 본인의 페르소나)의 펜 끝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술탄이 공석일 때 이집트를 실제로 다스린 카디 알 파딜, 다마스커스의 행정가이자 문장가인 이마드 앗 딘 등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향연도 빼놓을 수 없다.
본격적인 알 쿠드스 해방전쟁이 시작된 다음에는 정치를 담당하던 문인들의 이야기에서, 술탄의 조카 타키 앗 딘이나 아미르 케우크부리들로 이야기의 중심이 넘어가는 전환도 인상적이었다. 본질적인 무력으로 이슬람 세계를 통일을 이룬 술탄은 알 쿠드스 해방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병사들과 아미르들을 끌어 모으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술탄은 툴루즈의 베르트랑이라는 항복한 기사나 첩자들을 통해 알 쿠드스의 내부 정보를 모으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자신이 원하는 장소인 하틴에서 기 왕와 샤티용의 레지날드가 이끄는 십자군 주력부대를 섬멸했다.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지휘하는 한줌의 예루살렘 수비대 앞에 이슬람 전사들이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전략과 전술, 보급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모든 면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수비대는 술탄 부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88년 전, 알 쿠드스를 점령한 십자군 부대는 무슬림들은 물론이고 유대인 콥트교도 가릴 것 없이 성 안의 모든 이들을 학살했다. 과거를 아는 이들은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하기를 주저했다. 이길 방법은 없고, 항복해도 모두 죽게 된다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은 복수심에 불타는 자기 휘하의 제장들을 만류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술탄의 위대함이 돋보였다. 술탄은 예루살렘 수비대에게 목숨도 살려 주고, 재산까지도 성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중세의 전쟁에서 이런 전례가 있었던가? 신자들의 사령관이었던 살라흐 앗 딘은 그들에게 성지였던 알 쿠드스 해방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성을 비우자, 살라흐 앗 딘은 가장 먼저 성에 들어가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살라흐 앗 딘의 최측근으로 유대인 이븐 야쿠브가 발탁되어 활약한 것처럼, 술탄 가신단의 많은 이들이 무슬림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능력만 있다면, 유대인이고 콥트 기독교도고 할 것 없이 술탄은 그들을 기용했다. 저자가 책의 어디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대의 이슬람과 근본주의만 강조하는 현대의 이슬람은 전혀 다르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이런 정치적 격변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소소한 개인들의 일상도 놓치지 않는다. 12세기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술타나 자밀라는 술탄을 따라 알 쿠드스 해방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비극적으로 끝난 샤디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할리마를 자신의 애인이자 제자로 삼은 자밀라의 행각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이븐 야쿠브에게는 못할 말이 없다. 그만큼 신중한 그의 성격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이븐 야쿠브는 타리크 알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문득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을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영상화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갑자기 술탄의 총애를 받아 최측근이 된 이븐 야쿠브의 기구하고 신산한 삶도 드라마 같지 않은가. 인간 살라흐 앗 딘의 매력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한 이븐 야쿠브는 어느 순간 오쟁이진 남자가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이븐 마이문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라니. 그리고 보니 그전에 이븐 마이문이, 너무 술탄의 일에 빠져 가정과 아내 라헬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한 사람도 이븐 마이문이 아니었던가. 비탄에서 이븐 야쿠브를 벗어나게 해준 것 역시 술탄과의 동행이었다.
이븐 야쿠브를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알 쿠드스가 해방된 다음에 벌어졌다. 역설적으로 알 쿠드스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자면, 이븐 야쿠브 가정의 비극도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븐 야쿠브의 비극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소설의 활기와 역동성은 사라지고, 차분하게 이븐 야쿠브가 카이로의 이븐 마이문에게 전하는 편지로 진행된다.
좋은 책은 세 번이나 읽어도 변함없이 좋았다. 그냥 우연히 지난 2월에 조금 읽다만 책 생각이 나서 펼쳤다가 삼독을 하게 됐다. 내가 같은 책을 세 번 이상 읽은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술탄 살라딘>은 처음으로 사독을 하게 되는 그런 책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디 타리크 알리의 나머지 이슬람 5부작도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선 <돌기둥 여인>부터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