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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존 디디온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NYT 독자 선정 금세기 베스트 100 가운데,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의 <상실>이라는 책이 있다고 해서 냉큼 사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제목이 말해주듯 40년을 갈이 산 배우자와 사랑하는 딸 퀸타나의 "상실"에 대한 글이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고, 내용도 그냥 평범한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앤 디디온은 그야말로 평생 글쟁이로 '뉴 저널리즘'의 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 글을 쓴 대가였고, 그녀가 구사하는 상실의 이야기는 아직 진짜 "상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수용하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절반 정도 읽었나 보다.
나의 책읽기는 항상 컬렉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스레드를 통해 알게 된 베른트 하인리히 작가의 생태를 다룬 책들과 더불어 조앤 디디온의 책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전자는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조앤 디디온의 책이 수급이 쉬웠다고나 할까.
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푸른 밤>은 단박에 다 읽었다. <상실>과 달리 어제 만난 <푸른 밤>은 뭐랄까 일종의 리듬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리듬감 섞인 독서를 하게 되면 책의 진도가 쭉쭉 나간다는 걸 간만에 느낄 수가 있었다. 나에게는 어제 읽은 조앤 디디온의 <푸른 밤>이 그랬다. 책의 분위기도 상대적으로 <푸른 밤>이 가볐웠고.
아무래도 조앤 디디온 작가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하다 보니 <상실>은 좀 더디게 진도가 나갔는데, <상실>과 <푸른 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서 작가 내면세계에 좀 더 침투한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조앤 디디온은 3년 전인 2021년에 작고했다고 했다.
오랜 글쟁이로 다방면에서 활약하다 보니 조앤 디디온은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아는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주변의 다이애나라는 친구 덕분에 1966년에 딸 퀸타나를 입양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직접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더 퀸타나를 사랑했고 사춘기 딸의 고민을 함께 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녀의 글을 통해 드러난다. 문득 퀸타나 루가 어쩌면 저명한 저널리스트였던 엄마 찬스 덕을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인형방에 영사기를 들여 놓자는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다.
선택과 버림받음에 대한 고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존과 조앤은 그 아이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퀸타나 루는 태어나면서 "버림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 아이가 버려지지 않았다면, 존과 조앤 부부에게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과거의 어느 시점에 벌어지지 않은 사건에 대해 후일 시점에서 하는 이런 고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 마치 역사의 가정법처럼 말이지.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을 갑자기 잃고 나서, 딸 퀸타나마저 병상에서 힘겨운 투병을 하던 과정을 조앤 디디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어쩌면 독자는 이런 글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게 된 상실에 대한 감정들이 전작 <상실>에서 넘실거린다면, 이번 <푸른 밤>에서는 상실에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극복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덧없이 흘러가는 그런 무수한 시간들을, 모든 걸 파괴해 버리는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간단한 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퀸타나가 자신의 생물학적 여동생 그리고 생모를 만나게 되는 사건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그리고 보니 조앤 디디온은 퀸타나를 데리고 투산에 촬영갔다가, 문득 퀸타나의 생모가 투산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부로부터 퀸타나를 철저하게 차단하려고 했다는 자신의 시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아이가 어려서 가졌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반복해서 되뇌이면서 고민열차에 동참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사실들은 또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조앤 디디온이 무심결에 툭툭 던지는 미국 현대사의 한 장면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갓난쟁이 퀸타나를 데리고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미군들이 싸우던 베트남에 가겠다는 생각이나, 책의 어디에서 미국의 파나마 침공이 이루어졌을 때 바베이도스엔가 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떤 중대 사건들이 우리네 일상 너머로 벌어지고 있더라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책은 구간이다. 재개정판으로 만나보고 싶었지만, 중고책방에서 나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마술적 사고의 해>도 마저 읽어야지. 우리는 원하지 않겠지만 "빛의 소멸"로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읽기와 쓰기 역시 빛의 소멸로 나가는 하나의 스텝일지도. 그러고 보면 참 시간이 덧없다. 그렇지 않은가.
* 이 책으로 찰리 파커의 <Relaxin' at Camarillo>라는 곡도 알게 됐다.
지금 다시 들어도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다.
그런데 카마리요가 우리로 치면 "언덕 위의 하얀집" 정도라고 한다.